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대표 이사를 잘라 보겠습니다 (1)
검찰청 건물에서 나온 나를 알아본 정규석이 먼저 허리 굽혀 인사했다.
“검사님, 바쁘신 중에 불쑥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다행히 문제가 있어서 온 것 같지는 않았다. 처음 검찰
청에 올 때와는 달리 얼굴에는 웃음이 지어져 있었고, 다크서클도 많이 줄어
있었다.
“아닙니다. 마침 저도 퇴근할 시간이었어요.”
“그러시면 제가 술 한 잔 대접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검사님 덕분에 일이 아
주 잘 풀려서요.”
“아뇨. 수사 중인 사건 관계인한테 저희가 대접받으면 안 되게 돼 있어서요.”
내 대답에 정규석의 얼굴에 아쉬움이 묻어났다.
“규정이 그러면 어쩔 수 없네요.”
“제가 사 드리면 되지 않을까요?”
“그런가요? 제가 검사님께 도움도 크게 받고 술까지 얻어 마시면 너무 죄송한
데요.”
술값이야 누가 내면 어떤가? 나도 돈 많다. 정규석한테 잘된 일이 있다고 하
니 듣고 싶어지기도 했다.
“부담 갖지 마시고, 그냥 친구 아들이 한 잔 사 드린다고 생각하셔요.”
“그럼 제가 싸게 마실 수 있는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꼭 그럴 필요까지는 없지만, 검사가 비싼 술집 드나드는 모습을 보여서 좋을
것도 없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우리는 바닷가의 허름한 대폿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간단한 안주와 함께 막걸리를 주문하고 나서 술잔을 한 번 부딪힌 뒤, 내가
궁금했던 걸 물었다.
“일이 잘 풀리셨으면, 어떻게 되신 거예요? 아직 검찰청에 들어온 소식은 없
어서요.”
“그게, 최수연 상무가 변호사를 선임했다길래 처음에는 큰일 난 줄 알았지 뭡
니까? 그런데 그 변호사가 생각보다 말이 통하는 사람이더라고요.”
당연하지. 변호사는 항상 이 사건이 법적 쟁점화 되어 소송까지 갔을 때의 결
과를 예상하며 움직인다.
내가 조사실에서 말해 줬듯, 이번 건을 끝까지 밀어붙였다가 가장 크게 피를
볼 사람은 최수연이다.
그러니 그녀의 법률 대리를 맡은 변호사는 아주 조심스럽게 움직일 수밖에 없
다. 그리고 이건 최수연의 처벌 수위를 낮출 권한이 있는 정규석에게도 해당
되는 말이다.
“변호사가 뭐래요?”
“일단은 합의를 하자고 하더라고요. 합의금 얼마 원하냐고 물어보는데, 그 말
듣는 순간 검사님 말씀 대로 착착 진행되는 게 너무 신기했습니다.”
“합의금 받기로 하셨어요?”
꿀꺽-.
신이 난다는 듯 잔에 남아 있던 막걸리를 비우고 내 잔을 새로 채워준 정규석
이 대답을 이어갔다.
“아뇨. 검사님이 알려주신 대로 했죠. 제가 개인적으로 받을 합의금은 필요
없고, 사측이 노사 협상에 더 적극적으로 임했으면 한다고만 했습니다.”
“그게 잘 되셨나 봐요?”
“네. 저희 내일 파업 중단하고 작업 복귀해요. 최수연 상무가 공사 기간 단축
하겠다고 밀어붙이던 철야 작업 안 하기로 했고요, 멋대로 없애려고 하던 안
전감독관도 그대로 두기로 했습니다. 덤으로 조선소 전 직원 기본급 3.5% 인
상까지 쟁취했어요.”
저 조건을 다 받아준 걸 보면 최수연이 남 감옥 보내겠다고 협박은 하면서도
자기는 들어가기 무지하게 싫었나 보다.
“축하드려요.”
“이게 다 검사님 덕분이지 뭡니까? 처음에 검찰청에서 오라고 했다는 말 들을
때만 해도 그저 아찔했는데 담당 검사님 잘 만난 덕분에 오히려 아주 잘 풀렸
습니다.”
“그럼 합의서는 제출하시는 건가요?”
찬-.
정규석이 이건 다른 화제라는 듯 건배를 한 번 청한 뒤에 잔을 비우고 대답했다.
“네. 방금 노사 협상 타결되고 나서 최수연 쪽 변호사가 사인해 달라는 서류
는 다 해 줬어요. 그중에 말씀하신 합의서도 있더라고요. 이것도 검사님께 꼭
묻고 싶었는데, 이제 최수연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제가 합의해 줬으니 그냥
무죄가 되나요?”
