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의 정석 57화
“그냥, 궁금해서.”
헤르카가 바르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사람 좋은 얼굴로 헤헤- 웃었다.
“그러지 말고, 가르쳐줘봐.”
“이유를 알려주십시오.”
“혹시 그거 기밀이야?”
“기밀은 아닙니다만…….”
바르곤은 말하고 싶었다.
총책임자 보고일지를 보면 당신 스스로도 충분히 알아낼 수 있는 정보인데요.
그러나 헤르카는 스스로 알아볼 생각은 별로 없는 듯했다.
“기밀 아니면 그냥 말해줘도 되잖아. 깐깐하게 굴지 말자.”
“생도에 별로 관심 없으시지 않습니까?”
“빈첸은 조금 달라.”
“어째서입니까?”
“사미온을 이겼잖아. 다른 이유가 있겠어?”
“왠지 헤르카 경이라면 있을 거 같습니다.”
그렇지만 바르곤은 결국 말을 해줄 수밖에 없었다.
기밀사항도 아니고, 총책임자가 물으면 부책임자는 대답해야 했다.
“아덴카 장로원입니다.”
“아이 참, 바르곤 말 다 알아 들었으면서 답답하게 구네.”
“…….”
“그니까 그 늙은이들 중에 누구냐니까?”
“말씀을 제발 좀 가려하십시오.”
“아, 그래그래. 위대한 장로님들 중 누구시냐고?”
“틸로반 장로입니다.”
“아. 걔.”
“누군지 아십니까?”
“알지. 무척이나 재수 없는 할아범이야.”
“하아.”
바르곤은 슬쩍 주변을 살폈다.
혹시라도 듣는 사람이 있으면 큰일이니까.
“바르곤, 나 휴가 좀 쓸게. 며칠 남은 거 있지?”
“갑자기요? 사유가 무엇입니까?”
“몸과 마음이 지쳐 버렸지 뭐야. 휴식이 필요해.”
“지나치게 건강해 보입니다만.”
헤르카는 콜록, 콜록 기침을 했다.
“아무래도 감기 걸렸나 봐.”
“8성을 목전에 둔 무인이 감기요?”
“휴가 중에는 연락하지 말고. 알겠지?”
“어디 가시는데요?”
바르곤은 워프하여 문 앞을 막아섰다.
그는 부책임자로서 총책임자의 행선지 정도는 알아야 했다.
“투르니콘.”
“거긴 왜요?”
그곳은 빈첸이 향하는 곳이었다.
“거기 생크림 케이크가 맛있다더라. 제철이래.”
바르곤은 참지 못하고 소리치고 말았다.
“개자식아! 생크림 케이크에 제철이 어디 있냐!”
이미 헤르카는 이 자리에 없었다.
오늘도 바르곤의 주름살이 하나 늘었다.
* * *
헤르카 때문에 몹시 피곤해진 바르곤은 약간 초췌한 안색으로 레이븐을 불렀다.
총책임자의 허락도 있었겠다, 발 빠르게 일을 진행시켰다.
“지금부터 레이븐 생도는 붉은 요새의 9급 생도이며, 나는 레이븐 생도를 생도로서 대할 것이다. 이전과는 많이 달라질 것이니 적응하도록.”
레이븐은 9급 생도복과 배지도 받아들었다.
그는 제복과 배지가 마음에 드는 듯 후후- 웃었다.
“훌륭한 생도가 되겠습니다.”
“아참, 그리고.”
바르곤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헤르카의 전언 때문이었다.
-빈첸을 만나고 싶어서 왔으니 빈첸과의 만남을 주선해 주자! 빈첸에게도 큰 자극과 도움이 되겠지?
-안 된다고? 에이. 그거야 빈첸에게 서신을 보내서 의사를 물어보면 되지. 왜 바르곤 경은 안 된다고만 생각해? 일단 서신을 보내보자니까?
그에 따라 지금은 서신을 보내놓은 상태였다.
바르곤이 물었다.
