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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의 정석-91화 (91/184)

환생의 정석 91화

둘란은 눈을 의심했다.

성기사들은 신전의 위세를 등에 업고 상당히 많은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눈앞의 남자는 신전의 위세 같은 건 필요 없을 정도로 높은 경지에 이른 무인이었다.

그런데 둘란 자신의 성기사가 되겠단다.

“아덴카에서는 알고 있는 겁니까?”

멀린은 아덴카 내에서도 손에 꼽는 무인이다.

아덴카의 주축 중 하나인 12검 중 한 명이었으니까.

“물론 알고 있습니다.”

“도대체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를 필요로 하는 사람을 돕기 위해서입니다.”

“빈첸 공자입니까?”

멀린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내게도 스승님이 필요하다고 간곡히 말하던 빈첸의 모습을.

그는 원래 성왕의 무덤에서 죽었어야 했다.

그때, 그의 사명을 모두 이루었기 때문이었다.

“예.”

“성기사가 되면 여러모로 불편한 점들이 있다는 것도 알고 계시겠지요?”

일반적인 무가에 비해 규율이 엄격한 편이다.

또한 섬기는 신관에 대해 충성을 맹세해야 하며, 신전의 이익보다 개인의 이익을 우선시할 수 없다.

또한 사유재산을 갖는 것이 지극히 제한되어 있다.

“신전 출신이 아닌 자가 성기사가 되기 위해서는 막대한 양의 헌금도 해야 하는 것도 알고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멀린이 아공간을 열어 가죽주머니를 하나 꺼냈다.

“1억 루덴입니다.”

이것은 베르사가 멀린에게 내어준 것이었다.

아덴카를 떠나는 멀린에게 내린 마지막 호의이기도 했다.

“멀린 경 입장에서는 스스로의 손발에 족쇄를 채우는 것과 다름없다는 걸 알고 계시지요?”

“저는 평생 명령을 수행하던 무인입니다.”

그러나 그 명령이 항상 옳았던 건 아니다.

“저에게는 옳은 명령이 필요합니다. 둘란 경. 당신은 내게 옳은 명령을 내려줄 수 있습니까?”

“…….”

둘란은 한참 동안이나 침묵했다.

“적어도 빈첸 공자를 위한 명령을 내릴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그거면 되었습니다.”

허황된 약속보다는 이쪽이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멀린은 바로 어제까지도 아덴카의 명령을 받아 움직였다.

멀린이 아덴카의 무인인 이상, 빈첸 공자를 전폭적으로 지원할 수가 없었다.

빈첸은 이미 장로원의 눈 밖에 나버렸으니까.

“언제나 옳을 수 없다면, 그것이 차선책이겠지요. 당신의 기사가 되겠습니다. 성기사 의식을 치러주십시오.”

둘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멀린 경을 저의 성기사로 임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멀린 경이 어째서 성기사가 되려 하는지에 대해서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며, 저는 멀린 경과 빈첸 공자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그대는 지금부터 나의 성기사단장입니다.”

둘란은 종려나무 지팡이를 가져와 멀린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신성력을 뿜어내 멀린의 몸을 덮었다.

이내 멀린이 말했다.

“둘란 경은 커다란 싸움에 발을 들였습니다. 그 과정은 매우 고독할 것이고, 피를 흘리지 않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각오하는 바입니다.”

멀린이 기감을 흩뿌려 주변을 살펴본 뒤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아이만 경을 알고 계시지요?”

“물론입니다.”

멀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이만은 넬리우크를 배신한 배신자로 낙인찍혀 메일튬으로 보내진 자.

빈첸과의 만남 이후 행방불명된 신관이었다.

“아이만 경을 제가 데리고 있습니다.”

* * *

헬라임으로 떠나기 전날 저녁.

윌슨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공자님! 공자님, 공자니이이이임!”

“왜 이리 야단법석이냐?”

“그, 그, 그것이!”

윌슨은 숨이 너무 찬 나머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그 뒤로 평온한 기색의 한 여인이 서 있었다.

아덴카 3공녀이자 1급 대표생도 헤나였다.

“내일 헬라임으로 떠난다고 들었다.”

“그렇습니다, 누님. 그런데 어쩐 일이십니까?”

