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 숲에 살면 자연인 [2] >
시엔 티란디스. 아주 괘씸하고 고약한 놈 같으니.
알린 왕비가 생각했다.
첫 만남부터 비범한 아이라고 생각했다.
과거의 치정인지 무엇인지 흐레이그의 전 대공자와 시비가 붙었다.
그에 상대가 결투장을 보내냈다.
그랬더니, 아예 결투장을 못 받은 사람처럼 굴며 회피하지 않았던가.
왕비가 받은 충격은 보통이 아니었다.
귀족의 문법이 아니다. 그러나 효과적이다.
특히나 상대를 약 올린다는 측면에서는 더없이.
이후 시엔이 발작으로 고통받던 왕자를 치료했다.
왕비는 결론을 내렸다.
정신이 병든 이를 낫게 하는 것은 범인의 능력이 아니다.
내 편으로 포섭해야겠다.
그리고 그 결과는?
더없이 만족스럽다.
그리고 동시에 누구보다 괘씸한 녀석이었다.
티란디스가 내전에서 입은 피해는 미미했다.
애초에 전쟁에 나선 병력이 적었다.
시엔이 직접 이끌고 나선 기사단 외 군대를 합쳐 이천오백여 명이 전부였다. 개중 전사자가 삼백이 안 된다고.
다른 귀족들이 보기에, 불합리한 숫자였다.
왕국 귀족들 모두 왕성 공방에서 무수한 피를 흘렸다.
수천에 달하는 피해는 예사였고, 그 대부분이 난리통에 징집된 사내들이었다.
조금 과장 섞어, 남은 남자라곤 아이 아니면 노인 정도였다.
사내의 숫자는 곧 영지의 생산력이다.
티란디스는 아예 군대만으로 나서 영민을 징집하지도 않았으니, 애초에 타격이 하나도 없다.
향후 수년 동안 상대적인 이득을 취할 수밖에는.
다른 귀족들이 견제하고자 할 터다.
그러나 왕비의 뜻은 워낙에 확고했다.
명백한 편애.
이참에 왕국 역사에 없던 대귀족으로 만들자.
이참에 이것이 바로 왕비를 따르는 이가 받게 될 보상이라고, 그렇게 널리 공표할 셈이었다.
게다가 세필리아와 혼인을 시키고 나면, 시엔이 왕실의 외척이 된다.
향후 수십 년의 권력이 왕권에 집중될 것이다.
그야말로 절대 왕권.
왕비가 델피르에게 권력을 이양하기까지의 이십여 년 동안 누릴 혜택이기도 했다.
그런데 거절당했다.
설마 거절할 것이라 추호도 생각지 않았다.
귀족이 권력을 탐하는 것은 당연한 생리였으니까.
거기에다, 심지어 티란디스에게 하사한 비옥한 땅을 흐레이그의 전 대공자에게 양도하기까지 했다.
티란디스가 다른 귀족들에게 전하는 메시지였다.
주니까 받긴 받았는데, 봐라, 바로 넘겨줬다.
욕심을 부리지 않을 터니 너무 불안해하진 말고.
영지 확장에 대한 야욕을 공공연히 접었으니.
절묘한 균형 감각이다.
실익을 챙기고서는, 다른 귀족이 견제할 명분을 전부 차단해버린 셈이었다.
사실 그 이득이라 해도, 왕비가 제시했던 대가에 비하면야 아무것도 아니지만은.
“욕심이 없는 것도 문제야…….”
귀족의 의무.
듣던 중 가장 순진한 소리였다.
그러나 시엔이 순진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래서 여왕이 곧장 그 뜻을 이해했다.
울타리를 쳐 놓고, 그 안에 들인 이를 보살핀다.
그게 아래 둔 영민이건 위에 둔 왕이건 간에.
그러나 그 울타리를 넓힐 생각이 전혀 없다.
억지로 타인을 품지 않는다.
제 영역 안으로 스스로 뛰어든 이만 챙길 요량.
“능력도 있어. 충성심도 뛰어나.”
