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의 망령재림-214화 (210/268)

< 41. 망령 재림 [4] >

심연탑에 온 보람은 넉넉히 챙긴 셈이었다.

과거사도 알았겠다, 눈을 챙겨 마력도 늘었다.

그림자 탑의 제어도 얻었다. 새로 지어질 심연탑에 이어놓으면 끝.

원했던 볼일은 대강 마무리한 셈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새로운 용무가 생겼다.

“그 상인 놈 불러와.”

“예?”

“탑의 재산을 보고 압류하겠다잖아. 하라 그래.”

어차피 넘겨줄 것이야 낡은 건물, 그리고 그 수준의 집기가 전부였다.

“그, 살림은 좀 챙겨가면 안 되겠습니까? 아깝지 않습니까…….”

“새 건물에 낡은 물건 놓아서 뭐 해? 새 걸로 다 맞춰 줄 테니 그냥 버려.”

“아직 쓸만한 것들입니다. 어디 한 군데 고장……은 났지만 말끔하게 수리하기도 했고. 차라리 그 돈으로 연구를 조금 더 지원해 주시면…….”

재스타가 눈치를 보며 말했다.

가난한 마탑의 주인이 아닌가.

시엔이 보기엔 궁상이고, 좋게 말하면 절약이 몸에 배어 그렇다.

그래도 탑주라는 놈이 이러하니 딱한 마음이 절로 일어난다.

그와는 별개로, 꽤 마음에 드는 태도이긴 했다.

앞으로도 마탑을 이끌 녀석이 이러하니 작은 것 하나 허투루 넘기지 않으리라.

“나 돈 많아.”

“선배님……!”

“감동은 됐으니 그 상인이라 불러.”

“예, 알겠습니다! 당장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이 저녁에?”

“시간이 무슨 문제겠습니까. 지금 보내 도시에서 밤을 지내고 아침에 전달하면 빠를 테지요.”

“아주 좋아. 마음에 들어. 그렇게만 해.”

시엔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재스타가 대답을 붙이곤 집무실을 뛰쳐나갔다.

보통 아랫것을 불러 명령을 내리지 않나?

제가 직접 찾아가 전달하던가?

뭐. 마탑이 제대로 서고 나면 저 녀석도 제대로 된 위엄을 부릴 수 있으리라.

지금이야, 뭐, 사이비 수도회 회장 비슷한 처지이니.

* * *

“선배님, 페이발란트 상단주가 찾아왔습니다.”

“벌써?”

시엔이 되물었다.

어제저녁에 사람을 보냈는지 어쨌는지.

확인은 하지 않았다. 재스타가 충성스럽게 장담을 했으니 아마 보냈을 것이기에.

그렇다고 이렇게 아침부터 마탑을 찾아왔다고?

아귀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재스타가 보낸 인선이 오밤중에 상단주의 집문을 두드려 소식을 전하지 않고서야.

게마다 수도회가 도시와 떨어져 있었다.

소식을 받은 상단주가 곧장 꼭두새벽부터, 아니, 그 거리를 생각하면 해가 채 뜨기도 전에 출발했다는 소리가 아닌가.

의문은 금방 풀렸다.

“저, 선배님. 그런데, 상단주가 용병을 잔뜩 끌고 와 당장 강제 집행을 하겠다며 난리입니다.”

보아하니 소식이 엇갈린 모양이었다.

원래부터 무력으로 탑의 재산을 차압하겠다 마음을 먹고 있었겠지.

그러나 그도 꽤 어색한 일이다.

바로 어제 방문해 물러나더니, 돌아가자마자 바로 마음을 바꿔 준비를 시작했어야 시간이 맞지 않나.

갑자기 왜? 뭐가 급해서?

큰 일이 벌어진 치곤 재스타의 태도가 그리 다급하진 않았다. 시엔이 물었다.

“용병단을 끌고 왔다고?”

“예. 지금 정문에서 대치 중입니다.”

“용케도 막고 있네?”

“그, 기사분들께서…….”

