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의 정석 33화
빈첸이 말을 이었다.
“제가 왜 바르곤 경을 조롱한단 말입니까?”
“그러면?”
“그동안 단 한 번도 마탑과 가족들을 비방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들을 비방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뿐이다.”
“그 정도면 이름을 바꿀 법도 한데, 이름도 안 바꾸셨고요.”
“귀찮았을 뿐이지.”
“행적을 살펴보니 6마탑 주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율리안은 ‘바르곤’이라는 사람을 이렇게 정의했다.
버림받았으나, 버리지는 못할 사람.
바르곤이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나에 대해 많은 것을 조사한 것 같군.”
“조사만 한 건 아닙니다.”
“무슨 뜻이지?”
빈첸이 잠시 침묵했다.
“바르곤 경에게서 저를 보았습니다.”
“…….”
바르곤은 순간 말을 하지 못했다.
바르곤 스스로가 느꼈던 그 감정을, 빈첸도 똑같이 느낀 모양이었다.
“저도 긴 세월 동안 상처를 받아왔으니까요.”
데이븐은 누구보다 바르곤의 마음을 잘 알았다.
부모에게 배신당해 감옥에서 썩어갈 때조차도 그랬다.
“물론 밉고 원망스러울 때가 훨씬 많았습니다.”
그러나 가족이라는 것.
피로 이어져 있다는 것은 ‘미움’이라는 한 단어로 정의내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미운 가족들에게 인정받고 싶었고, 그래서 그는 처절하게 노력했다.
이중적인 마음에 늘 고통스러워했었다.
“그러나 마냥 증오하기만 할 수는 없더군요.”
바르곤도 그랬다.
그냥 끊어내면 그만인 것을.
머리는 그렇게 생각했으나 마음이 그렇게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서 천륜이라 불리나 봅니다.”
“…….”
바르곤은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도 ‘못난이 빈첸’이 천재들의 가문에서 얼마나 힘겹게 성장했을지 대충은 느낄 수 있었다.
“어린 나이에 맘고생이 심했겠군.”
바르곤은 빈첸과 대화하면서 답을 내릴 수 있었다.
빈첸이 가르쳐준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이미 알고 있던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래. 그것이 천륜이겠지.’
사실 그는 누이인 바르넬리를 동경했었다.
동경하는 만큼 좋아하기도 했다.
그것을 순순히 인정했다.
빈첸같은 꼬마도 하는 것을, 자신이 못하면 꼴이 우습지 않은가.
“내게 경례하는 모습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지금은 바르곤 경이 제 상급자이기 때문입니다.”
바르곤은 피식 웃고 말았다.
“네가 상급자가 되면 나도 그렇게 하라는 얘기로 들리는데?”
“그런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바르곤은 하핫! 웃음을 터뜨렸다.
빈첸과 대화를 나눈 후 바르곤은 마음을 정확히 정할 수 있었다.
‘나는 빈첸이 진심으로 마음에 든다.’
자신과 같은 처지인 이 아이를 후원하기로 했다.
자신은 결국 피지 못했으나 이 소년은 활짝 필 수도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이 샘솟았다.
마음을 확정했다.
바르곤도 사실 빈첸에게 정말 하고 싶은 얘기가 하나 있었다.
“그런데 말이다. 네 시녀 말인데.”
“왜 그러십니까?”
“5급신관의 신성력을 튕겨내더군.”
율리안조차 예측하지 못했던 변수였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마법을 익히기에 더없이 좋은 신체라는 뜻이지. 신성력을 튕겨낸다 하여 반발체라 부른다. 그걸 몰랐느냐?”
“……몰랐습니다.”
“뭐, 모를 수도 있지. 네가 허락한다면 그 아이에게 마법을 좀 가르쳐볼까 하는데.”
“제 허락이 필요한 일은 아닌 것 같군요.”
세리가 마법을 익히기에 좋은 체질이라는 사실은 분명 놀라웠다.
그러나 그것이 꼭 세리가 마법을 익혀야 하는 이유는 되지 않았다.
“그럼 무엇이 필요하느냐?”
“세리의 의지겠지요.”
세리가 원한다면,
마법을 배우고 싶다면,
빈첸은 세리를 말리지 않을 것이다.
“알다가도 모를 놈이군. 비록 내가 마탑 마법사는 아니지만 탑 외 마법사들 중에는 꽤 실력 있는 축이라는 건 알고 있겠지?”
보통은 시녀를 윽박질러서라도 마법을 배우도록 만들 것이다.
“물론입니다.”