왕비가 중얼거렸다.
능력과 충성심을 동시에 갖췄는데, 욕심이 없다.
왕을 섬긴다 했으니 억지로 시키면 하긴 할 터다. 그러다 울타리 바깥으로 밀려날 수가 있겠지만.
그러니 괘씸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럼에도 부득불 대공위를 수여하겠다는 것이 곧 알린 왕비의 결정이었다.
왜냐하면, 왕비에게도 확신이 있었으니까.
“공자도 자식을 가져보면 알겠지요.”
자식은 자식일 뿐이라.
딱 미혼의 젊은이가 할 법한 말이었다.
특히나 정략을 떠나 진짜 제 짝을 찾겠다는,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청춘이 아닌가.
그렇게 사랑을 찾아 자식이 생기면 그때도 그리 말할 수 있겠어.
때를 기다리자.
자식이 한창 예쁠 때에 제가 와서 권력을 탐하건, 아니면 슬그머니 바람을 불어넣는 방법이야 수십 가지가 넘으리라.
자고로 현명한 왕은 충신을 놀리지 않는 법이니.
알린 왕비가 미소를 지었다.
* * *
손님이 찾아왔다 하여 들이니 낯선 얼굴이었다.
본래 다른 종족의 얼굴이 알아보기 힘든 판인데, 성격마저 비슷비슷하면 도대체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
그냥 어디서 만난 엘프인가 싶지.
“시엔! 안녕! 오랜만이야!”
“어. 그러니까.”
“내 이름은 유백이야! 저번에 봤을 때는 알려줄 새가 없었거든!”
통성명도 안 했다는 뜻이었다.
엘프가 엘프답네. 시엔이 한숨을 삼켰다.
엘프란 종족은 항상 유쾌하며, 이상할 정도로 남의 눈치를 살피지 않았다.
사실 극도로 과묵한 비설이 매우 특이한 편이다.
그러나 결국 성격은 딱 엘프였다.
그냥 말 짧고 표정의 변화가 없을 뿐.
궁금하면 묻고 신기하면 매만지고 대개 뭐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니.
“그래서, 유백. 무슨 일인가요?”
“와아! 저거 다이어울프야? 엄청 크다! 멋져! 얘는 이름이 뭐야?”
엘프가 곧장 벽난로 옆에 몸을 말고 누운 늑대에 관심을 가졌다. 쪼르르 달려가 연신 쓰다듬는 것이 퍽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한때는 키메라를 늑대 무리 대신 이끌고 다니던 거대 다이어울프, 펠리다.
늑대가 기분 좋은 듯 눈을 감고 손길에 몸을 맡겼다.
“펠리.”
“펠리? 이상한 이름인데? 무슨 뜻이야?”
“글쎄. 트리예?”
“……어릴 적에 키우던 개 이름이었답니다. 혹시 시엔 님도 이상하다 생각하시나요?”
이상한 이름을 붙인 트리예가 대답했다.
유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얘는 늑대인데?”
“개와 늑대는 본래 같은 종이랍니다.”
“개는 개고 늑대는 늑대인데? 완전 다르잖아.”
“종의 분류가 본래. 흠. 아닙니다. 그렇다 치고.”
시엔이 끼어들어 설명하려다 말았다.
둘이 교미해 생식 능력을 갖춘 새끼가 태어나면 같은 종으로 분류해야 한다고.
그렇게 말했다만 이 엘프가 당장 해보자고 난리를 칠 것 같았으니까.
“아냐. 그렇다고 치면 안 돼. 늑대와 개는 달라.”
의외로 딱 부러지는 대답이 돌아왔다.
“개는 사람에게 길들고, 늑대는 그렇지 않으니까. 개는 어려운 상황에서 사람을 찾아 의지하지마는, 늑대는 그냥 포기하고 말거든.”
“그거 흥미로운데, 자세히 말해보시겠어요?”
“그러니까 독립성이라는 거지!”
시엔이 잠시 반성했다.
엘프가 생각 없이 말하기는 해도, 멍청하진 않다.
