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 밀림 속으로 [7] >
“베히모스의 영역은, 당연히 중앙이지. 제일 좋은 자리잖아.”
베히모스의 영역은 대수림의 중심에 위치했다.
괴물은 대개 더 넓은 영역,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계속해서 싸우는 생물이 아니던가.
영역만 보아도 베히모스의 위세를 알 법했다.
몇십년 째 모습이 보이지 않음에도 가장 중앙에 넓은 영역이 유지되고 있을 정도라면야.
“그냥 살짝 보고만 와. 남서로 쭉 내려가면 되는데, 그러다 늪이 나오면 영역의 끝을 지난 건데. 베히모스가 사라진 상태라면 늪이 나올 때까지 아무런 문제가 없지 않겠어?”
“그 외에 조심할 게 있을까요?”
“늪이 나오면 곧장 빠져. 히드라가 있거든.”
“히드라라면, 머리 아홉 달린 그 괴물 말이죠?”
“응. 요즘 얌전하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늪에서 히드라랑 싸우는 건, 음. 더 현명한 자살법이 있을 테니까.”
여우 수인이 키득거렸다.
나름 회심의 농담이었는지, 주변에 선 동족들이 배를 움켜쥐고 바닥을 굴렀다.
이해할 수 없는 유머 감각이었다.
시엔 일행이 멀뚱히 그 꼴을 바라보았다.
여우 수인이 시엔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에이, 너무 긴장해서 웃을 여유도 없어? 수십 년 안 보였는데 무슨 일이 있을까. 우리도 성인식 때 담력 시험으로 한 번씩은 다녀오곤 해. 그랬는데…….”
여우 수인이 한숨을 푹 쉬었다.
“요즘 늑대인간들 때문에 그걸 못 해서. 성인식을 못 치르다니. 요즘 애들이 그래서 담이 모자라다니까. 흑랑의 인간 어머니께서 가시는 김에 살펴보고 알려줬으면 하는데.”
“뭐, 그렇게 하지요.”
“고마워! 작은 인간이 어머니라기에 무슨 일인가 싶었더니, 좋은 녀석이었네! 그럼 자살 구덩이 쪽에 위험한 종이 자리를 잡은 건 아닌지, 바깥으로 안 나가고 남은 늑대인간이 있는지, 딱 그 정도만 봐주면 돼.”
“자살 구덩이요?”
시엔이 되물었다. 특이한 이름이 아닌가.
붉은 꼬리의 족장이 한결 친절해진 태도로 설명을 붙였다.
“대수림 중앙에 있는 수직 동굴이야. 우리는 자살 구덩이라 불러. 괴물들이 거기서 자살하거든.”
“괴물이 자살을 한다구요?”
“그럼. 늙고 병든 괴물 본 적 있어? 없지?”
“바깥에는 제법 있긴 하지만, 대수림에는 없다는 말이네요.”
“그럼. 대수림의 괴물은 항상 쌩쌩하지. 그게 다 허약한 것들이 스스로 몸을 던져서 그래.”
“호오.”
시엔이 눈을 빛냈다.
이건 상당히 흥미가 가는 이야기였다.
짐승 무리에서 늙고 병든 개체가 이탈하는 경우는 흔한 편이었다. 당장 늑대 무리만 해도 그러하니.
물론 허약한 개체가 무리를 위해 스스로 떠나나, 아니면 남아있어 봐야 공격받아 쫒겨나니 그 전에 도망을 치는지는 의견이 분분한 편이었지만.
허나 괴물이 그러한 생태를 보인다는 말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애초에 괴물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말부터가 기이하기 짝이 없고.
“그럼, 부탁해! 돌아오면 제대로 대접할 테니까!”
여우 수인들의 배웅을 뒤로하고, 시엔 일행이 더 깊은 곳으로 향했다.
* * *
라크라크는 영악하다.
약한 것들의 특징이기도 했다. 그저 군집을 이뤄 강할 뿐, 한 개체는 연약하기 그지없으니.
그리고 그 영악한 머리로, 특정 위치에 먹잇감이 알아서 걸어들어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도 보다 약한 먹이들이었다.
비슷하게 생긴 것들에 비해 가죽은 얇고 뼈는 무르며 속도가 느려 사냥하기에 훨씬 수월한 먹이들.
결국, 라프라크가 몰려들어 사냥감을 기다렸다.
라프라크가 사냥하기에 참으로 좋은 장소였다.
