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의 망령재림-153화 (151/268)

< 32. 마법사는 전장의 꽃 [3] >

청년은 징집병이었다.

때는 봄이고 떠나온 집에는 장정이 없으니, 혹여 일손이 달릴까 잠도 못 드는 그러한 밤.

부우우. 불길한 나팔 소리가 요란하니 대체 무엇인가 잠을 뒤척이다, 뒤이어 비상이다 군인들이 재우쳐 난리가 났다.

멋도 모르고 밖으로 뛰쳐나온 청년이 짓쳐오는 검은 그림자에 얼굴을 가렸다. 뒤이어 무언가에 받혀 몸이 떠오른다. 아픔을 느낄 새도 없이 내팽개쳐져, 그 위로 발굽이 떨어졌다.

말발굽이 뼈와 살을 짓밟고, 부수고 짓이겼다. 그 감촉이 말의 다리를 타올라, 어깨를 지나 안장에 닿아 기수의 엉덩이를 두들겼다.

뛰어난 기수는 기마와 한 몸이다. 말의 감각을 제 것처럼 받아 느꼈다.

카레네가 바로 그랬다.

내 발로 밟은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지는 그 감촉에, 카레네가 속으로 생각했다.

‘다섯. 겨우…… 다섯.’

구천의 적을 사방에 두고 겨우 일곱이었다. 대형을 이룬 창공 기사단원이 자신과 같다 해도 겨우 이백오십에 지나지 않으리라.

‘초조해하지 마. 침착하게. 먹이를 노리는 매처럼. 물소 떼에 뛰어든 사자처럼.’

카레네가 스스로를 다스리며 검을 뻗었다. 서걱. 오러가 실린 검이니 굳이 휘두를 필요도 없다. 그저 말을 달리며 손을 뻗을 뿐.

검이 그리는 궤적이 이름 모를 적병의 상체를 사선으로 베어냈다. 적병이 든 횃불이 떨어지고 불똥이 튀고 날며 어지러이 흩어졌다.

‘여섯.’

이십인 용 천막이 카레네의 앞을 가로막았다. 카레네는 대형의 중심, 섣불리 방향을 바꿀 수도, 바꿔서도 안 되는 그러한 자리였다.

카레네가 휘두른 검이 천막을 찢었다. 인마가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나팔에 부랴부랴 장비를 챙기던 병사들이 난데없는 기마의 습격에 비명을 질렀다.

‘일곱, 여덟, 아홉.’

천막의 반대편, 인마가 장막을 뚫듯 뛰쳐나왔다. 카레네가 좌우를 살폈다. 우로 창공 기사단장, 좌로 부단장.

오십의 군마가 좌우로 펼쳐진 너비와 딱 맞게, 주둔지에 대로가 트였다.

무너진 천막과 다져진 시체들이 놓인 길이었다. 떨어진 횃불의 불씨만 공허하게 타오를 뿐이었다.

* * *

“적습, 적습입니다!”

“뭐라고!”

킬지언 흐레이그가 눈을 번쩍 떴다.

일순간에 잠을 깨우는 섬뜩한 보고였다. 그 서슬에 방금의 단잠은 온데간데없이 핏발 선 지휘관이 정신을 차렸다.

“적의 규모는? 응전 태세는 어떻지? 응전조는 뭘 하고 있나!”

“그것이…….”

부관이 말끝을 흐렸다. 모르겠다는 뜻이다.

킬지언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대체 파악된 것이 무엇이란 말이냐!”

“그, 미상의 기마가 주둔지를 급습하여 돌파 중인 것으로, 것입니다.”

“미상이라니……!”

킬지언이 문득 입을 꾹 다물었다.

어깨를 잔뜩 움츠린 부관이 보였다. 이래서야 제대로 된 보고를 계속할 수 있을 리가 없다.

킬지언이 끓어오르는 울화를 꾹 참았다. 이런 때일수록 오히려 부드러워져야 했다.

“하긴 자네라고 딱히 수가 있겠나. 천천히 해보지. 적의 기습이라?”

“그렇습니다. 익힐군 주둔지 방면에 야음을 틈탄 습격입니다. 미상의 기마로 추정됩니다.”

“응전조는? 다른 지휘관들은 어떻지?”

“저희 측 응전조가 출동 준비를 마쳤습니다. 허가만 내리시면 당장 제압을 위해 움직일 겁니다.”

이러한 형태의 기습에 대비한 응전조를 미리 편성하여 준비시키는 것은 전술의 기본 중 기본이었다.

그물과 갈고리 따위로 무장한 응전조는 습격자의 사살보다 방해에 특화되어 있었다. 적을 지연시킨 후 준비를 마친 군대가 함께 제압하는 전략이었다.

