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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의 정석-92화 (92/184)

환생의 정석 92화

순간적으로 그의 기도가 달라졌다.

그의 오른팔에 파충류 같은 비늘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다리근육이 부풀어 올랐다.

“으하하하핫!”

가볍게 도약했다.

건물들의 옥상을 가뿐히 뛰어넘었다.

무인은 아공간에서 활을 꺼내어 빈첸을 조준했다.

“죽여 주마! 하급시민.”

빈첸은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았다.

무인이 날렵하게 움직였지만 빈첸의 표정은 여유롭다 못해 권태로울 지경이었다.

-형님 쟤 활 쏘는데요?

남자가 활시위를 잡아당겼다.

피슝!

파공성과 함께 화살이 날아들었다.

빈첸은 그 화살을 피하지 않았다.

오른손으로 자신에게 쏘아진 화살을 잡아냈다.

-헐? 이걸 잡아? 어떻게 했어요?

‘손 싸움의 기예. 이미 여러 번 보았지 않느냐?’

-그게 이거예요?

‘응용이지.’

-뭔 놈의 응용으로 쏜 화살을 맨손으로 잡아요?

‘게다가 파공성이 이렇게 크면 잡아달라고 광고하는 꼴이지 않느냐?’

-원래 활 쏘면 소리 나잖아요. 그게 당연한 물리법칙이잖아요…….

‘제대로 안 익혀서 그렇지, 극에 이른 궁사들의 활은 눈에도 보이지 않고 소리도 들리지 않아. 그래서 궁사들의 활은 소리 없는 비검이라고도 불린다.’

-그래요. 뭐, 그렇겠죠. 허접한 활을 맨손으로 잡는 건 아주 기초적이고도 쉬운 거예요. 그렇죠? 하하, 참 쉽다 쉬워.

‘이제야 말이 통하는군. 검술가들의 필수 덕목이었다. 원거리 공격에 대응하는 법. 이것도 아주 기초적인 거야.’

-…….

빈첸은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그런데 저놈들이 뭘하는 걸까?’

-너무 멍청해서 저도 예측이 안 돼요. 왜 저렇게 높이 뛰었을까요?

엄청나게 높이 도약한 것은 알겠으나 지금 여기서 굳이 저렇게 높이 도약할 필요는 없었다.

빈첸의 눈으로 봐도, 율리안의 눈으로 봐도, 이유를 전혀 알 수 없었다.

빈첸은 아까부터 느꼈던 묘한 느낌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저놈은 무인이 아니야. 무인으로서의 교육도 받지 못했고.’

이것은 마치 환생 초기, 무인들의 조악한 몸놀림을 보았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때보다 더 심했다.

저놈은 무예의 ‘무’ 자도 모르는 놈 같았다.

‘이상한 일이구나. 분명 몸에 마나는 있고 신체능력도 뛰어난데.’

여러 발의 화살이 더 쏘아졌으나 빈첸은 아주 쉽게 화살들을 피하거나 잡아냈다.

빈첸은 낚아챈 화살에 마나를 담아 옥상 위의 남자에게 집어 던졌다.

푸욱!

남자의 허벅지를 관통했고, 그는 옥상에서 굴러떨어졌다.

“으으윽.”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상당히 높은 곳에서 떨어졌는데 크게 다치지는 않은 것 같았다.

‘무인이 아닌데 마나를 익히고 있고 몸이 기이할 정도로 튼튼하다.’

마나로 몸을 보호한 게 아니다.

‘정말로 몸이 단단한 거야.’

피부에 돋아나 있는 저 이상한 비늘이 그것을 증명했다.

삐이이익-!

쓰러진 무인이 휘슬을 불었다.

제 동료들을 불러 모으는 소리 같았다.

‘동료들이 오고 있네.’

기감이 느껴졌다.

다들 이 남자와 느낌이 비슷했다.

무인이 아닌데 무인 흉내를 내고 있는 자들.

마나를 제대로 익히지 않았고, 심상도 없는데 마나를 다루고 있다.

여러모로 기묘했다.

그런데 그때.

아까까지 정신을 잃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던 소녀가 빈첸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저기요! 따라오세요.”

“음?”

“얼른요!”

소녀가 허공에 원을 그리자 작은 이동마법진이 생성되었다.

‘마법을 다루네?’

빈첸은 소녀의 뒤를 따라 반쯤 강제로 뛰었고, 또 반쯤 강제로 이동마법진 안에 몸을 맡겼다.

이동마법을 통해 이동한 곳은 한 허름한 집 안이었다.

‘음.’