늑대는 무리 생활을 하더라도, 그 무리에 의존하는 경향이 옅다.
오히려 상처나 질병을 숨기고 혹은 무리를 이탈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엘프의 개&늑대 이론이 장황하게 펼쳐졌다.
시엔이 의외의 지식에 즐거워하다, 다른 사실을 깨달았다.
“그럼 펠리는 늑대가 아니라 개에 속하겠는데.”
이 영악한 늑대는 사람을 이용할 줄 알았다.
주방에 가서 배를 까뒤집고 애교를 부려 고기를 따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뛰놀다 작은 가시라도 박히면 하인에게 달라붙어 낑낑거리며 떼어 달라 난리를 치고.
심지어 흙탕물에 뛰놀고 나선 깔끔한 성격의 하인 앞에서 알짱거리기까지 했다.
씻겨달라고.
“그런가? 개 이름이 펠리면……. 응!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아냐, 좋은 이름이야. 인간 여자, 이름 좀 짓잖아!”
유백이 그렇게 말해 트리예의 미소를 만들어냈다.
시엔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개 이름으로는 나쁘지 않은데, 늑대 이름으로는 이상하다고? 대체 무슨 기준이야, 그게?
그러다 문득, 엘프의 페이스의 제대로 휘말렸음을 깨달았다.
개와 늑대를 이야기하려고 찾아오지는 않았을 것이 아닌가.
“그래서 유백, 무슨 일로 찾아오셨지요?”
“맞다! 깜박 잊고 있었네. 한별이 도움을 요청하랬어. 최대한 빨리 와 달래.”
이제야 잊고 있던 심부름이 생각이 났다는 투다.
시엔이 이마를 짚었다.
자그마치 세계수를 낀 엘프의 숲이다.
엘프의 숲속에서 엘프의 전략적 전술적인 우위는 인간의 가장 견고한 성채 이상이었다.
엘프는 온화한 편이다. 불청객이 침입해도 숲을 꼬아 되돌려보내는 선에서 그친다.
그러나 악의를 가지고 공격하려 든다면, 글쎄.
차라리 좀 더 편한 자살법을 찾아보라 해야겠지.
그러니 엘프 수호자의 도움 요청은 가볍게 생각할 것이 못 된다. 시엔이 물었다.
“어떤 종류의 도움이죠? 군대가 필요한 겁니까, 아니면 한별의 개인적인 요청인지. 조언이 필요한 건지, 아니면 인간 마법사가 필요한지를 말해줘야지요.”
“어…….”
유백이 눈동자를 굴렸다. 긴 귀가 살짝 쳐졌다.
비설을 관찰한 바로는 골똘히 생각 중이라는 뜻.
그리고 마침내 유백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늑대들이 말야.”
“아니, 늑대 이야기 말고.”
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왜 또 늑대 이야기가 나와?
“아니 아니, 그 말이 아니라. 개랑 늑대 말고, 늑대들이 엄청 몰려들어서, 걔네 때문에 한별이 검을 다 뽑아 들고. 아! 한별이 비검을 백 자루 하고 세 자루를 더 다루더라. 나는 세 자루 다루는데.”
또 이야기가 새려 했다. 한별이 비검 백 세 자루나 다룬다는 이야기가 퍽 흥미롭기는 했지만은.
시엔이 다시 주제를 붙잡았다.
늑대가 엄청 몰려들었다고?
“늑대 말입니까? 얼마나 몰려들었길래 수호자가 비검을 전부 꺼내 들고.”
“아. 그 늑대 말고. 있잖아. 늑대인간.”
늑대인간. 퍽 상위의 괴물이 아닌가.
각 개체의 전투력도 전투력이지만, 무엇보다 늑대인간의 위험성은 전염에 있었다.
사람을 물어 광증에 빠뜨리고, 네 번의 보름달 이후에는 반인반마의 늑대인간 시종으로 변모시켰다.
그런 마물이 영지 내에 엄청 몰려들었다고?
시엔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 * *
시엔이 즉시 카레네를 불러 상황을 전달했다.
