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 얄밉게 더 얄밉게 [8] >
시엔이 포로를 잔뜩 이끌고 본대로 복귀했다. 적 기사 오백을 꺾고 돌아왔다.
종자도 없이 순수하게 기사만 오백이었다.
자연히 부대의 사기가 하늘을 찔렀다. 기사들이 얼마나 어깨에 힘을 주었는지, 견갑이 귀어림까지 닿을 정도였다.
“대체 대공자는 무얼 하고 다니시는지. 허허. 내 대단하다 몇 번을 말해도 모자라겠소이다.”
“대공자께서 적을 훤히 들여다보니 군략이 가히 대륙 제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겠습니다. 전서라도 하나 집필하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1왕자파의 귀족들도 덩달아 신이 났다. 대놓고 찬사를 퍼부어 예사 인물이라면 낯이 뜨거울 지경이었다.
그런데 다른 문제가 생겼다.
포로가 너무 많았다.
삼천의 군대가 백오십의 포로를 품기엔 아무래도 무리가 아니겠는가. 먹이고 재우는 것도 부담이 되고, 부상자를 돌보는 일도 그렇고.
포로들을 감시하는 것이 가장 문제였다.
다른 이가 아닌 기사들이었다. 부상자를 제외해도 오십에 가까운 기사들이 탈출하고자 하면?
개개인이 워낙에 뛰어나니 전부 잡을 수는 없다. 그 와중에 피해가 나고 사기가 꺾이고…… 그렇다고 기사를 노예마냥 우리에 가둬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당연히 골치가 아플 수밖에.
“몸값을 받고 풀어줄 수밖에 없겠는걸.”
“기사들을 돌려주겠다고? 부상자가 있다고 해도 기사들이야. 신관을 붙여 금방 움직일 자들이니 풀어주면 전장에서 마주칠 텐데.”
“그렇다고 데리고 있을 수도 없잖아?”
“뜻이 그렇다면. 시엔. 네 마음대로 하도록. 사령관은 너고, 나는 그저 따를 뿐이니.”
카레네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복동생은 이제 엄연한 영지의 후계자였고, 자신은 그 검일 뿐이었다. 이렇게 되고 나서는 카레네 역시 제 마음이 본디 이러한 상황을 꿈꾸었음을 알았다.
군략이 못 미더웠던 것도 지난 두 번의 작전으로 완전히 마음을 놓았다. 괜히 자신이 끼어들어 조언을 할 깜냥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그러니 얌전히 따르는 것이 맞았다. 게다가 그러고 있으면 무훈이 알아서 굴러들어오니 퍽 만족스럽기도 하고.
그렇게 시엔이 편지를 작성했다.
원래 전쟁 포로의 반환은 전쟁이 끝나고서야 할 절차였다. 다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시엔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그림을 만들어 볼 뿐이었다.
* * *
-유구한 전통대로 몸무게에 해당하는 황금을 내어주셔야겠으나, 허나 워낙에 많은 기사분께서 계시지 않습니까? 귀하의 재정이 걱정입니다. 그러하여 특별히 손수레 한 대 분의 곡식으로 한 명의 몸값을 대신하도록 하겠습니다.
손수레의 한 개 분의 곡식이라면 금화로 따지면 한 개가 조금 넘거나 안 되거나 하는 분량이 아닌가.
그러나 문제는 그 숫자였다.
사로잡힌 기사들의 명부가 몇 장의 편지에 걸쳐 계속해서 이어지니 그 숫자가 백오십 조금 넘었다.
그것만으로도 얄렘방의 군량 거의 전부를 내어주어야 할 판이었다.
-이는 비록 적으로 만났다 하나 충정으로 주인을 모신 기사들에 대한 예우이기도 합니다. 사지로 뛰어드는지 용맹하여 두려움이 없는 기사들이었으니, 그 충정은 사실 황금으로도 따질 수 없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가세를 팔아서라도 되돌려 받아야 할 기사들을 고작 곡식 한 수레로 퉁친다는 것부터가 그네들에 대한 모욕이었다.
