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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의 정석-36화 (36/184)

환생의 정석 36화

이능검격의 결이 그냥 보이는 것은 분명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분명 보였다.

벤다.

베지 않는다.

벤다.

베지 않는다.

지금은 ‘방어’에 치중해야 할 때다.

그는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를 확실히 구별했다고 생각했다.

최대한 적은 피해로 말론을 제압해야 했다.

‘그러나.’

고민은 길지 않았다.

‘벤다.’

진에서 이탈했다.

마나 흐름이 일시적으로 끊기면서, 빈첸을 지탱하던 몇몇 생도들이 휘청거렸다.

말론은 빈첸의 선택이 마음에 드는 듯했다.

“으하하핫! 덤벼라, 덤벼!”

뇌력이 가득 담긴 검을 휘둘렀다.

빈첸이 이를 악물었다.

‘검으로 검을 벤다.’

이능검격의 검로.

말론의 검에 그것이 보였다.

말론의 검에는 강력한 뇌기가 담겨 있었고, 빈첸의 홍련이 그 뇌기를 받아들였다.

‘큭.’

홍련의 검신을 타고 뇌기가 전해졌다.

그러나 빈첸은 검을 놓지 않았다.

‘한 번.’

한 번을 베었고,

“다시 한번 막아보아라.”

챙!

두 번을 베었다.

빈첸의 어깨가 너덜너덜해졌다.

익숙하지 않은 오른손으로 홍련을 옮겨 쥐었다.

“끝이다.”

챙!

세 번을 베었다.

뚝.

말론의 검이 반 토막 나서 땅으로 떨어졌다.

그러고서 먼지처럼 바스러지기 시작했다.

말론도 의외인 듯했다.

“응?”

그 황당함은 이내 고통으로 치환되었다.

“으아아아악!”

저번에 빈첸에게 당했던 오른 손목 부근이 문제였다.

검이 가루가 되어 사라진 것처럼, 그의 오른 손목 부근이 바스러지기 시작했다.

“빈첸, 네 이놈! 무슨 술수를 벌인 거냐!”

신체를 좀 먹는 벌레처럼.

오른 손목부터 시작된 잠식은 팔꿈치를 넘어 어깨까지 이어졌다.

빈첸은 이를 악물었다.

‘한 번 더 베어야 해.’

지금이 기회였다.

말론을 막아설 수 있는 기회.

‘젠장.’

그러나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말론에게 치명적인 부상을 입히기는 했으나, 빈첸도 몸이 완전히 굳어버렸다.

그리고 그때, 누군가가 워프로 모습을 드러냈다.

“Paralyse.”

마나의 파도가 밀려들었다.

그의 마법언이 형체를 갖추고 말론의 몸을 구속했고, 말론의 발목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붉은 요새의 부책임자 바르곤이었다.

셀비라를 비롯한 생도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후, 붉은 요새의 5성급 이상 상급 무인들이 속속들이 도착하면서 상황은 일단락되었다.

바르곤과 무인들은 말론을 무릎 꿇렸고, 마도공학 구속도구로 말론을 구속했다.

“심상을 봉인한다.”

바르곤이 심상 봉인 마법을 펼쳐 말론의 심상까지 봉인해 버렸다.

말론은 발악하며 저항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바르곤이 빈첸 앞에 섰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

빈첸은 대답하지 못했다.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바르곤은 빈첸의 상태를 눈치채고서 그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자세한 설명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네 모든 공적은 보고될 것이다.”

악령과 계약한 3성 무인.

게다가 생명력을 아낌없이 소모하여 힘을 뿜어낸 경우였다.

9급 생도들이 진을 짜서 버틸 수 있는 수준은 결코 아니었다.

‘빈첸이 크게 타격을 준 덕분에 쉽게 제압할 수 있던 거야.’

눈앞이 깜깜해지는 기분이었다.

‘빈첸이 없었다면 생도들은 몰살이었겠지.’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그가 대표생도 셀비라 앞에 섰다.

“보고 들은 모든 것을 말하라.”

“제 식견으로는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어요. 그렇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요.”

9급 생도들을 대표하는 ‘대표 생도’는 셀비라다.

“저희들의 대표는 빈첸이었어요.”

빈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이들에게 힘이 되어 주었다.

새로운 세계를 경험한 셀비라는 오늘, 완전히 빈첸의 편에 서기로 결심했다.

