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 밀림 속으로 [11] >
밀림 한복판에 파괴의 흔적이 역력했다.
쓰러지고 또 쓰러져 쌓인 나무들.
짓이겨진 풀이 내는 비린내만 짙게 깔렸다.
그리고 그를 배경으로 걸터앉은 해골이 하나.
기이한 광경이었다.
살점 하나 없이 깨끗하게 발린 사람의 골격이다.
이미 백골로 남은 시신이 모로 누운 나무에 앉아, 하릴없이 정강이뼈를 앞뒤로 흔들고 있었으니.
‘왜 이리 안 와?’
세올이 투덜거림을 삼켰다.
속으로 삼켜 소리를 내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아래쪽에 성기사가 하나 산 채로 깔려 있었으니까.
신성 주문을 난사하며 난리를 치면 피차 피곤한 꼴이 아니던가.
그러니 빨리 나비가 와 줘야 성기사를 인계하고 선배님께 갈 수 있었다.
이 뼈만 남은 앙상한 흉물을 벗어던지고서.
“거기 누구 있습니까?”
나름 조용히 있는다고 있었으나, 라이뱅은 성기사 중 가장 실력자가 아니던가.
그 기색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세올이 아래턱을 꽉 다물었다.
대답해봐야 돌아오는 건 성창이겠지, 하고.
그러나 이어진 성기사의 말에, 세올이 반사적으로 대답을 붙이고 말았다.
“……혹시 아까 그 마물입니까?”
-마물이라니, 그게 사람에게 할 말인가?
“사람이라. 보통 사람의 모습이 그러하진 않습니다만.”
-왜, 꼽추나 문둥병자에게도 그리 말하나?
“적어도 그들에게는 피와 살이 있…… 아니, 아닙니다. 실언이었습니다.”
-그냥 피차 조용히 있지. 조금만 기다리면 진짜 사람이 구하러 올 테니까.
세올의 빈정거림에, 라이뱅이 입을 다물었다.
그러기를 또 잠시였다. 성기사가 또다시 말을 걸어왔다. 아무래도 심심해서 그런가? 세올이 그리 생각했다.
“그쪽, 당신을 뭐라 불러드려야 합니까?”
-아까는 다짜고짜 성창을 날리더니만.
“혹시 천신께서 계심을 부정하십니까?”
-그럴 리가. 조금 너무하신다 싶으시긴 한데 관측해 지켜보시니 세상이 존재한다는 건 상식이잖아?
“그러한 상식이 통하지 않는 불신자가 넘쳐나는 세상입니다. 그러니 당신은 성기사가 대화하지 못할 상대는 아니로군요. 이전엔 실례했습니다. 일전에 당신과 같은 존재와 악연이 있었기에. 아까운 형제자매분들을 잃었습니다.”
-그건, 뭐…….
세올이 뺨을 긁적거렸다.
까득까득 뼈 부딪쳐 갈리는 소리가 났다.
그러다 문득 세올이 목소리를 냈다.
-그건, 음, 어. 미안하게 생각해.
“……그때도 당신이었습니까? 세오르그 오스텐. 그러한 이름이었지요.”
-이제 그 이름은 버렸는데. 어, 변명은 아니지만, 그때 나도 제정신이 아니었거든?
“제정신이 아니었다?”
-어떤 놈이 있는데. 여인의 마음을 홀리는 능력이 있어서. 마법은 아니고, 세뇌나 최면 비슷한, 그렇다고 그건 또 아닌. 무슨 수단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그때는 놈에게 속아 일을 벌였단 말야.
변명은 아니지만.
사람이 말을 하는 데에 이러한 접두사가 붙으면, 백이면 백, 천이면 천 무조건 변명이 맞았다.
“구하러 오셨다 하셨지요? 전에 벌인 일에 대한 속죄입니까?”
-그, 아니. 그건 아닌데. 선배님, 그러니까 시엔 님께서 구하라고 하셔서.
“시엔 형제님 말입니까? 그분을 따르십니까?”
-아까 말했잖아. 여인의 마음을 홀리는 못된 놈이 있다고. 내가 홀려 있을 때 시엔 님이 풀어주셔서.
“흠. 그렇다면 일단은 기다리겠습니다.”
-기다린다니, 뭘?
“당신이 용서를 구할 때까지요.”
-아니, 나도 피해자라니까. 난 단지 속아서…….