마법사의 입에서 나오는 기사‘분’들 이라니.

시엔이 기막혀하는 것도 잠시, 바로 상황을 파악했다.

기사단이 하는 일이 대개 수련이 아니던가.

마탑의 부지가 넓으니 밖에서 수련하다, 용병단을 보고 일단 막아섰을 터다.

제 주인이 있는 장소에 수상한 무장 집단을 들일 수는 없을 테니까.

그렇다면야 급할 것도 없지.

시엔이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상단의 용병이라 해 봐야 수준은 알 만 했다.

정규 기사단 반절, 그도 실력순으로 차려진 호위 기사단을 앞에 두고 무얼 할 수가 있을까.

개인이 가진 무력의 차이 외에도 기사의 권위란 감히 용병이나 상인 따위가 어찌할 것이 못 된다.

“그, 명예 성자님과는 관련 없는 일이오나…….”

“저희의 임무는 주군을 지키는 일입니다.”

“어으, 그러니까 그분과는 별개의 일이오만.”

예상대로, 상단주는 숫제 애원 중이었다.

수도회와 상단 사이의 일이니 비켜달라고 호소하면서.

그렇게 애걸하던 상단주가 시엔을 보고 활짝 미소를 지었다.

시엔이 그 모습에 절로 웃음을 터뜨렸다.

뭐가 반가워서 함박웃음일까.

스스로 사지에 찾아왔으니 살아서는 돌아가지 못할 처지임을 모르고.

“사제님!”

“무슨 일이시죠? 이 아침부터…….”

“사실, 강제 집행에 나섰습니다만, 기사 나리들께서 비켜주지 않으시지 않습니까.”

“강제 집행이요? 어제 그렇게 돌아가시곤.”

“사실 광명 수도회가 이미 악성 채무자의 단계를 넘었습니다. 지금까지도 많이 참아준 겁니다. 심지어 이자조차 면해 주었는데도 상환의 의지가 전혀 없는 치들이니.”

“이런, 소식이 엇갈렸나 봅니다.”

“엇갈리다니요?”

시엔이 미소지으며 말했다.

“회장과 이야기를 나눈 결과, 채무 대신 수도회의 건물과 땅을 넘기는 것이 옳다 결론을 내렸지요. 어제저녁에 재산을 확인하라 사람을 보냈는데요.”

“아, 그럼…….”

“그렇지만 아직은 수도회라 이름 붙은 장소네요. 용병분들께는 죄송하지만 대기를 부탁드리죠. 재산 확인이야 상단주님이 직접 하시면 될 테구요.”

상단주가 비굴한 웃음을 흘리며 말을 흘렸다.

“그렇다면, 혹시 사제님께서 압류를 위한 재산 확인 절차를 보증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제가 빚에 몰린 이를 여럿 본 까닭에…….”

용병을 대기시키는 대신, 재산 확인을 하는 동안 저를 지켜달라는 소리였다.

대체 누가 누구에게? 어이가 없는 소리였으나 뭐, 잘된 일이었다.

“뭐, 어려울 것 없죠.”

상단주의 표정이 폈다.

그렇게 탑주와 상단주 둘과 나란히 탑 내부에 들어서 재산 확인이 시작되었다.

시엔도 방문한 이후 굳이 둘러보지는 않았던지라, 이때 같이 보니 참으로 가난한 꼴이기는 했다.

예전의 영화는 온데간데없이, 금 간 복도와 허름한 세간은 오히려 시엔의 얼굴이 홧홧해질 정도로.

그리고 마침내 장서고의 문이 열렸다.

“이, 이게 무슨…….”

상단주의 경악한 표정이 참으로 볼만 했다.

애초에 서책을 전부 진서고에 옮겨놓고는, 남은 책장을 넘어뜨리고 부숴 난장판을 내놓았으니까.

쓰러지고 박살이 난 책장이 가득한 넓은 방.

서고보다는 폐허에 가까운 꼴이었다.

“이, 이럴 리가 없는데……. 회장, 대체 이게 무슨 짓이오?”

