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의 정석 69화
빈첸은 어두운 통로를 따라 걸었다.
-뭔가 기분이 영 이상하네요.
‘일어났냐?’
-일어났다뇨. 나는 신이고, 잠 같은 건 자지 않아요.
‘목소리에 생기가 도는 것 같은데?’
-그러게요. 몸이 가뿐한 것 같아요. 실제 몸은 없지만 아무튼 기분이 그렇다는 거니까 꼬투리는 안 잡았으면 좋겠어요.
율리안은 잠시 생각하다가 이내 이유를 찾아냈다.
-이곳이 신기(神氣)가 응집되어 있는 공간이라서 그런 것 같아요.
빈첸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러고서 기감을 흩뿌려보았다.
‘응집된 신기라. 나는 느껴지지 않는 기운이군.’
끝이 보이지 않는 기다란 복도가 보였다.
벽면에 일렬로 붙은 마법횃불이 주변을 희미하게 밝히고 있었다.
‘성왕의 무덤’에 들어오자 빈첸은 율리안을 보다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
정신적인 연결이 더욱 단단해졌기 때문이었다.
율리안이 고개를 갸웃하는 것이 느껴졌다.
-형님은 500년 전 무인이고, 현대 무인들은 느끼지 못하는 많은 것들을 느끼잖아요. 근데 아예 안 느껴져요?
‘그래.’
이것은 무인의 기감과는 상관없이, 완전히 다른 영역의 기운인 듯했다.
-그럼 형님 아까 결계 통과한 것도 못 느꼈어요?
‘결계? 내가 결계를 통과했어?’
-으, 나 좀 무서워지려고 해요.
율리안은 빈첸의 말도 안 되는 직관과 육감 때문에 종종 놀랐었다.
빈첸의 기감은 현대 기준으로는 너무나 상식 밖이었으니까.
-형님이 아무것도 못 느낀 건 좀 이상한데. 분명히 여러 겹의 특별한 결계가 펼쳐져 있었어요. 아까 입구로 다시 가서 확인해 보는 건 어때요?
‘그러지.’
빈첸은 자신이 들어왔던 곳으로 다시 한번 걸어가 보려 했다.
‘큭.’
가슴을 부여잡았다.
‘통증?’
걸음을 옮길 때마다 몸이 무거워지고 가슴이 아파왔다.
몇 발자국만 더 걸었으면 온몸이 깨져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
저벅저벅.
발자국 소리와 함께 한 소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뒤로는 갈 수 없으실 겁니다.”
빈첸은 반사적으로 홍련을 뽑았다.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어.’
홍련을 감싸 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입구에는 특별한 자격을 갖춘 자만이 입장할 수 있는 결계가 중첩되어 있습니다. 그 결계를 통과한 자는 오로지 전진하여 저희에게 닿도록 고안된 곳입니다.”
“……너는 누구지?”
소년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빈첸을 향해 정중히 허리를 숙여 보였다.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아스비온 일족, 멜리논입니다. 성왕의 무덤을 안내하는 길잡이이기도 합니다.”
* * *
빈첸이 멜리논에게 홍련을 겨누고 있을 그 시각.
헤르카는 ‘성왕의 무덤’ 입구를 살펴보다가 손을 대보았다.
파밧!
스파크가 일었다.
“빈첸은 결계를 그냥 통과하던데.”
‘성왕의 무덤’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결계를 뚫어야 한다.
그것이 상식이다.
헤르카는 아무도 없는 허공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 말이 맞네요.”
결계를 그냥 통과하는 자가 나타날 거라고 했다.
죽음을 경험한 자.
신과 함께하는 자.
그자만이 결계를 자연스레 통과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이제는 어쩔 거죠?”
“지켜봐야지요.”
“뭘요?”
“성배를 가질 자격이 있는지.”
헤르카가 씨익 웃었다.
“그래도 빈첸은 내 생도인 거 알죠?”
“…….”
“붉은 요새의 요새장이 함께 했는데 생도가 죽어버리면 모양새가 너무 안 좋잖아.”
“사고는 치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글쎄요. 뭐. 조심은 할게요.”
헤르카는 어깨를 으쓱한 뒤 비석에 몸을 기대고 앉았다.
‘우리 생도님을 기다려볼까.’
정말로,
‘성배를 얻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앞으로 얘기가 많이 달라질 것이다.
“아참. 입구의 결계가 해금되면 무덤이 붕괴되죠?”
“그렇습니다.”
“시간은?”
“48시간입니다.”
빈첸에게 주어진 시간은 48시간이었다.