단순히 이동만 한 건 아니었다.

어느새 빈첸의 몸은 밧줄로 포박당한 상태였다.

‘아아. 나를 납치하기 위한 계획이었나.’

뭔가 거창한 걸 하려는 것처럼 보였으나 결국 납치가 목표인 듯했다.

-이동마법진 안에 포획마법을 섞은 모양이네요. 별로 위기감은 없는데요?

‘그러게나 말이다.’

빈첸의 속마음을 알 리 없는 소녀는 무척이나 당당했다.

빈첸 앞에 섰다.

“당신, 파란 보석을 가지고 있지? 그걸 내놔.”

“나한테 없어.”

그 말에 소녀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 그럼 어디 있는데?”

“시종한테 있지.”

“그, 그래. 시종. 시종한테 얼른 파란 보석을 가지고 오라고 해.”

“여기가 어딘데?”

“그건 알려줄 수 없어.”

“그럼 파란 보석을 어떻게 주지?”

빈첸이 빙그레 웃었다.

“날 풀어주면 가져다주지.”

“그래?”

소녀의 몸이 잠깐 움직였다.

비록 찰나이기는 했지만 빈첸을 풀어주려 한 듯했다.

-바보네요.

‘그러게.’

그래도 완벽한 바보는 아닌 듯, 이내 정신을 차렸다.

“날 속이려고 한 거지?”

“속는 게 더 웃기지 않은가?”

“우습게 보지 마!”

빈첸의 얼굴 옆에 불화살이 생성되었다.

여차하면 불화살로 관자놀이를 뚫어버릴 기세였다.

“너는 시민 혁명대의 일원인가?”

“묻는 말에나 대답해!”

“이것 참 곤란한데.”

빈첸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방금까지 그의 몸을 포박하고 있던 밧줄은 어느새 풀린 상태였다.

소녀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 그 자리에 가만히 있어!”

“포박술에도 당연한 기초 원리가 있는 법인데.”

단순히 묶기만 한다고 해서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묶는 법이 있으면 푸는 법이 있고, 풀지 못하도록 제압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기술과 매듭법이 필요했다.

그러나 소녀의 포박마법에는 그런 원리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빈첸은 엄지와 검지로 불화살을 살짝 잡았다.

치이이익-!

불화살은 힘없이 사라져 버렸다.

“무인이 아닌 자들이 무인 흉내를, 마법사가 아닌 자가 마법사 흉내를 내고 있구나.”

빈첸이 소녀에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갔다.

“가, 가까이 오지 마!”

소녀의 뒤로 불화살이 세 개 생성되었다.

그녀 딴에는 꽤 무리하는 것인지 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형님, 쟤 쫄았어요.

빈첸은 휴-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야 정상적인 대화가 어려웠다.

빈첸은 바닥에 떨어진 밧줄을 들어 스스로를 포박했다.

“무인을 포박할 때에는, 이곳과 이곳 매듭을 이렇게 맺어야 한다. 기본원리는 알아야지. 잘 봐.”

그 말에 소녀는 또 가까이 다가와 포박술의 원리를 진지하게 경청했다.

“아. 그렇게 하는 거구나. 매듭이 중요한 거였어.”

“자, 이 정도면 대화를 좀 할 용의가 있어?”

* * *

소녀의 이름은 하모나였다.

스스로 시민 혁명대의 일원이라고 밝혔다.

“헬라임은 은총이라는 알약을 만들어서 시민들에게 강제적으로 먹이고 있어.”

“알약?”

“효과는 아까 봤지?”

무인이 아닌 자가 마나를 다룰 수 있게 되고, 몸에 비늘이 돋아났었다.

‘햇볕 수용소에서 나눠준 알약의 개량형인 것 같군.’

하모나가 말을 이었다.

“나 역시 은총으로 마법을 다룰 수 있게 됐어. 헬라임은, 헬라임을 따르는 모든 자에게 은총을 내려줄 수 있으며 모두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유토피아를 주겠다고 약속했어.”

그렇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은총에는 강한 중독성이 있단 말이야.”

약간의 힘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약은 강한 마약이었다.

“결국 헬라임의 은총 없이는 단 한 시도 살 수 없는 사람들이 되어가고 있어.”

부작용을 깨달은 사람들은 은총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거기서부터였다.

“헬라임은 자신들의 숭고한 목적을 방해하는 세력으로 우릴 찍었거든. 그래서 은총을 내려주기가 어렵게 되었다고 했어.”

이후의 결과는 뻔했다.

이미 ‘은총’에 중독된 시민들은 시민 혁명대를 좋게 보지 않았다.