기사들의 몸값을 깎아준다는 듯 말했지만, 말 그대로 충정을 다해 귀족을 모시는 기사들이었다. 몸무게와 같은 황금을 기꺼이 지급해도 모자란 존재들이 아니던가.
굳이 그걸 뒤에 강조했으니 빤히 알면서 곡식으로 받겠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당장 곡식을 구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사실 왕당파의 군대는 안 그래도 먹을 게 없었다. 오죽하면 병사들이 오염된 곡식으로 끼니를 때우고 있지 않은가.
“빌어먹을. 포로를 간수하기 힘드니 데려가라는 주제에!”
귀족들이 연신 분통을 터뜨렸다.
시엔의 속셈이야 훤히 읽혔다. 그걸 모를 정도로 무능력한 이라면 지휘관으로 파견되지 않았으리라.
문제는 포로를 데려가라 전언을 받았다는 것. 포로의 인수를 거절한다는 말은, 그들의 목숨을 포기한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목을 몽땅 떨어뜨려도 왕당파에겐 할 말이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정말로 그렇게 하기는 쉬운 일이 아닐 터였다. 대륙 규모로 악명을 쌓을 생각이 아니라면야.
하지만 전세가 뒤바뀌면? 반역도가 밀려 궁지에 몰리고 나면 그때는 기사들의 생사를 장담할 수 없게 될 터였다.
결국 기사들을 구해야 할 텐데, 정말로 그러기 싫었다. 이렇게 모욕뿐인 편지를 받고서 어떻게 그 뜻대로 따르자 말을 하겠는가.
귀족의 체면이란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지켜야 하는 긍지였다.
여기서 순순히 이 뜻에 따르자 말하려면, 그만큼의 권위가 필요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그리 의견을 표현할 수 있는 이는 한 명 뿐이었다.
“……줘버립시다.”
킬지언이 말했다.
속에서 천불이 치솟아도, 결국 총사령관으로서 자신이 할 말이었다.
“어차피 오염된 곡식들이 아닙니까? 병사들을 먹이는 것도 결국 며칠 못 할 일 아닙니까. 배앓이라도 오래 가면 결국 위중해지고 맙니다.”
“겨우 그늘병입니다. 반 년만 묵혀두면 멀쩡한 양곡이 될 것들을. 거기에 있는 군량을 몽땅 줘버리고 나면, 당장 정병들에게 무엇을 먹인단 말입니까?”
한 귀족이 반대하는 듯했으나, 목소리엔 별 힘이 없었다. 그냥 지금 반대가 한 명쯤 필요했을 뿐이었다.
“건량으로 어떻게든 넘기면 되지 않겠습니까? 대지급으로 전령을 보냈으니 조금만 버티면 보급이 다시 당도할 것입니다. 거기에.”
킬지언이 독이 바짝 올라 말을 이었다.
“어차피 저들은 곡식이 오염되어 있음을 모릅니다. 알아채더라도 누군가 앓고 나서야 알겠지요. 앓는다면 누가 앓겠습니까? 저 반역도의 군대가 앓는 꼴이 아닙니까.”
“하지만 아군의 보급을 빼어 적의 보급을 채워주는 격인데……”
“반역도의 군대가 얼마나 가겠습니까? 그늘병을 빼내는 데 반년이 걸립니다. 어차피 저들도 군량으로 쓸 수 없는 곡식입니다. 뒤늦게 알아채봐야.”
킬지언이 싸늘하게 미소 지었다.
“그때 속았음을 알면 꽤 약이 오르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당장 쓰지 못할 곡식이라면 황금과 다르지 않거늘, 제 꾀에 제가 넘어가는 꼴입니다.”
그제야 귀족들이 인상을 폈다.
총사령관이 이렇게까지 말해주었으니 되었다. 게다가 말이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다르니, 저 간악한 반역도에게 한 방 먹여준다는 생각에 나름 속이 좀 트이기도 했고.
* * *
1왕자파의 군대가 주둔 중인 늑대울 숲의 초입. 곡식을 가득 실은 커다란 마차가 줄줄이 도착해 멈췄다.