“저 셀비라는 대표생도로서의 모든 권한과 책무를 내려놓고 일반생도로 돌아가려 합니다.”

“이유는?”

“빈첸을 보고 저는 제 자격과 자질을 의심하게 됐어요.”

빈첸을 향해 말했다.

“전직 대표생도로서, 동료인 빈첸에게 깊은 감사와 존경을 표합니다. 빈첸이 없었다면 저희는 몰살당했을 것이 틀림없어요.”

* * *

붉은 요새의 총책임자 헤르카는 인상을 찡그렸다.

“으, 귀찮게 됐네.”

그녀는 곧바로 가볍게 짐을 챙겨 아덴카 본가로 향했다.

새벽 일찍, 그녀는 칸을 찾았다.

“오라버니. 오랜만이에요.”

“직접 온 걸 보면 붉은 요새에 큰일이 있었나 보군.”

“네. 들으면 좀 놀라실 텐데. 놀랄 준비 됐죠?”

헤르카는 지난 일들에 대하여 설명했다.

말론이 악령에게 잠식되어 반쯤 폐인이 되었다는 소식에 칸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데 신기한 건 안 죽었다는 거예요.”

악령과 계약한 자는 죽는다.

‘대악마 데이븐’에게 영혼을 판 대가로, 본인의 목숨을 바쳐야 했다.

그러나 말론은 죽지 않았다.

“오른 손목을 잃었고, 저항하는 과정에서 심상이 모두 파괴되었지만 죽지는 않았어요. 뭐랄까, 악령만 베었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악령과의 계약만 끊어냈다고 해야 할까? 하여튼 특이했어요.”

“……그렇군.”

“별로 안 놀라시네요?”

칸은 딱히 대꾸하지 않았다.

“피해는?”

칸은 아들의 상태에 대해서는 그리 궁금하지 않은 듯했다.

아무튼 차가운 사람이라니까.

헤르카는 어깨를 으쓱하고서 말을 이었다.

“보고 올리겠습니다. 사망 1명. 말론을 제외한 중상해 1명인데요. 그날 당직을 서던 5성 무인 브론드가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시젠이라는 9급생도의 양쪽 팔이 전부 잘렸어요.”

그나마 다행인 건,

“빈첸 공자에게 가이아 신전 3급 신관 명패가 있더라고요.”

슬쩍 칸의 눈치를 살폈다.

칸은 이마저도 이미 알고 있는 듯한 눈치였다.

“그래서 곧바로 신전으로 보냈어요. 바르곤 경이 응급처치를 해놓기는 했는데 완전히 치료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그렇군.”

“어떻게 종결할까요?”

“5성 무인 브론드는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르도록 하고, 그의 가문에게는 충분히 합당한 수준의 보상을 지급한다. 9급 생도 시젠의 회복에 본가는 전력을 다해 도와야 할 것이며 향후 시젠에게 물질적 지원이 필요할 시 아끼지 않고 지원하도록 한다.”

헤르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아는 칸이라면 이렇게 할 줄 알았다.

“또한 말론은 평생 동안 본가의 담장을 넘지 못할 것이다. 팔과 다리의 힘줄을 자르고 심상을 파괴하여 유폐한다.”

평생 가문 내에 감금된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이 남았다.

“빈첸의 공로를 인정하여 1,000만 루덴의 포상을 내리며 붉은 비석에 그 공로를 새기도록 한다.”

“각명(刻名)을 하시겠다고요? 벌써요?”

붉은 비석에 이름을 새기는 것.

그것을 붉은 요새에서는 ‘각명’이라 부른다.

헤르카는 눈을 크게 떴다.

“9급인데 붉은 비석에 이름을 새긴 애는 데이아밖에 없는 거…… 기억하시죠?”

칸은 그에 대한 대답 대신 다른 대답을 했다.

“3일 뒤. 내가 직접 각명하겠다.”

* * *

시젠은 들것에 실린 상태로 이동 관문으로 후송되었다.

양팔이 잘리고서 시간이 꽤 지체되어 고위급 신관에게 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마저도 완쾌가 가능할지 미지수인 상황.

“잠시만요.”

들것에 누워 있던 시젠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생도들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빈첸에게 할 말이 있습니다.”

빈첸 역시 몸이 정상은 아니었다.

말론을 상대하며 지나치게 무리했고, 지금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빈첸은 시젠에게 가까이 걸어갔다.

시젠이 곧바로 입을 열었다.

“고맙다, 빈첸.”