영지 내 모든 촌락에 순찰대를 편성해 탐문 조사를 하는 한편, 연락선을 유지해 유사시에 기사단이 곧장 출동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대장장이들을 급히 수배해 무구에 은 도금을 실시하고, 은을 입힌 화살촉을 빠르게 생산해야 했다.
사안이 사안인지라 카레네 역시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곤, 다급히 뛰쳐나갔다.
그리고 나선 엘프의 숲을 방문해야 했다.
호위기사인 베른닐은 당연히 따라가야 한다.
세 시녀와 늙은이 하나, 그리고 부득불 우겨 따라붙겠다는 어린 용.
그리고 늑대인간을 탐지할 수 있는 큰 늑대, 혹은 큰 개 한 마리까지.
그렇게 빠르게 여장을 꾸려 북으로 향했다.
그리고 이튿날, 엘프의 숲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름드리 거목으로 침침한 엘프의 숲이다.
덤불들이 지나가라는 듯 좌우로 자리를 비켰다.
시엔이 일단은 안도했다.
숲이 환영을 보내고 있으니 세계수와 그 수호자의 안위는 무사하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 안쪽으로 향하는 와중이었다.
“야, 이거 귀 좀 봐봐. 완전 신기하잖아.”
“어쩜 귀가 이렇게 생겼지?”
“흐흐. 귀가 민감하다던데. 좀 만져 볼까?”
“왜, 왜 이러세요. 이러지 마세요…….”
아직 어린 여자아이가 몸을 움츠리며 떨었다.
그러나 아이를 빙 둘러싼 성인 남녀들이 키득키득 웃음을 터뜨렸다.
“뭐 어때, 만진다고 닳는 것도 아니잖아?”
“하, 하지 말아 주세요오.”
“거참 비싸게 군다. 자. 그럼 너도 내 귀를 만져 봐. 서로 만져 보면 될 거 아냐?”
개중 유난히 키 큰 녀석이 제 귀를 바짝 내민다.
아이의 눈에 물기가 가득 차올랐다.
엘프의 숲에서 벌어지는 일이었다.
시엔이 어이가 없어 끼어들었다.
“싫다는데 그쯤 해두시지 그래요?”
그러자 남녀들의 시선이 일제히 시엔을 향했다.
그리곤 버럭 소리를 질렀다.
“시엔이다!”
“시엔! 오랜만! 이게 얼마 만이야!”
“안녕안녕! 시엔!”
엘프들이 아이를 내버려 둔 채로 달려와 특유의 유쾌하고 또한 부산하기 그지없는 인사를 건넸다.
“예예, 오랜만이네요. 그런데 저 아이는?”
“늑대인간이야!”
“늑대인간 꼬맹이!”
“완전 귀여워.”
“안아주고 싶어!”
시엔이 인상을 팍 찌푸렸다.
“늑대인간이 아니라, 늑대 수인이잖아요?”
고운 털로 윤기 나는 삼각형의 귀, 허리춤에 바짝 말린 풍성한 꼬리. 그 외엔 인간의 아이와 같다.
늑대인간이란 두 발로 서나 온몸에 털이 빽빽한 동시에 늑대의 머리가 달린 괴물을 말함이었다.
지성체 종족 중 하나인 늑대 수인이 아니라.
그러자 엘프들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그건 너무 인간 중심적인 이름이야.”
“수인이라는 말에 짐승이 들어가잖아. 지성체끼리 그리 부르는 건 옳지 않아.”
“그러니까 늑대 인간이라고 불러야 해!”
아니, 틀린 말이 아닌 것 같기도 한데.
꼬맹이 하나 우르르 둘러싸고 울리기 직전이었던 녀석들이 할 소린가 싶기도 하고.
물론, 엘프들의 행동에 어떠한 악의도 없다는 것을 알더라도.
아니, 카레네에게 지시한 일들은 뭐가 되는데?
아까운 은화만 잔뜩 녹아나게 생겼구만.
결국, 시엔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 40. 숲에 살면 자연인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