높은 나무가 그 위로 뻗은 가지들이 엮어 천장을 만드니, 라프라크가 자리를 잡고 아래 지나는 먹이에 뛰어들어 물어뜯기만 하면 되니.
그리고 그 아래로, 늙은 오우거 한 마리가 노구를 이끌고 움직였다.
한때 영역의 주인으로 맹위를 떨쳤으나, 산 것이 시간을 이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근육은 녹아 흐물텅한 지방이 대신 자리를 잡고, 가죽엔 자글자글한 주름이 가득해 아래로 축 늘어졌다.
그리고 대수림에서, 이렇게 약해진 괴물의 끝은 정해져 있었다.
늙고 병들어 수식 동굴에 스스로 몸을 던지는 것. 그렇지 않으면 아주 무시무시한 일이 일어나고 만다고.
대수림의 괴물이라면 어느 것이건 본능으로 알아 실행하는 종말이었다.
늙은 오우거 역시 그 종말을 위해 나아가는 중이었다. 오우거의 귀에 작은 소음이 잡히기 전까진.
뀨우?
삐이!
검은 털 뭉치들이 하늘에서 쏟아졌다.
순식간에 전신으로 달라붙는 작은 것들.
오우거가 분노해 팔다리를 휘둘렀다. 늙어도 오우거는 오우거였다.
순식간에 라프라크 열다섯이 곤죽이 된다.
그러나 수백에 이르는 숫자에 겨우 열다섯이었다.
라프라크의 몸통 절반이 쩍 벌어져 흉악한 이빨이 가죽에 박혔다. 살점이 뭉텅이로 뜯겨나가고 녹색 체액이 콸콸 흘렀다.
그러면 라프라크는 황홀한 듯 살과 피를 씹으며 또다시 뛰어 한 입 크게 베어문다…….
압도적인 숫자 앞에, 오우거의 저항은 오래가지 못했다.
* * *
그르르르…….
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어둠 속, 성난 으르렁거림이 울려 퍼졌다. 잔뜩 심기가 상한 울음소리다.
베히모스.
대수림 지하에 웅크린 강대한 괴물.
베히모스는 불쾌함을 감추지 못했다. 속에 강산이 끓어오르는 것만 같다. 내장을 쥐어짜는 듯 불편하고 고통스럽다.
베히모스가 태어나 처음 느끼는 감각. 배고픔. 바로 굶주림이었다.
크르……
베히모스가 처량히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먹이가 없다. 어째서? 왜?
베히모스의 지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늘의 구멍이 비추는 땅에는 항상 으스러지고 뭉개져 곤죽이 된 먹이가 있어야만 하는데.
물론, 그간 하늘의 구멍이 밝고 다시 어두워지는 동안 먹이가 솟아나지 않는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래 봐야 어쩌다가 한 번 정도.
하늘의 구멍이 밝고 어두워지는 시간이 네 번을 반복하도록 먹이가 없는 적은 생애 한 번도 없던 시련이었다.
크르르…….
베히모스가 동굴의 어둠 저편, 한 곳을 바라본다.
그리고 높은 곳에 하늘의 구멍을 바라보았다.
다시 어둠의 저편으로, 다시 하늘의 구멍으로.
망설이듯 베히모스의 시선이 오가더니, 결국 푸쉭 강한 콧김을 뿜었다.
먹이, 없다. 그러나 베히모스는 먹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먹이를 찾는다.
베히모스가 펄쩍 뛰어 수직 동굴의 암반에 발톱을 박아 넣었다.
육중한 거체.
그러나 그 무게를 쉽게 버티는 악력이 있다.
베히모스가 팔을 당겨 위로 쭉쭉 나아갔다.
* * *
대수림에 든 것이 벌써 일주일이었다.
그간 제대로 된 괴물 하나도 마주치지 못했다.
오랜만에 현상 세계에 나온 라프라크들이 왕성한 식탐으로 난리를 치는 와중이었으니까.
그러다 보니 그저 지친 몸뚱이가 남았다.
수인들이 물나무라 부르는 수목에 관을 꽂아 수분을 충분히 섭취하고, 매 끼니마다 바르키아올이 잡아 바치는 고기를 구워먹었음에도 몸이 지친다.
더운 날씨.
달라붙어 피를 노리를 벌레 따위와 신경전.
가만히만 있어도 지치는 곳을 돌아다니니 체력이 축나는 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시엔이야 신체가 신체라 멀쩡한 편이었지만.
아무래도 일행이 이리 지쳐서야 정말로 다급한 때에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리라.
“잠시 쉬어가도록 하자.”