“근데 왜 이 좋은 기회를 마다하는 것이냐?”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세리에게 선택권을 주려는 것입니다.”
* * *
바르곤과의 개인면담을 끝낸 뒤, 빈첸은 5생활관으로 돌아왔다.
짝! 짝! 짝!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가 일렬로 서서 박수를 치고 있었다.
‘이건 또…….’
빈첸은 약간 황당했다.
박수갈채를 받을 줄이야.
한바탕 소동이 끝난 뒤 조금 쉬려 했는데 셀비라가 찾아왔다.
“빈첸.”
셀비라는 등 뒤에 무엇인가를 숨기고 있었다.
그 모양새가 상당히 수상쩍었다.
빈첸은 본능적으로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암습?’
율리안이 소리를 빼액 질렀다.
-아니, 이 타이밍에 암습은 무슨 암습!
모든 걸 본능적으로 읽어내는 빈첸의 육감에도 허점은 있었다.
그가 경험해 보지 못한 세계에 관해서는 직감이 틀릴 때가 많았다.
-꽃이잖아요!
당연하게도,
암습은 아니었다.
“선물이야. 예뻐서 가져왔어.”
이름을 알 수 없는 꽃 한 송이였다.
“꽃말이 두려움을 극복하는 용기래.”
“……이걸 왜 주는 거지?”
빈첸의 입장에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네가 생도들의 두려움을 극복하게 해주었잖아. 나는 대표생도로서 너한테 감사를 표하려 한 거야.”
“…….”
빈첸은 꽃을 받아 들었다.
먹지도 못하고 마시지도 못하며 그렇다고 수련에 도움도 안 되는 선물.
이걸 과연 선물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만 그래도 악의는 없는 것 같아서 받아들었다.
셀비라가 헤- 웃었다.
‘가까이서 보니까 더 잘생긴 것 같네.’
반쯤 사심을 담아 물었다.
“혹시 교제하는 사람이 있어?”
“꽤 있는 편이지.”
시녀 세리.
시종 윌슨.
충성을 맹세한 레반.
야장 한센.
시종장 레일사.
5성 무인 제론까지.
꽤 많은 이들과 교제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응? 꽤 있다고?”
빈첸이 고개를 끄덕이자 셀비라가 가볍게 웃고 말았다.
‘벌써 나를 밀어내는 거야?’
그녀의 눈에 묘한 승부욕이 생기기 시작했다.
* * *
마법을 배우겠냐는 질문에 세리는 전에 없는 열정을 보여주었다.
“할게요. 하고 싶어요. 꼭 배우게 해주세요!”
“억지로 배울 필요는 없어.”
“아니에요. 꼭 배우고 싶어요.”
“네가 원한다면 그렇게 하도록 해.”
“감사합니다!”
마법을 배울 수 있다는 사실에 세리는 크게 기뻐했다.
그렇지만 그녀에게는 현실적인 문제들도 있었다.
“그런데…… 저…….”
마법은 아무나 배울 수 없다.
기본적으로 천문학적인 교습비가 들어간다.
바르곤에게 배울 수 있으니 그건 문제가 아니었으나, 마법을 익히는데 필요한 부자재나 교재들은 세리의 봉급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걱정 마. 바르곤 경이 비용 걱정은 하지 말라 했으니.”
세리는 뛸 듯이 기뻤다.
“저, 꼭 열심히 해서요, 공자님께 도움이 되는 시녀가 될래요.”
“지금도 충분히 도움이 되고 있어.”
그 짧은 시간 안에 제복을 다려온 것도 세리의 실력이었고, 거기에도 꼼꼼하게 하얀 배지를 달아놓은 사람도 세리였다.
세리는 일상생활에서 빈첸이 불편하지 않도록 세심하게 모든 것을 살폈다.
빈첸은 세리에게 진심으로 감사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도 더 소중한 사람이 되고 싶은 걸요.”
저 맹목적인 사랑에 빈첸은 괜스레 머쓱해졌다.
‘이미 소중한 사람이다’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빈첸은 몸을 돌려 생활관으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셀비라가 세리를 찾아왔다.
“안녕, 세리. 나는 셀비라라고 해. 9급 대표생도야.”
“안녕하세요. 빈첸 공자님의 직속시녀 세리입니다.”
셀비라는 흐음, 하고 잠시 뜸을 들였다.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얘기할게.”
“저도 그게 편하답니다.”
“어떻게 하면 빈첸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까? 도통 빈첸을 모르겠어.”
세리가 빙그레 웃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너는 빈첸에게 엄청난 신뢰를 받고 있잖아.”