뒤이어 병력이 달려들어 마차에 실린 곡식들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곡식을 하차하는 일이 원래 중노동이라, 꽤 많은 땀방울을 쏟고서야 하역이 모두 끝났다. 몇 명인가의 허리와 뒤바꾼 결과이기도 했다.
보고를 전해들은 시엔이 혀를 찼다.
“쯧. 곱게 가져다줄 것이지.”
자기네들도 자존심이 있다고 주장이라고 하듯, 내버리듯 내팽겨치고 간 모양이었다. 최소한 예쁘게 쌓아놓기라도 할 것이지.
가만. 이게 자존심이 상해서 벌인 일인가? 그런데 오히려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아닌가? 명예롭다고 하기는 힘든 행동이잖아.
대면하여 그 심리를 묻고 들으면 괜찮은 소논문 한 편이 완성되리라. 상한 마음을 좀스럽게 표현하는 것이 자존심의 발로가 되는지, 그렇다면 본인에게 긍정 이해가 적용되는 건가? 인간 본성에 관한 연구는 쓸모를 떠나 상당히 재미있는 과제가 아니던가.
시엔이 병사들로 곡식을 수거해 오라 명령을 내렸다. 성질을 돋운 입장이니 사소한 화풀이 정도야 대범하게 이해해 주기로 했다.
다만, 미리 병사들에게 특식을 베풀어 놓은 것이 아쉽게 되고 말았다. 싸구려라곤 해도 술까지 풀었다. 적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아마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있을 텐데 그 전의를 확 깎아놓을 기회였건만 아쉽게 되었다.
의도치 않게 왕당파가 거둔 쾌거였다.
포로로 잡힌 기사들이야, 어차피 되돌아가도 입을 다물 것이 뻔했다. 전쟁 중이었으니까. 평소에는 팔푼이처럼 구는 녀석이라도 전시가 되면 바짝 날이 서는 이가 기사들이이었다. 경솔하게 떠들지는 않을 터이니.
시엔이 포로들을 해방했다.
부상자의 처치도 훌륭하게 끝냈고, 포로로 대우도 극진히 해준 참이었다. 들것도 마련해 주었으니 저들끼리 알아서 복귀하면 될 일이었다.
시엔의 입장에서야 참으로 고마운 치들이었다, 알아서 함정에 걸려주고, 그도 모자라 저들끼리 싸우며 식사를 차려주기까지 했으니.
거기에 전리품이 한둘이랴.
곡식은 차치하고서라도, 귀한 혈통의 전투마를 백 기 이상이었다.
원래 말이 겁이 많은 생물이다. 자그만 자극에도 놀라 등에 탄 이를 내팽개치는 녀석들.
그러니 주인의 뜻을 따라 전장을 헤집을 수 있는 전투마는 아예 다른 생물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전투마의 값으로만 해도 이미 얻은 이득이 아득할 지경이었다.
거기에 기사의 무구들을 몽땅 챙겼다.
말과 포로는 살아 있어야 가격이 붙지만, 무구는 죽은 자의 것이라도 상관없었으니 말 그대로 산더미 같은 무구가 굴러들어왔다.
게다가 기사의 무기는 본인이 집과 땅을 털어라도 마련하는 고급품이었다. 단장 쯤 되면 가문에서 하사하는 보물급의 명품을 둘렀다.
마지막으로 제 몸값으로 곡식까지 적의 손에서 놓게 하였으니 포로들이야말로 진정한 은인이라 할 만했다.
물론 적들은 그늘병에 걸린 오염된 곡식이라 한 마디조차 전하지 않았다. 그늘병에 걸린 곡식을 먹어도 죽지는 않는다 해도, 이렇게 감춰둔 것은 괘씸한 일이었다.
애초에 그렇게 만든 장본인이 여기 있으니 인과응보라고 할까. 시엔에게 그늘병이 문제가 없는 일이었기도 했고.
“히힛, 내 마력이 돌아왔구나.”
