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아버지의 동료 (2)
[성해 조선소 사무실로 들어간 정규석이 직원들에게 눈으로 인사하며 급하게
회의실로 들어간다. 그 안에는 한 여자가 팔짱을 낀 채 책상에 걸터앉아 있
다. 정규석이 고개를 숙여 여자에게 인사한다.]
[“찾으셨다고요, 최수연 상무님.”]
순간 내가 잘못 들은 건가 했다. 저 여자가 국내는 물론 세계 조선업을 쥐락
펴락한다는 HL 중공업의 상무 최수연이라고?
여자라고 중공업 회사의 임원이 되지 말란 법은 없지만, 지금 영상 속에 비치
는 최수연은 너무 어려 보였다. 아무리 많이 잡아도 서른 중반은 넘지 않아
보였다.
게다가 회사에 일하러 온 건지 남자 꼬시러 온 건지 모를 저도로 오밀조밀하
게 꾸며 놓아서 저 모습만 보면 20대라고 해도 믿을 지경이다.
저 나이에 대기업 상무를 달았으면 뉴스에 나오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다. 배
만드는 데에 꼭 필요한 엄청난 능력이라도 있는 건가?
[영상 속 최수연이 자기 아버지뻘인 정규석을 향해 눈을 흘긴다.]
[“오늘까지 파업 풀고 업무 복귀하라고 분명히 경고했을 텐데요?”]
[“저희 요구안이 관철되기 전까지는 그럴 수 없다고 이미 통보 드렸습니다.”]
[“진짜 법적으로 당해 보고 싶어요?”]
[법이라는 말에 정규석의 당당하던 목소리가 부쩍 작아진다.]
[“노동쟁의를 법적으로 처벌할 수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아, 그러세요? 법 좀 잘 아시나 봐요? 그렇다고 제가 못 엮어드릴까 봐요?”]
[자신만만한 표정의 최수연이 옆에 놓여 있던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
가 전화를 건다. 그리고 잠시 후, 우락부락한 덩치의 두 남자가 회의실로 들
어오고, 밖에서 볼 수 없게 블라인드가 쳐진다.]
[“이게 뭐 하시는 겁니까!”]
뭔 생각으로 저러는 건지 나도 궁금해지네. 정규석을 법적으로 엮겠다더니 자
기가 폭력을 쓰려고? 이어지는 영상에서 내 짐작이 맞았음이 확인되었다.
[철썩-.]
[방금 들어온 남자가 정규석의 입을 막더니 손바닥을 들어 그대로 목덜미를
후려갈긴다. 반격을 막으려는 듯 다른 남자는 재빨리 정규석의 뒤로 가 양팔
을 뒤로 꺾어 잡는다.]
조금 전 정규석이 나한테 진술한 그대로였다. 폭행을 당한 쪽은 최수연이 아
니라 정규석이었다. 그런데 그다음 영상에서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꺄악! 노조위원장님, 왜 이러세요. 아무리 화가 나셔도 말로 하셔야죠. 회
사에서 폭력을 쓰시면 어떡해요? 더군다나 저 여자예요!”]
[최수연의 비명이다.]
이래서 성해 조선소 사무직 직원들이 폭행 장면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회
의실에서 최수연이 맞는 소리를 들었다고 진술서를 제출했구나.
[그러고 나서도 입이 막힌 정규석을 향한 폭행과 최수연의 대리 비명이 이어
진다. 정규석에게 손찌검을 날리던 남자가 주먹을 들었을 때야 최수연이 손을
들어 제지하고 나섰다.]
[“위원장님, 저한테 계속 덤비시니까 이런 꼴이 나시는 거예요. 자, 여기서
맞은 사람은 누구다? 나. 최수연. 그리고 때린 사람은 위원장님. 오늘 중으로
파업 안 풀면 법적으로는 이렇게 처리되는 거예요. 아시겠어요?”]
최수연 이거 진짜 우지현 급으로 미친 년이었네? 우지현 같은 애가 크면 이렇
게 된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하려나?
영상을 통해 사건의 진상을 확인한 나는 깡패들한테 맞을 때만큼이나 무기력
한 얼굴로 내 앞에 앉아 있는 정규석에게 물었다.
“허위 고소를 당하신 거라면 더 강력하게 대응할 생각은 없으세요?”
