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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의 정석-19화 (19/184)

환생의 정석 19화

며칠이 흘렀다.

레반 아덴카가 본가로 돌아가게 되었다.

“곧 본가로 돌아간다고?”

“그래.”

철인 특성을 얻을 때까지 도와주면 좋겠지만, 그건 빈첸에게도 아직 시간이 필요했다.

언제 가능할지 모를 일을 위해 레반을 붙잡아둘 생각은 없었다.

레반이 고개를 숙였다.

“고맙다. 너를 만난 것이 내게는 큰 행운이었던 것 같다.”

첫 임무를 성공적으로 끝낸 뒤 확실히 깨달았다.

‘나는 빈첸처럼 못했을 거야.’

빈첸이 보여준 그릇과 배포는 레반의 시야를 넓혀주었다.

“훗날, 너에게 부끄럽지 않은 무인이 되어 다시 나타나겠다.”

“그 날을 기대하지.”

“반드시 네 기대에 부응하겠다.”

레반의 두 눈에는 굳은 의지가 서려 있었다.

빈첸이 말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뭐지?”

“히슬리가(家)에 대해 좀 알아봐 주면 좋겠군.”

“히슬리가? 처음 듣는 가문인데.”

“그럴 거야. 몰락했으니까.”

500년 전 명가였고, 마력체 시술 연구를 했었으나 지금은 사라져 버린 가문.

‘마력체’에 회복의 단서가 있다.

“그런데 왜 알아보려 하는 거지?”

“세리의 가문이거든.”

“내가 너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판단한 거냐?”

“그래.”

가끔은 용의 꼬리보다 뱀의 머리가 낫다.

레반이 그러했다.

직계들 사이에서야 꼬리지만, 본인의 고장으로 돌아가면 머리였다.

훨씬 자유로이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레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네게 도움이 되겠다.”

그 날 이후.

레반은 아덴카의 본가를 떠나 그의 집으로 돌아갔다.

한편, 율리안은 아쉽다는 듯 말했다.

-그래도 철인 특성을 완전히 얻을 때까지 붙잡아두면 좋았을걸요.

‘내 사적인 이익을 위하여 내게 충성을 맹세한 자의 미래를 저당 잡을 수는 없으니.’

그렇게 말하면 멋있는 줄 알죠?

율리안은 또 말하려다가 말하지 못했다.

빈첸 같은 사람은 허구의 소설 속에나 등장하는 줄 알았다.

율리안이 아는 어른들은 자기 이익에 미쳐 있는 사람들이었으니까.

-근데요, 혹시요.

‘뭐지?’

-500년 전의 사람들은 다 형님 같았어요?

외팔이 데이븐은 스스로를 특출나거나 특별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뭐, 대충?’

-그때가 궁금해지기는 하네요.

처음에는 야만적인 줄로만 알았다.

비문명화되어 난폭하고 폭력적이고 상식이 없고 무모한 줄로만 알았는데.

빈첸을 경험하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빈첸은 율리안이 꿈꾸던 ‘어른’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었다.

-저도 궁금해졌어요, 500년 전 과거가. 그리고 그 이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초대가주께서 예비해놓은 것은 무엇인지. 왜 역사가 숨기는 것이 이렇게 많은 건지.

* * *

외팔이 데이븐이 못난이 빈첸의 몸을 차지한 이후 많은 것이 변했고, 또 많은 것을 알아냈다.

다만 아쉬운 건 시간이었다.

할 일이 너무 많았다.

모든 시간을 쪼개서 최대한 효율적으로 할애했다.

-이제 곧 서고 갈 시간이네요.

현재 율리안이 집중하는 것은 두 가지였다.

강화된 신체 이후 발현되는 ‘철인’ 특성과 더불어 ‘마력체’에 대한 조사였다.

-마력체에 대한 연구는 쥐뿔도 찾아볼 수 없네요.

뭐니 뭐니해도 ‘천골’의 회복이 우선이었다.

빈첸보다 율리안이 조금 더 조급했다.

-최선을 다하고는 있는데, 진척은 별로 없어요. 미안해요.

‘미안할 건 없다. 이미 최선을 다하고 있을 테니.’

이미 율리안은 최선을 다하고 있다.

더 빨라야 한다고 질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래도 ‘강화된 신체’ 덕택에 시간을 벌게 되었으니 조급할 필요는 없었다.

-근데, 두렵지 않아요?

‘뭐가?’

-형님 과거는 잘 모르지만, 삶에 대한 갈증이 엄청난 거 같던데.

‘그래서?’

