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법사는 전장의 꽃 [2] >
팔퓌유 자작은 왕당파에 속했다.
그러나 시엔의 무력시위에 도시 세 개를 연달아 내어준 이후, 전의를 상실하고 완전히 항복했다.
서로 창칼을 겨누었으나 딱히 흘린 피가 없으니, 항복은 원만하게 이루어졌다.
시엔의 조건은 단순했다. 모든 군대의 무장을 해제할 것. 그렇게 해제된 군수물자가 바로 전리품이었다.
팔퓌유 영지는 페벨룬 북부 평야의 끄트머리였다. 서부와는 달리 시야 끝에 지평선이 자리를 잡은 드넓은 광야의 시작 지점이었다.
팔퓌유 영지의 직할도시 얄렘방.
그간 1왕자파는 얄렘방에 상부 사령부를 구축하고, 진격을 위한 주공 병력을 준비했다.
그러나 루우트다렌 참사로 내전의 갈등이 격화되고, 패배가 단지 패배로 끝나지 않을 조짐이 보였다.
그러자 전방 영지를 소유한 영주들이 방어를 위해 회군했다. 집결한 군대 역시 저마다의 이해관계와 거래를 통해 전선으로 분산되었다.
시엔이 얄렘방에 복귀했을 때는, 일만에 이르던 병력이 삼천으로 줄어든 상태였다.
그러자 왕당파의 군대가 팔퓌유 영지에 발을 들였다. 얄렘방 전방의 평야에 진을 치고 계속해서 증원을 통해 세를 키웠다.
“적의 병력은 약 구천. 네 개 대대와 휘하 구성부대, 네 개 기사단 및 두 개 용병단 구성이 오천. 나머지는 징집병으로 보여.”
“사천의 징집병이라고?”
“그나마도 계속 늘어나는 추세야. 북부의 후방에서도 계속해서 증원을 보내는 와중이라.”
“그게 가능해?”
“북부니까.”
북부 평야는 왕국 최대의 곡창이었다. 같은 넓이의 영지라도, 숲과 산지로 이루어진 서부와는 영민의 숫자가 달랐다.
“계속 이렇게 보고만 있을 셈이야?”
“글쎄. 나라고 딱히 무슨 수가 있어야지.”
“시엔! 좀 더 진지하게 못 하겠어?”
카레네가 뾰족하게 소리를 질렀다.
시엔이 복귀하자, 자연스럽게 주둔 사령관 역할이 돌아왔다.
그게 보름 전의 일이었다.
시엔은 경계 외에 어떤 지시도 하지 않았다.
적의 증원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동안, 1왕자파의 군대는 그저 멀뚱멀뚱 구경만 하는 꼴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야?”
“무슨 생각이라기보단. 흠. 딱히 수가 없네.”
“시엔!”
“그렇잖아? 우리가 요격에 나설 수도 없고.”
현재 얄렘방에 주둔한 1왕자파의 군대는 삼천. 병력차가 세 배이니, 도시의 방어를 스스로 포기하고 나아가 전투를 벌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적이 공격해 올 것도 아니고.”
어느 영지건 영주성을 낀 직할도시의 방어력은 무시할 것이 못 되었다.
팔퓌유의 물자를 징발했으니 화살은 넘치다 못해 병사들의 궁술 훈련에 쓰이는 와중이었다.
제대로 된 궁사를 키우는 데엔 몇 년이 걸리지만, 성벽 위에서 효력사를 쏘는 수준이라면 보름의 훈련으로도 이미 충분했다.
그러니 기병을 제외한 전 부대가 수성 궁사대의 역할이 가능한 상태이며, 기름이며 부싯깃 따위의 수성 물자 역시 넉넉히 준비된 상황이었다.
게다가 진영에 뛰어난 방화광이 스물. 물길잡이도 하나. 거기에 시엔 본인까지.
수성에 한해서는 실제 전력은 오히려 1왕자파가 우세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당파의 군대가 선공을 개시할 이유가 없다.
1왕자파의 요격은 불가. 왕당파의 공성 역시 불가능하니 서로 마주 보고 경계에 힘을 쏟는 의외에 대체 뭘 하겠는가.
카레네가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시엔,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야. 이 시간에도 적의 증원이 오고 있는데.”
“그럼 빠져야지. 뭐.”
“시엔!”
“그렇게 조급할 필요가 없다니까 그러네.”
시엔이 테이블을 톡톡, 두 번 두드렸다.
“뭐. 이대로 있으면 불리하긴 하지. 적들의 노림수 역시 바로 그거고.”
왕당파 역시 얄렘방의 병력이 많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병력차가 세 배이니, 평원으로 나와 요격이 아예 불가능한 상황이 아니던가.
그러나 왕당파 입장에선 달랐다.
흐레이그가 이미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진 상황에서, 후방의 병력을 집결하여 잃어버린 땅을 수복한다는 명분까지 있었다.
증원은 어렵지 않게 이루어지고 있으니, 계속해서 병력을 모으다가 승산이 확실해지면 공격에 나서면 그만이었다.
