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 제자리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 있다 [3] >
땅을 파 사라진 상단의 흔적을 찾는다고 하니, 순식간에 사람이 몰려들었다.
수확철이나 수확할 것이 별로 없는 탓에 일찌감치 끝내고 노는 장정들이 많았던 탓이었다.
물론 높은 노임이 결정적이었으니, 세상 살기에 금화만큼 편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없다고 했던가.
시엔은 일하겠다 하는 이 모두를 고용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쓰겠다는 태도였다.
처음엔 힘깨나 쓴다는 장정들이나 지원하더니만, 모두 쓴다 하니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아이와 아녀자, 늙은이들이 손을 들었다.
좋다 쓰겠다 하니 도시 전체가 시끌벅적해졌다. 이럴 때에 돈푼이나 벌겠다 하여 일하기 어려운 자들까지 모두 달려들었다.
카레네가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생각이야? 당장 늙은이는 삽 하나도 들 힘이 없어 보이는데.”
“자갈이라도 들어다 옮기면 되겠지.”
“자갈? 줍느라 허리를 굽혔다간 그대로 부러지겠는데. 저러고도 돈을 받겠다 일을 하겠다고 지원했단 말야?”
“그래도 노임 준 값은 충분히 할 걸.”
“무슨 뜻이야? 뭔가 또 다른 걸 꾸미는 건 아니지? 뭐, 시엔이 하는 일이 어떤 식인지는 모르겠지만 수완은 인정하겠어. 대신 나한테는 좀 미리 말해줬으면 좋겠는데.”
“별건 아니고.”
시엔이 말을 이었다.
“사람 시체라는 게 생각보다 숨기기가 좋지 않아. 특히나 그 숫자가 많아지면 더욱더 그렇지. 상단이 하루아침에 사라졌어. 그 시체들을 서둘러 급히 처리했다면 눈으로 못 볼 꼴이 되어 있을 테고.”
시엔이 뒤를 바라보았다.
장정들이야 고개를 오르는 일이 쉬이 가능한 것이라, 뒤에 처진 것들은 늙거나 어리거나 병든 이들이었다.
일은커녕, 현장까지 도착하기도 힘들어 보였다.
“사람이 끔찍한 것을 보면 이상하게 입을 가만히 놔두질 못하거든. 내가 끔찍했으니 너도 느껴보라, 뭐 이런 건가?”
상단 하나가 통째로 사라지고, 그 범인은 전혀 단서가 없는 상황이었다. 지금이야 상단이 어디로 사라졌나 소문만 무성한 상황이지만.
그 시체가 발견되고 그 참혹한 꼴을 목도하면, 이후로는 그 도적떼인지 군대인지 알 수 없는 습격자가 공포가 되어 떠도리라.
그만한 상단을 한 방에 지우는 도적떼라더라. 신출귀몰하니 아직도 꼬리 하나가 안 잡혔다더라. 이거 무서워서 어디.
카레네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런 건가.”
“보고 배워. 모든 행사엔 이유가 있어야 해.”
“지금 날 가르치는 거니?”
카레네가 코웃음을 치며 말을 이었다.
“이젠 복잡한 건 신경 안 쓸 거거든? 네가 알아서 잘 하니 나야 검이나 휘두르면 되겠네. 앞으로도 잘 부탁하지요, 소영주님.”
* * *
시체가 발견되는 데는 사흘이 꼬박 걸렸다. 아래로 십여 미터. 참으로 깊은 곳에도 묻었다. 땅지기의 마법이 아니라면 하루아침에 사라진 상단이 그 깊은 곳에서 발견될 수는 없으리라.
“세상에.”
“온통 시체투성이야. 워메.”
일꾼들이 학을 뗐다.
처음부터 사라진 상단을 찾는다 게시했으니, 시체가 나올 것이라 이미 알고 있는 이들이었다.
그럼에도 한데 혀를 내두르고 차며 고개를 저으니, 시체들의 상태가 참혹하고 불쌍하기 때문이었다.
아무렇게나 뭉쳐진 시체들이었다.
땅지기가 대지를 가르고, 반쯤 불탄 것들, 제대로 태워지지 않은 것들을 그저 툭툭 던져넣고 다시 덮었다.
