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 도화선 [1] >
시엔이 환자의 요양을 핑계로 라이네스를 케이즈의 고급 여관으로 데려가겠다고 요청했다.
뤼니헤의 입장에서도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시엔에게 타플강드의 비밀 창고 위치를 받았다.
파괴하여 본보기를 보여야 할 때다.
아직 의식이 없는 환자를 두고 갈 수도 없다.
그럼 한 명을 빼서 지켜야 할 텐데, 타플강드의 수상한 소드 마스터가 또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 전력 하나를 놀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딱히 만화원을 돕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만화원의 복수가, 시엔에게는 이득이었다.
해야 할 일을 타인이 대신하는 행위는 편하기 짝이 없었다.
특히 그 일이 위험하고, 또 실패한다고 해서 제게 별 피해가 없다면 더욱이 그러했다.
시엔이 딱 그런 상태였다.
창고 파괴 공작에 성공하면 케이즈 상단에서 보수를 받고, 실패하면? 직접 나서면 그만이 아닌가.
그런 이유로 라이네스를 데리고 돌아오고 나서는 막상 할 일이 딱히 없었다.
타플강드 상회를 더 건드려 보고, 그 반응을 보고 대처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놈들이 도망을 가는 것도 아니니 느긋하게, 또 신중하게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아직 의회가 시엔을 특정하지 못했으니까.
섣불리 움직여 정보를 주었다간, 그 피해는 영지로 돌아오게 될 터다.
재림 전이야 이미 잃어 지킬 것이 없었으나, 이젠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기꺼이 지키리라.
지킬 것이 있음이 그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전생에 이미 뼈저리게 후회하며 익힌 진리였다.
누렁이는 누렁이대로 나림을 데리고 나서고, 또 나비는 나비대로 정보를 수집하러 나갔다.
그러니 이참에 낮잠이나 더 자자 싶었는데, 이번에는 파린이 난리였다.
“심심해. 심심하다구.”
“잠이나 자.”
“위대한 용은 안 자도 돼.”
“용이야 그렇겠지. 인간은 잔다. 나도 잘 거야.”
시엔이 심드렁히 대꾸했다.
그러자 파린이 무슨 소리냐는 듯 되물었다.
“너도 마찬가지거든? 반쪽짜리지만.”
“요게 갑자기 막말을 하네. 반쪽짜리라니.”
“여튼 섞였잖아.”
딱히 틀린 말은 아니라 시엔이 순순히 수긍했다.
시엔이 애초에 저를 대하는 말투나 예법 따위에 신경을 쓰지 않았으니까.
중요한 것은 관계이고 속으로 생각하여 따르는 마음이지, 표현 따위야 뭐.
그보다는 어린 용이 걱정이었다.
나중에 성룡이 되고 나서도 이 꼴이라면 퍽 끔찍한 일이 되고 말 테다.
언어란 때론 격에 맞을 필요가 있었으니까.
야. 인간아. 나 배고픈데 한 입만 먹어 보자.
위대한 용이 내려와서 크게 포효하고 나서 하는 소리로는 영 위엄이 떨어지지 않겠는가 하고.
당하는 이 입장에서도 황당하기 그지없으리라.
한 입만 달라고 하면, 대신 조금만 드셔야 합니다, 하고 대답할 수도 없을 텐데.
어차피 시엔이 살아서 그 광경을 볼 수도 없었다.
한별의 말로는 오래 살겠다지만, 파린이 다 커서 어엿한 용이 될 때까지는 아닐 터였다.
어엿한 용이라니.
시엔이 제 생각에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에 파린이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왜 필요도 없는 잠을 자는데?”
“잠이 필요한가의 문제가 아냐. 내가 그렇게 하고 싶은가의 문제지.”
“왜 필요도 없는 잠을 자고 싶은데?”
“너는 간식은 왜 먹고?”
“큭.”
말문이 막힌 파린이 분한 듯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잠시 그대로 시엔을 노려보더니, 평상시에 하던 대로 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넌 내 수호자고, 날 보호할 의무가 있어. 그리고 내 심심함으로부터도 날 지켜야 해. 안 그러면 심심해서 죽어버릴지도 몰라.”
“심심함이라. 그것참 강적인데.”
시엔이 킬킬거리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인간과 용의 교감을 지켜보던 일행도 나갈 채비를 하기 시작했다. 하나만 빼고.
시엔이 이채를 띠며 세올을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고급지 한 뭉치를 한 켠에 쌓아두고 정신없이 펜을 놀리는 중이었으니까.
요즘엔 좀체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세올은 게으르다.
리치의 시간 감각은 인간과는 달라서 느긋하기 짝이 없다.
그리고 시엔이 생각하기로는 딱히 리치라 그렇다기보단 원래 저렇게 생긴 녀석이라서다.