“저는 그저 공자님께 도움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랍니다.”
“도움이 된다라.”
셀비라는 또 흐응, 소리를 내며 턱을 매만졌다.
“알겠어. 조언 고마워.”
도움이 되란 말이지.
지극히 이성적인 녀석이네.
그녀가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 * *
5생활관의 암묵적인 대표인 시젠이 쭈뼛쭈뼛 다가왔다.
무엇인가를 말하려는 듯했다.
“무슨 일이지?”
“어떻게 하면…….”
그는 궁금했다.
심상도, 가호도, 육체적인 능력도 부족한 빈첸이 어떻게 말론을 이겨낼 수 있었는지.
“위압 특성을 어떻게 밀어낸 건지 배우고 싶어.”
빈첸은 침상에 앉아 가만히 시젠을 바라보았다.
시젠의 눈에는 열망이 있었다.
처음 시젠을 보았을 때와는 분명히 다른 눈이었다.
‘좋은 눈이군.’
그래서 말해주었다.
저런 눈을 가진 아이는 ‘위압’ 따위에 굴복하지 않는다.
“지금의 너라면 가능할 거다.”
“……가능하다고?”
시젠은 1년에 달하는 시간 동안 말론에게 짓밟혀왔다.
말론에 대한 공포가 뿌리깊이 박혀 있었다.
“……내가 정말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다.”
“…….”
빈첸의 ‘할 수 있다’라는 말이 시젠에게는 어떠한 권능처럼 다가왔다.
빈첸의 말이 마치 신의 계시 같은 느낌이었다.
빈첸이 말을 이었다.
“극복해 봐.”
“하지만…….”
“그도 못 할 거면 귀찮게 굴지 말고.”
빈첸은 더 이상 대화를 하기 싫다는 듯 자리에 누웠다.
물가에 말을 끌어다 줄 수는 있다.
그러나 떠먹여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시젠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
못 봤으면 못 봤으되, 이미 보았다.
빈첸이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었다.
말론은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공포였다.
빈첸을 보며 배웠다.
나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빈첸. 부탁이 있어.”
“부탁?”
“나도 정식으로 말론에게 결투를 신청할 거야.”
지든 이기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내가 질지도 모르지.”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전처럼 두려워서 벌벌 떨고 있지는 않을 것이었다.
이전과는 달라질 것이다.
“네가 지켜봐주면 좋겠다. 네 앞에서 싸우고 싶어.”
* * *
말론은 발톱 빠진 호랑이였다.
오른 손목이 잘렸던 그 통증과 빈첸에게 압도당했던 그 경험은 말론에게 트라우마였고, 말론은 ‘위압’ 특성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날붙이에 대한 두려움까지 커진 상태.
그러나 시젠은 달랐다.
‘이길 수 있다.’
아니.
이겨야 했다.
빈첸이 보고 있었다.
빈첸 앞에서 지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이길 거야.’
결국 시젠은 말론과의 결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그간 말론에게 눌려 있던 생도들이 또다시 환호했다.
시젠은 생도들의 환호 같은 건 들리지 않았다.
딱 한 명만 바라보았다.
‘해냈어, 빈첸.’
저만치 멀리, 빈첸이 보였다.
빈첸은 결투를 끝까지 지켜본 뒤 가장 먼저 대련장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 뒷모습이 왠지 모르게 거대하게 느껴졌다.
결투가 끝난 뒤, 셀비라가 가까이 다가왔다.
“하염없이 빈첸만 바라보더라.”
“내가 그랬어?”
“어, 애인인 줄 알았지 뭐야.”
시젠은 피식 웃고 말았다.
셀비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야, 그 웃음은? 진짜 빈첸을 사랑한다거나?”
“사랑은 무슨.”
시젠은 자신이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스스로 정확히 파악했다.
‘동경.’
결투를 하며 느꼈다.
빈첸의 ‘할 수 있다’라는 그 말이 얼마나 큰 의지가 되었는지.
“셀비라. 언젠가 내가 빈첸을 넘어설 수 있을까?”
“글쎄.”
셀비라는 솔직히 힘들다고 봤다.
빈첸은 최근 입성한 9급 생도들 중에서도 단연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빈첸이라면, 그렇다라고 얘기해 줄 것 같아.”
할 수 있으니 나를 넘어보아라.
그렇게 말하면서 기뻐할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시젠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렇겠지?”
그는 다짐했다.
저만치 앞서 있는 빈첸의 뒤를 기어이 한 번은 따라가 보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