* * *
자신을 아스비온 일족이라 소개한 멜리논에게서는 이렇다 할 적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저희는 500년 동안 당신을 기다려왔습니다.”
“나를?”
“예.”
멜리논이 빙그레 웃었다.
“가이아 신전에도 같은 신탁이 내려져 있지 않습니까?”
죽음을 경험한 자.
그리고 신과 함께 하는 자.
그자만이 자격을 갖추고 있다고 했다.
“드디어 당신께서 오셨으니, 저희는 비로소 자유를 얻어 세상으로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들떠 제 할 말만 하고 말았군요.”
멜리논이 몇 가지 이야기를 해주었다.
처음 소개한 대로 그는 ‘아스비온 일족’이라는 특별한 일족이었다.
“저희는 그림자를 다루는 족속입니다. 저기를 보십시오.”
멜리논이 손가락으로 빈첸의 그림자를 가리켰다.
빈첸의 그림자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율리안이 말했다.
-마법횃불은 기본적으로 부동(不動) 마법이에요.
일반적인 불과 달리 마법횃불의 불은 움직이지 않는다.
고정된 발광체다.
그런데 그 빛을 받은 빈첸과 율리안의 그림자가 일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림자의 방향을 봐요.
보통 그림자는 빛을 받은 반대 방향으로 생긴다.
빈첸이 말했다.
“빛을 받은 쪽에 그림자가 있군.”
“네. 이게 저희 힘의 일부입니다. 보여드려야 믿으실 것 같아서.”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을 일으킴으로써, 그는 아스비온 일족이 가진 특별한 힘을 증명했다.
“저희 일족은 저희가 가진 힘처럼, 세계의 그림자를 담당해 왔습니다.”
역사 속에서도 그러한 역할을 수행했다고 했다.
“세계에 기록되지 않은 많은 비사에 저희가 얽혀 있지요. 그리고 저희 일족의 마지막 사명이 당신에게 성배를 건네는 것입니다. 500년 전 맺어진 맹약입니다. 당신에게 성배를 건네고 나면 저희를 얽매고 있는 모든 제약들이 사라지고, 저희는 이곳에서 나갈 수 있게 됩니다.”
“…….”
“그러니 당신은 저희에게 자유를 선물해 줄 구원자이기도 하지요. 저를 따라오시겠습니까?”
빈첸은 홍련을 갈무리했다.
“그러지.”
멜리논은 자신의 등을 내보이며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꿀인데요?
성왕의 무덤.
들어간 자는 있어도 나온 자는 없다고 알려진 이곳에, 갑자기 길잡이가 나타났다.
게다가 그도 원하는 바가 명확했다.
-좀 의심스럽기는 한데.
어느새 율리안은 빈첸의 육감을 완전히 믿게 되었다.
-진짜 이상한 놈이었으면 야만적인 형님이 당장에 목을 베었겠죠?
멜리논이 걸음을 잠시 멈추었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입니다.”
그 안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일반적인 마법의 빛마저 모조리 잡아먹는 결계가 펼쳐져 있습니다.”
빛마저 빨아먹는 결계.
그래서 안쪽에는 빛 한 점도 머물 수 없었다.
“자격이 없는 자들이 이곳으로 왔다가 죽임을 맞이했지요.”
‘죽음을 맞이했다’가 자연스러운 표현이나, 그는 ‘죽임을 맞이했다’고 말하고 있었다.
빈첸은 그 의미를 알고 있었으나 내색하지는 않았다.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미궁인가.”
“그런 셈입니다.”
멜리논이 손가락을 튕겼다.
딱!
소리와 함께,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벽면에 설치된 마법횃불들이 빛을 내기 시작했다.
“이제는 결계가 사라졌으니 시야를 확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멜리논이 다시 앞장서서 걸었다.
그때,
율리안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으아악!
‘귀 떨어지겠다.’
-혀, 형님, 저게 안 보여요?!
‘보인다.’
해골이었다.
벽에 기대 앉아 있었다.
이전에 ‘성왕의 무덤’에 들어왔던 자인 것 같았다.
멜리논이 해골을 가리켰다.
“이자는 120년 전 성검이라 불리던 자입니다. 이곳을 헤매다 굶어 죽었지요.”
멜리논은 해골 앞에 섰다.
“뭔가 이상한 점이 느껴지시나요?”
“이상하군.”
“무엇이 이상한가요?”
멜리논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그러고서 이내 표정을 풀며 웃었다.
“죄송합니다. 시험하려는 것은 아니나 최소한의 자격검증이라 생각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림자가 부자연스럽다.”
빈첸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그림자를 가리켰다.
빛을 받는 쪽으로 그림자가 생성되어 있었으며, 아까와 마찬가지로 그림자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이 해골의 그림자는 지극히 정상이군.”