“제가 법적으로는 아는 게 많이 없어서 무죄 나오기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강
력하게 대응을 한다고 하시면, 제가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우리나라 법은 허위로 고소한 사람을 처벌하게 되어 있어요. 최수연 상무를
무고죄로 고소하실 수 있고요, 오히려 폭행을 당했다고 하셨으니 폭행죄 맞고
소도 가능합니다.”
내 조언에 정규석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그렇게 하면 제가 무죄를 받을 확률이 높아지나요?”
“방금 진술하신 대로 폭행이랑 허위 고소 둘 다 당하신 게 맞으면 정규석 씨
는 당연히 무죄고요, 오히려 최수연 씨가 처벌받게 되죠.”
“그럼 조금 무섭지만, 검사님 말씀대로 해 보겠습니다.”
오케이. 정규석이 고소장을 써 주면 내가 최수연을 수사하는 것도 훨씬 쉬워
진다. 잠시 후, 나에게 작성 완료된 고소장을 내미는 정규석에게 한 가지 조
언을 덧붙였다.
“그리고 이건, 저희 아버지 동료분이시니까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진상 규명
되고 최수연 상무가 유죄로 몰릴 것 같으면 합의하자고 나올 거예요.”
“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하죠? 제가 고소나 합의나 다 처음 해 보는 거라 검
사님이 말씀해 주시는 대로 하고 싶습니다.”
“일반적으로는 합의금을 받는 선에서 끝나는데요, 사실 합의 조건으로 크게
지탄 받을 일이 아니면 뭐든 제시할 수 있거든요. 그때 최수연 상무한테 노조
가 요구안 받아들이라고 압박하시면 효과 있을 거예요.”
그제야 정규석의 얼굴에서 보기 안 좋았던 무기력함이 걷혔다.
“그런 방법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성국이가 자기 아들 똑똑하다고 자랑하
더니, 아이고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두 분 친구 사이셨는데 이름 편하게 부르셔도 되죠. 아버지 동료
분께 꼭 잘부탁드립니다. 성해 조선소 안전한 일터로 만들어 주세요.”
“물론입니다!”
* * *
정규석을 만나고 나서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인간적으로도, 검사로서도 누구
를 조져야 할지 명확해졌기 때문이었다.
물론 최수연을 잡으려면 여러 준비가 필요했다. 내가 정규석의 마음을 읽었더
니 최수연이 나쁜 년이더라 라고 법정 가서 판사 앞에서 말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흔히 하는 말로 검사는 증거로 말한다고 하듯,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최수연이
정규석을 폭행하고 허위로 고소했다는 명백한 물증이었다.
물론 내가 정규석에게 그렇게 자신 있게 말했을 때는, 그 물증을 찾을 방법을
머릿속에 정리해 두고 난 다음이었다.
정규석은 그 상황에 집중하느라 미처 의식적으로 인식하지 못했던 것 같지만,
영상을 통해 객관적으로 바라본 내 눈에는 폭행 장소에 CCTV가 있었다는 게
너무 확연하게 드러났다.
나는 며칠간 그 증거 확보를 위해 영장을 치고, 기왕 이 사건이 높은 곳까지
알려졌다는 걸 활용해 대검찰청에도 연락했다.
그랬더니 보통은 따로 긴급으로 분류되지 않는 이상 몇 주가 걸리는 디지털
포렌식 및 데이터 복원 결과가 다음 날 바로 성해까지 날아오더라.
그리고 지금, 성해 조선소 최고의 미친년 최수연은 얼마 전 정규석이 앉아 있
던 바로 그 조사실 자리에 나와 마주 앉아 있다.
“저번에 다른 검사님께 다 말씀드렸는데, 왜 또 부르셨어요? 검사 바뀌면 부
른 사람 또 부르고, 검찰은 인수인계가 잘 안 되나 봐요?”
지금 나를 저렇게 도발해서 자기한테 좋을 게 1도 없다는 걸 모르나 보다.
“저번에 조사받으신 건 최수연 씨가 정규석 씨한테 폭행당했다고 고소한 건
관련이었고요, 오늘은 다른 사건으로 모셨습니다. 그러니 인수인계랑은 관련
이 없죠?”
“뭐, 뭐, 무고니 제가 정규석을 때렸다느니 하는 그거요?”
알고 와 놓고 왜 괜히 우리 회사를 까고 있나?
“네. 맞습니다. 실제 폭행은 최수연 씨의 사주를 받은 사람들이 정규석 씨한
테 했다고 파악되는데요.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그러세요? 제가 정규석한테 맞은 거 저희 조
선소 사무실 직원들이 다 듣고 진술서까지 써서 냈잖아요.”