“빌어먹을, 야습이라니…….”

병력의 숫자가 자그마치 세 배였다.

숫자의 차이를 떠나, 일만에 가까운 군대가 주둔한 상황이었다.

상식적인 지휘관이라면, 일만의 주둔지를 향해 야습을 감행할 리가 없지 않은가.

적의 삼천여 병력 전부가 야음을 틈타 선공을 가해도 승산은 절반도 되지 않으리라. 게다가 점령지, 1왕자파의 입장에선 굳이 사수할 만한 전략적 가치가 있지도 않았다.

그러니 퇴로를 두고 굳이 죽거나 죽이거나 하는 승부를 걸 이유도 없었을 텐데.

킬지언이 무장을 챙기며 인상을 구겼다.

“완전히 허를 찔렸군.”

상황이 이러하니 야습이라곤 아예 상상조차 못 했다. 야간 경계나 응전조의 편성은 응당 해야 하는 일이라 해놓았을 뿐, 정말로 야습을 감행하리라곤 추호도 생각지 않았다.

적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음을 알았다면?

킬지언 역시 야습을 감행했으리라.

상대방의 허점을 찌르는 것. 그게 바로 전략의 기본이었으니.

“당장 전 대대를 움직여! 궤헬과 즈미룬에 전령을 보내! 전선 방향으로 전군 집결할 것! 적 야습조의 회군 경로를 차단한다.”

주둔지에 군대가 무려 구천이었다

지금이야 모두 허둥댈지 몰라도, 머지않아 정상화 될 것이었다. 그때엔 적의 야습조가 되돌아가고자 할 테니, 한발 먼저 나아가 퇴로를 차단할 생각이었다.

“바로 전달하겠습니다. 그러면 각 부대장의 소집은 어찌하시는지…….”

“한시가 급해. 전부 부대장 재량에 맡기고, 얄렘방 주시 기준 좌로부터 하나, 둘, 셋 대대의 순서로 빈틈없이 차단을 펼치도록. 나는 천공기사단을 이끌고 합류하겠다.”

“예! 얄렘방 주시 기준 하나, 둘, 셋 대대! 차단 편성! 궤헬과 즈미룬에 전령, 전선 방향으로 집결 차단선 편성! 바로 전달하겠습니다!”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지휘였다.

복창을 붙인 부관이 천막을 뛰쳐나갔다.

“야습은 한 방 먹었다 치지. 하지만 들어오는 건 마음대로라도, 나가는 건 아니지.”

단 한 놈도 살려보내지 않겠다.

킬지언이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손아귀에 들어온 적의 야습조였다.

밤이라 깃발이 보이지 않고, 얄렘방이 멀어 불길로도 신호를 전달할 방법이 없다.

일이 잘못되어도 명령을 내릴 방법이 없으니, 적의 지휘관은 그저 손 모아 돌아오길 기도할 수밖에 없으리라.

물론 그 기도의 끝은 좋지 않겠지만.

* * *

성벽 위, 셀시가 마법에 집중하고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녀는 온몸으로 땀을 쏟아내는 중이었다.

물길잡이와 천문관 두 마법사 모두 구름을 부릴 수 있었다.

구름 그 자체를 부리는 물길잡이와, 대기를 조종해 구름을 움직이는 천문관의 방법은 완전히 다르기는 했지만.

이런 식으로 하늘을 가리는 일은 본디 천문관이 해야 할 일이었다.

천문관이 구름을 몰면 비가 내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뇌우가 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었다. 그래도, 그저 구름을 자리에 가져다 놓는 일은 수월히 해낼 수 있었다.

그걸 물길잡이가 하고 있으니, 없는 구름을 끌어모아 하늘을 가린다고 진땀을 빼는 중이었다.

“아직 별문제는 없어 보이네.”

시엔이 그 옆에 서서 중얼거렸다.

구름을 조종하던 셀시 아스데니아가 생각했다. 뭐라도 보이는 것처럼 말하네. 뭐가 보이나? 내가 아무것도 보이는데?

시력에 자신 있는 셀시마저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밤이었다.

별빛 하나 새어 나오지 않는 밤. 대기에 두꺼운 구름이 끼었으니 밤은 그야말로 암흑천지 시커먼 그림자 속에 있었다.

적의 주둔지는 저 멀리에 있었다. 낮에 보아도 사람이 개미 떼처럼 보이는 거리, 이러한 깜깜한 밤, 때아닌 습격에 잠이 깬 횃불들만 바글바글 피어올라 분주할 뿐인데.

