환생의 정석 97화
빈첸이 빙그레 웃었다.
“별거 아냐. 2년 전에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려고. 헬라임가에 얼마나 큰 도움을 주었으면 최상급 시민만 들어올 수 있는 데르소나까지 마음대로 통행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을까?”
그리고 시민들끼리 서로 분열하여 본격적으로 싸우기 시작한 것이 2년 전이라고 했다.
“누님은 이러한 상황을 예측하고 계셨던 건지 물어보고 싶었어.”
아마도 헤나 아덴카는 이런 상황에 대해 예측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예측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헤나에게 있어서 이곳에서 있었던 일은 그저 임무 혹은 의뢰에 불과했을 테니까.
세리는 빈첸의 미소를 보며 깨달았다.
‘우리의 대화도 밖으로 새어 나갈 거야. 우리 공자님께서는 그걸 원하시는 거고. 그렇다면 내가 할 일은 뭘까?’
누군가 엿듣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눈치 빠른 세리는 자연스레 대화를 이어갔다.
“3공녀님은 똑똑한 분이시니 이런 상황을 예측하시지 않았을까요?”
“글쎄. 별로 신경 쓰지 않았을 거야. 누님은 워낙 임무에 충실한 성격이니. 그렇지만 스스로 진행했던 임무에 명예롭지 못한 의도가 숨겨져 있었다면 얘기는 달라질 수도 있지.”
2년 전.
헤나가 수행했던 임무의 결과로 많은 것이 바뀐 것 같다.
“아마도 누님의 임무가 ‘은총’을 개량시켰거나 대량생산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것 같아. 그 정도 도움이 아니었다면 파란 보석을 받을 수는 없었겠지.”
“확실히, 그렇겠네요.”
“그런데 그 은총이 상당히 문제가 많은 거라면? 그걸 도와준 대가로 파란 보석을 얻은 거라면?”
“그걸 만들도록 도와준 3공녀님의 입장이 난처해지겠군요!”
“사실 누님은 임무를 수행한 것뿐이니까. 평소라면 별로 신경 쓰지 않았을지도 몰라.”
여기가 중요했다.
서신에도 이 내용을 담았고, 엿듣고 있을 누군가에게도 이 말을 전했다.
“하지만 누님은 곧 파성식을 앞두고 있어.”
파성식이란, 붉은 요새의 모든 과정을 이수하고 진정한 아덴카의 무인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뜻한다.
파성식을 끝내면 파성무인으로서, 어엿한 아덴카의 무인이 된다.
“누님의 실력이라면 어렵지 않게 파성무인이 될 수 있을 건데, 문제는 그 다음이겠지.”
“그 다음이요?”
“파성무인이 된 이후, 누님은 아덴카 무력집단 중 한 곳에 배치될 거야. 그곳에서 실전 경험과 지배자로서의 역할을 배우게 되겠지. 그걸 정하는 건 장로원인데…… 세리도 알다시피 장로분들은 보수적인 분들이 많거든.”
세리가 눈을 크게 떴다.
오른 주먹으로 왼손바닥을 톡 쳤다.
“아하! 잡음을 싫어하시는 장로님들은 3공녀님께 요직을 주지 않겠군요!”
“그래. 아덴카의 직계 중 그런 처사를 반길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럼…… 3공녀님께 보낸 서신은……!”
“맞아. 누님을 초대하는 서신이야. 파란 보석을 보내드렸으니 금방 당도하실 수 있겠지.”
이 시점에서 3공녀가 데르소나에 오는 것은 헬라임 입장에서도 큰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은총’에 문제가 있다면 말이다.
이 모든 내용은 헬라임가에 모두 전달될 것이다.
‘윌슨을 통해 내 말이 사실이라는 것도 캐치할 거고.’
그렇다고 대놓고 파란 보석을 훔칠 수도 없다.
헬라임가 내에서 파란 보석이 사라진다는 건, 헬라임의 치안력이 그만큼 부족하다는 뜻이니까.
헬라임 측에서는 좋으나 싫으나 헤나에게 초대장이 전달되는 것을 지켜봐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헤나 공녀님은 지금 임무 수행 중으로 바쁘지 않을까요?”
“그래도 와주실 거야. 지금 시기의 누님에게는, 백 개의 임무를 훌륭히 완수하는 것보다, 하나의 실수가 없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니까.”
세리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한 가지를 더 짚어냈다.
“그렇지만 ‘은총’에 문제가 없는 거라면 3공녀님께서도 별로 신경 쓰지 않으시지 않을까요?”
바르곤의 제자다운 좋은 지적이었다.
“지금 누님이 수행하고 있는 임무가 뭐지?”