마법으로 덮었으니 그 압력이 사람이 메우는 것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땅거죽이 마력에 조종당해 아래 깔린 것들이 짓눌렸다.
그렇게 덩어리진 것들을 살살 끄집어내 모양을 맞추는 것도 문제였다.
죽은 자를 만지는 일이니 노임으로도 사람을 부리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사람 뼈와 살이 어떻게 연결되어있는지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붙어야 제대로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시엔의 조사대에서 그런 이들이 누구랴.
시엔을 비롯한 흑마법사 셋. 그리고 전문적인 교육과정을 끝낸 기사들 뿐이었다.
시엔이 직접 앞으로 나섰다.
장갑을 끼고 뭉개진 시체를 직접 헤집었다.
반쯤 불탄 것들. 오히려 애매하게 썩어 지독한 악취가 올라왔다. 게다가 살아서 여럿이었던 이들이 죽어서 하나로 뭉쳤다. 살과 살이, 근육과 근육이 단단히 달라붙어 분리하는 것도 고역이라.
시엔의 곁에 카레네가 말없이 따라붙었다. 기사들이 뒤를 따랐다. 티란디스의 조사대가 시체를 분리하고 개인의 조각을 모아 하나하나 땅 위에 눕혔다.
그렇게 팔십여 구에 이르는 시체가 땅 위에 놓였다. 영 유쾌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 앞에 한 사람이 섰다.
망연한 표정. 핏기없이 창백한 얼굴. 그저 고개를 떨군 채 멀거니 시체를 바라보는 이였다.
엠파스툰이었다.
시엔이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신전에 사람을 청해. 시엔 샤인 티란디스가 추모를 부탁드린다고. 최대한의 예우로.”
* * *
신관들이 섰다.
큰 법모를 쓴 이는 도시의 신전을 맡은 주교였다. 그 외에도 정신관들이 많았다.
작은 규모나마 성가대가 제대로 자리를 잡고 섰다. 심지어 신전 경호를 맡은 성기사들까지 전부 동원되어 가검과 예식 갑옷을 차고 자리를 지켰다.
귀족가에서도 이 정도의 신관을 동원하려면, 참으로 막대한 기부가 필요한 것이었다.
큰 귀족가의 장례, 그것도 직계급 원로 인사의 추모에서나 볼 법한 제대로 된 인원 구성이었다.
명예 성자라는 칭호 덕분이었다.
시엔 샤인. 샤인들은 모든 신전에서 가장 높은 예우를 받았다.
성자 성녀의 권위란, 게다가 어떤 강압적인 힘에 마지못해 따르는 그런 성질이 아니었다. 천신께서 직접 내리신 기적의 소유자를 직접 눈으로 보고 함께 은혜를 느끼고 싶다며 스스로 자처해 모였다.
그 많은 신관들이 천신의 기적을 부르짖으며, 성흔 앞에 무릎 꿇고 신을 찬양했다.
그 중심에 선 시엔이야, 흑마법사 개인으로서는 대체 이게 무슨 꼴인가 싶기도 하고. 어쨌거나 죽은 이를 추모하는 것은 성대하면 성대할수록 좋은 일이었다.
“제가 추모를 진행해도 되겠습니까? 샤인께서 직접 주관하심이 아무래도 죽은 이들에게도 더 위안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만.”
“명예 성자니까요. 세속에 속했으니 아무래도 주교님께서 맡아주심이 더 안심될 것 같네요. 부탁드릴게요.”
고개 아래 도시에서 온 주교가 추모를 맡았다. 도시의 신전을 이끄는 이로, 명예 성자의 부탁으로 직접 자리했다.
“······여기 당신의 아이들이 있습니다. 지상에서 참혹하여 슬픔이 가득한 죽음이나, 당신의 사랑하심이 죽어서도 이뤄지는 것임을 믿습니다. 부디 바라건데 지상의 참혹한 삶을 잊고 낙원으로 인도하여 주시기를.”
긴 추모사가 이어지고, 신관들이 신성을 뿜었다. 가사 없는 성가가 연신 이어졌다.
어떤 악기도 없이 사람의 목 여럿이 모여 내는 화음이었다. 듣기에는 아름다우나 거기에 실린 신성은 아무래도 좀 거북했다.
