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의 정석 34화
세리는 마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세리가 바빠진 만큼, 윌슨이 세리의 일을 조금씩 배웠다.
“고마워, 윌슨.”
“나중에 마법사로 성공해도 나 잊으면 안 돼, 누나. 알지?”
윌슨은 요즘 일이 너무 힘들다고 느꼈다.
세리가 무조건 손빨래를 하라고 가르쳤기 때문이었다.
그래야 옷감이 덜 상하고 품위가 유지된다나 뭐라나.
“근데 누나는 몸이 열 개쯤 됐던 거야?”
해보니까 알겠다.
그간 세리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무슨 말이야?”
“누나가 하는 일 너무 힘든데? 이걸 매일 참고 다 했단 말이야?”
세리가 고개를 갸웃했다.
“힘들어? 뭐가?”
“어…… 아냐…… 아무것도.”
윌슨은 환청이 들리는 듯했다.
-우리 공자님을 위해서 하는 일인데 뭐가 힘들어? 기쁘고 재미있지.
윌슨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벅- 벅-
빨래를 하고,
탁- 탁
물기를 털었다.
빨랫감들을 햇빛에 잘 말렸다.
“아니, 이놈의 공자님은 하루에 수련을 얼마나 하는 거야? 옷을 빨아도 빨아도 계속 빨래가 생기네.”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버릇이 고약하구나.”
“으, 으잉?”
윌슨이 아는 얼굴이었다.
“레, 레반 아덴카 공자님?”
철인 특성을 가진 아덴카의 방계.
레반 아덴카였다.
“빈첸은 어디 있지?”
“아마 개인 수련실에 있을 겁니다요, 안내할까요?”
“그래.”
빈첸과 레반이 만났다.
빈첸으로서도 약간 의외였다.
레반이 이곳을 찾아올 줄이야.
“본가에서 수련한다고 하지 않았나?”
“네가 부탁한 것에 대한 단서를 조금 알아낸 것 같아서.”
히슬리가에 대해서 좀 알아달라고 부탁했다.
“벌써 알아냈다고?”
아마도 ‘어떤 세력’이 작정하고 히슬리가에 대한 기록을 모두 지웠다.
아무리 지방에서는 강력한 힘을 행사하는 아덴카의 방계라고는 해도.
벌써 그 기록이나 단서를 찾기는 어려웠을 텐데.
“그러게. 참 이상한 일이지. 우리 가문에 비밀서재가 있더군.”
레반은 비밀을 밝히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빈첸에게 충성을 맹세하였으니, 비밀을 갖지 않기로 했다.
“비밀서재?”
레반은 잠시 눈을 감았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머릿속으로 정리한 뒤 입을 열었다.
“우리 집안이 내게 모든 기대를 걸었던 건 기억하고 있겠지?”
레반은 소인왕의 가호를 가졌고 철인 특성을 지녔다.
꽤 준수한 편이었으나 아덴카의 방계로서 기대를 걸기에는 다소 부족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집안은 레반에게 많은 것을 기대했다.
“너도 알겠지만 나의 가문은 아덴카의 혈족이지만, 아덴카로서의 능력은 갖춘 사람은 거의 없었어.”
빈첸이 처음 빙의했을 때 만난 사람이 레반의 아버지였다.
아덴카로서의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말을 단박에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가문은 뛰어난 무가로 성장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생존방식과 그들의 역할을 전승해 왔다.
“나의 가문은 무가로 발돋움 하는 대신, 많은 것들을 기록해 왔고 보관해 왔어. 그것이 우리의 가업이었지.”
“그것이 가업이었다?”
율리안에게 물었다.
‘이런 게 있었어?’
-전혀 몰랐어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에요.
율리안은 자신이 이러한 내용을 전혀 알지 못했다는 것이 조금 분한 것 같았다.
레반이 말을 이었다.
“아이러니한 일이지.”
레반에게 ‘무인으로서의 기대’를 하고 있을 때.
가주는 그에게 가업에 대해 비밀로 하였다.
빈첸에게 대패하고 ‘무인으로서의 기대’를 접게 되었을 때.
가주는 그에게 가업에 대해 알렸다.
“아무튼 히슬리가에 대한 기록도 남아 있었어.”
빈첸이 말해준 것도 아닌데, 그가 한 마디를 더했다.