신관으로 후송될 수 있는 것은 빈첸이 가지고 있는 ‘명패’ 덕분이었다.

명패가 없었다면 이렇게 후한 응급치유는 받지 못했을 것이다.

“고맙다는 말은 완전히 회복된 이후 돌아와서 해도 늦지 않을 것 같군.”

시젠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무언가 할 말이 있는지 머뭇거렸다.

상급 무인 중 하나가 다급히 말했다.

“생도. 시간이 귀하다. 빨리 이동해야 해.”

“하나만, 하나만 묻고 싶습니다.”

시젠이 빈첸을 눈을 바라보았다.

“네가 보기에 나는 어땠지? 부끄럽지는 않았나?”

말론을 제대로 막지 못했다.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할 수 있었던 거라곤 그저 검을 들어 올리는 것뿐이었다.

그 결과 양팔을 잃었다.

“너는 충분히 뛰어난 무인이었다.”

빈첸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두려움에 도망치지 않고 맞섰다.

시젠은 시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

시젠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빈첸이 해주는 저 말이 듣고 싶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꼭 돌아와서, 네 뒤를 따르겠다.”

빈첸에게서 희망을 보았다.

예전에는 막연히 강해지고 싶다라는 생각을 했었다.

내가 강했더라면, 말론에게 지배당하지 않을 수 있을 텐데.

그렇게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눈에 보이는 분명한 목표가 생겼다.

그는 빈첸처럼 되고 싶었다.

목표가 생긴 그의 눈에는 생기가 가득했다.

“고맙다, 빈첸.”

그는 그대로 기절했고 신전으로 후송되었다.

* * *

하루가 지났다.

9급 생활관에 한바탕 난리가 일었다.

가장 먼저 소식을 접한 사람은 셀비라였다.

“붉은 비석에 네 이름을 새긴대!”

붉은 비석.

그것은 ‘붉은 요새’에 존재하는 거대한 비석이었다.

태양검제 아슬란이 세웠다고 알려지는 이 비석에는, 뛰어난 공로를 세운 생도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각명은 누가 해주실까?”

각명은 당대의 뛰어난 무인이 해주는 것이 관례였다.

빈첸의 각명을 누가 해줄 것인가.

그것은 커다란 이슈가 되었다.

“누가 해주시든 무슨 상관이람! 9급에 각명이라니. 수십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야. 축하해!”

셀비라는 마치 제가 포상을 받은 것처럼 기뻐하며 빈첸을 와락 끌어안았다.

“좀 놔주면 좋겠는데.”

“아, 미안. 나도 모르게. 헤헤.”

셀비라는 빈첸에게서 멀어졌다.

그리고 다시 두 걸음 물러서서 볼을 살살 긁었다.

셀비라의 귀가 약간 붉어져 있었다.

빈첸이 차갑게 말했다.

“암습인 줄 알고 반격할 뻔했다. 무인을 그토록 무방비하게 안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모르는 건가?”

“미, 미안.”

셀비라는 개인 수련실로 들어와 허공에 여러 번 주먹질을 했다.

저도 모르게 빈첸을 안았던 장면이 떠올랐다.

차디찬 얼굴로 타박하던 빈첸의 얼굴도 기억났다.

“으, 쪽팔려!”

분명 빈첸을 안을 때까지는 그냥 순수한 기쁨과 호의의 표현이었다.

“너무너무너무너무 쪽팔리다!”

창피한 것도 창피한 건데.

빈첸의 품이 굉장히 넓었다는 것도 기억이 났다.

단단하게 단련된 무인의 몸이었다.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얼굴이 붉어졌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람.’

그녀는 크게 심호흡한 뒤 자리에 앉았다.

“명상이나 해야겠다.”

그녀는 한동안 명상에 집중하지 못했다.

그리고 다시 하루가 흘렀다.

빈첸 아덴카의 이름을 새겨줄 사람이 누구인지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아직까지는 대표생도의 신분을 유지하고 있는 셀비라가, 이번에도 가장 먼저 그 소식을 접했다.

“말도 안 돼.”

그녀의 손발이 바들바들 떨렸다.

“가주께서 직접 오신다고?”

그 소문은 9급 생도들 사이에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너무 놀라운 일이어서 사실이냐, 아니냐를 두고 설전이 오갈 정도였다.

다음 날.

아덴카의 가주 칸이 붉은 요새를 찾았고, 생도 전원이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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