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의 망령재림-161화 (158/268)

< 33. 얄밉게 더 얄밉게 [7] >

시엔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뒤이어 돌진 나팔을 입에 물려던 때였다. 시엔이 멈칫하며 모인 숨을 맥없이 내뿜었다.

“후, 저건 또 뭐야?”

시엔에게 어둠은 전혀 방해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밝은 낮은 눈이 부셔 밤의 전경이 더 선명하게 보일 지경이었다. 순진무구의 시술 이후로는 그랬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니, 난장판이라서. 돌격은 잠시 대기.”

시엔이 나팔을 내렸다.

* * *

얄렘방에서 남북으로 빠져나온 왕당파의 기사들이 우회히여, 시엔의 진영을 향해 위와 아래에서 돌격했다. 빈 진영이었다.

미리 병력이 동쪽으로 이동한 상태였으니까. 한 줌 작은 병력이라 진퇴가 자유롭다는 것이 시엔과 기사들의 최고 장점이었다.

진영의 위아래로 만들어둔 대기병 함정에 왕당파 습격조의 전열이 무너졌다.

군대의 지휘관은 안전한 곳에 있지만, 기사단의 지휘관은 가장 선두에 있는 법. 무너진 전열을 짓밟으며 돌격한 두 습격조의 나머지 기사들이 시엔의 진영을 헤집었다.

빈 천막과 텅 빈 자리에 이상함을 느낄 새도 잠시였다. 이내 서로 반대편에서 달려온 두 습격조가 부딪쳤다.

“적이다!”

“폐하를 위하여!”

“스나덴!”

왕당파의 기사들이 저마다 국왕 혹은 가문을 외치며 기꺼이 적을 맞이했다. 적진에서 만난 상대니까 당연히 적이 아니겠는가.

대기병 함정에 전열만 무사했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었다.

그러나 이미 함정에 당했고, 그 와중에서 돌격 중에 동료를 짓밟는 끔찍한 경험을 한 기사들이었다. 분노가 머리끝에 이르러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다.

실제로도 한밤중 보이는 게 없었다.

핏대를 세우며 왕과 가문을 부르짖으니, 상대가 무어라 소리치는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기마들이 서로 부딪쳤다.

서로 찌르고 베며 피가 튀었다. 기사가 상대의 말머리를 베고 훌쩍 뛰어내렸다. 낙마한 자의 투구 아래를 찔렀다. 짜릿한 승리에 저도 모르게 함성이 튀어나왔다.

그 순간 섬뜩하게 치미는 어떤 예감에 기사가 본능적으로 몸을 틀었다. 검날이 팔받이를 스치며 끼이익 금속 부대끼는 소리가 울렸다.

“오너라!”

기사가 호기롭게 소리치며 자세를 취했다. 상대 역시 호성과 함께 달려들었다.

기사가 목을 노리는 검을 받아냈다. 검의 중단을 붙잡고 막아낸 후, 그대로 손잡이를 잡은 손을 쭉 내밀었다. 무게추로 적을 후려 패는 고급 카운터 기술이었다. 상대가 상체를 틀고 발을 놀려 한 바퀴 돌았다.

서로가 서로의 검술을 알고 있었다. 그러자 머리가 조금 식었다. 외적을 맞이한 것이 아니라 내전이었음을 검을 부딪치고 나서 알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적이 적임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순식간에 몇 합이 흘러갔다. 둘 모두 서로의 실력이 호각에 있음을 깨달았다.

그렇게 수십 합이 지나서 승부가 났다. 팔 하나가 갑옷 채로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승리한 기사가 호각수와의 생사를 건 결투를 맞이해 검을 나누며 순간의 깨달음, 검술에 대해 사소한 이해 하나를 이루어낸 덕분이었다.

기사는 순간 자신이 좀 더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며, 검사로서 상대에 대한 작은 존중을 펼쳤다.

