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의 정석 37화
무인에게 있어서 명예란 고귀한 가치 중 하나였다.
그리고 ‘각명’은 대단히 명예로운 작업.
“각명작업을 아덴카 가주께서 해주신 다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데이아 공녀 때도 가주께서 직접 해주시지 않았어.”
칸이 대연무장의 단상에 오르기 직전까지도, 사실 여부에 논쟁이 붙었다.
그런데 정말로 칸이 모습을 드러냈다.
“맙소사. 진짜잖아.”
칸은 대연무장의 단상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붉은 요새의 총책임자인 헤르카가 보고를 올렸다.
“최소한의 경계병력과 파견 나간 인원들을 제외한 모든 생도와 교관이 집합하였습니다.”
1급부터 9급까지.
생도 전원이 붉은 요새의 대연무장에 도열했다.
그들은 모두 예의와 격식을 차린 제복을 입고 허리춤에는 의전용 검을 찼다.
대표생도들은 급을 증명하는 깃발을 들었다.
“1급 생도 총원 5명. 대표생도 헤나 아덴카 외 4명. 전원 도열하였습니다.”
1급 대표생도 헤나 아덴카.
그녀는 1급 대표생도이면서 아덴카의 3공녀이기도 했다.
헤나는 1급 생도를 대표하여 1급 생도를 증명하는 검은색 깃발(흑기)을 들었다.
흑기에는 아덴카를 상징하는 ‘태양’이 수놓아져 있었다.
그 뒤로 5명의 1급 생도가 엄숙한 표정으로 곧게 섰다.
“2급 생도 총원 8명. 대표생도 요한 아덴카 외 6명. 도열하였습니다.”
2급 대표생도 요한 아덴카.
그는 아덴카의 방계였으나 문무를 겸비한 뛰어난 실력으로 2급 대표생도의 자리까지 올랐다.
“3급 생도 총원 11명. 대표생도 시르카 베라올 외 8명. 도열하였습니다.”
“4급 생도 총원 13명. 4급 대표생도 베냐민 아덴카 외 9명. 도열하였습니다.”
“5급 생도 총원 15명. 대표생도 아벨 아덴카 외 11명. 도열하였습니다.”
아벨 아덴카는 아덴카의 4공자였다.
“6급 생도 총원 17명. 대표생도 시온 펠라투 외 12명. 도열하였습니다.”
“7급 생도 총원 19명. 대표생도 테라인 마바인 외 18명. 전원 도열하였습니다.”
“8급 생도 총원 20명. 대표생도 데미안 아덴카 외 19명. 전원 도열하였습니다.”
“9급 대표생도 총원 21명. 셀비라 외 19명. 도열하였습니다.”
1급. 7급. 8급.
생도 전원이 모였고,
2급. 3급. 4급. 5급. 6급. 9급.
생도의 대부분이 집합했다.
이곳에 모이지 못한 생도들은 각자 임무로 인하여 외부에 있거나, 9급 생도 시젠처럼 큰 부상을 입은 중상자뿐이었다.
사실상 모일 수 있는 모든 인원이 모인 것이었다.
칸이 빈첸을 호명했다.
“빈첸. 올라오거라.”
대표생도들이 깃발을 높이 들어 올렸다.
1급을 상징하는 흑색 깃발.
2급을 상징하는 적색 깃발.
3급을 상징하는 갈색 깃발.
4급을 상징하는 자색 깃발.
5급을 상징하는 청색 깃발.
6급을 상징하는 황색 깃발.
7급을 상징하는 백색 깃발.
7개의 깃발이 나부꼈다.
깃발이 부여되지 않은 8급과 9급 대표생도 둘은 의전용 검을 들어 올렸다.
빈첸은 그들을 지나쳐 걸었다.
9급 대표생도 셀비라가 검을 내렸다.
“온전한 명예에 겸손한 경의를.”
8급 대표생도 데미안도 검을 내렸다.
“온전한 명예에 겸손한 경의를.”
빈첸이 지나칠 때.
펄럭-
7급 대표생도 헬라인은 두 차례 깃발을 휘저은 뒤, 땅에 내리며 예를 표했다.
“온전한 명예에 겸손한 경의를.”
6급.
5급.
모두 마찬가지였다.
1급 대표생도.
헤나 역시 흑기를 두 차례 크게 흔든 뒤, 깃대를 땅에 내렸다.
“온전한 명예에 겸손한 경의를.”
빈첸은 모든 생도들의 시선을 담담히 받아내며 흔들리지 않고 걸었다.
빈첸은 단상 위로 올라서서 칸 앞에 섰다.
칸과 마주 보고 섰다.
“네 검을 다오.”