시엔이 자에바를 바라보았다.
겉으로야 안타까운 표정으로 성사를 바라볼 뿐이지만, 속으로야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게 무엇이람. 복잡하긴 복잡할 테지만.
다만 망령이 붙지 않았으니 그녀가 직접 참여한 작전은 아니리라. 그러나 그 옆에는?
바라마엘이라 했던가. 기사는 굳은 표정으로 성사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제 죄악을 눈 앞에 두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건 조금 궁금한 일이었다.
시엔이 시체들을 바라보았다.
-복수를! 복수우!
-죽기 싫었는데, 죽기 싫었는데.
망령들이야 여전히 원한에 몸부림 칠 뿐이었다. 산 자가 하는 추모는 결국 산 자의 위안을 위한 것이라.
엠파스툰은 그저 가만히 서서 추모를 지켜볼 뿐이었다. 상인의 특성인지 어쩐지 그저 무표정할 뿐이었지만.
-아버지. 아파요, 저 많이 아파요. 아픈데, 도와주세요. 억울해, 이대로는 안 돼. 죽일 놈들, 죽여버려야 해. 다 죽어야.
제 아들의 망령이 눈앞에 있다는 사실이야 모르는 편이 더 나으리라.
흑마법사가 경지에 이르러 죽은 것들을 보면, 그 때는 이미 마음이 단단하여 거기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시엔이야 타고난 어둠의 축복으로 어릴 때부터 보아왔으니 이제야 익숙한 것이고.
어린 델피르 왕자가 광증에 걸린 마냥 날뛰었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러한 장면들이 고스란히 눈에 보인다는 것은 아무래도.
그때였다.
“영주님! 영주님!”
“막아, 막아!”
“젠장, 붙잡아!”
“영주님, 제가 왔습니다! 제가 왔다구요!”
성사를 끊는 불경한 소란이 있었다.
당황한 성가대가 성가를 멈추고, 성기사들이 사제를 보호하여 그 곁에 착착 뛰어 자리를 잡았다.
시엔이 바로 몸을 돌렸다.
“시엔?”
“전부 다, 가자.”
성가란 신성이 담긴 것이고, 어떤 종류든 마력과 같은 기운이 어린 소리는 유난히 멀리 퍼져나가기 마련이었다.
이러한 산중이니, 살아남아 몸을 숨긴 생존자가 있다면 소리를 듣고 찾아오리라 생각했다.
병사들의 손아귀에 잡혀 악을 쓰는 소년이 보였다. 긴 보자기 같은 것에 무언가 두툼한 짐을 넣어 목에 두른 소년이었다.
시엔을 발견하자 목에 핏대를 세우며 외쳤다.
“영주님! 영주님!”
“내 영민이야. 보호해.”
그러자 기사들이 나섰다.
“대공자님께서 놓으라고 하신다!”
병사에 지나지 않는 이들이 기사들의 위세 앞에서 어찌 버틸 수가 있을까.
게다가 어떤 명을 받아 막은 것이 아니라, 거지꼴을 한 수상한 것이 귀한 분들께 닿지 않게 붙들었던 것에 불과했다.
병사들이 손을 놓자, 소년이 시엔에게 달려들었다. 베른닐이 급히 검을 뽑아들었다.
그러나 그뿐.
소년이 무릎을 붙여 바짝 업드리니 베른닐의 검이 무안하게 허공을 겨눴다.
“영주님, 저 로이입니다!”
시엔이 빙긋 웃어보였다.
“로이. 아직 영주님은 아니란다. 함부로 그런 소리를 하면 못 써.”
“어. 그. 소영주님?”
“그래. 어디 소속이지?”
“제1 도로 순찰 보수대 휘하 특수 산림 조사조입니다. 소영주님.”
증편 1대대 휘하 레인저라는 뜻으로도 썼다. 가장 첫 번째 도로 순찰 보수대의 특수 산림 조사대라면, 제이든이 직접 가르친 아이들이었던가.
개중 쓸만한 아이가 셋 정도 있다더니, 개중 한 명임이 틀림없었다.
“살아남았구나. 수고했다. 잘 해 줬어.”
소년의 표정이 변했다. 밝게 타오르던 환희 속에 울컥 석양이 졌다. 이내 일그러진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더러운 얼굴에 눈물이 구정물이 되어 줄줄 흘렀다.