세올이 한숨을 푹 쉬었다.
말이 안 통하네. 이래서 성직자들이란.
둘 다 입을 다물고 나니 한동안 침묵이 맴돌았다.
침묵을 깬 것은 또다시 라이뱅이였다.
“……어쩌다 그런 꼴이 되셨습니까?”
-나? 못생겨서.
“예?”
라이뱅이 되물었다.
세올이 씁쓸한 미소를 짓는 기분을 냈다.
뼈만 남은 해골의 표정이라 할 것이 달리 없었다.
-못생겨서 그랬다, 왜. 추녀라서. 살면서 한 번이라도 미인이었으면 싶어서. 농담 같지? 응, 아냐. 얼굴 가죽 벗겨낸 지금 꼴이 나을 정도야. 적어도 두상은 괜찮은 편이었으니까…….
“그, 맥락을 못 잡겠습니다만.”
-뼈로 돌아다닐 수 있으면 여기에 살이랑 가죽도 씌울 수 있을 거 아냐.
라이뱅이 그제야 세올의 말을 이해했다.
동시에 이해하지 못했다.
“대체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왜냐구? 세상에 첫 번째로 미학을 노래한 음유시인이 있고 나서부터, 미추가 갈렸으니까. 사람이 아름다운 것을 보아 귀히 여기며 보듬으나 추한 꼴을 보고 고개를 돌리며 경멸하지.
성대가 없는 리치의 기이한 말이나 어쩐지 처연한 목소리로 들렸다.
“사람의 아름다움은 외면에서 나오는 것이…….”
-그 소리 좀 치워줄래? 너도 유부남이라여? 네 부인은 어때? 미인이야? 하긴 뭐. 잘 생기고 능력 있는데 당연하겠지.
할 말이 없어진 라이뱅이 입을 다물었다.
-여인으로 태어나 한 번도 여인인 적이 없었어. 차라리 침을 뱉고 외면하는 사내가 나아. 내면의 아름다움? 웃고 배려하고 온갖 정성을 다 바쳐도 에이, 씨! 결국 친구로 남고 싶다잖아!
“어, 그.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라이뱅이 기세에 눌려 위로를 건넸다.
한 번 서러움이 터진 세올의 말이 이어졌다.
-그게 어쩔 수 없다는 건 나도 알아. 사람이 마음이 본래 그렇게 만들어진 걸 어떡하겠어. 누구나 예쁜 게 좋아. 심지어 고양이처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짐승을 그저 예쁘다고 상전으로 모시기까지 하는데. 그런데 그게 잘못된 건 아니잖아.
쫑알쫑알 말이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못생긴 입장에선. 그저 그리 태어났는데. 그게 죄야? 죄인처럼 천형으로 받아들여 살아야 해? 아니, 그렇게 못 해. 그렇게 안 해. 그래서 이 꼴이야.
“아. 예.”
-사실, 그래서 뜻을 이루기는 했는데.
“뜻을 이루셨군요.”
-응. 그런데 요즘은 또 마음이 복잡해. 생전에는 웃으면 뭘 처웃냐, 혹은 뭘 쪼개냐, 보기 싫으니 치워라 이런 소리를 들었는데.
“방금 생전이라 말씀하셨…….”
-요즘은 그냥 눈웃음만 쳐도 사내들이 꼬여. 온갖 추파가 날아드는데 이런 생각이 드는 거야. 내가 본래 모습이었어도 이랬을까. 겨우 껍데기 가지고 좋다며 달려들 거였다면 사람이 인성이고 교양이고 대체 그게 무슨 소용인데.
“아, 그러시군요.”
라이뱅이 성의 없이 대꾸했다.
뒤늦은 후회였다. 이리 말이 많은 존재인 줄 알았으면 애초에 말을 걸지 말 것을.
-……그래서 말야, 요즘에 드는 생각은. 아. 이쪽! 이쪽이야!
“와. 진짜 해골이다!”
-너! 막내 주제에 어디서 건방지게. 아무리 시녀라 해도 엄연한 서열이 있는…….
“라이뱅 경! 라이뱅 경? 살아 계시나요? 구해드리러 왔는데요오.”
나비가 깔끔하게 무시하며 소리쳤다.
나비에게 중요한 것이 시엔의 명령이지, 해골이 하는 말 따위가 아니었으니까.
해골이 있을 거라더니 진짜로 해골이 있었다.