빈첸이 홍련을 꺼내 칸에게 건넸다.
칸이 그 검을 받아들었다.
칸의 시작을 함께 했던 홍련이, 다시금 칸의 손에 쥐어졌다.
“빈첸의 검으로 붉은 비석에 빈첸의 이름을 새기겠다.”
그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으나 생도들 전원에게 또렷하게 전달되었다.
칸이 한 획, 한 획 글자를 그리듯 검을 휘둘렀다.
막대한 검압이 일었다.
그러나 누구도 다치지 않았다.
단상 아래 저만치 멀리 있는 붉은 비석에 빈첸의 이름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한 글자, 한 글자, 천천히 그 이름이 완성되어갔다.
깃발을 가진 대표생도들이 있는 힘껏 깃발을 휘저었다.
[9급 생도. 빈첸 아덴카.]
그 이름이 새겨지자 생도 전원이 검을 높이 빼어 들었다.
대연무장에 은빛 물결이 새겨진 듯했다.
그들이 모두 말했다.
“온전한 명예에 겸손한 경의를.”
검을 갈무리한 뒤, 오른 주먹을 가슴팍에 올려 각명에 대한 예의를 취했다.
각명이 끝났다.
칸이 빈첸에게 홍련을 돌려주었다.
“이름에 부끄럽지 않도록 행동하라.”
“명심하겠습니다.”
빈첸의 눈에도 보였다.
붉은 비석에 새겨진 ‘빈첸 아덴카’라는 이름이.
“잊지 말아라. 네 이름이 빈첸 아덴카임을.”
“잊지 않겠습니다. 제 이름이 빈첸 아덴카임을.”
칸이 몸을 돌렸다.
* * *
셀비라와 9급 생도들은 생활관으로 돌아오며 수다 꽃을 피웠다.
셀비라의 얼굴이 약간 붉어져 있었다.
“가슴이 웅장해지는 느낌이었어.”
그 어떤 9급 생도가 상급 생도들에게 그러한 예와 존중을 받아보겠는가.
셀비라와 생도들은 생활관으로 돌아가 있는 힘껏 박수라도 쳐주겠다며 앞다투어 뛰어갔다.
“음?”
이렇게 큰일을 치르고 나면 같은 기수의 생도들에게 축하를 받으며 함께 시간을 즐기는 것이 보통이었다.
“없네?”
빈첸은 생활관에 없었다.
“어디 갔지?”
“글쎄. 화장실이라도 갔나?”
그러나 화장실을 간 것 같지는 않았다.
“설마 또 개인수련장에 간 거야?”
“에이, 설마. 방금 각명을 끝내고 돌아왔는데?”
그러나 그 설마가 맞았다.
생도들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허허- 웃고 말았다.
한편, 빈첸은 개인 수련장에 앉아 입을 열었다.
“다 울었냐?”
율리안과의 동조율이 많이 높아진 상태.
율리안이 적극적인 감정을 느끼면, 더욱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칸에게 이 말을 들었을 때 율리안의 감정은 폭발할 것처럼 증폭되었다.
[잊지 말아라. 네 이름이 빈첸 아덴카임을.]
그건 칸이 직접, 빈첸이 아덴카임을 인정하는 말이었다.
율리안은 펑펑 울었다.
비록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 마음은 분명히 느껴졌다.
-운 적 없거든요!
율리안은 훌쩍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누굴 울보로 아나.
빈첸은 피식 웃고 말았다.
가끔 보면 무서운데, 또 이럴 때 보면 어린아이가 맞는 것 같기도 했다.
율리안은 민망한지 화제를 돌렸다.
-9급에 각명이라니. 이러다가 진짜 ‘천과(天果)’를 얻는 거 아니에요?
‘얻어야지.’
강해질 것이다.
아덴카의 이름을 높일 것이고, 사미온을 넘어설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천과’는 반드시 필요했다.
이 몸을 회복시킬 수 있는, 지금으로서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었으니까.
‘아직 멀었으니 너무 흥분 마라.’
-흥분 안 했거든요. 근데 형님은 왜 그렇게 차분해요? 아버지께 각명을 받았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그리 대단한 걸 하지 않았으니까.’
각명은 분명 명예로운 작업이었다.
가주가 직접 나서 이름을 새겨주었다는 것도 영광스러운 일이 맞았다.
그러나 빈첸을 온전히 만족시켜주지는 못했다.
‘천과를 얻는다 해도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니 너무 호들갑 떨 필요 없지.’
율리안조차 혀를 내둘렀다.
동조율이 높아진 상태인지라, 빈첸의 말에 한 치의 거짓이 없다는 것도 느꼈다.