“맞은 걸 듣기만 했고, 본 사람은 없던데요?”
슬슬 쫄리기 시작했는지, 최수연이 버벅거렸다.
“그, 그럼 저희 노조위원장님이 맞았다는 건 본 사람이 있대요?”
“본 사람은 없는데 보고 기록까지 잘해 둔 기계가 있더라고요? 며칠 전에 저
희가 성해 조선소 CCTV 기록 압수한 건 아시죠? 지난 조사에서 왜 폭행 장소
에 CCTV가 설치돼 있지 않다고 거짓말하셨습니까?”
“그래요. 갑자기 검찰에서 와서 뭘 가져갔다니까 조선소 소장으로서 저도 많
이 놀랐죠. 제가 거짓말이요? 그때 기록이 지워져서 없다고 한 거예요. 뭐가
다른가요?”
얘도 우리나라 수사력 너무 무시하네.
“지워진 게 아니라, 최수연 씨가 상무 이사로서 지우라고 지시했겠죠. 그렇다
고 저희가 못 찾아낼 줄 아셨습니까?”
“지, 지워진 걸 어떻게 찾는데요?”
“우리나라가 IT 강국입니다. 특히 검찰청에는 전국에서 내노라하는 전문가들
이 수사를 돕고 있고요. 그렇게 표면적으로 삭제하셔서야, 금세 복원됩니다.
이거 같이 봅시다.”
나는 최수연에게 태블릿 PC를 내밀었고, 그 안에서는 내가 정규석의 마음을
통해 봤던 영상이 CCTV의 관점에서 재생되고 있었다.
“자, 잠깐만요. 저 전화 한 통만 할게요.”
빼도 박도 못할 증거가 자신의 눈앞에 놓이자 당황해 하는 최수연에게 나는
한 방을 더 먹였다.
“허민회 대표 이사님께 전화 드리게요?”
최수연이 여러모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고 나서 이것저것 조사를 해 보았다.
그랬더니 나이는 33세.
남들은 기껏해야 입사해서 첫 승진이나 했으면 다행인 시기에 굴지의 대기업
상무 이사라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렇다고 대단한 수상 경력이나 학문적
업적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그런, 나보다는 확실히 안 좋은 대학 나와서 HL 중공업에 입사했다가 대
표이사실 비서가 된 것까지가 내가 파악한 바였다. 상무까지의 초고속 승진은
그 다음이었다.
그러니 의심할 수 있는 건 딱 하나 아닌가? 이 여자 HL 중공업의 대표 이사인
허민회랑 놀아난 덕분에 벼락출세한 거다.
내 추측이 맞았다는 걸 증명해 주듯, 허민회라는 이름이 나오자 활짝 열려 버
린 최수연의 정신을 통해 영상이 흘러나왔다.
[키스와, 벗기기와 서로를 물고 빨고 (......)]
남녀가 서로 좋아하는 걸 갖고 내가 간섭할 바는 아니지만, 모텔방이라도 잡
지 이걸 왜 회사 사무실에서 하고 그러냐?
“어디서 그 이름을 함부로 입에 올려요?”
참나, 대단하신 허민회 대표이사님, 최수연한테는 인생의 구원자일지 모르겠
으나 나한테는 언젠가 때려 눕혀야 할 원수일 뿐이다.
“어쨌든 조사 거의 다 끝나 가니까 전화는 천천히 하십시오. 폭행과 허위 고
소 다 인정하십니까?”
“아니오! 그럴 리 없어요. 우리 사내 변호사들 다 불러다가 당신 암말도 못
하게 해 줄 거야.”
“피의자는 부정하신 거 알겠습니다. 그런데 영상 증거가 너무 확실해서 기소
를 안 할 수는 없네요. 정상 참작이라도 받고 싶으시면 피해자이신 정규석씨
와 합의라도 해 오셔야 할 겁니다.”
담담하게 이어지는 내 말에 최수연이 소리를 빽 질렀다.
“야! 법은 너만 아는 줄 알아? 나도 변호사 쓸 거야.”
이거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인데, 그 법 잘 아시는 변호사님이 이건 답이 없으
니 합의라도 하라고 하실 거다.
그 말을 내가 변호사 수임료도 안 받고 미리 해 준 건데 저렇게 부들부들 떨
것까지야 뭐가 있나?
* * *
그러고 나서 일주일쯤 지났을 때였다. 우리 검찰청 앞에서 나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나가 보니, 아버지의 동료 정규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