“빈첸 생도와 만나고 싶은가?”
“만날 수 있나요?”
레이븐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빈첸의 의사를 확인한 이후 가능할 것이다.”
“엄청 기대되는군요!”
논리적인 바르곤은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빈첸을 이기는 것과, 붉은 요새 입성에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인가?”
빈첸을 이기는 게 목표라고 했다.
그 말이 무슨 말인지는 알겠다.
레이븐의 원래 목표는 카곤 사미온이었고, 카곤보다 강해지는 것이 꿈이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빈첸이 카곤을 꺾었으니, 생도의 목표가 바뀐 것까지는 알겠다. 그런데 이게 붉은 요새 입성과 무슨 상관이 있지?”
“상관없나요?”
레이븐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상관없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렇지만 아무렴 어때요? 재미있을 것 같아요.
환청이 들리는 듯했다.
바르곤은 두 눈을 꿈뻑이며 레이븐을 바라보았다.
바르곤은 직감했다.
‘천성적으로 나랑 안 맞는 놈이다.’
집사가 크흠, 헛기침을 하고서 말했다.
“저희 공자님은 본래 카곤 공자와 함께 수련하고 싶어 하셨습니다만, 사미온 측에서 거절하였습니다. 반대로 붉은 요새는 입성을 허락해 주셨으니 저희 공자님에게는 여러모로 즐거운 일이 되었습니다. 입성을 허가하여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몇 시간 뒤.
매 한 마리가 창문을 두드렸다.
매의 다리에는 서신이 묶여 있었다.
빈첸으로부터 온 서신이었다.
[바르티칸의 레이븐이라면 저희에게도 큰 전력이 될 것입니다.]
레이븐은 차분한 태도로 바르곤의 말을 기다렸다.
“임무하달서 사본이다. 출발 전 꼼꼼히 확인해 보도록.”
“오, 감사합니다!”
9급 생도들과 인사를 나누기도 전에, 그는 곧바로 붉은 요새를 떠나 빈첸을 뒤쫓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루가 지났을 때 레이븐은 빈첸과 만날 수 있었다.
율리안이 레이븐을 먼저 알아보았다.
-오렌지색 머리카락. 쟤가 레이븐이에요. 그 뒤에는 레이븐의 집사인 세르쿤이고요. 레이븐은 쾌활한 바보니까 그렇다 치고, 세르쿤을 조심해야 해요. 전직 암살자거든요.
‘살수?’
-네. 20년 전에는 살왕(殺王)이라 불렸던 자예요. 지금 엄청 젊어 보이기는 하지만 저건 역용술이라는 걸 써서 그래요. 사실은 50살도 넘었어요.
‘그렇군.’
-아참, 그리고요, 쟤 창 들고 있는 거 보이죠?
‘마치 나와 싸우고 싶어서 안달인 난 것 같군.’
-맞아요. 다짜고짜 싸우자고 할 수도 있어요. 우리의 자웅을 겨뤄보자! 이러면서요.
‘그래.’
-태연하네요? 덤벼들 수도 있다니까요?
빈첸이 남몰래 씨익 웃었다.
-형님 웃음 변태 같아요. 뭘 꾸미고 있죠?
‘저렇게 솔직한 놈들이 편해. 호승심이 무척이나 강한 대신 한 번 패배했다고 인정하면 믿음직한 동료가 되기도 하지. 레이븐 정도의 능력이라면 이번 임무에도 꽤 도움이 될 테고.’
빈첸은 바르곤과는 시각이 완전히 달랐다.
‘나와 태생적으로 잘 맞는 놈일 것 같군.’
윌슨은 본능적으로 레이븐과 세르쿤을 알아보았다.
잘은 몰라도 무인이겠거니 싶어 은근슬쩍 빈첸의 뒤로 숨었다.
창을 들고 있는 레이븐의 기세는 자못 날카로웠다.
마치 들끓는 활화산 같았다.
“네가 빈첸이냐?”
