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의 망령재림-124화 (124/268)

< 25. 믿음에 대하여 [8] >

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끔찍했다.

더 잔혹한 것은 낮이었다.

밤의 장막이 어둠으로 감춘 상처. 밝은 태양 아래 숨김없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광장에서의 사상자는 아직 집계가 되지 않았다. 시체가 먹히거나 혹은 사지가 뿔뿔이 흩어진 상황, 앞으로도 더욱 시일이 걸리리라.

더불어 마물이 할른폴드 곳곳으로 퍼져 모든 곳에서 피해가 있었다.

게다가 아직 불이 잡히지 않았다.

마물이 도시에 난리라 모든 병졸이 거기에 집중하니 불을 끌 인력이 모자란 탓이 컸다.

게다가 불씨는 영리하고 집요한 녀석이라, 사람이 진압하여 치우고자 하면 깊은 곳에 몸을 숨기고 이후를 기약하는 지혜가 있었다.

겨우 잡았다 싶은 화마가 아직 식지 않은 불씨에 다시 일어났다.

그리하여 광장을 수습하는 데 이틀, 마물을 치우는 데에 사흘, 불을 잡는 데에도 사흘이 걸렸다.

이것이 모두 국왕의 탄신제를 맞아 일어난 일이었다. 이 모든 결과가 국왕의 부덕함이라 공격이 들어온다면? 그런 거대한 명분 앞에 버틸 재간이 있을까.

안 그래도 수도귀족이라 하는 치들, 원로원이라 스스로 칭하는 수도 사대귀족을 견제하느라 정신이 없는 왕가였다.

왕가가 불꽃놀이를 개발하고 연구하여 베푸는 것도 그 일환이었으니.

다행인 점이라면, 원로원들의 저택이 불탔다는 점이었다. 제 집과 재산, 가솔을 수습하느라 바쁘니, 왕가가 짧은 순간이나마 시간을 벌었다.

그리고 왕가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중앙 광장, 가시렌의 국왕이 성녀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무릎을 꿇고, 팔꿈치를 땅에 대어 붙이고 손바닥을 위로 폈다. 경이와 존경, 완벽한 굴종의 뜻이 담긴 경배의 자세였다.

국왕이 그러하니 나머지가 어떠하랴.

광장에 모인 백성이 한데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수만의 정수리가 뷔아를 향했다.

뷔아가 당황했다.

“폐하? 이러하시면……”

“내 천신께서 보우하심을 알았습니다. 거대한 악을 맞이하여 천신께서 왕국을 돌보심을 다시 깨달았습니다.”

“일단 일어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폐하께서 이러하시니 그저 천신님의 종인 제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모두 보았습니다. 그때의 기적을. 천신께서 돌보아 성녀님을 그 자리에 임하게 하셨으니 이제는 모두 그분의 사랑을 압니다. 어찌 그러한 사랑 앞에 경배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 * *

광장이 들여다보이는 창가에서, 시엔이 의자에 앉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나오나. 꽤 영리한 치네.”

“왜?”

어린아이의 미성이 시엔의 말 뒤에 따라붙었다. 아이 특유의, 소년도 소녀도 아닌 그러한 깨끗한 목소리였다.

시엔이 제 품 안을 내려다보았다. 무릎을 떡하니 차지하고 앉은 아이가 하나.

예닐곱 살이나 되었을까.

어린 주제에 벌써부터 콧날이 오뚝한 것이 심상치 않은 외모였다. 이대로 잘 자라면 아마 베른닐과 쌍벽을 이룰 미남이 되지 않을까.

시엔이 아는 이 중 가장 잘생긴 사내가 베른닐이었다. 이대로 잘 자라면, 아이가 추후 새로이 그 자리를 차지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대체 이건 무어란 말인가.

“너는.”

“손 멈추지 마. 계속 쓰다듬어.”

“흠.”

시엔이 다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이의 입꼬리가 올라가니 금세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었다.

이건 뭐, 개나 고양이도 아니고.

이틀 전, 재림교도들을 돌려보내고 바깥에서 온 지성과 거래를 마치고 난 이후였다.