셀시가 뭐라고 생각하든, 보이는 것을 어쩌겠는가. 시엔 역시 신기하긴 매한가지였다.

야. 이게 보이네.

이 어둠이 대낮처럼 훤하고, 저 멀리 주둔지에 넓은 길을 뚫는 기사단의 꽁무니가 보였다.

어쩔 줄 모르고 우왕좌왕 헤매는 적들의 모습도 보였다.

“좀 호되게 당해야 할 텐데.”

카레네의 상태가 참으로 애매했다.

용맹과 만용의 사이 어딘가에 정신을 두고 있으니. 아군이 피를 볼 일을 주저하기는 하나, 적의 피를 보지 못해 안달이 난 상태였다.

원래는 최대한 대치하다 물러날 생각이었지만, 누구 하나가 옆에서 전쟁전쟁 노래를 부르고 있으니.

“쯧.”

시엔히 혀를 찼다.

아직 철이 없어서 그렇다. 나이가 몇 갠데 아직도 기사도에 심취해서 전장에 나서지 못해 안달일까.

뭐, 소원이라면야 들어줄 수밖에.

이참에 마음껏 날뛰어 보기도 하고, 그 와중에 철이 좀 들었으면 하고.

시엔이 적진을 바라보았다.

적 주둔지의 좌측으로 돌파한 기사단이 완만하게 곡선을 그렸다. 반원을 그려 우측으로 빠져나오는 것이 최초의 계획이었다.

시엔이 눈을 가늘게 떴다.

저 멀디먼 너머, 인간의 시야를 아득히 초월한 용의 시선이 먼 거리의 적진을 훑었다.

창공 기사단의 진행 방향으로 밀집한 적들이 한 무리. 그물이며 밧줄 따위를 들었으니, 저기에 물리면 최소한 기사 서넛은 낙마하고 말리라.

“그렇다고 당하게 놔둘 수도 없고.”

유능한 병무관과 충성스러운 기사들이 아니던가. 심지어 자살에 가까운 야습 명령임에도 용맹스럽게 나선 가문의 정예들이었으니.

시엔이 귓가로 손을 가져갔다.

“숲지기가 알린다. 돌파 진행 한 시 방향으로 조정할 것. 진행 여덟 시 방향으로 조정.”

그러자 대답이 되돌아왔다. 카레네의 목소리였다.

-여덟 시 방향!

거의 악을 쓰는 외침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그 뒤로 뿔피리 소리며 말발굽 소리, 온갖 아우성이 깔렸다. 적진 한복판이니 소란스러울 만도 하지만은.

시엔이 눈살을 찌푸렸다.

“귀청 터지겠네. 좀 살살 말하지.”

-몰라! 정신 없거든! 기사단, 나를 따르라!

“송수신기 침묵부터 해.”

-이상!

귀청을 찢을 듯한 고함과 함께 수신이 멋었다.

시엔이 다시 송수신기를 조작했다. 수신은 대역폭으로 유지, 발신 채널을 4번으로 조정하면.

“나비, 들려?”

그러자 나비의 쾌활한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앗, 시엔 님. 잘 들려요. 듣고 있어요! 말씀하세요, 시엔 님! 아. 이러니까 계시 같네요! 아니지, 이게 바로 계시네요!

“계시는 무슨……. 그쪽 준비는 어때?”

-이제 땅은 다 팠구요, 자리도 다 잡았구요. 바로 준비할까요? 아니면 좀 더 대기할까요?

“바로 준비해. 생각보다 적의 대응이 빨라.”

-예, 시엔 님!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좋아. 그럼 준비 마치고 대기해.”

-저도 좋아합니다! 나비, 이상!

은근슬쩍 다른 대답이 되돌아왔다.

하여간 왜 정상인 녀석이 없담. 시엔이 한숨을 푹 쉬었다. 어쩐지 계속 한숨만 쉬는 기분이었다.

* * *

횃불이 흔들리며 화광과 어둠이 점멸하고, 그림자들이 앞뒤좌우로 나타나고 일그러지고 사라지며 다시 나타났다.

그 사이로, 기마대가 짓쳐오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창을 내밀었을 뿐, 사위는 온통 혼돈뿐이니 군대는 없고 군인도 없이 그저 창을 든 개인이 남았을 뿐이었다.

병사가 이를 딱딱 부딪쳤다.

적의 군마가 코앞에 있었다. 차라리 악몽이 더욱 끔찍하리라.

병사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자 기적이 일어났다.

뾰족한 머리를 앞세운 쇄기 진형의 기사단 돌진이, 모양이 변하지 않은 채로 좌측으로 방향을 틀었다.