생체 강신체 연구를 할 때는 아주 열성이었다.
그러나 완성을 목전에 두고 나서는 아주 세월아 네월아 내팽개치고 그저 사내들 훔쳐보는 데에나 관심이 있었다.
정작 주문을 쓰고 나니 지금의 신체보다 불편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거기에 화염탑의 부탑주, 그 알렌이라는 꼬맹이가 지금 신체에 아주 열성이라는 점도 한몫했을 테고.
“선배.”
“놔둬. 무슨 영감이라도 떠오른 모양이지.”
시엔이 세올을 재우치려던 트리예를 만류했다.
용의 심심함을 달래주는 일은 막중한 임무지만, 그게 마법사의 영감을 방해할 정도는 아니다.
그렇게 호화 객실을 나서니 또 막상 갈 데가 막막하다.
시엔 본인이야 의미 없이 어슬렁거려도 이것저것 보며 즐기는 유형이었지만, 파린은 꽤 까탈스러웠으므로.
그렇다고 딱히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도시를 좀 둘러보려는데, 안내인을 붙여 줘요.”
“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고급 여관이라면 안내인 여럿을 두기 마련이다.
심지어 싸구려 여관이라도 마찬가지였다.
대개는 거리에 나와서 호객하는 꼬맹이가 동전 몇 개에 신이 나서 앞장을 서곤 했다.
그 녀석들이야 여관에 소속되기보다는 용역에 가까운 꼴이지만.
잠시 후 푸른 정복을 입은 안내인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정복 차림은 호객꾼 따위가 아니라 제대로 된 안내인이라는 뜻이었다.
고급 여관이란 대개 큰 상단에서 운영하고, 또 큰 상단은 도시와 연계가 되기 마련이었다.
안내인이 복장을 갖춰 제 소속을 드러내면 손님이 둘러보는 데에 훨씬 편리하고 또 위험도 적었다.
큰 상인은 건달들과도 연결이 되어 있다 보니 객을 노리는 소매치기나 강도들도 몸을 사리기 때문에.
“어디로 모셔드리면 되겠습니까?”
“할타스는 처음이라. 볼 게 뭐가 있죠?”
“일단 할타스가 자랑하는 대륙 최대의 카지노가 있습니다. 손님께서는 다이아몬드관을 이용하실 수 있겠습니다. 안내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안내인은 제대로 교육을 받은 듯, 그 태도가 공손하여 흠잡을 곳이 없었다.
어지간한 귀족가의 접객 담당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으니.
“다이아몬드 관이라. 제일 높은 등급인가요?”
“상단주님께서 모시라 하셨습니다.”
상단주가 신경을 써 준 모양이었다.
그와는 별개로, 여관에 들자마자 모종의 사정으로 주류는 무료가 아니라 반값에 제공한다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마는.
술은 돈이 들지만, 귀빈 대우는 그렇지 않았다.
값비싼 술로부터 아래로 쭉 들이켰으니 그 손실에 속은 쓰리고, 그렇다고 실력 있는 용병의 비위를 거스르기도 싫으니 하는 조치였다.
이쯤에서 좀 봐달라고 하는 느낌으로다가.
시엔이 파린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도박이라. 어때?”
“별로. 어차피 돈은 많잖아.”
파린이 고개를 저었다.
시엔 역시 도박을 즐기지는 않았다.
망령을 이용하면 따기는 어렵지 않고, 그렇다고 순수하게 즐기기에는 돈 벌 기회에 시간을 날리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으니까.
“주도를 즐기신다면 유흥 지구는, 아니, 실례했습니다.”
안내원이 문득 파린을 바라보고 말을 바꿨다.
아이를 데리고 갈만한 곳은 못 되는 모양.
뒤이어 인공 호수를 파 놓은 대공원과 희귀한 생물의 전시관 따위의 설명이 이어졌다.
공원은 따분하고, 희귀 생물은 이미 심연탑에서 더 귀한 것을 본 참이라면서 파린이 그리 까탈을 부리니 안내인이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때 시엔이 넌지시 물었다.
“공방 거리는 어때요?”
“귀한 분께서 가실 만한 곳이 못 됩니다만.”
에두른 거절이었다.
공방이란 원래 외인에게 함부로 보여주는 장소가 아니다.
기술자란 치들은 마법사와는 달리 제 지식을 나누는 데에 인색하기 짝이 없는 녀석들이었다.
게다가 그 땅의 주인, 영주에게도 실례가 되는 행동이었다.
대개는 특산품이 있고 그 기술이 유출되는 일은 영지에도 해가 되는 일이라서.
그러나 그건 그네들 사정이고, 어차피 자유도시란 눈치를 볼 주인도 없는 땅이 아니던가.
“공방? 공방에는 가본 적이 없네, 좋아, 인간. 앞장서도록.”
