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 도화선 [4] >
아침이 밝았다.
간밤에는 많은 이가 잠을 설쳤으리라.
지난밤에는 결국 다섯 번째 폭음까지 울려 퍼지고 말았으니까.
타플강드의 비밀 창고 다섯이 날아가는 소리였다.
한 번 기습을 당하고 배운 셈인지, 대응할 시간을 주지 않고 쉴 새 없이 몰아친 모양이었다.
세올의 문서 작성이 끝난 것도 이때쯤이었다.
꽤 강렬한 영감이었는지, 밤을 새워 작성하기까지 하고. 연구에 매진하니 오랜만에 마법사다운 모습이다 싶기도 하고.
시엔이 기특한 마음에 문서들을 집어 들었다.
[신체 대용의 강신체 주문 응용.
-세올 저. 공동 저자 트리예 아르트레스.
첨삭 및 연구지도 시엔 티란디스.]
세상 가장 존경하는 시엔 선배님에게 이 성과를 바칩니다.
그렇게 시작하는 문서는 새로운 주문의 대한 발상이 아닌 생체 강신체 연구 정리본이었다.
넘겨보니 의외로 깔끔하니 잘 쓴 논문이었다.
“생체 강신체? 이걸 지금 정리했어?”
“아. 그 이에인이라고. 그 후배가 관심이 있다고 해서요.”
“이에인?”
“만화원의 흑마법사인데요. 왜 그 선배님도 바로 아셨을 텐데.”
어제 만난 만화원의 흑마법사는 하나였다.
굳이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자신감 없는 작은 목소리에 하나하나 눈치를 보던 그런 여인이었다.
사람이 소심해도 정도가 있지, 그만한 이는 또 처음이었기에 뇌리에 남았다.
“그렇다고 밤을 새워서 정리했다고? 걔가 꽤 마음에 들었나 보지?”
“얘기해 보니까 괜찮은 녀석이더라구요.”
“흠.”
시엔이 잠시 갈등했다.
지식의 전파와 그로 인한 연구 발전은 마법사의 의무였다.
그러니 마음에 드는 후배에게 제 연구를 전달하는 것이야 아주 바람직한 행위기도 했다.
그런데 하필 심연탑이 아니라 만화원 소속이다.
물론 그 수장의 불가사의한 수법으로 사랑에 눈이 먼 상태이겠지만.
상대가 흑마법사라면 심령을 제압하는 방식으로 간단히 그 수법을 깰 수도 있었다.
트리예가 바로 그렇게 곧장 정신을 차리지 않았던가.
세올이 보기에 괜찮은 후배였다면, 그 엉망진창인 집단에서 빠져나오도록 돕는 것도 괜찮겠지마는.
그러자 트리예가 진저리를 치며 말했다.
“선배, 미쳤어요? 걔는 안 돼요.”
“왜? 가 아니라. 방금 너 뭐라고 했어? 미쳐? 지금 하늘 같은 선배님한테 감히 하는 소리가 미쳐? 미쳐어?”
“됐고. 다른 사람 다 줘도 걔한테 주는 꼴은 못 봐요.”
“되긴 뭐가 돼? 이게 미쳐 가지고는.”
“나 미친 거 이제 알았어요? 하여간, 이에인은 안 돼요. 공동 연구자로서 절대 허락 못 해요.”
트리예가 단호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세올이 어찌 말꼬투리를 잡아보려 했으나, 트리예가 당연하다는 듯 넘기는 바람에 타이밍을 놓쳤다.
세올 다루는 데에는 이제 아주 도가 터 가지고.
“왜? 이 세올이 얘기해 보니까 애가 괜찮던데.”
“내가 살면서 걔만큼 기분 나쁜 애를 못 봤어요. 애초에 걔는 글렀어요.”
“아니, 왜? 애가 좀 많이 소심하기는 해도, 착한 애 같던데.”
“착해요? 하.”
트리예가 코웃음을 쳤다.
세올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다가, 갑자기 무언가 깨달은 양 샐쭉한 미소를 머금었다.
“너, 질투하는구나?”
“뭐라구요?”
“그러니까 평소에 잘 했어야지. 선배 알기를 아주 우습게 알고 그러니까.”
“잠깐만요. 지금 무슨 소리야, 그게.”
“너, 의외로 귀여운 구석이 있다?”