세상에 없던 회전이었다. 기예단의 묘기에나 볼 법한 광경이었다. 각개 기마가 같은 동작으로 급히 말머리를 돌린 것이었기에.

사실상 불가능한 방향 전환이었다.

돌진 대형의 모든 구성원에게, 같은 명령을, 동시에 내릴 수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창공 기사단에겐 송수신기가 있었다.

정확히는 송수신기는 카레네와 기사단장에게, 나머지 기사들에겐 수신만 가능한 마도구를 착용한 상태였으니까.

이를 통해 기사단 전원이, 어떠한 난전 속에서도 정확한 육성 지휘를 동시에 전달받을 수 있었다.

기마들이 앞으로 뒤로 속력을 조정했다.

횡으로 달려나가던 쇄기가 무너지고, 다시 카레네를 중심으로 뾰족한 머리가 날을 세웠다.

방향의 급전환과 돌격 대형 재구성.

이미 송수신기를 활용한 기사단의 기동 훈련을 마쳤으니, 기예처럼 보여도 이미 몸에 철저히 익혀 놓아 손쉬운 일이었다.

“으으…….”

병사가 앓는 소리를 냈다.

기마가 닥쳐와 몸이 으스러져도 한참이 지났을 시간. 어째서 아무 느낌도 없을까.

병사가 조심스레 눈을 떴다.

“어?”

그리고 이미 한차례 뒤집어진 군영만이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 * *

“적습입니다!”

“비익조 군창 화재입니다!”

“연무 대대 지휘 막사가 쓰러졌습니다. 중대장 외 지휘부 전원 전사, 지휘권 이양이 필요합니다!”

“응전조입니다! 어디로 이동합니까!”

“백작님, 기사단 소집 완료했습니다! 명령을 내려 주십시오!”

팡토스 백작의 천막으로 전령들이 연거푸 밀려들었다. 난리통에 눈을 떠 정신을 차리자마자 바로 이 꼴이었다.

팡토스 백작뿐만이 아니었다. 왕당파의 다른 귀족들 역시 밀려드는 전령으로 정신이 쏙 빠져나가는 상태였다.

구천의 군대가 단일 세력이 아니라 왕당파의 연합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이었다.

주둔지 내부에 가문에 따라 지휘부를 따로 가지고 있으니, 이러한 상황에서는 서로 통하기가 어려운 탓이었다.

전령을 보내도 어두운 밤중이라 헤매기 십상이고, 덕분에 공조는커녕 서로의 소식조차 듣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나마 적습이 없었던 곳은 사정이 나았다. 난리통에 병사를 깨워 대열을 쌓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러나 이미 카레네가 몰아쳐 휩쓸었거나 혹은 휩쓸리는 와중에서는, 지휘는커녕 자다 깨 허둥거리는 군영에서 무엇 하나 제대로 대처가 가능할 리가 만무했다.

물론 지금과 같이 극단적인 상황은 전쟁사에서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별빛 하나 없는 밤에 소규모 정예로 구성된 기마가 거대 주둔지로 난입하여 날뛰는 중이었으니까.

그러나 이러한 극단적 상황이 아니더라도, 원래 돌파의 무서움이 바로 이것이었다.

아무리 빼어난 지휘라도 부하들이 듣거나 혹은 보아 알아들어야 의미가 있는 법.

그러나 이미 돌파당한 부대는 이러한 지휘체계 자체가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당장 방어선이 무너져 적이 들이치면, 귀로는 들리는 것이 없고, 눈으로는 적과 아군이 뒤섞이고 말았다. 그러면 눈먼 칼이 사방팔방으로 휘돌아 피아 없이 죽어 나가는 것이다.

이러한 혼전에 빛을 발하는 것이 평시의 훈련이었다. 평시에 훈련이 잘된 부대는 난전에서도 지휘 없이 스스로 할 일을 찾았다.

응전조 역시 그러한 훈련이 중요했다.

평시에 엄중한 훈련이 이루어졌던 귀족가의 부대는 달랐다. 응전조가 빠르게 태세를 갖추어 밀집 태세를 갖추었다. 병기창이나 식량창 등 중요 시설을 기점으로 방어선을 짰다.

그러나 야습조가 그러한 위험을 기가 막히게 피해 다니는 와중이었다. 물론, 주둔지의 누구도 그 사실을 알아채진 못했지만.

초월적 시계를 가진 정찰자가, 빠르게 기동하는 기사단에 실시간으로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꿈에서도 상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노릇인지 당연히 모를 수밖에.

그저 왕당파 귀족들이 아는 것은 이 정도였다. 알 수 없는 규모의 기동성 있는 적이 주둔지를 뒤집으며 돌아다닌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당파의 군대는 점차 제 전투력을 되찾고 있었다.