-마력체에 대해 빨리 알아야 형님도 오래 살 수 있잖아요. 형님처럼 삶이 간절한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태평해요?

빈첸이 피식 웃었다.

‘네가 잘 해낼 거란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 그런 말 하면 누가 멋있다고 생각할 줄 알고!

빈첸의 머릿속에 율리안의 얼굴이 빨개지는 모습이 그려졌다.

이럴 때 보면 어린애가 맞았다.

화제를 돌려주었다.

‘아덴카 검식은 언제 익힐 수 있지?’

-형님도 알다시피, 진검회동의 우승자들은 그 해 6월에 ‘붉은 요새’로 가게 돼요. 그곳에서 배울 수 있을 거예요. 좋은 스승님이 자원을 해준다면 말이에요.

‘기대되는구나. 500년간 진일보된 검식이 어떤 형태일지.’

아슬란이 남긴 검과 명상식은 어떠한지.

특성을 얻게 된 빈첸은 현대 무학에도 뛰어난 장점들이 있음을 깨달았다.

취할 것은 취하여 익혀야 했다.

율리안은 ‘마력체 연구’에 가장 심혈을 쏟았고, 빈첸은 다른 것에 크게 집중했다.

‘가장 중요한 건 실전 감각이다.’

그는 율리안을 믿었다.

마력체 등의 연구에 대해서는 율리안이 자신보다 훨씬 뛰어나다.

그러니 믿고 맡기기로 했다.

빈첸은 빈첸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명상 100시간보다 실전 1시간이 나은 법이거든.’

-뭐하려고요?

‘제론에게 도움을 청할 생각이다.’

* * *

제론은 요즘 재미있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며칠 전, 빈첸이 대련상대를 요구했고 제론은 기쁘게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참 희한하단 말이야.’

근래 들어 빈첸이 너무 급격하게 변했다.

‘진검회동도 그렇고, 붉은 악귀 토벌도 그렇고. 체력은 또 어떻게 이렇게 늘었지?’

성장세가 가히 폭발적이었다.

‘강화된 신체’ 특성을 획득했다는 것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건 따로 있었다.

‘자신보다 강한 무인과 대련을 치르면 체력분배가 힘들 텐데.’

본래는 그렇다.

그래서 본 실력을 발휘하기도 전에 지치는 경우가 태반이다.

제론 자신도 자신보다 강한 무인과 대련을 치를 때에는 그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대한의 효율을 뽑아내고 있다. 이게 저 나이에 가능한 일인가?’

이것은 아마도 정신력과 수양의 영역이리라.

제론이 빙그레 웃었다.

‘왼손으로 검을 사용하는 것도 신기하고.’

만약 제대로 된 가호와 특성이 있었다면, 어쩌면 빈첸 공자님은 훌륭한 무인으로 성장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지. 심상도 못 맺으시지.’

그게 참 안타까웠다.

물론 진검회동에서 훌륭한 무예를 보여주기는 했으나 그건 ‘기이한 힘’에 가까웠다.

그런 기이함은 의외의 결과를 불러오지만 꾸준한 결과를 가져오지는 못한다.

꾸준한 성취를 위하여서는 심상과 가호.

그리고 특성이 필수였다.

그게 이 세계의 상식이었다.

“상대해 주어 고맙구나.”

최대한 티를 내지 않고는 있으나 빈첸의 앙다문 입술 사이로 뜨거운 들숨과 날숨이 오갔다.

“앉아서 쉬셔도 됩니다. 숨도 편하게 쉬십시오.”

“상대를 앞에 두고 어찌 약한 모습을 보인단 말이냐?”

빈첸은 그 자리에 꼿꼿하게 서서 제론을 바라보았다.

빈첸은 매일같이 혹독하게 스스로를 몰아붙였고, 제론조차도 그 집념에는 혀를 내둘렀다.

“아무튼 오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저는 백색검대로 복귀하겠습니다.”

“그래.”

제론은 빈첸에게 허리를 숙여 보이고 백색검대의 숙소로 방향을 잡았다.

빈첸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제론은 여전히 내가 특성을 익힌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지?’

-그런 것 같아요. 흥미롭네요.

저번에 세리를 보았을 때와 마찬가지였다.

제론은 세리에게서 마나를 읽어내지 못했다.

이번에도 제론은 빈첸이 특성을 익혔다는 것을 알아내지 못했다.

그렇다고 제론이 수준 낮은 무인은 절대로 아니었다.