생각해 보니 재림교도에게 정보를 묻는다는 것을 깜빡했다. 대사교가 분명 광장의 참사에 대해 알고 있었으니, 시엔의 적과 내통하였거나 혹은 이용당했으리라.

뭐. 재림교도가 당장 전부 사라질 것도 아니니, 급한 일은 아니었다. 일단 피곤하니 돌아와 잠을 청했다.

바깥이 소란스러워 곤욕이었지만, 원래 시엔이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잘 자는 유형이라 어렵지 않게 잠에 빠져들었다.

꿈에서 천신을 보았다.

시엔이 천신에 접속하기 위해선 강대한 신성을 가진 이의 심원이 필요했다. 이전 뷔아의 심원을 통해 천신을 보고 성흔을 취했던 것처럼.

그러나 그런 과정이 없이 천신께서 꿈에 나타나니 당황스러울 따름이었다. 게다가 천신께서 감정을 내보이시니 더욱 곤혹스러웠다.

「그/그녀는 책망어린 시선으로 당신을 바라본다. 그/그녀는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며, 그것이 모든 인간이 가진 사랑의 합보다 큰 것이다. 그러나 그/그녀는 또한 당신의 어리석음을 탓하며 스스로 슬퍼한다.」

신의 언어였다.

언어 이전의 무언가. 그저 존재함으로 뜻이 살아 지성에게 바로 닿는 그러한 전언이었다.

“무언가 문책하실 것이 있으십니까?”

「그/그녀는 지쳤다. 세상이 온전한 것이 그 부품이 모두 자리에 서기 때문이라. 간밤에 커다란 것이 하나 빠져 밖으로 새었으니 그 수습에 곤혹을 치른 탓이었다.」

용의 영혼을 말함이었다.

안에 있어야 할 것이 바깥 것에게 건네 빠져나갔으니 무언가 문제가 있었던 모양.

세상에 무수한 영혼 중 하나가 빠졌다 해서 무어 그리 큰 문제인가 싶긴 한데, 천신께서 그러하시다니 납득을 할 수밖에.

그러나 납득과는 별개의 문제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건 제 잘못이 아닙니다. 애초에 거래하고자 한 게 제가 아니니, 제멋대로 넘겨받아 그나마 수습한 것이 아닙니까.”

시엔의 목소리가 퉁명스러웠다.

천신 앞에서는 모두 아이와 마찬가지라, 삶의 모든 행동의 결과를 신께서 사랑하심을 이미 알기 때문이었다.

답지 않은 어리광이었다.

「그/그녀는 미소짓는다. 사랑이 듬뿍 담긴 시선으로 당신을 내려다본다. 또한 그 미소는 어쩐지 짓궂어 장난기가 서렸다.」

“뭐.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하나가 가라앉으면 하나가 다시 차올랐다. 그것이 그/그녀가 보아 유지하는 균형이었다. 온전한 것이 사라지고 부족한 것이 대신했으니 그/그녀는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함이 균형임을 보아 규정했다.」

“하지만.”

「그/그녀는 어느새 시선을 돌린다. 그/그녀의 눈에 무수한 생명들, 웃고 울고 희망하고 절망하며, 사랑하고 증오하며 삶을 살리고 또한 죽이는 모든 지성이 비친다. 그/그녀는 그 모두를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다는 듯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 안에 당신이 포함되어 있으나 특별이 당신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뒤이어 의식이 아스라히 멀어지기 시작했다. 천신이 시엔을 불렀으나, 같은 의지로 돌려보내는 것이었다.

시엔이 잠에서 깨어났다.

그 때에 낮선 아이 하나가 품속에 안겨 가만히 시엔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아이가 어쩐지 얄미운 미소와 함께 말했다.

“안녕. 내 보호자.”

그게 이틀 전 밤의 일이었다.

아이, 파린이 재촉했다.

“그래서, 대답은 아직이야? 저 뚱땡이가 왜 영리하다는 거야? 제 딸만한 계집한테 머리나 숙이고선.”

“모든 영광을 천신께 돌리는 거지.”

“그게 왜?”

“그 대신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뜻이고.”

지난 탄신제의 기적, 모든 영광이 천신의 뜻이었다. 그러하니 그 피해와 원망 모두가 천신의 적이 일으킨 일이었다.

이것이 교단의 힘이기도 했다.