거기에 파린이 관심을 보였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망설이던 안내인이 결국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제가 결정할 일이 아니니 제 윗선으로 그 결정을 떠맡길 작정으로.
그리고 잠시 후.
안내인이 재차 고개를 숙였다.
“기다리시게 하여 죄송합니다. 케이즈가 운영하는 공방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제화 공방은 어떠십니까?”
“좋지.”
시엔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검장을 찾기는 쉬워도 좋은 제화장을 찾기는 어렵다고 하던가.
신발이라는 것이 사람 발밑에 깔리는 것에 불과하지만, 사실은 걷고 뛰는 상태가 모두 신발에 달린 것이었다.
게다가 사람이 각기 발의 치수가 다르고 모양이 천차만별이라 꼭 맞는 물건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
거기에 아름다움까지 갖추기란 정말로 어려운 일이었다.
숙련된 제화장은 어느 영지를 가도 대접받을 수 있었다. 제화장이 영지를 떠나도록 영주가 가만히 놔둘 리도 없겠지만.
영지의 제화장만 해도 아예 영주성 바로 옆에 그 공방을 끌어다 놓지 않았던가.
영지의 젊은이들이 그 아래 도제로 들어가고 싶어 아주 안달이었다.
그러니 보통 제화 공방이라 하면 대개 콧대 높은 마스터와 가려 받아 재능 넘치는 도제들이 상주하는 곳이었다.
그런데 다른 곳도 아니고 제화 공방을 봐도 좋다 하니 궁금증이 날 수밖에는.
그렇게 도착한 제화 공방은 아주 개판이었다.
파린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뭐야. 거지 소굴이야?”
표현은 다소 싸구려이긴 하나, 그보다 정확한 감상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창고처럼 커다란 공방 앞으로, 거지꼴을 한 녀석들이 길가에 축 늘어진 채다.
옴폭 팬 뺨이며 힘없는 눈빛이 며칠은 굶은 사람처럼 매가리가 없다.
“공방에 웬 거지들이 이리 많죠?”
“그것이, 손님. 이자들은 거지가 아니라 공방의 도제들입니다. 한 개 조가 휴식을 취하는 모양입니다만.”
안내인을 대신해 손님을 맞이한 공방의 관리인이 대답했다.
“이게 도제들이라구요?”
시엔이 다시 거지들을 내려다보았다.
마스터들 중에야 도제를 노예처럼 부리는 이도 심심치 않게 있는 법이었다.
기술의 전수가 급여보다 훨씬 값진 것이다 보니, 도제가 감수해야 할 일이기도 했다.
그러니 거지꼴을 그러려니 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한 개 조라니?
“저희 공방의 도제는 백여 명에 이릅니다. 인원의 가감이 잦아 현재의 정확한 숫자는 모르겠습니다만, 상시 그 정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스무 명이 한 조를 지어 교대로 작업을 진행합니다.”
“백 명? 도제를 그리 둬서 관리가 되나요?”
“손님께서는 멀리서 오신 모양이시군요. 분업화 공방은 처음이십니까?”
“분업화?”
처음 듣는 단어에 시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말로 설명을 드리기보다 보시며 이해하시는 편이 쉬우실 겁니다. 이쪽으로 드시지요.”
일행이 관리인을 따라 공방 안쪽으로 향했다.
한 바퀴 둘러보고 나니, 시엔이 곧장 이해했다.
분업화, 그러니까 일을 나누어 한다는 뜻이었다.
일부는 밑창만, 또 일부는 신발의 콧등이나 신발귀 따위만 열심히 만드는 중이었다. 그리고 또 일부는 한데 모여 만들어진 신발의 부품들을 한데로 조립해 완성품을 만들었다.
“분업화 공정으로 공방의 생산량은 하루에 오십 켤례에 달합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신발들이 북부 각지로 팔려나가지요.”
관리인이 자부심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대단한 생산량이었다. 공방 하나에서 열심히 만들어 봐야 하루에 네다섯 짝이 전부인 것을 생각하면 놀라운 수준이 아닌가.
확실히, 이러한 방법이라면 생산량을 획기적으로 늘릴 수가 있었다.
그러나 생산량뿐이었다.
제대로 된 신발은 비싼 물건이나, 이리 찍어내는 것이 제 품질을 낼 수 있겠는가 하고.
“흐흐, 아닙니다. 저희 제품의 품질은 이미 대륙 북부에 있어 검증된 것들입니다. 각각 공정에서의 숙련도가 높으니 완제품 역시 그러하지요.”
“신발의 치수는요? 사람마다 발이 다른데.”
“연구 끝에 발의 넓이 둘과 길이 일곱으로 나누어 열 네 개의 치수를 제조하고 있습니다. 발모양이 다르다 해도 사람의 것이라 결국 비슷하니 개중에 안 맞는 것이 있겠습니까?”