“짓이라니. 뭘 말씀이십니까?”

“책! 서책들! 전부 어디로 빼돌렸단 말이오!”

“빼돌리다니,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오?”

“그렇다면 이 꼴이 대체 무엇이오!”

“수도회가 어려운 때가 하루이틀이 아니었던지라, 돈 되는 것들부터 처분해 남은 것이 없다고 이미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시엔이 흐뭇하게 웃었다.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서 어물쩡 넘어가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이제야 좀 마탑주 답네.

그러자 상단주가 시엔에게 매달렸다.

“보십시오, 사제님! 이것들이 이렇습니다!”

“이렇다는 게 무슨 뜻인가요?”

“그나마 돈 될 재산을 빼돌려 놓지 않았습니까! 이 서고가 바로 그 증거입니다!”

“증거라.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단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장서 사천 권이 있어야 할 서고가 이 꼴이 아닙니까!”

“사천 권? 여기에요?”

시엔이 부러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깨지고 부서진 잔해들만 보아선 사천 권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는 듯이.

그러면서도 천연덕스레 탑주에게 물었다.

“회장, 어찌 된 일이죠? 상단주께서 장서 사천 권이 있어야 주장하시는데요.”

“근거 없는 주장입니다. 애초에 서고에는 수도회의 중진 이외엔 출입할 수 없는데, 외인인 상단주께서 어찌 이리 말씀하시나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는데요?”

“그건…….”

상단주가 말끝을 흐렸다.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이 잔머리를 굴리는 모양. 뒤이어 상단주가 호소했다.

“전 회장, 돈을 빌려간 광명 수도회의 전 회장이 말했습니다. 서고에 사천 권의 서책이 있다면서요. 그걸 팔면 금화 삼십만 개는 될 것이라 했습니다.”

“금화 삼십만 개라. 토지와 건물이 십만 개쯤 치면, 사십만 개 어치 담보를 잡으셨단 말이네요.”

“이런 낡아빠진 건물에 외진 땅이 십만 개라니요. 어림도 없습니다. 오만 개를 쳐도 많이 쳐 주는 겁니다, 사제님.”

“그럼 금화 삼십오만 개를 담보로 잡으셨던 거네요? 이전에 말하기로는 전 회장과의 친분으로 오십만 개를 대출해 주셨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어. 그것이.”

상단주가 얼굴을 붉혔다.

“죄송합니다. 상인이 어찌 친분만 보고 그리 큰 금액을 거래하겠습니까? 그래도 담보와 십오만 개가 차이가 나고, 이자를 받지 않았으니 그만하면 우정은 충분히 치룬 셈이 아니겠습니까. 사제님께서도 한 상단을 가지고 계시니 아실 겁니다.”

“뭐. 맞는 말이에요. 제게 거짓을 말한 것은 조금 괘씸하지만,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어요. 상인이 상인답지 않게 대출을 해주었나 했더니.”

“죄송합니다, 사제님.”

“알면 됐어요. 그래도 십오만 개짜리 우정이라면 상당히 값진 것이로군요?”

상단주가 눈알을 굴렸다.

시엔이 말하는 것이 비꼼인지 아니면 큰 상단의 주인으로 하는 진심인지 알 수가 없었기에.

“회장님. 상단주께서 이리 말씀하시는데, 서책의 행방에 대해 어찌 생각하시나요?”

“상단주께서 원하신다면야, 밖에 대기하는 용병을 전부 불러들여 수도회를 수색해도 상관없습니다. 서책을 밖으로 빼냈다면 애초에 정문을 틀어막고 있던 용병들이 모를 리도 없었을 테지 않습니까.”

“이렇게 말하는데요? 수색하시겠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거참! 이 사기꾼이! 하아!”

상단주가 방방 뛰었다.

답답해서 미치겠다는 태도였다.

더 약을 올려야지.

사람이 속이 답답하고 머리에 화가 차면 그때는 반드시 실수가 나오는 법이니까.

시엔이 싱글벙글 웃으며 부채질을 했다.