“그렇지는 않아요. 폭행교사죄는 반의사불벌죄, 아, 그러니까 합의서가 제출
되면 처벌하지 않는 범죄인데요, 최수연 상무한테 적용되는 죄목이 하나 더
있거든요. 무고죄요. 이건 합의랑 상관없이 끝까지 처벌합니다.”
이게 법리적으로 살짝 복잡한 문제인데 흔히 오해할 수도 있는 지점과는 다르
게 무고죄는 친고죄도 아니고 반의사불벌죄도 아니다.
그 까닭은 무고의 피해자는 죄가 없는 채로 고소당한 사람뿐만 아니라, 그 고
소를 접수받은 사법 기관, 즉 이번 경우엔 우리 검찰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최수연이 궁극적으로 속이려고 한 사람은 우리 검찰이기에 정규석
이 합의를 해 줬다고 해도 이 죄는 처벌이 이루어진다.
“잘은 모르겠는데, 아무튼 최수연 상무가 감옥에 가게 된다는 말씀이시죠?”
“솔직히 말씀드려서 동종 전과가 없고 합의서까지 제출돼서 실형은 피할 가능
성이 커요. 아마 벌금형 꽤 세게 맞을 겁니다.”
“감옥에 가든 벌금형을 받은 최수연 상무가 저희 조선소에서는 손 뗐으면 좋
겠네요. 경영진치고도 그렇게 실적에 미친 사람은 처음 봤습니다. 어떻게든
저희 현장 노동자들 갈아 넣어서 배 뽑아내는 데에만 혈안이 돼 있어요.”
끄덕-.
왜 그런지는 충분히 알 만했다. 능력도 없이 내연남 빽으로 상무에 조선소 소
장 완장까지 찼으니 자기가 일 잘한다는 걸 어떻게든 보여줘야 하는 처지일
것이다.
나도 그런 최수연이 계속 중대한 직무를 맡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던 터
라 이 맥락에서 정규석에게 물어볼 게 있었다.
“혹시 최수연 상무가 저지른 다른 업무상 비위 혐의도 아시는 게 있을까요?
그럼 제가 확실히 물러나게 할 수 있을 텐데요.”
안타깝게도 정규석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저희 현장직 근로자들 사무실에 들어가기만 해도 얼마나 눈치 주는데
요. 조선소 시스템이 완전히 사무실이랑 현장 둘로 갈라져 있어서 저희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처리해야 한다는 건데.
* * *
정규석과의 기분 좋은 술자리를 마무리하고 오피스텔로 돌아온 나는 침대에
누워 생각에 잠겼다.
성해 조선소 파업 사건에서 내가 검사로서 해야 할 일은 거의 끝났다. 남은
건 최수연을 무고죄로 기소하는 것 정도.
노조 측의 안전 관리 요구가 받아들여지고 꼴 보기 싫던 최수연도 법정에 세
우게 됐으니 깔끔한 처리라고도 볼 수는 있겠는데, 뒷맛이 무지하게 아쉽다.
정규석이 지적했던 대로 최수연이 벌금 내고 나서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가면
근본적으로 달라지는 건 없지 않은가?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곽한성 검사장으로부터 이 사건을 받아오면서 목표로
잡았던 건 최수연 정도의 잡범이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위에 있는 허민회 대
표 이사였지.
‘최수연이랑 허민회를 동시에 날려 버릴 방법은 없을까?’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한 가지 물고 늘어질 지점이 보이긴 했다. 최수연이 능
력도 경력도 안 되면서 허민회와의 내연관계를 이용해 상무 자리를 꿰찼다는 것.
이걸 엄격하게 법적으로 따지자면, 허민회에게 업무상 배임죄를 적용할 수는
있다. HL 중공업이라는 법인의 대표 이사로서 회사에 해가 되는 방식으로 인
사 업무를 처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허민회와 최수연이 내연관계라는 것부터 그 관계가 최수연의
승진에 영향을 미쳤다는 걸 내가 의심할 여지 없이 증명해 내야 한다는 거지.
내가 최수연의 마음에 침투해 본 영상을 공유할 수 있으면 그 첫걸음이라도
뗄 수 있겠건만, 안타깝게도 그건 내 눈에만 보이더라.
검사의 권한을 동원한다고 해도 허민회에게 출석 요구서를 보내 보는 것 정도
이다. 하지만 그 요구는 정황상 증거도 없으니 허민회가 그냥 씹어버려도 그
만이다.