과연 시엔 님, 위대하셔라!
딱 그 정도 감상이었다.
“나비 자매님? 이 아래입니다!”
수다의 끝을 직감한 라이뱅이 다급히 소리쳤다.
* * *
수풀로 덤불 따위가 발칵 뒤집힌다. 위장해 감춘 덮개들이었다. 뻥 뚫린 동혈로 꾸역꾸역 치밀어 올라오는 것들.
늑대의 대가리를 하고 털가죽을 뒤집어쓴 인간의 형상, 늑대인간들이었다.
개미집에 물이 든 듯 와글와글 끓어올라 순식간에 지상으로 솟아오른다.
베히모스가 그 광경에 분노했다.
아직은 베히모스의 영역이었다.
대동면에 들었기로서니, 하찮은 괴물이 땅 아래 자리를 잡고 새끼를 치지 않았던가.
심지어 근방의 동혈이 모두 이어져 베히모스의 소굴과 통하는 참이었으니.
자칫하면 연약한 새끼가 화를 입을 수도 있었다.
새끼? 그러나 새끼는 이미 없다.
크허엉! 베히모스가 포효했다.
한층 더 솟아오르는 분노.
아직까지 살아 숨 쉬는 새끼의 원수. 새끼가 죽어가며 붙인 표식이 베히모스의 감각 속에 선연하게 떠오르고 있었으니까.
하찮은 늑대인간 따위 언제든 쓸어버릴 수 있다.
그러나 원수를 놓칠 수는 없다.
베히모스가 늑대인간 떼를 무시하려 했다. 떼거리가 겁도 없이 돌진해 달려들기 전까지는 그랬다.
베히모스의 오랜 삶에서 참으로 당황스러운 순간이었다. 지상의 그 어떤 괴물도 감히 베히모스를 대적하지 못했다. 그저 냄새만으로도 꼬리를 말고 도망치니 괴수의 제왕에게 이빨을 들이미는 멍청한 생물이 없었던 탓이었다.
베히모스가 발을 굴렀다.
그저 짓밟는 행위로 늑대인간 넷의 목숨이 단숨에 끊어졌다. 베히모스의 발이 다시 허공에 오르고, 쾅, 떨어지며 늑대인간 여럿이 곤죽이 되어 바닥에 남았다.
쿵. 쿵. 쿵. 연신 발을 놀리는 베히모스. 덩치에 맞지 않게 민첩한 동작이라, 그 아래 늘어나는 것이 뼈 꿰인 가죽과 그 안에 있던 붉은 살덩어리들이었다.
그러나 늑대인간이 질주를 멈추지 않았다.
첫 번째 늑대인간이 베히모스의 발등에 올라 제 손톱을 박아넣었다.
본래 베히모스의 가죽이란 일개 늑대인간이 감히 흠집조차 낼 물건이 아니었다.
병장기도 들어가지 않은 질긴 가죽이 두껍기도 참으로 두꺼운 탓에.
그러나 오러. 늑대인간이 뿜은 오러는 달랐다.
오러 앞에 금속 아닌 것이 남아날 수가 있으랴.
늑대인간의 발등을 파고든 손톱. 늑대인간이 발로 털가죽을 붙잡고 양팔을 재게 놀렸다.
네 줄기가 교차하여 연신 상처가 더해진다. 쩍쩍 벌어지며 가죽의 자투리가 튀었다.
마침내 연약한 속살에 닿아 베히모스의 피가 솟았다.
첫 번째 늑대인간이 올랐으니 두 번째, 세 번째가 올랐다.
베히모스의 털실같이 엉킨 모질이란 타고 오르기에 참으로 편리한 손잡이가 아닌가.
한 놈이 세 놈으로, 세 놈이 열 놈으로. 열 놈이 스물에 서른…….
늑대인간들이 베히모스의 발을 타고 위로 올랐다.
제 마음에 드는 자리에 털을 붙들고 손톱을 뽑아 그 위에 노란빛 광채가 새어 나왔다.
크허엉! 베히모스가 다시 고함을 질렀다.
손을 들어 다리를 훑고 손바닥으로 내리치며 또 자리에서 뛰고 바닥을 짓밟는다.
오르던 늑대인간이 후두둑 떨어진다. 정글의 바닥이란 낙사에 관대하니 개중 대부분은 다시 일어난다.