말인즉슨, 세올이 다른 후배를 챙겨주려고 하니 트리예가 질투해서 강짜를 부린다는 것이었다.
“아니, 무슨, 무슨.”
트리예가 말문이 막혀 버벅거렸다.
시엔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사람이 말문이 막히는 것은 아주 어이가 없거나, 혹은 정곡을 찔렸을 때였다.
세올 주제에 웬일로 날카로운데.
이러니저러니 매양 투닥거려도 결국 트리예가 잘 따르고 있으니 무어.
시엔이 그렇게 생각했다.
라이네스가 끼어들기 전까지는.
“그게 아니라. 만화원 중에 이에인을 좋아하는 여인은 단 한 명도 없어. 걔는 좀 뭔가 더럽고 기분 나빠.”
정신을 차렸는지, 방 여럿 딸린 호화 객실의 거실로 나온 라이네스가 끼어들었다.
“아. 정신을 차렸나.”
“어떻게 된 거야? 칼에 찔린 것까지는 알겠는데. 당신은 왜 여기에 있고.”
“볼 일 있어서 왔다가 송장 하나 살렸지.”
“아.”
“첩자 노릇을 하랬더니 열사로 죽고 싶었나 봐?”
시엔이 이죽거렸다.
만화원의 수장에게 복수한답시고 붙어있는 중이라더니 제 목숨도 안 가리고 몸을 던졌다.
일단 살려는 놓았다면 좋은 소리가 나올 리가 없었다.
“그게 아니라.”
“아니면?”
“그냥 붙어 있다가 중요한 때에 망쳐놓는 건 쉬운데, 당신과 연락하려면 의심을 살지도 모르잖아.”
“그래서? 신뢰를 사기 위해 몸을 던졌다고? 소드 마스터의 칼날에 몸을 던지고 살 수는 있고?”
“마스터인 줄 몰랐어. 그냥 팔 하나 정도만 내어주면 되겠다 싶었는데.”
시엔이 눈살을 찌푸렸다.
“팔 하나는 괜찮고?”
“두 개니까 하나 정도는.”
“특이한 논리인데.”
“그리고 외팔이가 되면, 사람들이 날 좀 더 불쌍하게 보지 않을까? 아니면 병신이라 경멸할지…… 아니, 아니야.”
키 큰 마법사가 말을 하다 말고 민망한 표정으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계속 느끼는 점인데, 워낙에 큰 키도 그렇지마는 행동 자체가 털털하니 사내와 같은 모양새였다.
“그래서, 충성을 보이기 위해 한쪽 팔을 내주려고 했다고?”
“충성이라기보단. 뭐 동료애라던가.”
여튼 특이한 인물상이었다.
제 목숨 제가 건사해야지. 굳이 잔소리를 할 상대가 아닌 것 같으니 시엔이 덧붙이지는 않았다.
“그래서. 지금은 무슨 상황이야? 이에인 이야기는 왜 나와? 또 지저분한 짓 하다 걸렸어?”
“그건 무슨 소린데?”
“이에인은 겉과 속이 좀 많이 달라. 소심한 사람이 선량해 보이기는 하지만, 그게 아니니까. 소심해도 나쁜 년은 나빠. 눈치를 보느라 못 할 뿐인데.”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녀석이라고.
마법사가 어지간해서는 거짓을 입에 담지 않으나, 그녀의 경우에는 아주 입만 열면 거짓이라면서.
“논문을 주면, 살짝 고쳐다가 제가 쓴 마냥 행세할걸. 메이화가 죽고 연구도 그렇게 가로챘어. 새 논문에 공저도 없이 혼자 쓴 것처럼. 읽어 보니 몇 글자 말고는 메이화가 쓴 그대로던데.”
“그거 봐요. 걔는 아주 못 돼먹었다니까.”
“그런가?”
세올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걔도 원래 그 메이화인지 하는 애랑 같이 연구했을 수도 있잖아. 아니면 같은 내용을 연구하다 합쳐서 수정했을 수도 있지. 몇 글자라도 핵심에 닿아 있으면 아예 다른 건데.”
“메이화의 연구는 좀 달라. 뭔가 사악한.”
“흑마법사의 연구는 원래 사악해 보이거든?”
“그게 아니라, 진짜 본질적으로 뭔가. 잘 표현이 안 되는데. 괴물 같은 걸 소환하는? 괴물이 그냥 괴물이 아니라 진짜로 괴물인데. 말로는 음.”