“덧붙여 마력체라는 것도. 이 모든 내용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야 한다는 조항이 있기는 한데.”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이미 네게 충성을 맹세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율리안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여지껏 몰랐으면 몰랐으되, 곧바로 퍼즐을 끼워 맞추기 시작했다.
-저런 가문이 하나는 아닐 거예요.
아덴카에는 수많은 방계들이 있다.
그들 모두가 무가(武家)를 꿈꾸지만, 모두가 강력한 무가가 될 수는 없었다.
레반의 가문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방계들이 여럿 존재할 것이었다.
-모든 기록이 사라진 게 아니었네요!
기록은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뿔뿔이 흩어져 의도적으로 숨겨져 있던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기록을 모른 채.
‘잊혀진 역사를 기록하는 방계들이 존재한다라.’
500년 전.
태양검제 아슬란이 ‘붉은 요새’를 만들었다.
‘생도들을 하나로 규합하고 그들의 지지를 받아 세력을 형성하는 것. 그것이 500년 전부터 붉은 요새의 중요한 요소였다고 했지?’
-맞아요. 전통적으로 그랬어요.
500년 전.
외팔이 데이븐이 살았던 그 시대에 이러한 정치력은 그리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분명 이상한 일이었다.
‘그래서 초대가주가 붉은 요새를 만든 것인가.’
잊혀진 역사를 기록하는 방계가 존재한다.
이것 외에 다른 역할을 맡은 방계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방계들의 후계자들과 이곳에서 친분을 나눌 수 있었다.
‘이를 위한 전통이었나.’
방계들을 규합하여 그들로부터 더 많은 것들을 획득하라.
붉은 요새에 숨겨진 직계의 지상명령인 것 같았다.
* * *
9급 생도들의 제왕이었던 말론은 오늘도 결투에서 패배했다.
“파르몬의 승리다.”
“…….”
생도들은 말론의 패배에 더 이상 환호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말론은 벌써 6번이나 결투에서 패배했기 때문이었다.
오늘도 결투에서 패배한 말론을 보며 빈첸은 등을 돌렸다.
‘결국 너의 그릇은 그 정도인 거지.’
이들은 아직 완숙한 경지의 무인이 아니다.
기세와 자신감이 곧 승패로 직결되는 경우가 아주 많았다.
‘네가 그렇게까지 형편없는 무인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만.’
그래도 말론은 아덴카의 직계였다.
칸의 피는 어디가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 9급 생도인 파르몬에게도 패배한 것은, 실력 부족이 아니라 자신감의 부재에서 온 결과였다.
‘결과적으로 형편없게 되었구나.’
9급 생도들의 세력구도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아직까지 공식적인 것은 아니었으나 빈첸은 새로운 대표생도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공식적으로 대표생도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기존 대표생도 중 한 명이었던 셀비라는 빈첸에게 우호적이었으니, 셀비라와 빈첸을 중심으로 하여 9급 생도들이 하나로 통합되기 시작했다.
그날 저녁.
말론이 빈첸을 찾아왔다.
5생활관의 그 누구도, 말론을 보고 벌떡 일어나 차렷자세를 취하지 않았다.
말론은 입술을 깨물었다.
“빈첸. 할 말이 있다.”
“해.”
말론은 주변을 살펴보았다.
당장에라도 생도들을 윽박질러 내쫓고 싶었으나 이제는 그 방법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잠시만 자리들을 좀 비켜주면 안 될까?”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생도들은 더 이상 말론을 보지 않았다.
그들의 눈은 이제 빈첸을 향했다.
빈첸의 허락을 구하고 있었다.
빈첸이 입을 열었다.
“내가 나가지.”
빈첸이 침상에서 내려왔다.
앞장서서 걸어 공터로 향했다.
생활관에서는 제법 멀어졌다.
-쟤가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고 저렇게 폼을 잡을까요?
생활관 내에 소식이 퍼졌는지, 창문 쪽에서 생도들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말론은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빈첸.”
말론의 주먹이 바들바들 떨렸다.
어찌 보면 분노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주먹에서 시작된 떨림은 이내 팔을 타고 넘어갔다.
몸 전체가 요동쳤다.
시간이 꽤 흘렀건만 말론은 말을 하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말론이 입술을 깨물었다.