만약 탄신제의 참사를 극복한 것이 신의 힘이 아니라 인간의 힘이었다면? 모든 영광이 인간의 영웅에게 있었다.

영웅이 적이다 칼을 겨누면 그것이 국왕이라 해도 자리를 보전하기 힘든 거대한 명분이 될 터였다.

여기까지 생각이 닿자, 시엔의 적이 바로 그러한 것을 노렸으리라 생각이 들었다.

다만 변수라면, 시엔이 개입하며 마경을 열었다는 것 정도일까.

바깥과의 통로가 부정 세계에 속하고 나자 바깥의 지성이 길을 잃었고, 심장 조각을 가진 시엔에게 달라붙어 거래를 이행하라 강짜를 놓았으니.

-천신께서 사랑하심에 인간이 감동하니, 그 증거로 대신전을 지어 그분께 바치겠습니다. 그것이 인간 세상에서 가장 크며 가장 아름다운 것이 될 것이니, 지금 이 순간 가시렌의 이름으로 역사를 선포하겠습니다!

바깥에서 국왕의 목소리가 증폭되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대신전 건설이라. 좋은 수작이었다.

큰 참사를 수습하는 데에 그만한 방법이 또 있겠는가.

신전은 피로 지어지지 않으며, 또한 기도와 웃음 속에 올라야 했다. 그러니 일하는 이를 맞아 대우가 공손하고, 수많은 신관이 모여 아침저녁으로 축복하며 예배를 드렸다.

참사로 많은 이들이 죽고, 또한 거기 달린 삶들이 위협받으리라. 그럴 때에 대신전 건설로 그러한 삶을 안정시킬 수 있을 터.

불안한 왕권을 교단의 권위를 빌려 세우는 것은 부수적인 수입일 테고.

* * *

화마가 고급 주택가를 휩쓸었다. 남은 것은 당장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은 잿더미뿐이었다.

저택의 주인들이 가병을 부리고 사람을 써, 그 복구를 위한 정리에 한창이었다.

늙은이가 그 사이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품에 찬 단검이 어쩌다 달그락거릴 때면, 소름이 돋고 아찔하여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놀라 급히 주변을 살피나, 그저 잿더미를 치우는 손길이 분주할 뿐 늙은이를 보는 이는 없었다.

그래. 모르겠지.

늙은이가 냉소했다.

보잘것 없는 천한 늙은이 하나가, 왕국에 위명을 떨치는 대귀족에게 복수하겠다 칼을 찼다는 사실을 누가 아랴.

그러니 나는 시도하겠다.

이미 원수의 집을 불태웠으나, 복수의 쾌감을 알아 새겨진 마음이 부족하다 외쳤다. 늙은이가 칼을 숨긴 채, 노역을 하는 이유였다.

기가 막힌 일이었다.

사람이 사람을 해하여 그 가족을 모두 죽였다. 그러면 당연히 해롭다 하여 멀리하거나, 화근을 뽑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니던가.

그러나 늙은이가 칼을 품고 원수의 집이 불탄 잔해를 치우는 중이니, 단 한 명도 알아보아 어쩐 일이냐 묻는 이가 없었다.

애초에 늙은이가 그정도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꿈틀대는 벌레를 밟았다 하여 복수를 두려워하는 이가 누가 있으랴.

늙은이가 귀족에게 벌레나 같은 것이라, 전혀 해롭다 여기지 않아 괴로워하는 꼴을 보아 웃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여기서 내 본보기를 보이리라.

이미 늙은 목숨이야 아까울 것이 무엇이랴. 다만 원한다면 이 칼이 원수의 목에 닿아 피를 보고 시체를 보기를 원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러고 나면?

원수를 죽이는 것으론 모자랐다.

그에게 자신과 같은 고통을 맛보여 주고 싶었다. 그 가족을 모두 참살하여, 홀로 남는다는 것이 어떠한 슬픔이며 좌절인지 직접 맛보아 눈물을 흘리도록 하고 싶었다.

그러나 능력이 없었다.

그러니 원수의 목숨을 끓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기를. 원수의 목을 갈라 내 그간 묻어둔 웃음을 미친 듯이 터뜨리리라.