“으아, 축축해.”
세올이 늘어지는 소리를 하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밀림의 바닥이란 습하니 깔고 앉을 만한 바닥은 못 된다. 평시에는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이었다.
그러나 이미 옷 버리고 몸 피곤하면 원래 사소한 것쯤은 그냥 넘기기 마련이 아니던가.
흑랑의 늑대 수인들이 준비한 깔개 위에 누워서, 시엔이 궁리했다.
수천의 늑대인간이 갑자기 솟아나진 않았을 테고, 분명 영역이 있을 텐데 수인들이 아는 바가 없다.
하지만, 자살 구덩이라 했던가?
빛이 닿지 않을 만치 깊은 동굴이라 했으니, 그 내부 또한 광대한 용량을 가지고 있으리라.
수천의 늑대인간 정도는 들어갈 정도로.
대수림에 이변이 있다면 바로 거기에 있을 터.
그러나 대체 무엇이 늑대인간들에게 오러를 불어넣었을까.
시엔의 생각으로는, 엘프의 세계수가 영맥을 뻗는 와중에 어떤 이상을 일으켰을 확률이 높았다.
한별이 말하기는 대수림이 어쩌고 종족이 어쩌니 했지마는, 정작 저네들은 대수림에 엘프 좀 들어가 살게 하겠다고 세계수의 뿌리를 뻗었으니.
그 말고 이상 현상이 일어날 일이 있나?
그때, 뾰족한 목소리가 시엔의 생각을 깨뜨렸다.
“적습이에요! 다들 일어나요!”
“무슨 일입니까!”
“괴물이에요! 천신이시여!”
일행이 벌떡 일어나 태세를 취했다.
뷔아의 머리 위로 세 개의 성창이 떠오르고, 그 끝에 겨누는 것이 새까만 털 뭉치였다.
시엔이 손을 들어 뷔아를 급히 말렸다.
“잠깐, 잠깐만. 일단 성력을 거두시지요.”
“하지만, 괴물이잖아요! 그것도 이전에 그 숲에.”
뷔아가 몇 년 전의 일을 떠올렸다. 역병 둥지를 찾으려던 숲에서였다.
저와 같은 괴물 수백의 습격을 받지 않았던가.
보호막을 까맣게 뒤덮어 이빨을 박아넣던.
그 끔찍한 광경이 돌연 선명하게 떠올라서.
“아. 괜찮습니다. 욘석. 이리 온.”
삐이. 끼이끼이.
라프라크가 슬슬 기어 다가와 시엔의 발치에 몸을 비볐다. 어째 힘이 없는 모습에 시엔이 털을 붙잡아 번쩍 들어올렸다.
어딘가에서 검은 액체가 뚝뚝 떨어져내렸다.
“시엔…….”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다친 모양인데.”
삐이…….
라프라크가 구슬픈 소리로 울더니, 이내 힘을 잃고 축 쳐졌다.
털이 빠져 바닥에 툭 떨어지니 시엔에 손에 검은 털 한 움큼만 남았다.
바닥에 떨어진 라프라크가 형체를 잃고 흐물흐물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사각사각 풀 흔들리는 소리.
그리고 먼 곳, 우직 쾅쾅.
나무 부러지고 발 구르는 소리.
“뷔아, 보호를. 세올, 트리예, 뼈 방패 대기.”
“시엔? 뭔가 알겠어요?”
“대형종이 오고 있는 모양입니다. 큰 놈이네요.”
뷔아가 침을 꿀꺽 삼키며 신성을 일으켰다.
신성 보호막이 일행을 감싸는 가운데, 풀 흔들리는 소리가 모두의 귀에도 들려 가까워졌다.
그리고 밀림의 모든 틈으로부터 라프라크 떼가 밀려든다.
검은 파도가 밀려드는 것만 같은 광경.
보호막에 막힌 라프라크가 좌우로 갈라져 일행을 스치고 그대로 달려나갔다.
그리고 무언가 거대한 그림자가.
“지금!”
두 시녀가 미리 준비한 주문이 일시에 터졌다.
허공에 솟아오른 뼈다귀들.
촘촘히 얽혀 장막을 친다.
동시에 무언가 뼈 방패를 후려치는 거대한 것.
고위 흑마법사 둘의 방어 주문이 한 방에 깨진다.
여세를 잃지 않은 앞발이 신성 보호막을 후려쳤다. 쩍쩍 커다란 금이 나며 빛의 조각이 흩날린다.
시엔이 손을 뻗었다.