“그런데?”
빈첸의 태도는 평소와 달리 상당히 도발적이었고 건방져 보였다.
레이븐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이름은 레이븐 바르티칸. 빈첸 아덴카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싫다.”
“뭐, 뭐라고?”
“싫다.”
“왜? 왜 싫은데?”
빈첸은 잠자코 창날을 바라보았다.
빈첸의 태도에 레이븐은 조금 당황한 듯했으나 이내 입을 열었다.
“빈첸. 검을 뽑아라.”
“싫다니까.”
빈첸은 대답하지 않고 레이븐을 스쳐 지나갔다.
레이븐의 몸이 움찔했다.
“…….”
“…….”
둘 사이에는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이미 빈첸은 저만치 앞서 걷고 있었다.
레이븐이 옆을 보았다.
세르쿤이 빙그레 웃었다.
“집사. 나 무시당한 거지?”
“그런 것 같군요.”
레이븐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나를 치욕스럽게 하다니 제법인걸.”
그가 마나를 담아 소리쳤다.
“상대를 앞에 두고, 비겁하게 도망치는 거냐!”
빈첸은 이후로도 한참을 무시하며 걸었다.
레이븐은 그 뒤를 쫓았다.
인적이 드문 골목길에 도착해서야 빈첸은 동을 돌려 임무하달서를 꺼내들었다.
“지금은 임무 수행 중이다, 레이븐. 내 임무를 방해할 셈이냐? 그 정도로 덜떨어진 생도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빈첸은 레이븐을 계속해서 자극했다.
레이븐은 자못 날카로운 기세를 내뿜으며 말했다.
“전에 우리는 만난 적이 있었다, 빈첸 아덴카.”
“그래?”
“그때에는 분명 겁쟁이에 소심이였어. 등신 같았지.”
“미안하다. 난 널 만난 게 기억이 안 나.”
그 말에 레이븐은 움찔했다.
기억이 없다는 말에 자존심이 좀 상한 모양이었다.
“기도가 바뀌긴 했어. 그건 인정한다. 그렇지만 카곤에게서 느껴지던 그 숨 막히는 기세는 없어. 도대체 카곤을 어떻게 이긴 거냐?”
“…….”
“역시 속임수였겠지?”
“그 자리에는 아덴카와 사미온을 대표하는 두 분께서 함께하셨다. 너는 그분들을 모욕하는 거냐?”
“그, 그건…….”
“나의 수준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는 네 안목을 탓하는 것이 옳았을 것이다. 덜떨어진 데다가 안목도 없군.”
레이븐의 얼굴이 조금 빨개졌다.
그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달려들었다.
“과연 검술실력도 말솜씨만큼 뛰어난지 증명해 보아라!”
레이븐이 지면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그의 움직임은 과연 빨랐고, 간결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빈첸은 반응하지 못한 것 같았다.
‘왜, 왜!’
반응하지 않은 것인지, 못한 것인지,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대로라면 진짜로 빈첸의 심장을 찌르게 생겼다.
그러나 창을 회수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여기서 창을 회수하여 창식을 거두면, 마력회로와 심상에 큰 충격이 온다.
‘젠장!’
창날이 심장에 닿는 그 순간까지도, 빈첸은 움직이지 않고 레이븐을 응시하기만 했다.
결국 그는 억지로 마나를 회수해야만 했다.
‘컥!’
레이븐은 가슴을 움켜쥐고 켁켁거렸다.
속이 좋지 않은 듯 우에엑- 하고 헛구역질도 했다.
어쩔 수 없었다.
심상에도 크게 무리가 왔다.
“우에에엑!”
세르쿤이 가만히 뒤에 서서 등을 토닥여주었다.
손은 레이븐의 등을 토닥이고 있었으나, 눈은 빈첸을 향했다.
“레이븐 공자. 빈첸 공자는 분명 반응하였습니다.”
“콜록, 그럼?”
“빈첸 공자의 눈이 제 손 끝을 향하고 있더군요. 심지어 가볍게 웃고 있었습니다.”