“다 죽었어요, 아저씨들 전부 좋은 분들이셨는데, 우리는 항복한다고 했었는데, 저는.”
소년이 꺽꺽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비통한 울음을 터뜨렸다.
“무슨 일이야?”
“글쎄······.”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져갔다.
소란이 있었으니 다른 이들이 몰려왔다. 신관들이며 노역꾼들 모두가 호기심어린 시선으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얼마간일까. 소년의 표정이 분노로 물드니 시커먼 증오가 슬픔 위에 드리웠다.
“여기, 여기 있습니다. 여기 이 새끼, 이 개 같은 놈이.”
소년이 목에 맨 보따리를 끌어내렸다. 성마른 손길로 매듭을 푸려 하나, 얼마나 꽉 매어놓은 것인지 좀체 풀릴 기색이 없었다.
한참을 낑낑거리며 매듭과 사투를 벌이니, 지켜보는 이들의 오히려 긴장하여 침을 삼켰다. 대체 무엇이길래 저러는가.
마침내 소년이 제 품에서 날붙이를 꺼내 보자기를 잘라냈다. 보자기 안에서 나타난 것이 사람 한 명 분의 머리통이었다.
허억. 구경꾼들의 탄식이 요란하게 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소년이 양 손으로 받쳐 공손하게 시엔의 앞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좋아. 고마운 일을 해 냈구나.”
시엔이 손을 뻗어 머리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그대로 손을 들어 빙글 돌리니, 하얗게 질린 머리 하나가 시엔을 마주보았다.
피를 빼내고 두 눈을 파낸 머리라. 썩지 않도록 신경 쓴 것이나 벌레 몇 마리가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리라.
시엔이 자에바를 바라보았다.
“여기 습격자의 머리가 있군요.”
“그, 그러네요.”
“사람이 갑자기 솟지 않았을 것이니, 이 머리의 주인을 아는 이가 있을 겁니다. 뒤이어 조사하면 나머지 적 또한 알아낼 수 있겠군요.”
자에바의 얼굴이 희게 떴다.
“그, 그게 적이라는 증거는.”
“거야 조사해 보면 알 일입니다. 내 영민이 약하지 않은데 하루아침에 사라졌으니, 그 무리는 군대가 아니면 힘들겠지요. 이 머리가 군인의 것이라는 데에 제 작위를 걸어도 좋겠네요.”
머리가 군인의 것이라니.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올바른 관중의 태도였다.
시엔이 키득거렸다.
“아. 근데 작위를 걸기에는, 아직 정식으로 작위가 없구나. 그럼 뭘 걸어드릴까?”
“그, 근거 없는 소리는.”
“거야 조사해 보면 자연스럽게 나올 텐데. 이제 어찌하시겠습니까? 이쯤 순순히 죄를 인정하신다면야.”
“우, 웃기지 마!”
자에바가 악을 썼다. 분노 가득한 목소리.
시엔이 인상을 찌푸렸다. 왜 그녀가 화를 내는지 대체 이해를 할 수 없는 탓이었다.
남의 영민을 해하고는, 제가 모욕받았다 여겨 화를 내는 것은 아니겠지. 설마.
“어디 보자.”
시엔이 머리를 바라보았다.
아직 그 사념이 깃든 것이라.
오라. 너는 억울하게 죽은 이가 아니로구나. 하기사, 군인이 작전 중에 죽었으니 누구를 원망하여 망령이 되었겠는가. 사람이 죽음을 맞아 억울하지 않으면 망령이 되어 남지 않는 법이었으니.
강대한 흑마법사가 시체의 머리를 얻었다. 음차원 에너지를 일으켜 그 영혼을 불러내는 것이야 손을 휘젓는 만큼 쉬운 일이었다.
시엔은 이미 주문이 필요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주문을 입 밖으로 내지 않는다 뿐이지, 사고와 의지로 마법을 구현하는 데엔 주문을 외우나 외우지 않으나 걸리는 시간은 거기서 거기였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청중 앞에서 자연스레 마법을 부린다는 점에 있어선 참으로 뛰어난 능력이 아닐 수 없었다.
시엔의 눈에, 반쯤 썩은 입구멍에서 나오는 망령 하나가 비쳤다.