빛을 받는 반대쪽에 그림자가 생성되어 있었다.
마치 바깥 세계처럼.
“비정상인 곳에서 정상이라는 건 분명 이상한 일이지.”
멜리논이 호오, 하고 짧게 감탄했다.
“눈썰미가 좋으시군요. 그렇지만 한 가지 놓치신 것이 있답니다.”
“그게 뭐지?”
멜리논은 해골 옆에 섰다.
“해골의 손가락을 봐주시겠습니까?”
해골은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지쳐 쓰러진 뒤 죽은 것만 같은 모양새였다.
“힘들어 죽어갈 때에, 우연히 이런 손가락 모양을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멜리논은 해골 옆에 앉아 재연해 보였다.
손가락을 쫙 펴고 손바닥으로 몸을 지탱한 상태가 되었다.
“이 해골은 여기서 굳이 이렇게 검지만 펴서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렇군.”
각도 자체도 자연스럽지 않았다.
“이 손가락이 바로 저희가 당신을 위하여 만들어 낸 이정표입니다. 역할을 다한 이정표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해골이 스르르- 무너져 내렸다.
이내 해골은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어차피 네가 안내해 줄 거라면 굳이 이정표가 필요 없는 것 아닌가?”
“성왕의 무덤은 살아 숨 쉬는 공간입니다. 길이 계속해서 바뀌기에, 저희도 이정표의 도움 없이는 길을 잃고 헤매게 되지요.”
한 해골을 가리켰다.
크기가 꽤 작았다.
어린아이의 해골 같았다.
“이 해골은 저희 아스비온 일족의 아이입니다. 길을 잃고 헤매다 이렇게 되었지요.”
멜리논은 작은 해골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잠시 묵념했다.
동족의 죽음을 기리는 것 같았다.
“오늘 당신을 만나게 되었으니 이 아이도 기쁘게 소멸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는 품 안에서 미리 준비했던 하얀 국화꽃 한 송이를 해골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해골이 스스로 움직였다.
-아아악! 해, 해골이 움직인다!
해골이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손가락에서는 붉은 빛이 새어 나왔다.
일자로 쏘아진 그 빛이 길을 가르쳐주었다.
“움직이죠.”
길목마다 해골이 배치되어 있었다.
집게손가락으로 길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500년 동안 이런 걸 유지해 왔다는 건가?”
“예. 이제 저희 사명도 끝나겠지만요.”
멜리논이 빙그레 웃었다.
“자유가 코앞에 있는듯하여 저도 몹시 설레는군요.”
멜리논의 웃음은 진짜였다.
그의 눈빛에서는 강렬한 열망 같은 것이 느껴졌다.
-진짜로 형님. 아니 우리를 위해서 준비된 곳이 맞나 봐요.
율리안은 율리안 나름대로 들떴다.
성배를 얻을 수만 있다면 상당한 양의 신기(神氣)를 축적할 수 있을 테니까.
“거의 다 온 것 같습니다.”
멜리논이 돌문에 손을 대었다.
그의 손이 쑥- 안쪽으로 들어갔다.
마치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함께 가시죠.”
멜리논이 뒤를 힐끗 바라보았다.
그의 눈이 가늘어져 있었다.
“이 결계만 넘어서면, 저희 일족의 영역이 존재합니다.”
“그곳에 성배가 있나?”
“예. 500년간 주인을 기다린 성배가 잠들어 있습니다.”
멜리논의 모습이 약간 변했다.
“놀라지 마십시오. 보금자리에 다가오니 제 본래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지.”
“양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람과 똑같았던 그의 피부가 검게 물들기 시작하더니, 이내 그림자처럼 변했다.
“따라오시지요.”
멜리논이 몇 걸음 앞으로 더 움직였다.
빈첸이 그 뒤를 따라 걸었다.
빈첸은 문득 무엇인가 생각난 듯했다.
“멜리논. 잠깐 확인할 것이 있어.”
“예?”
멜리논이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멜리논의 눈에 붉은색 검날이 보였다.
서걱!
멜리논의 몸이 반으로 갈라졌다.
멜리논의 몸을 가른 것은 빈첸의 홍련이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치지직-
빈첸의 검에는 뇌력거인의 힘인 미전류가 깃들어 있었다.
두 동강 난 멜리논의 몸이 바닥에서 꿈틀거렸다.
“피는 나지 않는군.”
빈첸이 검을 회수했다.
검에는 피가 단 한 방울도 묻어 있지 않았다.
그가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500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너희 영살자들의 특성이 무엇이었는지 잊어버린 모양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