“2년 전, 헬라임으로 파견을 나간 적이 있었다. 그때의 공로를 인정받아 헬라임의 가주께 통행증을 선물 받았다.”

헤나가 내민 것은 파란색 보석이었다.

“헬라임이 다스리는 모든 지방을 자유로이 오갈 수 있는 통행증이니 챙겨두어라.”

“……감사합니다.”

“감사할 것 없어. 네 공로를 일부 빼앗은 것에 대한 보상일 뿐이다.”

헤나는 파란 보석을 전해준 뒤 등을 돌렸다.

“누님. 이것만으로는 저에 대한 보상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윌슨이 움찔 놀랐다.

그는 늘 감정 없는 기계처럼 움직이는 헤나가 두려웠다.

빈첸의 뒤에 숨었다.

“무엇을 원하느냐?”

“누님의 그림을 선물해 주세요.”

10년쯤 전.

율리안의 기억 저편에 희미하지만 밝은 기억이 하나 있었다.

헤나와 대화를 나누다 보니 불현듯 떠올랐다.

10년 전의 헤나는 4살이었던 율리안의 모습을 그려주었었다.

“쓸모없는 소리를 하는구나.”

“10년 전과는 제 모습이 많이 달라졌잖아요.”

“…….”

헤나는 잠시 침묵했다.

그녀는 원래 화가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오래되어 빛이 바래고 낡은 꿈.

아덴카의 직계로 태어난 이상 불가능한 이상향일 뿐이었다.

“저는 아직도 10년 전 누님께서 그려주셨던 그림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소, 소중하게 간직했다고 누가 그래요?

‘10년이나 지났는데 상태가 무척이나 깨끗하던데. 마치 보존마법이라도 걸어놓은 것처럼.’

-그, 그 정도로 소중하게 간직하지는 않았거든요? 오해하지 말아줄래요?

빈첸은 그 날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

소중히 간직하던 초상화를 들켰던 그때.

‘피의 정령왕’에서 초상화가 땅에 떨어져 내렸을 때 율리안은 크게 당황했었다.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딴 데 정신 팔지 말고 본론에 집중 좀 해줘요.

마치 들키고 싶지 않은 비밀을 들킨 어린아이 같았었다.

빈첸이 빙그레 웃었다.

‘네게 무척 소중한 기억이었겠구나.’

그래서 다시 말했다.

“제게 몇 없는 소중한 기억입니다, 누님.”

“…….”

“좋은 기억을 주셔서 늘 감사드리고 있어요.”

헤나는 등을 돌리지 않은 채 짧게 대답했다.

“네 임무를 완수하고 붉은 요새로 돌아오너라.”

“그럼 그림 그려주실 거예요?”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멀어지는 헤나를 보며 빈첸이 크게 말했다.

“약속해 주신 겁니다, 누님!”

멀어지던 헤나가 잠시 멈췄다.

문득 생각난 듯 말해주었다.

“너를 도울 자들이 있을 거야.”

* * *

헬라임가는 주변의 많은 가문들을 흡수, 병합하여 커다란 세력을 이루고 있는 유력 명가였다.

대륙 남쪽에서는 아덴카 못지않은 위세를 누리고 있었는데 성벽이 매우 높고 굳건했다.

또한 다른 가문들이 다스리는 영역들에 비하여 입가절차가 상당히 까다롭다고 알려져 있었다.

헬라임가가 다스리는 서쪽 지방, 무스돔에 도착했다.

윌슨이 거들먹거리며 파란 보석으로 만들어진 통행증을 내밀었다.

헤나가 준 보석이었다.

“엣헴, 우리 공자님이 이런 사람입니다.”

“들어가십시오.”

경비대원들은 별다른 검문 절차 없이 빈첸 일행을 통과시켜주었다.

‘이곳이 무스돔인가.’

무스돔은 중소규모의 도시였다.

여느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성문과 접한 대로가 눈에 띄었다.

거리 곳곳에 중무장한 무인들이 열을 맞추어 행진하는 것이 보였다.

세리가 주변을 훑어보았다.

“분위기가 제법 살벌하네요.”

마치 군사도시 같은 느낌이었다.

이틀이 지나자 이곳의 분위기를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도시 곳곳에서 크고 작은 시위들이 산발적으로 일어났다.

그들은 손에 노란색 작은 깃발을 들고서 자유를 달라고 외치고 있었다.

