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의 정석 70화
빈첸은 두 동강 난 멜리논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멜리논이 말했다.
“뇌기를 다루시는군요. 여전히 불쾌한 기운이네요.”
그의 상체가 움직였다.
뒤집혀 있던 몸을 앞쪽으로 돌렸다.
멜리논의 얼굴이 보였다.
멜리논의 얼굴은 완전히 검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것은 마치 그림자 혹은 어둠처럼 변해 있어서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저를 왜 죽이려 하시는 겁니까?”
“너희 영살자들은 오로지 두 가지 경우에만 살기를 숨긴다. 하나는 사미온 일족 앞에서.”
아까 멜리논이 스스로 밝혔다.
-저희 일족은 저희가 가진 힘처럼, 세계의 그림자를 담당해 왔습니다.
저들은 사미온가(家)에게 충성을 맹세한 이능종족으로서, 사미온의 그림자 역할을 하는 일족이었다.
세계의 그림자를 담당해 왔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또 다른 하나는 죽일 대상 앞에서 살기를 감추지.”
사미온의 피를 이어받지 않은 사미온 내의 사람들은 ‘아스비온 일족’을 싫어했다.
그들이 본능적으로 내뿜는 살기 때문이었다.
평범한 인간들이 숨을 내쉬는 것처럼, 저들도 살기를 내뿜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족이었다.
“그런 억지 추측으로 저를 죽이려 했단 말입니까?”
빈첸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한번 검을 휘둘렀다.
서걱!
미전류를 머금은 검이 멜리논의 오른 손목을 잘랐다.
‘여전히 피는 묻어나오지 않는군.’
제대로 베지 못했다는 소리였다.
빈첸이 말했다.
“너희들은 사냥감을 사냥할 때, 몸에서 두 가지 변화가 벌어진다. 하나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손끝에 특히 짙은 영기(影氣)가 서린다는 것이지.”
잘려나간 손목에서 피 대신 검은색 영기가 줄줄 흘러나왔다.
“저희에 대해 많이 아시는군요.”
율리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혀, 형님! 저 기운이 다시 몸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어요!
사람으로 치자면 저 검은 기운은 피나 다름없었다.
그 피가 거꾸로 몸으로 흡수되고 있었다.
이내, 동강 난 하체로부터 검은 기운이 주욱- 늘어났다.
표정이 보이지 않던 멜리논의 얼굴에서 표정이 보이기 시작했다.
시뻘건 입이 양옆으로 찢어졌다.
섬뜩한 웃음이 보였다.
“원래는 저희들의 영역에 불러들여 완벽하게 살해하려 했습니다만.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어느새 멜리논의 하체와 상체가 붙었다.
멜리논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본래 결계 안쪽.
그들의 ‘영역’으로 불러들이려던 것은 안전장치에 불과했다.
“여기서도 충분히 당신을 죽일 수 있으니.”
멜리논의 잘려나간 손목에서 영기가 새어 나오는가 싶더니 이내 날카로운 형상으로 변했다.
손목이 검화(劍化)되었다.
“제아무리 뇌력을 지녔어도, 당신의 격으로는 나를 죽일 수 없어요.”
“그렇겠지.”
멜리논이 보기에 빈첸은 지나치게 평온한 상태였다.
호흡도 그랬고 마나의 흐름도 그랬다.
멜리논은 피식 웃었다.
“허세를 부리고 있군요.”
“글쎄. 내가 허세를 부린다고 생각해?”
“당신의 검은 나에게 닿지 않습니다.”
멜리논이 몸을 낮추었다.
그의 몸이 그림자처럼 흩어지는가 싶더니, 빈첸을 향해 쏘아졌다.
챙!
검과 검이 부딪쳤다.
멜리논의 검화 된 손과 홍련이 부딪쳐 불꽃이 일었다.
‘이건……!’
푸악!
피가 솟구쳤다.
멜리논이 크아아악! 비명을 질렀다.
털썩!
빙글빙글 돌며 허공에 솟구쳤던 멜리논의 손목이 땅에 떨어졌다.
멜리논은 고통스럽다기보다는 당황스러웠다.
‘어떻게?’
어떻게 자신의 몸을 벨 수 있었단 말인가.
뇌력을 담아 공격해도 닿지 않았던 검이, 어떻게 이런 결과를 낳았는가.
고통이 밀려들었다.
의문이 사라지고 두려움이 피어올랐다.
“오, 오지 마!”
빈첸의 몸에도 피가 잔뜩 튀었다.
빈첸은 멜리논에게 시간을 주지 않았다.
“나의 검은 사미온을 넘어서기 위한 검이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저들은 사미온과의 맹약에 묶인 이능종족.