라이네스가 무어라 설명하려다 결국 포기했다.
“나중에 자료를 보내줄 테니까.”
땅지기인 라이네스가 보기에 흑마법사의 연구가 대체 무엇인가 싶을 터였다.
자료를 보내준다고 하니 받아 나쁠 것도 없었다.
보고 괜찮으면 새 심연탑에 비치해도 되겠고.
“됐고. 라이네스? 일 좀 해.”
“어떤 일인데.”
“타플강드의 시설 파괴. 공방에 사무소에 여관 등등 사업체 목록을 받았는데, 전부 싹 날려버렸으면 좋겠거든.”
케이즈 상단에게서 받은 의뢰였다.
타플강드 상단과 할타스 상인 연합의 충돌은 이제 정면전에 이르렀으니까.
여기서부터는 한쪽이 항복하고 물러날 때까지 계속 피가 흘러야 했다.
시엔이 사업체의 위치와 상호를 적어 건넸다.
좋게 말하면 하청인 셈이었다.
달리 보수를 지불하지는 않지마는, 그래도 복수할 기회를 주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겠는가, 하고.
* * *
잉크가 담긴 병이 날았다.
잉크병이 본래 살아 움직이는 것이 아니니, 누가 집어던지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빈번히 일어난 일이기도 했는데, 화가 난 윗사람이 제 부하에게 집어 던지기에 가장 만만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항상 책상 위에 있어 손에 잡히고, 적당한 중량은 던지기에 참으로 부담이 없다.
거기다가 맞는다고 해서 큰 부상이 일어날 염려도 없었다.
다만, 얻어맞는 입장에선 그보다 고역이 없다.
일단은 기분이 더러웠다.
병이 날아오면 필연적으로 안에 든 끈적한 잉크를 뒤집어 쓸 수밖에는 없었다.
옷을 버리는 것은 두 번째 문제였다.
그 뒤집어쓴 꼴을 남들에게 보이는 것이 문제지.
또 얻어맞았구나 하고 동정 어린, 혹은 한심하다는 그러한 눈빛이 뒤따르니 창피하고 부끄러웠다.
지부장이 고개를 푹 숙였다.
“도대체 일을 어떻게 하는 거야! 박살을 내라고 했더니, 왜 박살이 나고 있냐고!”
타플강드 의원이 시뻘건 얼굴로 고함을 질렀다.
잉크병을 던지고도 전혀 화가 가라앉지 않은 표정이었다.
사실 화풀이로 무언가를 내던지거나 손찌검을 하거나 해도, 실상 전혀 화는 가라앉지 않는 법이다.
그러면서도 하급자에게는 확실히 수모와 모멸감을 주고 자연스레 원한을 쌓는 일이었다.
기분 전환에는 추호도 도움이 안 되면서 괜한 원한을 사는 일이라.
그게 사장이건 선임이건 간에 징벌이 아닌 그저 화풀이는 그 추악한 본성을 드러내는 일이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다야? 어떻게 할 건데? 대책이 있어야지! 이딴 멍청한 새끼를 지부장이라고!”
“…….”
“어쭈, 할 말 없다 이거야? 할 말 없으면 죄송하다고 빌기라도 해야할 거 아니야!”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다냐고!”
나보고 어쩌라고 이런 개X발 새끼.
타플강드의 할타스 지부장이 속으로 이를 갈았다.
그러나 어쩌랴, 꼬우면 윗사람을 했어야지.
먹여 살려야 할 처자식이 있는 지부장이 꾹 참고 순간을 모면할 수밖에는.
거기에, 도는 소문으로는 그렇게 좋지 않은 모양으로 뛰쳐나간 이들 중 다시 연락이 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고.
지부장쯤 되면 그 소문이 그저 소문만이 아님을 안다. 사람을 부려 처리한 적이 몇 번이었으니까.
“변명이라도 해 봐.”
“그것이, 만화원이 끼어드는 바람에…….”
“빌어먹을.”
타플강드 의원의 기세가 조금 누그러졌다.
만화원이 끼어드는 것은 그에게도 상정 외의 상황이었으니까.
특히 그들은 성유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게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가졌는지는 타플강드 의원이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타플강드의 화는 아직 가라앉지 않았다.
“소드 마스터가 몇 명인데 그깟 마법사 몇을 처리 못 해서 이 난장판이야!”