세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생각보다 시위가 잦고 진압하는 과정이 폭력적이에요.”

“그래.”

빈첸이 속으로 물었다.

‘이상하지?’

-네. 엄청요.

이틀 동안 4번의 시위를 목격했다.

많은 시민들이 자유를 달라며 노란 기를 흔들었다.

‘헬라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길래 저들이 저렇게까지 하는 거지?’

시위대는 어딘지 절실해 보였고, 그런 시위대를 짓밟는 무인들은 광기에 젖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한데, 밖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네요.

꽤 많은 유혈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이쯤 되면 다른 유력 명가들이 개입을 할 법도 한데.

그게 아니더라도 소식지의 기자들이 이곳의 참상을 전할 법도 한데 그것도 아니었다.

여러모로 상황이 이상했다.

다음 날.

빈첸은 노란 기를 들고 있는 소년을 만났다.

그에게 로랑에 대해 물었으나 원하는 답은 들을 수 없었다.

“헬라임 무인이 틀림없지? 내가 속을 줄 알고!”

소년은 도망쳐 버렸다.

그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시민 혁명대의 사람들은 무인으로 보이는 빈첸에게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았다.

“마냥 쉽지만은 않구나.”

세리는 빈첸에게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넸다.

“공자님께서 어엿한 무인의 기도를 풍기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요?”

다시 하루가 흘렀다.

안전을 위하여 세리와 윌슨은 숙소에 대기시켰다.

‘시민 혁명대의 본부나 로랑의 위치를 알아내는 게 우선인데.’

거리를 걷던 빈첸은 헬라임의 무인이 한 소녀를 짓밟는 것을 발견했다.

소녀가 숨을 헐떡이며 애처롭게 도움을 요청했다.

“도, 도와주세요!”

결국 소녀는 정신을 잃은 것 같았다.

무인은 소녀의 머리채를 잡아 끌어 인적이 없는 골목길로 들어왔다.

-이야, 형님. 대단한데요?

‘그러게나 말이다.’

빈첸은 뒤따라 걸으며 피식 웃고 말았다.

-세상에서 제일 연기 못하는 극단 같아요.

산전수전을 다 겪은 빈첸의 눈으로 보았을 때, 저들의 움직임은 어설펐다.

실제로 납치를 해본 적이 없는 자의 엉성한 움직임이었고, 살려달라고 외치는 소녀의 목소리에 두려움은 전혀 없었다.

지금 이 상황은 조작된 상황이 분명했다.

‘나를 꼬여내고 싶은 것 같지?’

-그런 것 같아요.

‘그렇다면 같이 어울려주는 수밖에.’

빈첸은 뒤를 따라 걸어가 말했다.

“그쯤 하지?”

“넌 뭐냐? 너도 시위대냐?”

“…….”

“갈 길이나 가지, 왜 끼어들고 난리야?”

그는 빈첸을 향해 다짜고짜 주먹을 휘둘렀다.

무인의 주먹을 낚아챈 뒤, 그 힘을 이용해 바닥에 집어 던졌다.

무인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는 친절하고도 상세하게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헬라임의 은총을 받은 시민이자 무인을 이따위로 다뤄? 목숨이 두 개라도 되는 거냐?”

마치 자신의 정체를 알려주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 같았다.

정확한 속셈을 알 수가 없어 일단 대답은 해주었다.

“아무런 무기도 없는 일반인을 그렇게 폭력적으로 대하는 것이 부끄럽지도 않은가?”

“시끄럽다!”

무인은 옷에 묻은 먼지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연극 속 틀에 박힌 듯한 대사를 열심히 내뱉었다.

실전을 수없이 겪어온 빈첸의 눈으로 보기에 그게 얼마나 어색한지도 모른 채.

“너는 잘못 건드린 거다. 감히 하급시민이 상위시민을 막아서? 은총을 받지도 못한 것이!”

“은총?”

“겪어보아라. 은총이 무엇인지를!”

무인이 품 안에서 작은 구슬을 꺼내어 입속에 넣었다.

그와 동시에 그의 몸에서 하얀 증기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이것이, 선택받은 자들의 은총이지.”

이들의 말은 익숙지 않은 연기를 하는 것처럼 어색했다.

이 상황이 상당히 우스꽝스럽다는 것과는 별개로,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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