그게 싫으면 알아서 후퇴해 도망치시던가.
어느 쪽이건 이미 확실한 승리를 확보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니 굳이 조바심을 낼 이유가 없었다.
카레네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대체 왜 이러고 있는데?”
“지난 가뭄이 이제야 가혹해지기 시작했으니까. 우리야 삼천명 분을 소모하지만, 저쪽은 벌써 일만 가까운 병력이잖아?”
“그런데?”
“군대는 숨만 쉬어도 금화가 녹아나는 법이야. 특히 징집병들이 그렇지. 실력은 형편없지만 그렇다고 굶길 수도 없으니.”
“그래서?”
“그래서는 무슨 그래서야. 내 손해보다 상대의 손해가 크면 그만이지.”
“이대로면 팔퓌유를 포기하고 후퇴해야 할 상황인데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점령한 땅을 내어주고, 팔퓌유 자작을 다시 왕당파로 돌려주는 것보다 큰 손해가 어디에 있다는 거야?”
카레네가 황당하다는 듯 쏘아붙였다.
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비용의 문제지. 팔퓌유 영지는 피 한 방울 안 흘리고 집어삼킨 땅인데, 그걸 넘겨주는 게 뭐 얼마나 큰 손해겠어?”
“하지만 흐레이그로 향하는 진격로야. 그만한 전략 거점을 포기하는 건 또 다른 문제잖아?”
“진격로는 다시 뚫으면 그만이지. 지금으로선 팔퓌유 방어에 병력을 소모하느니, 적당히 보급 소모를 지우다 넘겨주는 게 나아.”
“그걸 말이라고······”
“게다가 이미 팔퓌유의 무장을 해제했으니, 왕당파가 재무장 비용까지 고스란히 부담해야 할 테고.”
“하지만, 전쟁은 그런 비용의 문제가.”
“비용의 문제지. 금화가 없으면 병력이 아무리 많은 들 그게 무슨 소용이야?”
“금화? 또 왜 금화 이야기가.”
“금화가 없으면 보급도 없어. 보급 없는 부대가 얼마나 싸울 수 있을까? 당장 일주일만 지나면 모든 기마를 버려야 할 테고, 보름이면 제대로 무기를 들 힘도 없을 텐데.”
“그건 너무 극단적인 결과 아냐? 전쟁이 아무리 길어진다 한들, 그 정도 수준까지는.”
“지금은 다르지. 작년에 가뭄이 들었으니까. 군량이 소모되고 나면, 이후 보급에 드는 금화의 단위 자체가 다를 거야.”
카레네의 표정이 멍하니 풀렸다.
그런 식으로는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던 탓이었다.
“뭐. 그래도 전쟁에서 가장 효과적인 공격은, 적의 병력을 소모시키는 게 맞긴 해.”
카레네의 속내가 워낙에 빤히 들여다보이는 것이여야지. 이제는 아예 후계 자격까지 포기한 채로 기사의 삶을 살겠다 했으니.
그러니 전장에 대해 카레네가 가진 어떠한 열망을 어찌 모르겠는가.
정 그렇다면야. 뭐. 소원 풀이 한 번 해 주는 거야 그리 어려운 일이겠어.
시엔이 키득거리며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심심한 모양인데. 그럼 산책이라도 좀 다녀오는 건 어때?”
* * *
사람이 종일 깨어있을 수는 없다.
군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군인에게 수면은 중요한 임무였다.
사람이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면, 온갖 부작용이 일어나는 법. 군인이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면 그 전투력이 상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군대는 또한 항상 깨어있어야 했다.
밤은 공격자의 가장 좋은 친구였으니까.
그러니 경계의 중요성이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라고, 군대의 주둔지엔 항상 깨어 있는 이가 사방을 살펴 적습에 대비했다.
왕당파의 군대가 팔퓌유 영지로 진격했을 때만 해도, 엄중한 군기로 부대를 지휘했다.
적에게 점령당한 지역이니 어디서 교전이 일어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음으로.
그러나 1왕자파는 일체의 반응 없이 얄렘방에 틀어박혔을 뿐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후속 부대가 계속 도착해 자리를 잡았다.
이제는 적이 요격하고자 해도 체격 차이가 현격하여 도저히 시도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티란디스의 대공자는 이대로 수성에 나설 생각인가 봅니다.”
“용의 마법에, 듣자 하니 화염탑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수성엔 자신이 있다 이 말이지요.”
“누가 어울려 주겠답니까? 크크.”
왕당파의 전략은 간단했다.
징집병으로 크게 증편한 군대가 충분히 모이고 나면, 그때엔 얄렘방을 완전히 포위할 예정이었다.
보급이 끊기고 나면 제아무리 강력한 마법을 부린다 한들 방법이 있으랴. 포위를 뚫기 위해 스스로 문을 열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 전략이 알려지면 1왕자파의 군대가 얄렘방을 버리고 후퇴하고 말리라. 그러니 충분한 병력이 모일 때까지는 정면에서 주둔하며 공성 준비를 하는 척을 하고 있었다.