머리 위로 뭉친 어둠에서 검은 화살들이 날았다.
어둠 화살. 흑마법사의 기초 주문.
그러나 한 타래에서 서른 발 이상 쏘아내는 수준은 쉬이 흉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표적은 크고, 화살은 많았다.
대형종의 사지 여기저기 화살이 박혔다.
크헝! 고통찬 비명이 귀청을 찢을 듯 하다.
괴물이 펄쩍 뛰어 뒤로 물러났다.
크르르르. 섬뜩한 으르렁거림.
두 눈이 정확히 시엔을 노려보았다. 마치 빈틈을 노리듯이.
여간 괴물은 아닌데.
상처 입은 괴물이 물러나 상대를 살피다니.
괴물의 지능이 보통 이상이라는 뜻이었다.
덕분에 그제야 괴물을 살필 틈이 났다.
일견 보기에는 거대한 곰을 닮았다.
그러나, 그 덩치가 성인 키의 세 배가 넘는 곰은 세상에 없는 법이었다.
회색 털은 서로 엉겨 붙어 두꺼운 실타래를 늘어뜨린 모양이고, 목 없이 몸통에 붙은 대가리는 앞으로 툭 튀어나왔다.
비교적 짧은 다리와는 달리, 길쭉한 두 팔과 그 끝에 장검처럼 긴 발톱이 일곱 개나 솟았다.
“베히모스! 당장 피하셔야 합니다!”
므잉이 목소리. 반쯤은 비명이었다.
“베히모스? 저게?”
시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다기에는, 너무 앙증맞지 않나?
육 미터에 이르는 괴물에 앙증맞다는 표현은 어울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기록에 따르면 어떤 놈이랴.
두 발로 선 것 중 가장 강대한 괴물.
그 몸집은 인간이 세운 가장 큰 성채와 같으며, 무엇으로도 뚫을 수 없는 두꺼운 가죽, 산을 뽑아 던지는 괴력을 가졌다.
단신으로 재앙과 다름없으니 초대형종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종류에 속한다…….
물론 사가라는 치들이 과장을 좋아한다고는 해도, 성채만 한 괴물이라기엔 좀…… 앙증맞지.
“어머니, 빨리 전략적 후퇴를…….”
“아냐. 충분히 상대할 만한데. 봐봐. 다쳤잖아.”
회색 털가죽 군데군데 붉은 얼룩이 번졌다.
시엔이 쓰는 어둠 화살 주문의 위력이 세상 어느 흑마법사보다 강력한 것이나, 그래도 기초 주문의 한계는 여실한 편이었다.
무엇으로도 뚫을 수 없는 가죽이라고?
잘 뚫리는데?
“뷔아, 전투에 들어가면, 때를 노리다가 성창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최대한의 힘을 실은 일격이어야 합니다. 라이뱅 경은 뷔아의 호위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좋아요, 나만 믿어요.”
후광을 틔울 정도의 신성을 가진 성녀의 일격이라면, 숨통을 끊을 화력으론 충분하리라.
다만, 베히모스의 속도가 심상치 않으니 움직임을 묶어둘 필요가 있었다.
“세올, 트리예. 어둠 화살. 위력은 상관없고 최대한 많이 쏴. 세올은 머리, 트리예는 무릎을 노려.”
“최대한 많이. 알겠습니다!” “예, 선배님.”
“누렁이는 파린을 안전하게. 나비는 알아서. 므잉. 일족을 이끌고 소리를 지르며 주변을 돌아. 시선만 끌면 되니 무리할 필요는 없다.”
“사냥하실 생각이십니까? 위험한 상대입니다만.”
“충분해.”
“……믿겠습니다. 성공한다면 대대로 남기겠군요. 일족, 전원 어머니 말씀 들었지? 오늘, 베히모스를 잡는다.”
“셋, 하면 움직인다. 하나. 둘. 셋!”
동시에, 시엔의 무영창 주문이 곧장 발동되었다.
그림자 속박.
베히모스가 움찔 몸을 떨었다.
몸이 움직이지 않을 테니까. 그러나 그도 잠시.
무식한 힘이 곧장 주문을 깨뜨렸다.
이걸 이리 바로 깨버린다고?
어지간한 트롤도 꼼작 못하도록 막는 위력인데.
산을 뽑는 괴력 하나만큼은 문헌대로인가.
그러나 그 잠깐이면 충분했다.
선공을 잡는 데엔 딱 그만큼이면 충분했으니까.
< 42. 밀림 속으로 [7]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