그렇게 애꿎은 잿더미를 부수고 다질 때였다. 가솔로 보이는 이들이 재를 담은 수레를 끌며 떠드니, 늙은이의 귀에 그 소리가 들려왔다.

“쯧쯧. 주인님께서도 안 되셨지 뭐야.”

“쓰러져 거동이 불가하시다며?”

“하기사. 나 같아도.”

늙은이가 급히 그들을 붙잡았다.

“그것이, 그것이 무슨 말이오?”

“못 들으셨소? 지난 참사에 마님이며 도련님들, 아가씨에 선주인님까지 전부 돌아가셨지 뭐에요.”

“어, 어떻게 그런 일이.”

“쯧. 거대한 괴물이 덮쳤다고 하는 모양이야. 머리가 일곱에 팔이 열둘 달린 거인이랬던가?”

“주인님께서야 마차에 타고 계셨으니 멀쩡하시지만, 귀빈석에 괴물이 들이닥쳐 마님이며 아가씨, 도련님을 잡아 뜯어 삼키는 모습을 똑똑히 지켜보셨다는데. 덕분에 지금 반쯤 정신이 나가셔서.”

“이크, 이 사람이.”

하인이 급히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다 이야기를 풀던 하인이 흠흠 헛기침을 했다.

“흠흠. 말실수가 좀 나왔는데, 노인장께서 못 들은 걸로 해 주세요. 정신이 좀 편찮으셔서. 덕분에 그 외숙이라 하던 작자가 가주라도 된 양 우쭐하게 굴지 뭐에요.”

“아이고, 이 치가 입이 방정이네. 여튼 그렇게 되었다오. 그래도 공작님께서 워낙에 강한 분이시라, 털고 일어나실 수 있겠지.”

“안 그래도 하인이 많이 줄었으니 이럴 때에 열심히 하면 집사장님 눈에 띌 수도 있고. 노인장께서 말년에 여기만한 곳도 없…… 노인장? 노인장! 어디 가시오!”

늙은이가 곡괭이를 내던진 채 등을 돌려 달아났다. 하인이 머리를 긁적였다.

“노임 떼먹힐까 도망치나?”

“쯧. 너는 입이 문제라니까. 왜 그런 이야기를 해서.”

“왜, 내가 없는 이야기 했냐? 당장 우리도 뭐 이번 달 봉급 나오나.”

“됐어. 부정타게 또 주절거리지.”

* * *

파린이 말했다.

“나가자.”

“왜?”

“나가고 싶어.”

“그게 다야?”

“그럼? 나는 나가고 싶고, 시엔은 내 보호자고. 보호자는 피보호자 옆에 붙어있어야 할 의무가 있어. 그러니까 같이 나가.”

파린이 옆구리에 손을 척 얹으며 말했다.

시엔이 한숨을 푹 쉬었다.

“내가 어쩌다.”

“불만 있으면 천신에게 따져야지.”

파린이 웃으며 말했다.

전혀 귀엽지 않았다.

* * *

늙은이는 정신없이 내달렸다.

저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다.

그저 속에 가진 의문이 하나.

달이 눈을 뜨면 사람이 미쳐 날뛴다고 이미 들어 알고 있었으나, 괴물에 대한 것은 듣지 못했다. 그러니 괴물은 어디서 나왔는가.

돌연 치솟는 어떤 감정이 늙은이를 이끌었다. 설마. 설마하여.

늙은이가 뛰었다.

늙은 몸에 어울리지 않는 민첩함으로 사람 사이를 누볐다.

가야 한다. 그분께 가서 답을 구해야 한다.

목적지는 있었으나, 그것이 어디인지는 몰랐다. 그래서 늙은이는 그냥 뛸 뿐이었다. 그저 내달리며 가고자 간절히 소망하니, 그렇게 닿게 되리라.

그런 터무니없는 확신으로 그저 앞으로 달려나갈 뿐이었다.

* * *

파린이 말했다.

“맛없어.”

동시에 하나 빼어먹은 꼬치를 시엔에게 내밀었다. 시엔이 어이가 없어 되물었다.

“맛없는 걸 왜 날 주는데? 버리던가.”

“내 보호자잖아.”

“보호자의 뜻을 잘못 아는 모양인데.”