세올이 곡식을 둘러보는 척, 거기에 깃든 음차원 에너지를 흡수했다. 세올의 경지로는 어차피 별 도움 되지 않는 양이었으나, 원래 내 걸 다시 챙기는 일은 기꺼운 법이었다.
그러던 세올이 눈을 부라렸다.
“야, 너. 손 안 떼? 어디서 수작질이야?”
“어라? 선배. 수작질이라니. 그게 무슨 섭섭한 말씀이실까요?”
“요게 도대체 위아래가 없네? 선배 마력에 손대게 되어 있어, 안 되어 있어?”
“선배 마력이요?”
트리예가 정말로 놀랐다는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곤 특유의 나긋나긋한 어조로 조곤조곤 말을 뱉었다.
“선배, 음차원 에너지가 전부 어둠에서 나온 것이고, 자연에서 유래된 것이니 개인이 소유권을 주장할 수는 없지 않나요? 그런데 이걸 선배 것이라 주장하시면 어떡하세요?”
“하! 야! 내가 마력을 풀어 오염시켰으니 당연히 내 마력이지, 너 그런 개소리를,”
“흐응? 그럼 선배가 숨을 들이쉬고 내쉬면 그게 선배 공기인가? 아. 그럼 내가 숨을 쉬면 선배 공기를 뺏은 건가요? 이렇게? 흡. 하. 흡. 하.”
“야! 그건 궤변이지!”
“그럼 음차원 에너지는? 마력만 제외라고 말씀하시는거? 자연 상태에 있는 공기와 마력이 소유 상으로 차이는 없잖아요?”
“응? 그건.”
말이…… 되잖아? 세올의 눈이 떨렸다.
원래 세올의 성격이 열을 받아 불타오르니 이성을 잃는 유형이었다. 뭔가 논리적으로 맞아떨어지는 개소리가 날아드니 정신을 차리기가 어려웠다.
“야! 너 정말……!”
세올과 트리예의 관계가 원래 이랬다.
선후배 사이가 존재하는 집단에서, 전문 용어로 ‘먹혔다’라고 표현하는 상황이었다.
사실 이걸 중재해 줄 사람은 시엔 뿐이었다. 그런데 시엔이 보기에는 어차피 둘의 상하를 따지기엔 족보상으로 까마득한 절벽 아래에 있는 고만고만한 핏덩이들이었다.
둘이 툭탁거리는 것이 보기에 재미있고, 트리예도 선을 넘지는 않는 선에서 시엔이 나서지 않을 것임을 알았다.
“야! 이게 오냐오냐했더니. 그림자에도 짙은 부분이 있다! 몰라?”
“아. 그럼 내가 숨을 멈춰야겠다. 흡. 자. 선배님. 이제 만족하시나요? 아. 선배. 저 죽겠어요. 숨 좀 쉬면 안 될까요?”
“제발 그냥 죽었으면 좋겠다.”
“아이, 참. 선배. 숨 참는 거로는 못 죽는 거 아시잖아요?”
슬슬 삐지겠다. 트리예가 발을 뺐다.
“양도 많은데 선배 돌아다니기 귀찮으니 도와드려고 한 거지. 사실 쬐끔 사심이 섞이긴 했는데, 저야 원래 책상물림이라 한 줌 에너지가 모자란 거고. 선배는 불사에 가까이 접근하셨는데, 그런데 선배 마력이 이 정도로 아쉬우시겠어요?”
“흠. 크흠.”
세올이 헛기침을 했다. 반쯤 애교가 섞인 채로 띄워주는 소리에 앙금이 지조 없이 녹아내리고 만 통에.
“그러니 우리 빨리 끝내요? 알았죠? 선배?”
“……그럼 빨리 움직여.”
“그럼요, 그래야지요.”
트리예가 바쁜 척 몸을 놀렸다.
세올이 애매한 표정으로 마력을 회수했다. 뭔가 또 당한 것 같은데, 그렇다고 또 이제와 뭐라고 하기도 또 그렇고.
원래 속는 사람이 계속 속고, 당하는 사람이 계속 당하는 법이었다.
< 33. 얄밉게 더 얄밉게 [8]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