얄렘방을 포위하여 적을 섬멸하는 것이 최선이며, 포위망 구성 전 1왕자파의 군대가 눈치채고 도망치더라도 손해는 아니었다.
팔퓌유 영지의 탈환 수복이라는 진격 목표 자체는 이루는 셈이었으니까.
그러니 이미 승리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장 얄렘방 탈환군 사령을 맏은 킬지언 흐레이그의 생각이 그러했으니, 군대를 이끌고 합류한 귀족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미 승리했다 여겼으니 자연히 그 태도가 밖으로 드러났다. 지휘관이 자신감이 넘치니 군대의 사기가 하늘을 찔렀다.
그러나 지휘관이 자만하는 만큼 군기는 흐려지기 마련이었다.
심지어 아무런 응전 없이 벌써 보름이 지났다면?
시엔의 생각으로는, 어떤 명장의 지휘 아래에 있어도 군기를 유지하기 어려우리라. 당장 시엔 본인이 지휘하더라도 군기를 장담할 수 없을 테니까.
오십 기의 기마가 밤의 평야를 가로질렀다.
검게 칠한 갑옷과 마갑 탓에, 기마는 어둠 속에 녹아들어 그저 흐릿한 형체로 보일 뿐이었다.
곡창 지대의 흙바닥 위로 잘 훈련된 군마가 천천히 나아가니 소음이라곤 찰칵찰칵 갑옷 부대끼는 소리가 전부였다.
그 선두에 카레네가 있었다.
‘일단 적당히 접근해 보도록 해. 관측이 가능한 거리에서 적당히 눈치를 보다가, 별 반응이 없다면, 이미 군기가 엉망이라 봐야겠지. 그러면 창돌격을 하건 뭘 하건 이미 대처하기는 늦은 상황일 테고. 주둔지를 적당히 휘젓고 돌아오면 될 거야.’
시엔의 말이었다.
대체 적당히가 어느 정도 수준을 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의 초병이 눈에 보일 정도라면 충분히 접근했다 볼 수 있으리라.
이건 미친 짓이야.
카레네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단 오십의 기마가 구천의 적을 마주하고 있었다. 누군가 듣는다면 참으로 참신한 자살법이라 비꼴 만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중얼거림과는 별개로 카레네의 눈빛이 생기로 반짝거렸다.
미친 짓이지만, 또한 역사에 남을 용맹이리라. 세상 어떤 기사들이 수백배에 달하는 대적을 상대로 감히 기습을 감행하겠는가.
카레네가 힘차게 숨을 들이마셨다.
뒤이어, 우렁찬 목소리가 고요한 밤을 뒤흔들었다.
“티란디스를 위하여! 전원, 돌격하라!”
“티란디스를 위하여!”
* * *
“티란디스를 위하여!”
난데없이 들려온 우렁찬 목소리였다.
불침번을 서던 초병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두두두두! 뒤이어 땅이 울리고,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이건 아닌 밤중에 또 무슨 소리람.
본디 무두장이였으나 징집되어 여기에 선 초병이었다. 그러니 현재의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해서 탓할 수는 없으리라.
초병이 제 옆에 누운 병사를 흔들었다.
군인은 평민 중에서도 특권 계급이니, 징집병에 대한 취급이야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우텀 십장님? 우텀 십장님? 일어나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 씨. 뭔데······. 깨우지 말라고.”
병사가 욕설을 주워 삼키며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러나 그도 잠시, 무언가 시끄럽기 짝이 없는데, 아. 이 소리 뭐더라. 그래. 마치 기마대가 돌진이라도 하는 것처럼.
병사가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빠르게 다가오는 한 떼의 기마를 발견했다.
-부우우. 부우우우!
신호나팔이 울려퍼졌다.
그러나 이미 기마가 지척이었다.
서걱. 비스듬히 세운 돌격검의 칼날이 병사의 몸통을 반으로 가르고 지나갔다.
“적습이다!”
“적습! 적습!”
기사단의 총돌격은 밀집한 보병이라도 단숨에 돌파하는 막강한 수단이었다.
중기병의 창돌격과 비슷하지만, 그 주체가 오러를 다루는 초인들이었으니 파괴력은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일단 무기의 파괴력부터가 정상이 아니었다.
기사의 돌격검.
성인 키의 두 배에 이르는 거대한 장검으로, 유연한 칼몸은 쉬이 부러지는 일이 없었다.
대신 칼날이 무딘 편이었지만.
그러나 기사에게 칼날의 날카로움이란 별반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무딘 칼날이라도 오러가 실리면 웬만한 장인의 작품만큼이나 예리한 절삭력을 가지는 법이었으니까.
기사단의 돌격으로 진형이 무너진 이후라면, 그 이후엔 그저 편안히 죽기만을 기도하라고 했던가.
이제와서 나팔이 울리고 적습을 외친다 한들, 한참이나 늦은 반응이었다.
쇄기형으로 늘어선 창공 기사단의 정예가 적의 진지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 마법사는 전장의 꽃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