“마스터들의 실력이 생각보다 더 형편없습니다. 심지어는 술집에서 주사를 부리다 맞아 죽은 놈도 있습니다만…….”
타플강드 의원의 기세가 한층 더 누그러졌다.
그라고 모르겠는가.
병신같은 것들. 용병질이랍시고 떠들다가 어디 한 지점에서 칼 맞아 죽어갈 놈들에게 힘을 쥐여줬다.
오러 블레이드를 얻었으니 검술만 익혀 능숙해지면 대륙에 이름을 떨칠 텐데, 실상 그렇게 하는 놈은 몇 명에 불과했다.
그 많은 놈 중에 겨우 몇 명!
애초에 건실하거나 노력할 줄 아는 놈이라면 그렇게 동급 용병으로 떠돌아다니지 않을 테지마는.
그래도 해도 너무하잖는가.
“빌어먹을. 열등한 인종 같으니. 그 천하고 더러운 피는 도대체가 써먹을 수가 없어.”
제국 의회의 논리였다. 열등하지 않은 인종이란 그네들에게 딱 하나 제국인 뿐이었으므로.
“그래도 말이 안 돼. 비밀 창고가 여덟 개가 날아갔어! 자금을 추적하는 기색도 없었는데, 그걸 놈들이 어떻게 알아낼 수가 있나! 상단의 배신자가 있어. 어떤 놈이 저쪽에 붙어서 분 거야.”
“그것이, 그게 아니라.”
“아앙? 또 뭐야?”
“키우던 조직들이 몇 개 날아갔습니다. 그놈들이 용역 관리를 좀 맡아서 하다 보니……”
상단은 필연적으로 뒷골목의 건달들과 이어진다.
큰 상단은 아예 뒷배를 서 주기도 했다.
“건달 새끼들이. 하. 그러니까 건달 새끼들이지.”
원래 건달에게는 의리가 없다.
세상 그 누구보다 의리를 외치며 중요시하지만, 그건 건달들 역시 저들에게는 한 줌만큼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사람은 제게 없는 것을 필요하다고 생각하니까.
“그래. 건달 새끼들. 그놈들 뒀다 뭐해? 이참에 싹 모아다가 써먹으면.”
“그것이, 놈들이 죄다 잠수를 타고 몸을 사리는 중입니다. 날랐어요.”
“아니, 왜?”
“푸른 장미가 떴답니다.”
타플강드 의원이 잠깐 얼빠진 표정을 내보였다.
푸른 장미가 대체 뭐야? 그렇게 잠시 눈만 꿈벅이다, 이내 전설적인 암살자 조직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연합 놈들이 푸른 장미를 고용했다고?”
“그건 아닐 겁니다. 연합 구역의 조직들도 몽땅 쓸려나갔습니다. 그냥, 푸른 장미가 미쳐서 조직 놈들을 전부 다 때려잡고 있다고.”
“멍청한 놈 같으니. 네가 그래서 안 되는 거야.”
타플강드 의원이 인상을 찌푸렸다.
지부장이 속으로 생각했다.
안 되기는 뭐가 안 돼?
대륙에서 가장 크고 부유한 상단의, 본단의 지부장을 맡고 있으니 이미 되기는 큰 사람이 된 지 오래였다.
그러나 대답은 속마음과 달랐다.
“고견을 청하겠습니다.”
“어차피 조직 놈들이야 언제들 갈아엎을 수 있는 것들인데. 암살자를 고용해 놓고는, 자기네들이 키운 조직도 날아갔다면서 발뺌을 할 생각이지.”
“그러면 어찌…….”
“어쩌긴 어째. 이러면 우기기도 뭐하고. 하는 수 없이 일정을 앞당겨야지. 디엔바 백작에게 사람을 보내. 군대를 동원래 반대파를 싹 밀어버리고 도시를 접수하라고. 내가 이런 것까지 하나하나 알려줘야 하나?”
“송구합니다.”
지부장이 허리를 접으며 생각했다.
하나하나 알려주기는. 계획에 대해서는 지부장이 감히 어쩔 수 없으니, 상단주가 직접 지시하기 전에 재량으로 될 것이 아니었다.
제가 시켜야만 할 수 있는 일을 미리 안 했다고 지랄을 하면, X발 개 같은 새끼.
지부장의 원한이 무럭무럭 자라는 가운데, 타플강드 의원이 마뜩잖은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 46. 도화선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