세르쿤이 빙그레 웃었다.
“아마도 제가 막아줄 것을 확신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비겁하게 집사의 뒤에 숨은 거군.”
“아닙니다. 상황을 객관적으로 살펴보고 있던 것이겠지요. 임무 중이지 않았습니까?”
임무 수행 시에는 무엇보다 임무 수행을 중시해야 한다.
그것이 최우선 가치다.
동료끼리 결투를 벌이는 것은 그리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다.
혹여 문제가 생길 소지가 있다면 세르쿤이 막아주어야 했다.
그것이 그에게 부여된 역할이었다.
‘재미있군요, 빈첸 공자.’
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눈과, 그 파악한 것을 실행에 옮기는 심장은 분명 다른 영역이었다.
창날이 눈앞에 다가오고 있는데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그리 흔치 않았다.
“첫 만남은 빈첸 공자의 승리로군요.”
“아직 나랑 싸우지 않았는데.”
“싸우지 않아도 승패가 결정될 때가 있는 법입니다.”
레이븐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그렇게 약 30여 초간 고민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내가 진 것 같아.”
그는 인정이 무척 빨랐다.
쾌활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졌다, 빈첸.”
레이븐이 손을 내밀었다.
“정식으로 소개하지. 내 이름은 레이븐 바르티칸. 오늘은 패배했지만 다음에는 이길 것이다. 어쨌든 지금은 임무 중이니 네 임무에 적극 협력할게!”
“빈첸. 아덴카의 7공자이며 붉은 요새의 9급 생도다.”
소란스러운 첫 만남 이후, 빈첸은 투르니콘을 향해 걸었다.
투르니콘은 붉은 요새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남쪽의 소규모 도시였다.
객실 하나를 빌려 짐을 풀고 휴식을 취했다.
“임무 끝나면, 나와 정식으로 겨루어줘.”
빈첸은 딱히 대답하지 않았다.
“내일 바로 변이 고블린을 찾을 거다. 체력을 비축 해둬.”
율리안이 핵심을 짚었다.
-형님, 일부러 대답 안 했죠? 더 안달 나라고? 처음에 도발하는 듯한 태도를 취했던 것도 일부러 그런 거죠? 말 재수 없게 한 것도 일부러 그런 거죠? 쟤 자극해서 덤벼들게 하려고?
‘…….’
-용병술이라고 해야 할지 어떨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효과는 장난 아니네요. 협력 의지가 활활 불타오르는 것 같아요. 저로서는 이해는 안 되지만요.
실제로 레이븐은 속으로 전의를 불태우는 중이었다.
빈첸에게 큰 도움이 되기로 작정하고 있었다.
‘패배했으니까 다음에는 반드시 좋은 모습을 보여 주겠다 빈첸! 그러면 너도 나를 라이벌로 인정하고 나와 싸워주겠지!’
율리안은 굳이 따지자면 바르곤과 비슷한 성향이었다.
그래서 레이븐 같은 유형의 사람을 대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빈첸이 레이븐을 대하는 것을 보며 큰 깨달음을 얻었다.
저런 류의 사람을 상대할 때에 논리 같은 건 별로 필요 없었다.
-쾌활한 바보는 이렇게 상대하는 거구나.
레이븐은 믿음직한 동료가 되어줄 것이 틀림없었다.
적어도 임무가 끝날 때까지는 말이다.
오후 7시.
1층에 마련된 식당으로 내려갔다.
빈첸과 윌슨.
레이븐과 세르쿤이 한 자리에 앉았다.
‘냄새다.’
빈첸의 후각에 무엇인가가 잡혔다.
‘잊혀지지 않는 냄새.’
500년이 지났지만 잊지 못한 냄새가 났다.
냄새를 들이마신 폐가 찌릿찌릿했다.
‘어째서 여기에 그 냄새가 나는가.’
사미온의 지하 감옥에서 나던 특유의 냄새가 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