“맛없는 꼬치로부터 날 지켜야지.”

시엔이 한숨을 쉬며 꼬치를 받아들었다.

먹고 싶다 난리를 치길래 손에 쥐어줬더니 이 꼴이었다.

정말로 맛이 없나 꼬치에 꿰인 고기를 하나 빼어 무니, 확실히 맛이 없었다. 차라리 동전을 땅에 버리는 편이 더 나았겠다 싶을 정도였으니.

“……맛이 없긴 하네.”

시엔이 꼬치를 옆으로 내밀었다.

으레 있던 일이라, 트리예가 공손히 꼬치를 받아들었다. 이내 묘한 표정으로 시엔과 파린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왜?”

“아무것도 아니랍니다.”

아무것도 아니라니 뭐. 시엔이 이내 관심을 끊었다.

그나저나 이 녀석은 대체 뭐야?

여덟 살 아이의 껍데기를 뒤집어쓰곤, 해선 대체 이게 정체가 무엇인지 아는 것도 없었다.

다만 천신께서 맡기신 것이라 함부로 쳐내기도 그렇고.

귀여운 부분은 전혀 없지만. 흠. 생긴 것에 반만 귀엽게 굴어도 어찌 봐 줄 구석이 있을 것 같은데.

그때였다.

무언가 시엔을 향해 달려와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시엔이 이건 또 무어람 내려다보자, 대사교라 불리던 늙은이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땅에 달라붙은 상태였다.

“당신께서.”

늙은이가 그렇게 말하곤 축 늘어졌다.

맥이 뛰니 죽은 것은 아니라. 지쳐 탈진하고 만 모양이었다.

마침 어떻게 찾을까 궁리하던 참이었다.

신격이 황당한 것이고, 바깥 것에 당황하고 궁금하여 경황 중에 그냥 보내고 말았다. 적에 대한 것을 알 테니 보내기 전에 물어보았어야 하는데.

“이거 주워 가자. 세올에 실으면 되겠네.”

“예, 시엔 님.”

트리예가 늙은이를 잡아끌었다.

“세올 선배. 좀 낮춰 봐요. 이것 좀 올리게.”

그러자 뒤를 따르던 말이 푸힝힝 콧김을 내뿜었다.

명목상으로는, 시엔이 탑리프 상단 책임자의 아들이며 트리예가 그 부인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여인이 하나 더 낄 때가 없다.

그러니 리치야 뭐.

이제는 강신체를 연구하며 그 지식이 예전과 다르니, 오리 아니라 말이며 개 따위의 짐승이라도 깃드는 데에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 * *

늙은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해가 지며 하늘이 붉은 상황이었다. 창밖으로 노을을 바라보던 시엔이 고개를 돌렸다.

품에 잠든 아이 하나를 안고 있는 상황이라, 시엔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이제 정신이 드나?”

“그렇습니다.”

“흠. 괜한 안부는 생략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자고.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말야.”

“그 전에, 그 전에 하나 여쭙고 싶습니다만.”

늙은이가 토를 달았다.

그러나 그 음성이 사뭇 간절했다.

“뭔데?”

“광장이 잿빛으로 물들며 온갖 마물이 튀어나와 사람을 해하였다 들었습니다. 그것이 혹여 당신의 행사이십니까?”

시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늙은이가 다른 마음을 먹고 시엔이 벌인 일이라 주장한들, 이제와서 믿을 이가 누가 있으랴. 그러니 굳이 거짓말로 숨길 이유가 없는 것이었다.

“아아.”

늙은이의 표정이, 인상이 바뀌었다.

회한이 가득 담긴 주름이 연륜으로 탈바꿈하며, 공허한 눈에 경이가 깃들어 시엔을 바라보았다.

처진 어깨와 굽은 등이 펴니 볼품없는 늙은이가 어느새 자취를 감췄다.

떠난 신앙이 돌아오니 몸에 활력이 넘치고, 곧 신성이 차올라 어떠한 위엄 비슷한 것이 존재에 서렸다.

“당신을 섬깁니다. 제가 바로 당신의 누렁이입니다.”

아니, 왜 또?

시엔이 인상을 찌푸렸다.

< 25. 믿음에 대하여 [8]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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