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 숲에 살면 자연인 [4] >
늑대인간 따위보다 훨씬 좋지 않은 소식이었다.
시엔이 재차 확인했다.
“마지막 대주기가 언제였지?”
“제가 듣기로는 삼십사 년 전이에요.”
“말도 안 돼. 너무 빨라.”
굳이 대주기라 이름을 붙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뜬금없이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다.
얼추 백 년 정도의 간격.
인간이 살며 대개는 한 번, 재수가 좋으면 모른 채로 살다 죽었다.
간혹 두 번 겪은 이가 있기는 했다.
그러나 개중 한 번은 너무 어려 자세히 기억하지 못하니, 결국 살며 한 번 정도 겪는 일이리라.
“시기가 좋지 않은데. 아니, 최악이잖아.”
인간이 역사를 기록하니 같은 잘못을 두 번 행하지 않으려는 이유도 그중 하나였다.
백 년 단위로 난리를 겪으니 대충 그쯤 되어서는 모두 긴장하여 단단히 대비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고작 삼십여년이 지난 지금 그러한 대비가 되어 있을 리는 만무.
심지어 내전으로 왕국의 군대 대부분이 소모된 상황이라면.
시엔이 한별을 재우쳐 진실이냐 묻지는 않았다.
한별이 거짓을 말할 이유도 없을뿐더러, 흑랑족이 찾아온 이유에 확신할 만한 증거가 있어 하는 말일 테니까.
“그러니 시엔이 나섰으면 해요. 흑마법사가 밀림에서 무적과 같은 존재가 아니던가요? 시엔과 같이 강대한 이라면.”
흑마법사가 밀림에서 유리하기는 했다.
밀림의 가장 큰 문제는 역병과 독물이었다.
그러나 흑마법사가 악식을 통해 무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으니까.
거기에 식물이 만든 천장이 해를 막아 사시사철 낮조차 어둡고, 또 축축한 땅이 아니던가.
음차원 에너지와 성질이 잘 맞아 주문의 위력 역시 대폭 상승했다.
시엔이 잠시 머리를 굴렸다.
흑마법사에게도 밀림은 불쾌한 장소다.
질척하고 뜨겁고 숨 막히며 또 때로는 추웠다.
개인적으로 불편하기 짝이 없겠지만, 그래도 해결하려면야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딱히?
“그리고 겸사겸사 흑랑족들의 터전을 되찾아주면 어떨까요?”
“딱히 그래야 할 이유까지는 없는 것 같은데.”
“세상에 얼마 남지 않은 진짜 수인족들이니까요.”
“가짜 수인족은 또 뭐고?”
“이미 대부분 인간이 되고 말았으니까요.”
한별이 쓰게 웃었다.
“한때 세상에 엘프는 즐거움을 노래하고, 드워프는 기쁨으로 땅을 파며, 수인은 저를 닮은 짐승의 야성으로 싸워나갔답니다.”
한별이 노래하듯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인간은 부귀와 영화를 쫓았지요.”
“그건 지금도 크게 다르진 않은 것 같은데. 엘프는 노래하고, 드워프는 땅을 파고, 수인은 싸우지.”
“저는 삶의 목적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한별이 침울해졌다.
“이제 드워프는 기쁨이 아니라 재화를 찾아 땅을 파요. 수인은 금화를 위해 싸우고, 익인들은 아예 왕국을 이뤘어요. 정말 모르겠나요? 아직 온전히 남은 종족은 엘프뿐이에요.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남았던 극소수를 제외하면요.”
“그게 세상이 변하는 모양일지도 모르고.”
“그건 변화가 아니라 멸종이에요. 이젠 전부 인간에 불과하니까. 그저 신체적 특성의 차이가 되고 말았답니다. 키가 크고 작고, 털이 있고 없고. 조금 오래 살거나 덜 살거나. 그 정도 차이요.”
“흠.”
시엔이 생각을 정리했다.
한별의 말이 일리가 있으나 그뿐이었다.
무언가 석연찮은, 마음에 걸리는 무언가가 그에 동의하기를 거부하는 느낌이라서.