‘그러니 벨 수 있어.’
아까 뇌기를 섞어 펼친 공격은 그저 ‘검로’를 만들기 위한 검이었다.
두 번의 공격으로, 두 개의 선을 만든 셈이었다.
-일부러 미전류 특성을 섞어서 기습하면서 전력을 다한 것처럼 연출한 거군요.
이능검격은 ‘이능’을 베는 검이다.
아스비온 일족은 이능의 일족이다.
빈첸은 재빨리 멜리논에게 접근했다.
멜리논은 몸을 영체화(影體化)하여 흩어졌으나 빈첸은 그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아덴카 정검 기본 1식.
반월 베기.
사미온을 넘어서기 위해 아슬란이 남긴 검.
아덴카의 흐름을 따라 마나를 움직였고, 좌에서 우로 정직하게 베었다.
‘하나의 선을 더하고.’
아덴카 정검 기본 2식.
깊게 찌르기.
하나의 점을 더했다.
사미온을 넘어서기 위한 두 개의 검이 하나로 펼쳐졌다.
“으아아아악!”
멜리논의 몸은 영체화 되지 못했다.
마치 불에 타서 없어지는 것처럼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내 멜리논은 잿더미가 되어 버렸다.
빈첸은 벽면으로 다가가 마법횃불을 꺼냈다.
-뭐하는 거예요?
‘이능검격을 완벽하게 구사하지 못했어.’
절체절명의 순간,
멜리논은 몸을 뒤틀어 선과 점에 변형을 주었다.
완벽한 검로를 생성시키지 못했다.
‘완벽하게 처리해야 해.’
마법횃불을 잿더미에 대었다.
잿더미가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다시 한번, 으아아악!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잿더미마저도 불에 타서 완전히 없어져 버렸다.
고요.
이 공간은 고요해졌다.
멜리논의 시신은 사라졌고, 이 공간에는 빈첸만 남은 듯했다.
‘이상하구나.’
-뭐가요?
‘전에는 이상하게 보이지 않던 것들이, 이제는 이상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500년 전.
빈첸은 사미온의 무인이었다.
그것도 직계에 가장 근접한 방계의 무인.
사미온은 그의 가문이었고, 그가 살아갔던 터전이었다.
‘사미온의 사슬식도 그랬고.’
그것은 말이 좋아 사슬식이지, 흑마법에 가까웠다.
‘아스비온 일족이 그렇다.’
보통 ‘이능’이라 함은 이계의 권능을 뜻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이계의 권능’은 흑마법으로부터 기인한다.
제물을 바쳐 현계에 존재하지 않는 특별한 힘을 불러오는 것.
그것이 흑마법이다.
‘그때에는 너무 당연했었는데.’
그 안에 있을 때에는 몰랐다.
그런데 한 발자국 떨어져서 보니 이상한 것 투성이다.
-형님, 또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예요?
‘내 생각이 읽히지 않는 건가?’
-네. 지직지직- 거려요.
빈첸은 피식 웃었다.
‘글쎄. 네가 알면 안 되는 무엇인가가 있는가 보지.’
빈첸이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혹시 그거 알아?”
-뭘요?
율리안은 직감했다.
이 얘기는 자신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괜스레 오싹해졌다.
-누, 누구한테 말하는 거예요?
“영살자들은 절대 혼자 다니지 않아.”
그들은 항상 짝을 이루어 다닌다.
“곧 모습을 드러내겠지. 또 다른 영살자가.”
일부러 자극했다.
‘영역’ 안으로 들어가지 않기 위해.
다행히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희에 대해 정말로 잘 아시는 것 같군요.”
여자의 목소리였다.
순간, 마법횃불이 모두 꺼졌다.
완벽한 어둠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빈첸은 알고 있었다.
‘반드시 공격해 올 것이다.’
시각은 완전히 차단된 상태.
눈을 감았다.
‘소리까지 없애지는 못해.’
아주 잠깐이라도 망설인다면, 목이 베일 것이다.
영살자들은 어둠 속에서 더 빠르니까.
‘오른쪽.’
집중했다.
반격은 고려하지 않았다.
이 어둠 가운데, 빈첸은 영살자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으니까.
‘그러나 막을 수는 있다.’
아밀룬 제3 검식.
중검첩방(重劍疊防).
마나의 속성이 변했다.
중검의 마나를 겹겹이 쌓아 올려 방어에만 치중한 검술.
중검의 기운이 빈첸의 몸을 감쌌다.
커다란 원형 방패가 되어 영살자의 검을 막아냈다.