-저게 진심이라서 더 무서워.
빈첸은 오늘 보았던 상급 생도들을 떠올렸다.
사실 빈첸은 적잖은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특히 1급 대표생도 헤나 아덴카를 지날 때에는 가슴이 저릿했다.
‘일개 생도일 뿐인데. 그 기세가 몹시 예리했어.’
헤나 아덴카는 아덴카의 3공녀다.
물론 뛰어난 자질을 지니고 있었으나 2공녀의 명성에 비하면 아직 한참 모자랐다.
‘3공녀가 그 정도일 줄이야.’
2공녀는?
그리고 1공자는?
상급 생도들을 직접 마주한 빈첸은 새로운 세상이 있음을 느꼈다.
비록 과거와 길은 많이 달라졌을지라도, 언제나 극의에 이르는 자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빈첸이 느낀 몇몇은 극의를 향해 가는 올바른 길을 찾아낸 모양이었고.
빈첸이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런데 그 3공녀조차 사미온을 넘지 못했다고 했었지.”
-맞아요.
현세대의 직계들 중, ‘친선교류회’에서 사미온을 넘어선 직계는 2공녀 데이아가 유일했다.
그리고 ‘친선교류회’는 곧 빈첸에게 닥칠 미래이기도 했다.
사미온의 6공자 카곤과의 친선 대련이 코앞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빈첸은 사미온의 카곤에게 패배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사미온에게 패배하지 않을 것이다.”
빈첸은 눈을 감고 명상을 시작했다.
기쁘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이 흥분을 최대한 다스리며 수련에 힘썼다.
한 차례 마력자전이 끝났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한 번 더.’
집중력이 흐트러지기 전 한 번 더 명상을 하려 했다.
-형님, 잠깐만요!
수련을 할 때에는 어지간해서는 방해하지 않는 율리안이다.
빈첸이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왜?’
-이상해요. 형님이 마력을 자전시킬 때 홍련에 반응이 있어요.
‘홍련에?’
-무엇인가가 깜빡 깜빡거려요. 나타났다가 없어졌다가.
빈첸은 고개를 갸웃했다.
마력자전을 했는데 홍련에서 무엇인가가 생성된다니.
‘홍련 쪽에 집중해 보마.’
다시 한번 명상을 시작했다.
두 번의 명상으로 모든 것을 알아낼 수는 없었다.
여러 차례, 빈첸은 정신력이 완전히 고갈 나기 직전까지 명상했다.
‘알겠다.’
이제는 알 것 같았다.
홍련이 빈첸의 마나와 반응하면서 무엇인가를 만들어냈다.
‘가호야.’
그것은 가호였다.
‘이게 무슨 문양이지?’
세 개의 삐뚤빼뚤한 획.
지금은 보이지 않았으나, 명상을 할 때에는 잠깐잠깐 모습을 드러냈다.
-뇌력거인의 가호 같아요.
‘뇌력거인?’
뇌전계열 상급신.
바로 말론의 가호였다.
‘이게 왜 홍련에 깃들었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특성을 자극하여 가호를 만들어낸 것도 아니었다.
홍련에 가호가 새겨졌다.
-형님이 이능검격으로 말론을 베어내서 그런 게 아닐까요?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율리안은 잠시 생각하다 말을 이었다.
-형님은 이 힘을 어떻게 하길 바라요?
“온전히 얻어야지.”
-뇌력거인의 힘은 지나치게 파괴적이에요.
사실 ‘가호’의 등급만 놓고 보면 가히 최상급이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제대로 다룰 수 있는 인간이 많지 않다는 것.
그래서 다른 특성들과 비교하여 진행된 연구가 적었다.
말론이 다룰 수 있던 힘도 아주 일부분이었을 뿐이었다.
-형님은 그 위험하고 파괴적인 힘을 취하려 노력하겠죠?
‘내 눈앞에 보이는 것조차 얻지 못한다면 내가 무엇을 성취할 수 있겠느냐?’
율리안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예전 같았으면 ‘너무 위험해요, 다른 방도를 찾아보죠’라고 말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율리안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아무튼 야만적인 힘에 거부감이 없으시다니까.
‘말리고 싶으냐?’
-전혀요.
율리안은 빈첸을 말리지 않았다.
오늘 율리안은 모든 생도들 앞에서 ‘아덴카’로서 인정받았다.
율리안의 방식으로는 해내지 못했을 것을, 빈첸은 해냈다.
-저는 저만의 방식으로 대비하고 도울게요.
빈첸은 ‘뇌력거인’의 힘을 받아들여 보기로 했다.
인간이 받아들이기에는 지나치게 파괴적인 그 힘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