좋게 볼 수 없었다.

시민 혁명대 때문에 은총을 받을 수 없게 되었으니까.

“결국 시민들끼리 치고받고 싸우게 된 거야. 그게 2년 전이고.”

“그렇군.”

“시민들은 저희들끼리 분열하여 상위 시민과 하급 시민으로 나누어 첨예하게 대립하기 시작했지.”

은총을 받은 자들은 스스로를 상위 시민이라 불렀다.

은총을 거부한 자들을 하위 시민이라 부르며 탄압했다.

-헬라임은 다른 명가(名家)들이 개입할 수 없도록 치밀하게 계산한 것 같네요. 은총을 받은 자들은 헬라임가를 열렬히 지지하고 있을 테니까요.

시민 혁명대를 그토록 잔혹하게 탄압하는 주체가 헬라임의 무인들이었다면 얘기는 달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민 혁명대를 탄압하는 주체는 헬라임이 아니라, 또 다른 시민들이었다.

하모나는 빈첸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빈첸이 속으로 물었다.

‘율리안. 쟤가 정말로 바보로 보이냐?’

-설마요.

빈첸은 직감적으로, 율리안은 논리적으로 상황을 해석했다.

연극과 연출이 우스꽝스럽기는 했지만 그건 빈첸의 눈썰미가 지나치게 탁월해서 그렇게 보인 것이기도 했다.

-그야 당연히 시간 끌기겠죠.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속이 훤히 보였다.

빈첸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가만히 있어 주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순순히 파란 보석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동시에 3발의 불화살이 생성되었다.

그리고 주변에 불화살들이 더욱 생겨나기 시작했다.

무려 20여 발의 불화살이 빈첸을 노렸다.

3명의 마법사. 그리고 2명의 무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빈첸의 생각대로, 역시 시간을 끌어서 사람들을 부르기 위한 수작이었다.

빈첸이 고개를 갸웃했다.

“너희는 시민 혁명대 아니야? 비폭력이 혁명대의 신념이라고 하던데.”

대머리의 덩치 큰 남자가 소리쳤다.

“흥, 파란 보석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순순히 놓칠 수는 없지.”

“이건 좀 곤란하게 됐는데. 난 너희가 시민 혁명대와 관련이 있는 줄 알고 기다려준 거거든.”

빈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를 포박하고 있던 밧줄이 스르르 풀려 내렸다.

“순순히 말해. 너희 시민 혁명대 아니지.”

시민 혁명대는 비폭력이 원칙이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마법과 무기로 무장했다.

다시 말해, 이들은 ‘진짜 시민 혁명대’가 아니었다.

하모나가 소리쳤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순순히 항복하면 험한 꼴은 덜 보게 될 거야.”

빈첸은 설인 걸음을 펼쳐 순식간에 하모나의 뒤를 점했다.

하모나의 허벅지 춤에 감춰져 있던 단도를 꺼내 하모나의 목에 대었다.

하모나의 몸이 움찔 떨렸다.

빈첸이 피식 웃었다.

“왜? 이 정도 거리면 안전하다고 생각했어?”

문을 열고 들어온 자들을 살펴보았다.

하모나를 포함해서 총 여섯 명.

제대로 무예나 마법을 익힌 자는 없는 것 같았다.

“이 정도 숫자면 나를 제압할 수 있을 거라 판단한 건가?”

하모나가 침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

“비, 비겁한 놈아. 인질이라니. 무인으로서 부끄럽지도 않아?”

“그러게. 좀 비겁한 것 같기도 하고. 놔줄게.”

빈첸은 순순히 하모나를 놓아주었다.

하모나는 꽁지 빠져라 도망쳐 자신들의 무리 쪽으로 움직였다.

“여러분이 시민 혁명대와 관련이 있는 편이 좋을 겁니다.”

빈첸이 한 걸음 앞으로 움직였다.

“머, 멈춰라!”

“멈춰!”

그와 동시에 빈첸 주위를 불화살들이 감쌌다.

‘진짜 마법사’가 아닌 마법사들의 마법은 빈첸에게 그 어떤 위해도 되지 못했다.

빈첸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제 원칙 중 하나는 무인이 아닌 자를 베지 않는다는 건데.”

빈첸이 홍련을 꺼내 들었다.

위압의 마나를 운용했다.

그의 기운이 이곳을 가득 채웠다.

하나, 둘.

빈첸 주변을 둘러싼 불화살들이 힘없이 꺼지기 시작했다.

“단, 제게 살의가 없는 자에 한합니다.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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