최악의 경우 HL 중공업의 인사팀에서 미리 준비해 둔 최수연의 승진 근거 자
료라도 보내오는 날에는 수사를 시작할 수조차 없게 된다.
컥-.
이건 뭐, 답답함이 밤고구마 100개를 연속으로 먹다가 체한 급이었다. 그러다
가 너무 답답해서 어떻게든 속을 뚫어보려 냉장고에서 사이다를 꺼내 마셨을
때였다.
의외로 방법은 간단하지 않은가? 내가 보았던 허민회와 최수연이 사무실에서
서로를 벗기던 영상을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있으면 된다.
그리고 그 수많은 낯뜨거운 장면 중에는 아주 익숙한 배경도 있었다. 바로,
정규석이 최수연한테 폭행 누명을 썼던 성해 조선소의 그 회의실이었다.
허민회가 서울에서 성해까지 내려왔다가 서로 욕정을 못 참았는지 다른 곳보
다 훨씬 더 빠르게 벗기더라.
그 회의실에 나 말고도 보는 눈이 있었다는 건 이미 확인되었다. 구석에 있던
CCTV 영상을 복원해서 최수연을 무릎 꿇리는 데에 성공했으니까.
그렇다면 더 오래 전에 삭제된 영상이라도 복구하지 못하리라는 법은 없지 않
나? 인맥을 이용해 보기로 한 나는 핸드폰을 들어 메시지를 쳤다.
- 오랜만. 일 잘 처리해 줘서 고마워.
수신인은 한때 나와 대학에서 같은 동아리에 있다가 지금은 대검찰청 디지털
포렌식 담당직원으로 있는 후배 여세린이었다.
조금 더 근래에 있었던 일로 말하자면, 내가 압수해서 대검찰청에 보낸 성해
조선소 사무실의 CCTV 기록 파일을 복원해 낸 장본인이기도 했다.
답장이 오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 어, 오빠. 나도 성해지청에서 일 올라왔다는 얘기 듣고 오빠 생각했는데.
그 하드디스크 복원 오빠가 의뢰한 거 맞지?
- 응. 네가 복원해 준 덕분에 일 아주 깔끔하게 처리됐어.
- 정말? 그거 보낸 지 이제 일주일 조금 넘은 것 같은데, 오빠 일 잘하는 검
사인가 보다?
검사 일이야 뭐, 15년 경력에 마음 침투 능력까지 있는데 내가 못 할 리가 없지.
- 내가 대학 때부터 좀 날렸잖아.
- 까분다. 오랜만에 스파링 한 판 할까?
우리가 킥복싱 동아리에 같이 있었다고 반갑다는 말을 저렇게 하네?
- 온라인으로 스파링 할 거 아니면 나 서울 갈 때까지 기다려. 그건 그렇고,
나 일 하나만 더 부탁해도 돼?
- 응? 무슨 일? 검찰 일이면 공식적으로 의뢰하면 되잖아.
- 수사에 필요한 건 맞는데 아직 내가 정황 증거도 확보를 못 해서 공식적으
로 의뢰하긴 어려울 것 같아. 너한텐 어려운 일 아닐 것 같은데, 내가 보냈던
그 하드디스크 더 오래전에 지워진 파일도 복원할 수 있을까?
가능성을 고민하는 건지 잠시 뜸을 들였다가 여세린의 답장이 도착했다.
- 오래전이며 얼마나?
- 그걸 나도 잘 모르겠는데, 네가 복원해 준 파일에서 맞은척하던 여자랑 HL
중공업 허민회 대표 이사가 붕가붕가하는 장면이 있을 거거든?
- 붕가붕가면? 내가 생각하는 그거?
- 응. 나도 지금 같이 생각하고 있는 그거.
그 뒤로 한참 여세린이 보낸 수많은 ‘ㅋ’과 ‘ㅎ’이 내 메시지창에 찍혔다.
- 둘이 왜 그걸 하는지는 모르겠는데 더 옛날 영상 찾아보면 확실히 있다는
거지?
지금까지 내가 마음 침투를 통해 본 영상이 틀린 적은 없었으니 확답은 얼마
든지 해 줄 수 있었다.
- 응. 찾아봐 줄 수 있어?
- 그래. 허민회면 오빠가 동아리 회식에서 술만 마시면 욕하던 그 원수잖아.
내가 오늘 오빠 위해서 야근 한 번 한다.
- 고마워. 나중에 스파링할 때 조금 봐 줄게.
- 됐네요. 진짜 찾으면 밥이나 거하게 사.
- 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