“그대의 이름을 알 수 있겠소? 비록 적으로 만났으나 그대의 용맹에 대해 잊지 않겠소이다.”

“나는 젤란트 알사스, 베넨바스의 히비스커스 기사단의 젤란트 알사스요. 내 최후가 비겁하지 않았음을 전해주시오.”

“젤란트? 젤란트 경? 나 루아르 텔렌이오. 경께서 어째서 반역자들 무리에 계신단 말이오?”

“루아르 경? 청송 기사단의? 청송 기사단은 분명 북측에서 공격할 것이라고…….”

기사가 그제야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비슷한 일들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간악한 반역자야! 내 검이 너를 용서하지 않으리라!”

“감히 누가 반역을 입에 올리느냐! 네놈이야말로 폐하에 대한 충정을 거스르고 심지어 검을 겨운 반역자가 아니더냐!”

“폐하? 어찌 폐하의 존엄을 그 더러운 입에 올리느냐! 폐왕자가 왕명을 거스르고 사사로운 욕망에 참화를 일으켰거늘!”

“내 말이 바로 그 말이다! 폐하께서 정정하시어 치세를 펼치시는 중이 아닌가!”

“그 말이 진실로 옳다! 어찌하여 그리 잘 알면서도 폐왕자의 무리에 끼어들었단 말이냐!”

“그게 무슨 소리냐! 폐왕자에 무리에 끼어든 것이 네놈 아니더냐!”

“아니, 네놈야말로 폐왕자의 무리잖나!”

“그 무슨 무도한 소리냐! 내 주인께선 폐하의 충신이시며 나 또한 그 뜻을 따른다! 폐왕자와 그 무리, 반역도들을 모조리 베는 것이 나의 사명이다!”

“나 또한 그러하다!”

“그게 무슨 소리냐!”

“……?”

“……?”

* * *

시엔은 황당했다.

적의 야습이야 이미 예상한 바였다. 예상이라기보단 유도했다는 말이 맞으리라.

일부러 적은 규모의 부대를 보여주었고, 엄한 성문만 계속 파괴하며 적이 행동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으니까.

다만, 적이 이렇게 빨리 반응할 줄은 몰랐다. 그리고 양면에서 공격해 올 것이라곤 생각지도 않았다.

그 결과, 저네들끼리 치고박고 싸울 것이라고는 더더욱 예상하지 못했다.

아니, 누가 이런 걸 예상하고 계책을 짜?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야.

그렇다고 적이 멍청한 것도 아니었다.

적의 판단들 하나하나 따져보면 꽤 날카롭지 않았던가.

허를 찌르는 날카로운 야습의 시기. 거기에 두 부대가 합공을 가했다. 자칫했으면 궤멸을 피할 수 없었으리라.

그야말로 천운이었다.

원래 계획은 사람이 짜는 것이나 이루는 것은 여신께서 뜻하는 대로라고 하듯이.

기사들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적이 서로 싸우고 있으니 잠시 대기하라는 명령에, 기사들의 사기가 치솟았다.

‘대공자께서 전략가의 면모를 보이셨지만, 이 정도이셨을 줄이야.’

‘과연, 저번에 창공 기사단이 올린 전설적인 성과가 그냥 나오지는 않았다는 것이로군.’

‘대공자께서 적의 머리 꼭대기에 있으니 우리는 싸워 승리할 운명이로구나!’

시엔이 고민하는 척을 했다.

“베른닐, 어떻게 생각해? 이대로 놔두면 저것들이 쪽팔려서 죽어버리지 않을까? 굳이 공격해 목숨을 거둘 필요가 있을까?”

“그렇게 비참한 최후를 맞게 놔두실 겁니까? 공자님이 마음 좀 더 써주시지 말입니다.”

“뭐. 나는 자비로우니까.”

시엔이 뒤이어 명령을 내렸다.

“가서 전달해. 돌격 때에 구호는 국왕 폐하 만세, 하나로 통일한다고.”