“사기꾼이라. 그렇게 확신하세요?”

“그렇지 않습니까! 분명히 있어야 할 서책을 없다 우기는데!”

“원한다면 수색하셔도 괜찮다 하셨는데요? 회장의 뜻이 그러하다면 저도 기사를 물려 용병이 들도록 해도 괜찮겠네요.”

“이미 다른 곳에 빼돌렸으니 수색해도 좋다 장담을 하는 것이 아닙니까!”

“다른 곳이요? 그게 어디인지 아세요?”

“제가 알 리가 있겠습니까!”

상단주가 분통을 터뜨렸다.

시엔이 생각하는 척을 하다 말했다.

“제 생각에는, 상단주께서 친우분에 대한 믿음이 과하신 게 아닌가 싶기도 한데요.”

“그건 또 무슨 뜻이십니까?”

“전대 회장이 수도회의 신물과 건물 토지, 재산을 몽땅 담보로 걸고 잠적했다 하던데. 그런 인물을 보통 사기꾼이라 하지 않나요? 상단주님께 있지도 않은 서책을 있다고 말했더라도 이상하진 않을 것 같은데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왜죠?”

“그야.”

무어라 말하려던 상단주가 돌연 입을 다물었다.

찔러보려면 지금인가.

시엔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척 물었다.

“저는 이해가 안 되는데요. 심연탑의 서책이 분명 존재할 것이라 말씀하시네요? 전대 탑주가 그리 말하던가요? 그렇게 신임할 만한 친우였나요?”

“그렇습니다. 절대 거짓을 말할 친구는 아닙지요, 사제님.”

“그러니까 전대 탑주가 말이지요?”

“예, 그렇습니다. 사제님.”

“전대 탑주가요?”

“몇 번을 물으셔도 제 대답은 같습니다.”

“그러니까, 탑주가.”

“예, 어찌 그러시는지…….”

시엔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대체 탑주는 누구야?”

“예? 아.”

상단주가 그제야 깨달은 표정이 되었다.

“애초에 심연탑을 알고 노렸네?”

“아니,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도통…….”

“이거, 붙잡아.”

시엔의 말에, 기사들이 빠르게 움직여 상단주를 붙들어 제압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그만둬! 사람 살려! 이보게! 누구 없나!”

“소리 질러 봐야 소용없어.”

시엔이 말을 이었다.

“심연탑에서 방음이 잘 되는 시설이 둘 있는데. 하나는 탑주의 집무실이고, 하나는 장서고야. 전자야 그렇다 치고, 서책 붙들고 연구하는데, 잡음이 들리면 꽤 불편하거든.”

재스타가 부서진 책장 사이에서 굵은 밧줄을 꺼내 들었다. 미리 준비해 숨겨 둔 것이었다.

뒤이어 상단주를 의자에 묶어 꽁꽁 싸매니, 애벌레의 고치 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웁, 우웁…….”

“뭐, 결론부터 말하자면, 넌 죽어. 내가 그 인장을 가진 이를 보고 살려둔 역사가 없으니까.”

“웁! 웁!”

“중요한 건 어떻게 죽느냐지. 편히 죽느냐, 아님 차라리 죽여달라 애원하다 그렇게 가느냐.”

시엔이 손짓하자, 트리예가 앞으로 나서 가방을 펼쳐놓았다.

그 위로 온갖 수술 도구들이 은빛으로 번쩍거렸다.

상단주가 몸을 떨었다.

“사람의 목숨이란 게 의외로 질기기도 하고, 마침 신성 치료가 가능한 이도 있으니까.”

시엔이 손끝에서 신성을 피워올렸다.

상단주는 살며 처음으로 신성이 세상 끔찍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 살고 싶나?”

“우웁! 우우웁!”

상단주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시엔이 웃으며 대답했다.

“널 살려둬야 할 이유를 모르겠거든? 그 이유를 네가 만들어야 할 거야. 내 듣기에 타당하다면……. 어쩌면 예외 한 번쯤 허용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 41. 망령 재림 [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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