“신기하군요. 마나의 속성이 자유자재로 달라지다니. 지금은 무거운 마나인가요?”
빈첸은 대답할 수 없었다.
이 순간에도,
영살자는 계속해서 검을 뻗어왔다.
챙!
챙!
“언제까지 막아낼 수 있는지 보도록 하지요.”
챙!
챙!
영살자의 검이 중검첩방을 뚫어냈다.
‘지금.’
검을 맞대면서 알 수 있었다.
영살자는 지금 무척이나 화가 나 있었다.
아마도 멜리논을 무척이나 아꼈던 것 같았다.
그 떨림과 분노가 검첨에 고스란히 녹아나 있었다.
‘그렇기에 반드시 목을 노릴 것이다.’
보이지는 않으나, 그의 경험과 육감이 가르쳐주었다.
아덴카의 기본적인 검.
화려하지 않으나 기본에 충실한 그의 검날이 영살자의 검을 막아냈다.
‘큭.’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에 상처가 났다.
빈첸의 목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호호호. 운이 좋았네요.”
빈첸은 피를 닦지 않았다.
지혈을 위하여 손을 움직이는 순간, 그때 반드시 공격이 들어올 것이다.
‘상처가 아주 깊지는 않으니.’
지혈은 나중이었다.
“하나는 확실하군.”
“뭐죠?”
영살자의 움직임은 빨랐다.
시야가 차단되지 않은 상태라 할지라도, 영살자의 움직임을 쫓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너도 나를 베지 못했다는 것.”
또다시 영살자가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빈첸이 본능에 의지하여 검을 휘둘렀다.
‘컥.’
그러나 완벽한 방어는 되지 못했다.
옆구리를 베였다.
상당한 통증이 밀려들었다.
“이걸 어쩌나, 베었네요?”
이내 공격이 멎었다.
“바로 나를 죽이지 않는 이유는, 복수를 위함인가?”
“…….”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빈첸은 느낄 수 있었다.
보이지 않는 그림자가 크게 분노하고 있었다.
“맞아요. 당신을 야금야금, 천천히 죽일 거예요. 최대한 고통스럽게. 그것만이 내 동생에 대한 보상이 되겠죠.”
“멜리논의 혈육인가 보군.”
그사이,
차가운 날붙이가 빈첸의 반대쪽 옆구리를 베었다.
‘큭!’
아까보다 더 깊게 베였다.
영살자가 크게 웃었다.
“호호호호호! 살려달라고 빌어도 늦었어요.”
“…….”
영살자의 웃음에서는 약간의 여유마저 느껴졌다.
완전한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다음은 오른 다리를 노릴 거예요.”
그리고 그때,
빈첸이 무엇인가를 꺼내 들었다.
팟!
잠깐이지만 빛이 일었다.
영살자의 형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점을 더하고.’
아덴카 정검 기본 2식.
깊게 찌르기.
빈첸의 검이 무엇인가를 찔렀다.
푸욱!
빈첸은 재빨리 검을 회수했다.
다시 한번, 깊게 찔렀다.
‘선을 더하여 이능을 벤다.’
양쪽 무릎 뒤.
오금을 베었다.
양쪽 오금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영살자의 무릎 아랫부분이 재가 되어 사라졌다.
“으아아악!”
영살자는 엉금엉금 기어 도망치다 막다른 벽에 부딪쳤다.
“어, 어떻게…….”
“말했잖아. 중요한 건 너도 나를 베지 못했다는 거라고.”
그것이 빈첸에게는 중요한 요소였다.
이 작은 것이, 이 결과를 낳았다.
“네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려줄까?”
빈첸의 손에는 빛을 내는 무엇인가가 들려 있었다.
영살자는 얼굴을 들어 빈첸의 손을 바라보았다.
“이해할 수가…… 없어.”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자신의 ‘영역’ 안에서 싸우지 않았다고 해도, 객관적인 전력은 이쪽이 훨씬 우위였다.
빈첸이 쓰러진 영살자 앞에 섰다.
“너희는 [영역]에서 벗어나서 싸웠어. 그게 이렇게 된 첫 번째 이유다.”
암살자들에게도 여러 가지 부류가 있다.
아스비온 일족은 ‘함정’을 파놓고 차분히 기다려서 사냥하는 일족이었다.
저들이 말하는 ‘영역’이 바로 함정이었다.
영역을 벗어난 순간, 힘의 절반은 약화된다.
“너희는, 너희들의 진짜 이름을 아나?”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너희는 그림자의 일족이 아니야.”
빈첸의 손에 여전히 빛이 일렁거렸다.
-이렇게 빛이 나요. 예쁘죠?
그것은 세리가 전해주었던 부적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