“흑랑족의 대모가 곧장 결투를 신청했을 때, 그리고 바로 패배를 선언했을 때 제가 느꼈던 그 기분을 아시겠어요?”
수인에게 싸움은 당연한 수단이다.
그렇기에 당당히 결투를 청했다.
또한, 싸움의 목적은 승리가 아니라 생존이었다.
그렇기에 한별의 힘을 확인하자마자 바로 패배를 선언했다.
싸워 이기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으니까.
그저 새로이 머물 땅이 필요했으며, 그 수단으로 결투를 청했다.
그리고 승산이 없음을 알고 다시 다른 땅을 찾아 떠나려 했다.
수인의 방식으로. 수인답게.
한별이 떠나려는 흑랑족을 붙잡은 이유였겠지.
얼마 남지 않은, 인간 아닌 수인의 생존을 위해.
“그 건은 일단 그 대모를 만나봐야겠네.”
공감이야 해도, 시엔의 방식은 아니었다.
내 영민이 아니라면 도와야 할 이유가 무엇이랴.
그러나 도움 말고 거래 정도는 할 수 있다.
그에 상응하는 댓가만 지불한다면 얼마든지 응해줄 수 있는 노릇이었으니까.
* * *
“오! 네가 바로 이 땅의 주인인가?”
흑랑족의 대모, 므잉은 시엔보다 머리 한 개 반이 더 컸다.
가까이 붙으니 턱을 완전히 들어올려야 눈이 마주칠 정도였으니.
오른쪽 눈썹 위에서 눈 사이를 지나 왼쪽 뺨으로 이어지는 긴 상처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그야말로 그림에 나올 법한 전사가 아닌가.
“아직 어린 인간처럼 보이는데. 뭐. 우두머리라면 외양과는 상관없이 강자라는 뜻이겠지. 땅 주인, 네 이름은?”
“시엔. 시엔 티란디스야.”
“인간의 이름은 쓰잘데없이 길어. 므잉이다.”
므잉이 손을 내밀었다.
악수를 청하는 모양인데, 신장의 차이만큼이나 손의 위치가 참으로 높았다.
시엔이 턱 높이에 가까웠으니.
그렇다고 상대가 허리를 숙일 수는 없으리라.
시엔이 손을 올려 붙잡으니, 벌써 탐색전을 하려는 양 강한 악력이 손을 꽉 조였다.
시엔이 지지 않고 마주 힘을 주었다.
신체가 어디 보통 신체여야지.
서로 손을 놓고 나니, 므잉이 기분 좋은 모양새로 씩 웃었다.
“과연. 한가락 하는 전사로군.”
“그쪽이야말로.”
“네 늑대를 보았다. 훌륭한 마랑이더군.”
“마랑이라. 그게 무슨 뜻이야?”
“흠? 모르나? 괴물의 피와 살을 삼키고, 그 마성을 품고서도 한 마리 늑대로 살아남은 가장 뛰어난 개체들을 마랑이라 하지.”
펠리가 먹은 것이 괴물이라 하면 또 괴물이라 할 것들이었다.
흑랑족의 기준으로 마랑이 맞다.
“흠. 그걸 보면 곧장 알 수가 있어?”
“척 보면 알지. 내가 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놈이야. 그만큼이나 괴물을 삼키고서도 늑대로 남을 정도로 야성이 뛰어난 놈이 있을 줄이야.”
므잉의 설명에 따르면, 괴물을 많이 삼킨 늑대는 마성이 깨어 괴물이 되고 만다.
그러나 개중 강력한 야성을 가진 놈일수록 야수성을 유지해 늑대로 남았다고.
“많이 삼킨 줄은 어떻게 알아?”
“크잖나.”
므잉이 한 편을 가리켰다.
늑대가 한데 모여 휴식 중이었다. 흑랑족이 길들인 늑대들이리라.
개중에 유난히 털이 곱고 덩치가 큰 녀석이 눈에 띄었다.
펠리였다.
하기야, 황소만 한 다이어울프라니.
호들갑을 떨며 과장하는 식으로나 등장하지, 실제로 그러한 덩치를 가진 녀석이 펠리 말고는 어디에 있겠는가.
시엔과 눈이 마주친 펠리가 성큼 뛰었다.