“부랑자 수용소 사건의 사후 처리…… 아!”
그곳은 ‘은총’의 시작이나 다름없는 곳.
헤나는 이미 그곳에서부터 많은 이상함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빈첸의 말대로라면 헤나는 반드시 여기로 올 것이다.
세리가 빙그레 웃었다.
“3공녀님이 좋아하는 다과를 준비해야겠네요.”
빈첸이 속으로 물었다.
‘그런데 진짜냐? 요즘 시대에는 백 개의 성취를 이루는 것보다, 하나의 실수가 없는 게 더 중요하다고?’
-네. 진짜요.
‘소심하기 짝이 없는 풍토로구나. 이래서야 무인들이 무인답게 행동할 수 있겠느냐?’
100개의 행동을 하면,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한두 개 정도는 실패가 나오기 마련이다.
무인들은 그 실패를 통해 성장한다.
실수나 실패는 당연히 성장 과정에서 당연히 따라온다.
‘수많은 성공을 해내는 것보다 하나의 실패를 피해야 하는 후계경쟁이라니. 겁쟁이들의 기준이구나.’
-어쩌겠어요, 현실이 그런데.
‘많은 것이 바뀌어야겠군.’
-네?
아덴카는 아슬란이 남겨준 가문이다.
‘나는 아슬란의 유산이 빛나기를 바란다.’
빈첸이 가볍게 웃었다.
혼자서는 할 수 없다.
그렇지만 율리안과 함께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아덴카가 빛나기를 바랐고, 또한 500년의 숙명을 이뤄내고 싶었다.
‘앞으로도 최선을 다해 열심히 돕도록.’
-뭔가 엄청 뻔뻔해진 거 같아 찝찝하지만 저도 바라던 바에요. 이제야 뭔가 호흡이 좀 맞아가는 기분이네.
* * *
빈첸 아덴카가 고지 점령전에 참여한다는 소식이 헬라임가 내에 전해졌다.
“배짱이 두둑하네.”
“아덴카의 명성에 먹칠하고 싶어 환장한 모양이군.”
빈첸은 아덴카의 직계다.
그가 헬라임이 주최한 행사, 그것도 메인 행사도 아닌 ‘고지 점령전’에서 패배자가 된다는 건 모양새가 그리 좋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심지어 헬라임 측에서도 아룡검대원이 출전한다지?”
아룡검대는 ‘무력집단’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웠다.
그들은 붉은 요새의 ‘생도’와 비슷한 개념으로서, 무인이 되기 위해 훈련받고 있는 아이들을 뜻했다.
또한 ‘아룡검대’는 헬라임 내에서 그리 권위 있는 집단은 아니었다.
아룡검대 출신은 지원업무로 차출되는 경우가 많다.
“고지 점령전이 사실은 아룡검대원을 빛내주기 위한 행사라는 걸 모르는 모양이지?”
“그걸 알 만큼 똑똑했다면 고지 점령전에 참전하고 싶다고 말하지 않았겠지.”
아룡검대는 헬라임의 주축이 아니다.
‘고지 점령전’은 ‘아룡검대조차도 뛰어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행사였다.
“아덴카의 직계가 일개 아룡검대원에게 패배하면 볼만하겠군.”
“씻을 수 없는 치욕이 될 텐데.”
헬라임의 많은 관련자들이 비슷한 생각을 했다.
“최근 성공에 눈이 멀어 분수를 망각한 거지.”
“어린 나이에 많은 것을 이룬 것이 독이 된 거야.”
심지어 이번에 출전하는 아룡검대원은, 역대 아룡검대원들 중 가장 우수한 실력을 가졌다고 평가되는 유리나였다.
대화를 나누던 남자는 주변을 살펴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가주께서 빈첸 공자를 좋게 보고 있을 리 없지 않나?”
“그렇겠지.”
알 만한 사람은 알고 있는 내용이다.
가폰소는 빈첸 때문에 제1 후계자를 잃었다.
“빈첸 공자는 스스로 함정에 걸어 들어간 거나 다름없군.”
그리고 고지 점령전의 우승 내정자인 유리나도 비슷하게 생각했다.
유리나가 빈첸이 머무는 방을 찾아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헬라임의 아룡검대원 유리나라고 해요.”
“반갑습니다, 붉은 요새의 8급 생도 빈첸 입니다.”
유리나는 열일곱 살 치고 몸집이 무척 작은 편이었다.
열네 살인 빈첸보다 키가 작았다.
그녀가 빈첸을 올려다보았다.
“빈첸 생도님과 겨루게 될 아룡검대원이기도 하고요.”
“제가 당신에게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 눈빛이 곱지 않군요.”