시엔이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판을 이렇게 벌여줬는데, 챙겨 먹지 않으면 또 미안하잖아.

* * *

나팔 소리가 울리자, 아홉 창날 기사단이 돌진을 개시했다. 홉브 가문의 첫 번째 기사단으로, 초대 홉브 자작께서 용병단을 세워 영지를 재건할 때 함께했던 아홉 명의 기사를 기려 지어진 이름이었다.

그 덕분인지 기사단의 분위기 역시 상당히 거친 편이었다. 아홉 창날 기사단장이 중앙에서 소리 질렀다.

“영광의 순간이 저 앞에 있다! 있는 대로 부수며 돌파한다! 낙마한 놈은 우리 기사단 아니다, 이 놈들아!”

“예, 단장!”

“저들끼리 싸울 정도로 덜떨어진 놈들 상대로 낙마하면 기사 자격도 없는 겁니다!”

“불턴 경, 너 말하는 거 같은데! 이번에는 신입이라도 못 챙겨주는 거 알지? 낙오하면 그냥 버리는 거야!”

“그쪽이나 신경 쓰십쇼!”

“크하핫, 좋다, 신입. 가자!”

농담 같은 진담이었다.

실제 전술이 그랬다. 기마 돌격하여 적을 꿰뚫고, 그대로 달려 나간 후에 일점 지점에서 대기, 신호 시에 복귀하는 작전이었다.

지난 야습과 같은 조건이었다. 적의 섬멸보다 돌파를 우선하고, 와중에 낙마하는 이가 있어도 구출에 나서지 마라. 낙오자는 알아서 전역을 이탈해야 한다.

왕당파의 야습과는 달랐다. 애초에 목적부터가 다르니 그 전술도 다른 법이었다. 왕당파의 야습은 적의 격멸을 목표로 했고, 시엔의 야습은 아군의 최소 피해로 최대 이득을 보는 데에 있었으니까.

“국왕 폐하 만세!”

“국왕 폐하 만세에!”

아홉 창날 기사단이 높이 고함을 질렀다.

덕분에 왕당파의 기사들만 죽을 맛이었다.

일부 기사들이 흘러가는 상황을 알아차렸다. 그 일부가 전투 중지를 외치며 이 웃기지도 않는 내홍을 멈추려 노력했다. 덕분에 조금씩 칼 부딪치는 소리가 잦아드는 와중이었다.

그 와중에 국왕 폐하 만세를 외치며 달려드는 녀석들을 적이라 생각하지 못했던 탓이었다.

“잠깐, 우리 같은 편이아악!”

“멈춰, 멈춰! 멈추라고! 컥!”

그러나 왕당파든 1왕자파든 모두 국왕 폐하 앞에서는 당당했다.

왕당파는 폐왕자가 왕위를 노려 반란을 일으켰다 하고, 1왕자파는 북부 귀족이 왕을 구금하고 정통 왕위 계승자를 폐하는 등 포악을 부려 그로부터 해방한다는 명분을 세웠다.

물론 1왕자파의 귀족들은 그 명분이 어이없는 억지임을 안다. 그러나 기사 대부분은 아니었다.

시엔이 어둠 너머를 꿰뚫어보았다.

아홉 창날 기사단이 진영에 닿는 순간, 또다시 나팔을 불어 두 번째 돌격을 지시했다.

“영하 기사단, 돌격!”

“체이벨트 기사단, 돌격하라!”

“우리도 간다! 바일의 아들들이여!”

소규모로 참가한 세 개의 기사단이 열을 이뤄 출발했다. 기사단이 혼란에 빠진 적을 다시금 휩쓸고 지나갔다.

시엔이 불을 피웠다.

버닝 신, 악령이 피우는 푸른 귀화가 밤하늘 위로 치솟았다. 먼저 지나간 두 개의 돌격조를 위한 신호로, 말에서 내려 본대를 향해 공격하라는 뜻이었다.