“그런 게 편할 리가 없을 텐데요.”
관리인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물론 귀한 분들께서 쓸 물건은 아닙니다. 그러나 저희 물건은 값이 쌉니다. 신발이 비싸다 보니 저마다 얼치기로 만들어 신다 보니, 그보다는 월등히 품질이 좋은 물건이 아니겠습니까.”
가격을 듣고 나니 수긍이 되는 말이었다.
고작 그 정도 값으로 사는 물건이라면야. 충분히 지갑을 열 만할 테니까.
“그렇게 싸게 팔면 남는 게 있나요?”
“흐흐, 인건비가 거의 안 드니까요.”
관리인이 자랑스럽게 떠들었다.
알고 보니 도제라는 것들은 겉모습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거지들이었다.
할타스 외각 판자촌의 빈민들이었으니까.
“조립 공정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단순한 노동이라 별 기술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틀이면 몸에 익혀 능숙히 해내지요.”
그런 이유로 빈민들을 데려와 썼다.
“하루 네 끼를 제공합니다. 그래도 저희 상단은 거기에 더해 하루 삯까지 쳐 줍니다. 상단주님께서 참으로 속이 깊으신 분이셔서. 그래서 서로들 하겠다고 난리입니다.”
관리인의 말에서 존경이 묻어나왔다.
그 말인즉슨, 다른 상단의 공방에서는 하루에 네 끼만 주고 공짜로 부려 먹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런데. 몇 끼? 시엔이 눈을 가늘게 떴다.
“잠깐, 네 끼요?”
“흐흐, 놀랍지요? 아침 점심 저녁에 야식을 추가로 제공합니다. 일당을 치는 데에 야식까지 주니. 거의 빈민 구제에 가깝지요. 상단주님께서 워낙에 인품이 뛰어나신 분인지라.”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시엔이 인상을 찌푸렸다.
하루에 네 끼를 제공하면 아침부터 밤까지 계속 일을 하는 것이냐 물었다.
그랬더니 엉뚱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니까 다른 공방에서는 일당도 안 지고, 거기에 더해 밥 세 끼 차려주고 끝이라는 뜻이었다.
“그뿐이 아닙니다. 밖에 도제들이 쉬는 곳에 깔개를 보셨지요? 그것 역시 무료입니다. 쉴 때는 푹 쉬어야 한다는 상단주님의 뜻이지요.”
어째 입을 열 때마다 점점 가관이었다.
“다른 공방에서는 깔개에도 돈을 받는다고요?”
“개당 단가도 있고. 관리도 해야 하는데 공간도 많이 차지하니까요. 저희야 무료로 베풉니다만.”
관리인이 자부심 어린 미소를 지었다.
하나같이 지치고 야윈 도제들과는 여실히 다른 태도였다.
그렇게 공방을 둘러보고 나오니 마침 점심 시간인 모양이었다. 도제들이 바가지 하나씩을 들고 손에 너부죽한 빵을 쥐었다.
보아하니 스프라고는 멀게서 물이나 다름없고, 빵이야 말이 빵이지 그냥 반죽을 펴다 구운 것이다.
그마저도 누가 뺏을세라 서로 경계하며 허겁지겁 퍼먹는 중이었다.
베른닐이 질린 기색으로 고개를 저었다.
“세상에. 노예도 이렇게는 안 다룰 겁니다.”
“상인 놈들이 그렇지 뭐. 자유도시니까.”
“아까 그놈 표정 보셨습니까? 시엔 님만 아니면 당장에 칼을 뽑았을 겁니다.”
“그나마도 나은 편이라잖아.”
“그게 더 괘씸하지 말입니다.”
“허락할 테니까 가서 칼부림 좀 하고 올래?”
시엔이 농담으로 받았다.
불쾌한 광경이지만 시엔이 뭐라 할 것은 아니다.
어차피 내 땅 내 영민도 아닌데 무어.
“에이. 몇 놈 벤다고 될 일도 아니잖습니까.”
“뭐. 그렇지.”
시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도시에 주인이 없으니 이 꼴이었다.
상인이 들어차 주인 행세를 하나, 실상은 제 속을 채우는 데에만 관심이 있으니 어쩔 수 있나.
상인은 살이 찌고, 나머지는 야위어갈 테지.
그때였다. 시엔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베른닐, 검 뽑아.”
“진짜 베고 옵니까? 진짜 벱니다? 괜찮습니까?”
시엔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아니. 그쪽 말고. 저쪽.”
공방으로 다가오는 한 떼의 무리였다.
저마다 손에 쥔 것이 시퍼렇게 날이 선 장검이다.
그제야 베른닐이 굳은 낯으로 검을 뽑아 들었다.
< 46. 도화선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