늑대인간이 맹목적으로 베히모스에게 향했다.
늑대인간의 뇌리를 차지한 것은 오직 하나뿐.
저 거대한 적을 멸하라.
제 생명과 본능보다도 더 우선해야 하는 절대적인 명령. 늑대인간이 제 몸을 돌보지 않고 돌진하는 이유였다.
베히모스에게 늑대인간은 겨우 발목에나 닿을 법한 작디작은 미물이었다.
그러나 그 숫자가 칠백에 달하며, 제 안위를 살피지 않으니 떼로 미친 것들이다.
베히모스의 하체로부터 그 위를 향해 털이 점점 더 붉게 물들어갔다.
그러나 베히모스도 호락호락 당할 괴물이 아니다.
칠백의 늑대인간이 금방 육백이 되었다. 그리고 또 오백이 되고, 사백이 된다.
늑대인간이 손아귀에 들어가면 수건을 짠 듯 붉은 물이 주르륵 빠진다.
내려치는 손바닥이 다시 오르고 나면 잘 다져진 덩어리만 남았다.
늑대인간이 절반 이상이나 사라지고 나서, 기어코 한 놈이 베히모스의 머리 위에 섰다. 베히모스의 거대한 손바닥이 제 머리를 내리친다.
몸을 던진 늑대인간이 추락하며 발버둥을 쳤다.
손톱을 뻗어 벽에 박으려는 것이 눈꺼풀이었다.
오러가 깃든 손톱을 박고 주륵 미끄러지니 거대한 괴물의 윗눈꺼풀이 세로로 쩍 갈라진다. 그리고 그 안쪽 눈동자 역시 그대로 긁혀나갔다.
크아아아! 마침내 베히모스의 비명이 터졌다.
손이 눈으로 향하니 늑대인간 하나가 때에 맞춰 뱃가죽을 뚫고 그 속으로 파고들었다.
온통 붉고 비린 뱃속.
오러를 뿜는 손톱이 위와 아래 왼쪽과 오른쪽을 마구 난도질했다.
베히모스의 비명이 더욱더 성량을 더했다.
눈은 아파 뜰 수가 없으니 세상은 온통 시커멓고, 내장에 불이 붙은 고통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결국 엉덩방아를 찧고 누워 좌로 우로 마구 굴렀다.
그 서슬이 밀림이 아예 쓸려나가기 시작했다.
거대한 밀대가 지상을 쓰는 꼴이었다.
시설의 옥상에서 지켜보던 히예브가 휘파람을 불었다.
“휘유. 장관인데. 이 몸이 합류하면 베히모스의 멱을 따는 것도 금방이겠는데 말이야.”
“그럼 가서 처리하지 그래요?”
“저거 봐. 덩치가 크면 그냥 구르기만 해도 재앙이지. 저 틈바구니에서 나라고 별수가 있을까.”
히예브의 말대로였다.
베히모스가 바닥을 구르니 고통스러운 까닭이다.
그러나 늑대인간에겐 더없는 재앙이었다.
늑대인간의 숫자가 급격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삼백에서 이백. 그리고 백여 마리에 이르기까지.
히예브가 고개를 저었다.
“안 되겠는데. 늑대인간 더 없나?”
“대주기에 푼 물량까지 합하면 오천이 넘었는데, 어떻게 여기서 더 만들어내요?”
“그럼 다른 건?”
“늑대인간 하나로도 대단한 업적이거든요?”
“그럼 저건 뭔데? 너희가 만든 게 아닌가?”
히예브가 한 편을 가리켰다.
수목 사이로, 흰 것이 하나 반쯤 몸을 가렸다.
그렇게 반만 보이는 모습이 꼭 사람의 뼈다귀와 같은 꼴이었다.
“젠장, 리치잖아요!”
나림이 빽 소리 질렀다.
“왜 소리를 질러?”
“당장 처리해요. 빌어먹을 고위 흑마법사라구요!”
“아. 적이다 이거지? 뭐, 아무리 내가 아가씨한테 빠졌다고 해도 명령처럼 그러는 건 좀 그런데.”
“명령이 아니라 부탁인 걸로.”
“부탁이라. 뭐. 그러지. 내게 빚 하나 진 거야.”
히예브가 히죽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옥상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 * *
시엔은 천천히 걷는 중이었다.