습격이 없었던 방면에선 빠르게 군대가 무장하여 대형을 갖춰 방어 준비를 마칠 수 있었으니까.

고작 오십의 기마가 돌아다니기에 왕당파의 주둔지는 너무나 광활했다.

* * *

중기병의 기동력은 의외로 좋지 않다.

말의 품종 문제였다.

육중한 무게를 견디며 돌진하는 힘 있는 품종. 대신 그만큼이나 빨리 지치는 녀석들이었다.

결국, 적진으로 돌파한 카레네의 기사단의 후퇴로는 하나뿐이었다. 다시 요새 방면으로 돌파하여 되돌아 나오는 것.

다른 방향으로 도망쳐 봐야 허사였다. 얼마 가지 않아 군마가 퍼지고 말 터. 적의 기마대가 추격해 뒤를 잡히면 겨우 오십의 기사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킬지언의 대처는 훌륭한 편이었다.

이미 돌파당한 내부는 아예 통제 불가능한 아수라장이니 피해를 감수하겠다는 것이다.

대신 얄렘방 방면, 습격조의 퇴로에 군사를 밀집시켰다. 내어줄 것은 내어주더라도 살아서 달아나게 놔두지 않겠다고.

습격조란 본디 가진 병력 중에서도 가장 정예가 맡는 일이었다. 다소 많은 병력을 잃더라도 확실히 잡을 수만 있다면. 교환비는 나쁘지만 큰 손해까지는 아니리라.

물론, 킬지언의 생각대로라면.

-나비. 이제 시작해.

“네, 시엔 님!”

-아. 부탑주한테 전해주면 좋겠는데. 모두 구경나왔으니 최대한 멋진 모습 보여달라 해.

야음을 틈타 밖으로 나온 이들이 카레네와 기사단뿐만이 아니었다.

경기병대가 방화광들을 태워 조용히 전방에 자리를 잡았다. 땅을 파헤쳐 작은 구덩이들을 만들고 마법사들이 안에 누워 적진을 바라보니, 머리통들만 빼꼼히 밖으로 나온 꼴이었다.

통신을 끊은 나비가 물었다.

“부탑주님 계셔요?”

“무슨 일이지?”

“모두 구경나왔으니 멋진 모습 부탁드리신대요.”

“모두? 헤위, 아니, 세올 누나도?”

“움……. 모두라고 하셨으니까.”

그렇다 이거지.

알렌이 전의를 다졌다.

방화광이 불에 집착하는 것은, 방화광이 아니라면 상상할 수 없는 그 이상이었다.

혹시 몰라. 세상 가장 아름다운 화염 앞에 헤위 누나가 기억을 되찾을지도.

그게 아니라도, 한바탕 화염을 쏟아낼 기회란 좀처럼 오지 않았다. 지금의 화염탑주는 방화광의 방화행조차 막아서는 고리타분한 영감이었으니까.

“후 하르 헤르리아 알렌. 세 브라르 알흐라비아…….”

알렌의 이름으로 불타오르라.

세상 가장 정열적인 타오름으로, 심화의 화염으로 들끓는 태고의 정화가 세상을 태워 가장 정순한 재를 이루리라.

마법사의 심상이 세상과 이어지면, 가슴 깊은 곳에서 언어이되 언어가 아닌 강제적 명령이 피어올랐다.

이를 주문이라 하니, 곧 세상이 가장 편애하는 언어이다. 그리하여 세상에 없던 기적이 피어올랐다.

스무 명의 방화광들.

화염탑에서 용의 피를 대가로 파견한 강대한 마법사들이었다.

그 앞에, 적의 군대가 있었다.

주둔지에서 탈출할 습격조를 막기 위해 차단선을 짠 왕당파의 군대였다.

흉포한 습격자들이 주둔지를 헤집는 줄로만 알지, 등 뒤에 가장 위험한 족속들이 도사리고 있는 줄은 몰랐다.

서로 밀집하여 어깨와 어깨를 맞대고, 심지어 방화광 앞에 등을 돌리고 있었다.

방패와 창을 애꿎은 방향으로 향하고 있으니, 이래서야 뜨거운 맛 좀 보여달라 애원하는 꼴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방화광의 적이라면, 그 앞에서 이렇게 당당히 등을 보여서는 안 되는 법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칠흑 같은 밤에 흐르던 스무 개의 기이한 언어가 하나둘 사그라들더니, 종국에는 모두 멈추어 자취를 감추었다.

이제는 화염이 피어오를 시간이었다.

< 32. 마법사는 전장의 꽃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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