주먹을 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그는 태어나서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던 행동을 하려니 마음이 영 거북했다.
털썩.
그가 무릎을 꿇었다.
“내게도 가르쳐다오.”
창문 쪽에서 지켜보던 생도들을 허어- 하고 탄식했다.
말론이 저런 모습을 보일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무엇을?”
“생도들이 나를 이길 수 있던 방법을, 네가 가르쳐주었다고 들었다.”
빈첸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론을 바라보았다.
“나는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어.”
그들이 스스로 두려움을 극복했을 뿐이었다.
그에 반해 말론은 스스로를 위축시켰을 뿐이고.
“거짓말.”
“그렇게 믿어도 상관은 없다만.”
“그럴 리 없다. 제발 가르쳐줘. 네 비법이 아니었다면 그 등신 같은 놈들이 어떻게 이렇게 강해졌겠어?”
“…….”
빈첸은 말론에게 실망감을 감추지 않고 말했다.
“할 말은 그것뿐이냐?”
“…….”
아까운 시간만 허비했군.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돌리던 찰나.
말론이 외쳤다.
“분명! 비법이 있잖아!”
그의 눈에서 커다란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알려달라고!”
“…….”
“제발 방법을 가르쳐줘. 뭘 주면 가르쳐줄 거냐? 원하는 걸 말해봐.”
그는 눈물을 훔쳐내고서 솔직히 말을 이었다.
“나도 너처럼 되고 싶다.”
“나처럼 되는 게 어떤 건데?”
“모자란 재능을 극복하여 높이 성장하는 거지.”
“…….”
말론의 눈에 희망의 빛이 서렸다.
“가르쳐줄 것이냐?”
“…….”
“우린 피를 나눈 형제가 아니냐? 부탁이다.”
빈첸이 한숨을 내쉬었다.
모양새를 보아하니 과거의 행동은 별로 반성하지 않았다.
그저 빈첸처럼 되고 싶을 뿐이었다.
‘아주 한심하기 짝이 없는 놈이구나.’
말론은 과거를 바로잡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놓쳤다.
과거의 잘못에 대한 진지한 사과나 반성도 없이, 자신의 이득만을 탐하는 놈을 가까이 둘 생각은 없었다.
“한심한 놈.”
빈첸은 몸을 돌리고 생활관 쪽으로 걸어갔다.
네가 내게 가장 먼저 했어야 할 말은 진심 어린 사과였다.
그 말은 해주지 않았다.
그럴 가치조차 없었으므로.
“빈첸!”
“…….”
빈첸은 대답하지 않았다.
말론은 그 자리에서 한참이나 빈첸을 부르짖다가 주먹을 꽉 쥐었다.
‘개 같은 놈이!’
내가 이토록 저자세를 보였는데, 그런데 나를 이토록 무시해.
그도 생활관에 들어왔으나 분해서 잠이 오질 않았다.
깊은 밤.
말론은 목소리를 들었다.
-힘을 원하나?
말론은 눈을 번쩍 뜨고 주변을 둘러봤다.
드르렁- 쿨.
생도들이 코를 고는 소리만 들려왔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뭐지?’
다시금 잠을 청했으나 또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힘을 원하나?
그 목소리는 말론의 가슴 속 깊은 곳에 묵혀놓은 분노를 건드렸다.
-죽이고 싶은가?
말론은 이 목소리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이 목소리는 분명히 ‘악령’의 것이었다.
-원한다면 힘을 주겠다. 널 나락으로 빠뜨린 모든 것들을 죽이게 해주겠다.
500년 전.
영웅왕 카진과 동료들이 대악마 데이븐을 토벌했다.
이후 데이븐의 사악한 영혼은 작게 조각나 세계 곳곳에 뿌려졌다고 전해진다.
그 조각에서 태어난 것이 바로 ‘악령’이었고, 현대의 무인들이 크게 조심하는 것들 중 하나였다.
‘악령은 내게 큰 힘을 줄 거야.’
대악마 데이븐이 남긴 사념답게.
악령은 계약자에게 어마어마한 힘을 선사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계약자의 정신을 파먹는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사미온을 필두로 한 세계의 명가들은 ‘악령과의 계약’을 절대 금하고 있다.
-계약하겠는가?
그 날은 달까지 구름에 가려져 유독 어두운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