뒤이어 시엔 곁에 남은 병력이 마무리를 위해 출발했다.

* * *

날이 밝았다.

왕당파의 습격조 중 생존자들이 얄렘방으로 하나둘씩 귀환했다. 그 숫자가 서른일곱이었다. 오백 중 겨우 서른일곱.

얄렘방의 지휘소는 침묵에 휩싸였다.

전령이 그 침묵을 깼다.

“보고입니다. 조금 전 텔어버리 기사단의 세필룸 경이 복귀했다고 합니다.”

“세필룸 경이…….”

귀족 하나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내 다시 침울하게 가라앉았다.

서른의 기사 중 네 명이 돌아왔고, 이제는 다섯 명이 돌아온 셈이었다.

병력의 반만 잃어도 전투 지속이 곤란한 판이었다. 오백 중 마흔 남짓을 남겼다. 개중에 멀쩡한 이만 세고 나면, 전멸이라고 표현해도 무방할 지경이었다.

왕당파의 귀족들이 말을 잃은 이유였다.

징집병을 잃어도 이후 줄어든 영민에 고심해야 했다. 그런데 정예병을, 개중에 기사를 잃었다. 그 비통함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으니 차라리 입을 다문 것이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전령이 진땀을 흘렸다. 할 말이 더 있기 때문이었다.

“그, 세필룸 경께서 적의 전언을 가지고 오셨습니다만.”

“읽어 보도록.”

킬지언의 말에, 전령이 두루마리를 끌렀다. 뒤이어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 입만 뻐끔거렸다.

“뭐하나, 읽어 보라니까!”

“그, 아, 알겠습니다.”

킬지언의 재촉에 전령이 두루마리를 읽어 내렸다. 연신 더듬거리며 목소리가 점차 기어들어가는 한심한 꼴이었으나, 귀족들은 금방 그 태도를 이해했다.

-참으로 좋은 날씨에 두루 평안하신지요. 간밤에 충성스러운 국왕 폐하의 종복들이 적들에 맞서 대승을 거두었다는 낭보를 전해드리며, 이 기쁨을 나누고자 합니다. 같이 폐하를 모시는 왕국의 백성으로서 함께 축하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이! 저! 저……!”

귀족 하나가 벌건 얼굴로 뒷목을 잡았다.

전령이 급히 입을 다물다가, 킬지언의 분노 가득한 눈빛에 어물어물 다시 읽기 시작했다.

-간밤의 습격은 굉장히 날카로운 기책으로 누구라도 당할 만큼 가공할 것이었습니다. 일군의 수장으로 그 계책에 찬사를 보냅니다. 인간의 지혜로는 이렇게 뛰어난 전법을 이겨낼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어찌저찌 결과를 내었습니다. 이는 천운으로 극복한 결과입니다. 이는 필경 여, 여신께서 내리신 축복…… 축복이 아니겠습니까…… 여신께서도 분명 이 나라를 위해 힘을 써주시는 것이…….”

귀족들이 이를 갈았다.

글로 사람을 찌른다는 것이 이런 것인가 싶을 정도로 분노를 이끌어내는 문장이었다.

전령은 울고 싶었다.

연락병의 임무가 비교적 안전하다 지원한 과거의 자신이 원망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이 무서운 비책을 제 지혜로 막아낸 것이 아니로군요. 몇 가지 대운이 함께한 까닭이지 제 능력 밖에 있었다고 고백하겠습니다. 그러니 전략 대결에서는 제가 패배한 것으로 치겠습니다.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억, 어억……!”

“즈미룬 백작!”

“정신 차리시고, 숨을, 숨을 쉬시오!”

“빨리 의사를, 신관을 데려와라! 어서!”

기어코 귀족 하나가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으니, 시엔이 이뤄낸 또 하나의 값진 성과였다.

< 33. 얄밉게 더 얄밉게 [7]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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