“무슨 생각으로 고지 점령전에 참여한다는 거예요?”
“참여하면 안 될 이유라도 있나요?”
“당연히 안 되죠!”
유리나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목소리를 낮추고 작게 말했다.
“이 무대가 아룡검대원을 빛내주기 위한 자리라는 걸 모르시는 거예요?”
“…….”
“아룡검대원 따위가 이 정도다, 그러면 진짜 검대원들은 얼마나 강하겠는가! 헬라임이 자랑하는 자리라는 걸 모르신단 말이에요?”
“…….”
“여기서 제가 당신을 이기면……!”
“그러면요?”
“헬라임의 명성이 엄청나게 높아지겠죠.”
“그게 문제가 됩니까?”
빈첸은 피식 웃었다.
“헬라임의 명예가 드높아지는 것이 싫은 모양이군요.”
“…….”
“지금 본인이 감시당하고 있을 거라는 건 알고 있습니까? 나와의 만남이 상부로 실시간으로 보고되고 있을 거라는 것도? 어쩌면 우리의 대화가 기록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도?”
“…….”
“하긴, 그걸 일일이 계산하고 움직일 정도면 대놓고 절 찾아오지는 않았겠죠.”
유리나는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아무튼 지금이라도 좋으니 출전을 포기하도록 해요.”
“어째서죠?”
“나는 최선을 다할 예정이니까요. 당신은 무참히 패배할 거예요. 지금 포기하는 편이 차라리 덜 망신스러울 거예요.”
“그러니까, 내 패배를 알려주기 위해 친절히 찾아왔다는 말인가요?”
빈첸이 빙그레 웃었다.
“내게 친절을 베푸는 건가요, 아니면 불만을 토로하기 위한 건가요, 아니면 이 점령전이 공정하지 못하다고 알려주는 건가요? 헷갈리는군.”
“어느 쪽이든 상관없잖아요. 어차피 당신은 패배할 거고, 엄청나게 망신을 당할 거예요.”
“그게 걱정 되나요?”
“아뇨, 전혀요.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당신이 괜히 여기까지 와서 내 희생양이 되기를 바라지 않을 뿐이에요.”
“왜요?”
“찝찝하니까!”
그녀가 몸을 돌렸다.
노란색 단발이 흩날렸다.
“아무튼 난 분명히 전했어요. 망신당하기 전에 그냥 도망쳐요.”
“걱정은 고맙습니다만,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문이 닫혔다.
빈첸은 한참 동안이나 그 문 쪽을 바라보았다.
‘율리안. 네가 보기엔 어때?’
-당연히 수상하죠.
‘왜?’
-아룡검대원은 지원업무를 하기 위해 육성되는 애들이에요. 남을 도와야 하기 때문에 눈치도 빠르고 머리회전이 빨라야 하거든요. 저 누나는 아룡검대원의 대표로 뽑힌 검대원이고요. 근데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행동했다? 꿍꿍이가 있어서 찾아온 게 틀림없어요.
‘헬라임에서 의도적으로 보냈다고 생각하는 거냐?’
-그럴 가능성이 높죠. 어쩌면 명분 쌓기일지도 몰라요.
‘명분쌓기?’
-무턱대고 고지 점령전에 출전하겠다고 얘기한 빈첸 공자를 위하여 유리나를 보내 충분히 설명하고 경고했다. 뭐 이런 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첸 공자가 고집을 부려 고지 점령전에 참전했다.
‘그리고?’
-그리고 형님에게 완벽한 패배를 선물하겠죠. 그게 헬라임 입장에서는 완벽한 서사죠.
빈첸은 입을 다물었다.
이번에는 율리안이 되물었다.
-형님 생각은 좀 다른 모양인데요?
‘좀 달라.’
-어떻게 다른데요?
‘뒤돌아 설 때, 유리나의 모습이 기억나?’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몸을 돌렸다.
노란색 단발머리가 흩날렸었다.
언뜻 보면 자연스러운 모양새였지만, 빈첸은 다른 점을 짚어냈다.
‘마를렌 꽃 내음이 났어.’
로랑이 가르쳐주었던 그 냄새.
시민 혁명대만의 특별한 방식을 통해서만 느낄 수 있다는 그 냄새가 났다.
-잘못 느낀 거 아니에요?
‘그걸 잘못 느낄 수는 없지. 세상에서 처음 맡아본 냄새인데.’
-그럼 유리나도 시민 혁명대일까요?
‘높은 확률로 그렇겠지.’
유리나의 모습은 마치, 빈첸이 그 냄새를 맡아주기를 바랐던 것 같아 보였다.
‘그걸 알려주려고 많은 위험을 감수하고 나를 찾아왔을지도 모를 일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