굳이 앉아 쉬지 않아도 그저 산책하듯 거니는 것뿐으로 충분히 체력을 회복할 수 있었으니까.
뛰지 않는다면야, 여인 하나 품에 안고 걷는 정도야 운동 축에도 못 드는 일이었다.
“다음번엔 제가 쓰러지도록 하지요. 뷔아가 안고 뛰십시오. 한 번 제대로 고생을 해 봐야 헛소리를 안 하지.”
뷔아가 키득키득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사내가 되가지곤.”
“아니, 사내라고 안기지 말라는 법이 있답니까?”
“뭐. 그래요. 내가 안고서 온 대륙 동네방네 다 돌아다녀야겠네. 여기 명예 성자가 꼴사납게 여인 품에 안겨 늘어져 있다고 소문이나 내야지.”
“강철 체력을 가진 뷔아의 무용이 온 대륙에 퍼지겠군요. 기록되기로 무쇠 팔의 성녀쯤 될 겁니다.”
“아, 진짜. 한 마디를 안 져요.”
“그러니 입놀림을 더 단련하시지요. 한데 그렇다 해도 쉽지는 않겠습니다. 제가 본디 혓바닥으로 싸우는 데에는 져 본 역사가 없어서.”
“잘났어, 정말.”
“그걸 이제 알았습니까?”
뷔아가 다시 풉풉 웃음을 터뜨렸다.
시엔도 마주 킬킬거리던 와중이었다.
찰팍. 발을 디뎌 물 밟는 소리와 함께 난데없이 발이 푹 빠졌다.
그리고서도 서서히 발이 가라앉는 느낌이 드니 제대로 된 진창을 밟았다 싶었다.
진창이라고?
시엔이 발을 빼 단단한 곳을 디디며 앞을 유심히 살폈다.
이미 해가 져 깜깜하나, 시엔의 눈이 어둠을 꿰뚫어 본 지가 이미 오래가 아니던가.
지금까지와는 기묘하게 다른 풍경이었다.
가볍게 일렁이는 지면. 특유의 광택을 보아 옅게 깔린 물기가 차오른 땅이었다.
나무가 뻗은 것은 마찬가지나 수목의 질이 바뀌어 더 두껍고 두툴두툴하니 못생긴 것들뿐이었다.
개중엔 땅에서 위로 솟은 뿌리가 곧게 서거나 혹 아치를 이루거나 하며 아기자기하게 쭉 펼쳐졌다.
일반적으로는 늪지라고 하는 지형이다.
시엔이 펄쩍펄쩍 뛰어올라 물 위로 드러난 나무의 뿌리를 밟으며 나아갔다.
그리고 이내, 탁 트인 호수가 눈앞에 펼쳐졌다.
수심이 깊어져 더는 수목이 자라지 못하니 시야를 가로막는 것이 없었으니까.
뷔아가 곧장 탄성을 터뜨렸다.
“와아. 예쁘다.”
“여기가 히드라 못이로군요.”
어설프게 떠오른 달이 아슬아슬하게 호수 경계에 걸쳤다. 샛노란 것이 차분한 모양으로 일렁거렸다.
개구리는 개굴개굴하고, 맹꽁이가 꾸악꾸악 대답을 붙인다. 벌레의 나직한 울음이 여러 종의 화음으로 찌르르 사위를 감쌌다.
그러나 밤의 호수가 으레 그러하듯 자연스레 있는 배경의 소리라 사람이 들어 의식하지 않는 것이다.
적막한 여유가 고즈넉하게 넘치는 밤의 물가.
참 좋다.
처한 상황도 잊고 뷔아가 그리 생각했다.
좋은 풍경. 좋아하는 이의 품에 안겨서.
그래. 지금이야. 누가 먼저 매달리면 뭐 어때.
어떤 종류의 낭만이 여심의 등을 떠밀었다.
“저, 시엔. 저, 할 말이 있는데.”
“하시지요.”
“그게…….”
뷔아가 한 번 머뭇거리고, 다시 용기를 냈다.
아니, 용기를 내려던 참이었다.
“뷔아. 잠시.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네?”
“시끄러운 녀석 때문에, 잠시.”
시엔이 눈살을 찌푸렸다.
머릿속에 쩌렁쩌렁 울려대는 비명 섞인 외침 때문이었다.
-아악, 선배님! 저 죽었어요! 죽었다구요! 으아악!
< 42. 밀림 속으로 [1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