달리기보다는 활공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다.
펠리가 시엔의 옆에 앉아 헥헥거리며 혀를 빼고 웃었다.
늑대가 이리 표정이 다양하던가? 행동은 영락없이 순한 개와 같았지만.
그럼 대체 개야 늑대야?
“오오! 어떻게 이토록 길들일 수가 있지? 비법을 묻고 싶을 정도야. 이러한 충성은 마랑이 아니라 늑대에게도 볼 수가 없었는데.”
“엘프들 말로는 늑대가 아니라 개라던데?”
“개라고!”
므잉이 인상을 구겼다.
“그건 이 훌륭한 마랑에 대한 모욕이지. 세상에 어떤 개가 이렇게 생겼던가? 애초에 둘은 치열부터 다르지 않나. 잘생긴 주둥이는 늑대의 특징이다.”
흠. 므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확실히, 듣고 보니 꼭 하는 짓이 개 같기는 하다만. 허나 그게 어쨌단 말인가. 태생이 늑대인데.”
그럼 내가 사내처럼 행동하면 사내가 되겠나?
므잉이 덧붙였다.
이미 사내처럼 행동하고 있지 않나? 시엔이 굳이 덧붙여 묻지는 않았다.
본래 부락과 같은 이종족 공동체가 모계 지배적 구조를 가지는 것이 그리 특이한 일이 아니니까.
“잡담이 길었군. 우리 흑랑족은 이 땅에 거주하고 싶다. 땅의 주인인 네게 결투를 신청하지.”
결투 신청이 날아들었다.
“한별보다 내가 더 강해. 그래도 괜찮겠어?”
“흠. 그럼 됐다. 그럼 이제 진짜로 떠나야겠군.”
므잉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엔이 잠시 당황했다. 이걸 바로 믿는다고?
“잠깐, 내가 속이려고 한 말이면?”
“날 속였나?”
“그건 아니고.”
“그럼 된 것이 아닌가? 애초에 무리의 우두머리가 거짓 따위로 일족을 이끌 수도 없을 테니. 저만한 마랑을 길들인 자가 혀만 놀리지는 않았을 터.”
나름으로 근거가 있는 신뢰였다.
그래도 사기 맞기에 딱 좋아 보이는데.
물론, 이 강인한 수인을 속이고서도 뒷감당을 할 수 있는지는 둘째치고서라도.
“한별이 말하기로는, 내가 대수림의 문제를 정리하고 너희를 고향으로 돌려보냈으면 한다던데.”
“그게 가능한 일인가? 지금의 대수림은 이상하다. 네가 그 한별보다 강하다 해도.”
“이상하다고?”
“그렇다. 이상 개체가 끊임없이 불어나고 있다.”
“이상 개체라는 게 무슨 뜻인데?”
“돌연변이 같은 놈들인데. 예를 들면, 고블린 중 이상 개체는 놀과 비슷할 정도의 괴력을 가진다. 지금 대수림엔 그런 이상 개체, 개중에서도 특히 늑대인간들이 판을 치는 통에.”
“늑대인간이라고?”
“그렇다. 본래도 강한 놈인데, 이상 개체가 득실거린다. 히드라, 그 강대한 영역의 주인마저 늪에 숨어 머리 하나만 간신히 내밀고 있었지. 심지어 늪을 지남에도 반응하지 않을 정도로 겁을 먹었다. 하물며 일족이 어찌 버티겠나.”
그래서 고향을 등지고 도망쳐 나왔다는 뜻이다.
므잉은 당당했다. 당연히 할 일을 했다는 듯이.
시엔은 쉽게 생각했다.
어차피 괴물은 괴물이다.
어떤 전술이나 전략을 쓰지 않으니 단일 개체가 강하다 해도 상대하기가 어렵지는 않으리라.
어차피 괴물 토벌이다.
있는 대로 마수를 풀기만 하면 그만인데.
그야말로 물량으로 밀어붙이면 될 테고, 시엔은 홀로 그게 가능한 이였으니까.
“어쨌든, 대수림이 정리되면 돌아갈 거 아냐?”
므잉이 잠시 고민하다 대답했다.