아덴카 내에야 5성급 무인이 차고 넘쳤지만, 아덴카를 벗어나면 꽤 뛰어난 실력자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심상을 가진 무인은 심상이 없는 자의 마나를 파악하기 어려운가 봐요. 반대로 심상이 없는 무인은 심상을 가진 무인에 대해 금방 파악하는 것 같고. 왜 그럴까요?

7성에 달하는 무인인 레일사조차도 빈첸의 특성을 한 번에 읽어내지는 못했었다.

5성 무인인 제론은 이토록 검을 맞대면서도 빈첸의 특성을 알아내지 못했다.

‘이유는 잘 모르겠군.’

어쨌든 중요한 건 나는 상대를 읽을 수 있는데, 상대는 나를 읽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한편, 제론은 빈첸과의 대련을 복기하며 백색검대의 숙소를 향해 걸었다.

자신이 인정한 어린 무인의 성장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

그건 그것만으로도 꽤 즐거운 경험이었다.

‘어, 저분은?’

그런데 저만치 앞에서 걸어오는 누군가를 발견했다.

대륙에서도 흔치 않은 은발 벽안의 여인.

정갈하고 단정된 기도.

태풍의 눈처럼 고요하지만 두려운 기세를 내포하고 있는 저 여인의 이름은 데이아.

‘2공녀시잖아!’

아덴카의 2공녀였다.

제론은 제자리에 서서 오른손을 가슴팍에 올리고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아덴카의 2공녀이자 최연소 7성의 경지에 오른 뛰어난 무인.

차기 가주로 가장 유력한 여인을 향해 보이는 예의였다.

제론은 데이아와 마주친 것만으로도 잔뜩 긴장했다.

데이아가 제론 앞에 섰다.

“거기.”

“네, 네! 공녀님.”

“소속과 이름은?”

“백색검대 소속! 제론입니다!”

데이아와 눈을 마주친 제론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오늘도 여전히 위엄이 넘치시는군.’

대륙의 모두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데이아는 강인한 무인이었다.

너무나 아름답지만 감히 가까이 다가설 수 없는 고고한 존재.

“검집이 몹시 상했구나.”

제론이 반사적으로 검집으로 눈을 돌렸다.

‘어?’

이 검집은 한센의 공방에서 보름 전에 구입한 검집이었다.

오전까지는 멀쩡했었다.

그런데 검집에 쩌적- 금이 갈라져 있었다.

“송구합니다.”

“질책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마침 바람이 휘잉- 불어왔다.

그녀의 기다란 은색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휘날렸다.

제론은 그 모습마저 한 폭의 그림 같다고 느꼈다.

그는 잔뜩 긴장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구입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네. 보름 전에 구입한 것입니다.”

“어디서?”

“한센의 대장간에서 맞추었습니다.”

“그분의 공방에서 나온 물건이 왜 그렇게 되었지?”

데이아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잠시 갸웃했다.

데이아는 한동안 검집에서 눈을 떼지 않았고, 덕분에 제론은 민망해졌다.

“바로 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덴카의 체면을 손상시켜 죄송합니다.”

“방금은 무얼 하고 오는 길이냐?”

제론은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세상에서 5성급 무인이면 꽤 강한 축에 속했지만 아덴카에는 5성급 무인이 발에 챌 만큼 널렸다.

데이아가 이토록 오랜 시간을 할애하여 대화를 할 만큼 매력적인 성취는 아니었다.

“빈첸 공자와 대련을 하였습니다.”

“대련?”

“예.”

“빈첸이 그대와 대련을 할 정도의 성취를 지녔다고 말하는 것이냐?”

“지도 대련의 느낌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렇구나.”

데이아는 잠시 침묵했다.

‘검집이…… 안에서부터 파괴되었다.’

흔적이 영 이상했다.

데이아가 보기에는 기이한 흔적이었다.

약간의 침묵이 흐른 뒤, 제론이 물었다.

“그런데 데이아 공녀께서는 어쩐 일로……?”

“아무것도 아니다. 시간을 많이 빼앗아 미안하구나.”

“아, 아닙니다. 영광입니다! 살펴 가십시오!”

데이아는 그대로 제론을 스쳐 지나갔다.

제론은 한동안 데이아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게 꿈이냐, 생시냐?”

데이아와 이토록 오랜 대화를 나눈 5성 무인은 흔치 않을 것이다.

이것은 백색검대 내에서도 두고두고 자랑거리라 할 수 있었다.

‘근데 이건 왜 이렇게 됐지?’

구입한 지 보름밖에 안 된 새 검집인데 이상한 일이었다.

그는 곧바로 한센의 공방을 찾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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