“네게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겠지.”
-나는······.
“잡지 않을 터이니 가거라.”
망령이 몸을 돌렸다. 그대로 날아 한 방향으로 향했다.
시엔이 다시 마력을 일으키자 망령이 무언가에 잡힌 모양새로 질질 끌려와 머리 속으로 되돌아왔다.
“서북쪽.”
자에바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무언가 알고 있다. 어디서 정보가 새었건, 아니면 명예 성자라 정말로 죽은 이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지도 모르고.
막아야 했다. 최소한 시간이라도 벌어야 했다. 저 머리, 저 병사의 친가며 아는 이를 찾아 입을 막을 시간이라도 벌어야 할 텐데.
그러나 어떻게?
그때 바라마엘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이번 참사의 주요 용의자가 나타났군요. 영지의 법에 따라 신병을 구속하겠습니다.”
“뭐?”
“어떤 식으로든 이번 사건과 관련되어 있는 인물으로 보입니다. 해당 인물과 증거를 구속하여 조사하도록 하겠습니다.”
시엔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 아이가 내 영민이다.”
“어찌 보증하시겠습니까? 대공자께서 모든 영민의 얼굴을 안다 주장하실 생각이십니까?”
“과연. 이렇게 나오시겠다?”
“대공자의 증언 의외에 신분을 증명할 수단이 없다면, 영지의 법에 따라 저희가 신병을 인도하도록 하겠습니다.”
“내 영민을 참살하고 땅에 저 꼴로 묻어놓은 것도 모자라, 이제 그 생존자를 달라 하는군. 이 소년의 신원은 내가 보증한다. 내 이름으로 보증하는 바이며, 이는 내 명예와 직위를 건 엄숙한 선언이다.”
바라마엘이 고개를 저었다.
“해당 인물이 대공자님의 영민이 맞다 하여도, 랭무튼 내부의 사건이니 그에 관련된 자를 철저히 조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반쯤, 아니 대놓고 하는 협박이었다.
여기가 랭무튼의 땅이니 순순히 말을 들으라는 그러한 소리가 아니던가.
시엔이 코웃음을 쳤다.
“내가 듣지 않겠다면? 군대와 창칼을 앞세울 셈인가? 그것도 재미있겠는데. 한 번 해봐.”
“영지에 법에 따라, 조사에 협조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 대공자님과 그 일행의 신병을 구속할 권리가 있습니다.”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티란디스의 기사들이 검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여차하면 뽑아들겠다는 것이니 지금 당장 충돌이 일어면 참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시엔이 싸늘하게 웃었다.
“그러니까 해 보라고. 기사가 입을 놀리는 데에만 열중이야.”
“어쩔 수 없군요. 대대장! 티란디스 공자님의 신병을 모시도록 해라!”
바라마엘의 명령에, 병사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티란디스, 전투 준비!”
동시에 카레네의 뾰족한 외침이 이어졌다. 기사들이 전원 검을 뽑아 시엔을 둘러싸 사방을 겨누었다.
그러나 그 숫자의 차이가 명확했다.
대대장이 자리에 있으니 한 개 대대가 이 자리에 있고, 티란디스의 병력이라곤 기사를 포함에 열댓에 이를 뿐이었으니.
어쩔 수 없지. 정말로 이건 하기 싫었는데.
시엔이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시엔 샤인 티란디스. 천신을 직접 뵈어 성흔을 손에 새기고, 성하와 백만 교도들 앞에 샤인의 기적을 증명하는 이다.”
“성자님을 지켜!”
성기사들이며 신관들이 시엔의 편으로 가세했다.
병사들이 주춤하여 물러섰다.
이제는 어찌하냐는 듯 저들의 지휘권자를 바라보고, 또 그 지휘관이 저희들의 아가씨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뻔뻔하고, 또 막 나가기로 했기로서니. 아무리 그래도 교단을 적으로 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시엔이 얄미운 미소를 지었다.
치사하지만 뭐 어떤가. 가진 것은 써먹으라 있는 것이니. 시엔이 교단에 기꺼이 그 힘든 노동을 감수하였으니 이 정도는 사사로이 쓸 권리가 있지 않겠는가.
< 27. 제자리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 있다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