“글쎄. 굳이 돌아가고 싶진 않군.”
“안 돌아간다고?”
“여기로 오는 길에 인간들이 사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여기 엘프들이 사는 것을 보았지. 누구도 적을 경계하지 않더군. 그래서 알았다.”
“뭘?”
“대수림 바깥에선 굳이 적을 경계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 아닌가. 그렇다면 어째서 돌아가야 하나? 더 살기에 좋은 수림이, 그래, 숲이라 했지. 놀라울 만큼 평화로워.”
아, 그런 건가.
시엔이 문득 깨달았다.
그러고 나니 시엔이 할 거래야 명확했다.
“뭐. 아직은 그렇겠지만. 앞으로도 평화롭겠어?”
시엔의 말에, 므잉이 질문을 던졌다.
“아직은? 무슨 뜻인가?”
“바깥의 숲은 대수림과는 완전히 달라. 내내 같은 날씨가 이어지지도 않고, 새로운 종족을 받아들일 정도로 생태계가 빽빽하지 않아. 몇 년 내로 사냥감이 떨어지고 말걸.”
밀림의 생물 밀도는 기이할 정도로 높다.
한 종이 사라지더라도 다른 종이 그 자리를 채울 정도가 되니, 어떤 이변으로도 밀림의 생태가 끊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숲이라면?
일단 안전부터 달라 인구가 증가 속도가 다르다.
거기에 사냥 활동으로 부양하는 수인 특성이 합쳐지면, 몇 년 내에 숲의 생물이 싹 사라지고 만다.
“그때는 또 다른 숲을 찾아야겠지.”
“언제까지 그럴 수 있겠어? 몇 년마다 일족들을 이끌고 떠돌아다니겠다고? 그런 식으로 숲을 망치며 돌아다니면 다들 필히 막으려 들 테고.”
“그래서 결투가 있지 않나. 전쟁도 있지.”
“전쟁이라. 만약 나와 전쟁을 벌인다면, 일만보다 많은 군대를 상대해야 할 거야. 물론 내가 좀 많은 편이기는 한데. 어딜 가더라도 수천의 병력을 가진 이가 이미 땅을 차지하고 일을 텐데?”
“일만이라고?”
“물론 개중 절반은 고블린과 비슷한 수준일 테고, 남은 이 중 대부분은 놀 정도겠지. 그리고 나머지는 오크조차 간단히 도륙할 실력자들이고. 비율은 어디건 비슷할 거야.”
징집병과 군대, 기사단의 차이였다.
므잉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애초에 그녀는 일만이라는 숫자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승산이 전혀 없다는 사실은 알았다.
“결국, 돌아가는 말인가? 그 끔찍한 곳으로.”
“원한다면 내 땅에서 살 수도 있지. 그리고 나는 내 땅에 사는 이를 보호해야 하고.”
“네 무리에 들어오라는 뜻이로군.”
므잉이 시엔을 바라보았다.
“당장 결정하지 않아도 상관없으니까.”
“아니. 이미 결정했다. 널 따르도록 하지. 그리고 네 말이 계속해서 진실된 것이라면, 검은 갈기는 기꺼이 네 아이들로 살아갈 것이다.”
“좋아.”
수인의 신체 능력이란 애초에 인간과는 비교가 안 되지 않는가.
다만, 인간의 충성을 모르니 영민이 못 되고 용병질이나 하는 이들이지만.
그러나 이들은 다를 터다.
벌목이면 벌목, 농사면 농사. 군대면 군대가 될 이들이다. 아래로 들어오려는 이를 막지 않았으나 이만하면 환영해 팔을 벌려야겠지.
시엔이 만족스레 웃었다.
므잉의 결의 어린 목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는.
“그럼, 이제부턴 어머니로 모시도록 하지.”
“뭐? 왜 어머니야? 내가 여인으로 보여?”
“그건 아니다만. 일족을 보호하고 먹여 살리는 이를 어머니라 하지 그럼 무어라 한단 말인가?”
“……최소한 아버지 정도까진 안 되나?”
“절대 안 된다.”
므잉이 단호히 말했다.
< 40. 숲에 살면 자연인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