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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의 망령재림-112화 (112/268)

< 23. 도둑맞은 빈 집의 책임은 [1] >

왕국 규모의 강우 사업. 게다가 말석이나마 오대국 중 하나인 페벨룬이니 그 땅이 얼마나 넓은 것이랴.

그러니 한 명의 물길잡이가 나서서 될 일이 아니었다. 셀시를 포함한 여섯 물길잡이가 일행화 함께하는 이유였다.

파도등대의 차석 등대지기인 셀시의 실력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마법사들 역시 쟁쟁한 이들이었다. 파도등대에서 상당한 성의를 보여준 셈이었다.

받은 만큼 돌려주는 것이 순리였다.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는 뜻이 담긴 인사였다.

엄청난 규모의 먹구름이 일행의 머리 위에 자리잡았다. 한낮에도 사위가 어둑할 정도의 비구름이었다.

대륙 전체가 가문 참이었다. 통과하는 도시마다 간절함이 담긴 시선이 날아들었다.

그러나 어쩌랴. 비를 원하면 제 왕에게 청해야 할 것이니. 타국의 백성에게 베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간절하면 사람이 무엇이든 못할까.

혹여 모를 일이라, 일행이 서둘러 왕국으로 돌아가는 길을 재촉했다.

그리고 마침내 페벨룬 왕국의 국경에 닿았다. 국경이라 해도 그저 길게 사이를 두고 표지를 박아둔 것에 불과했지만.

표지 뒤편으로 사열한 왕국의 병사들이 왕자를 보며 환호성을 질렀다. 이틀 전부터 저 먼 하늘에 먹구름이 다가오는 것이 보이던 참이었다.

이제 머리 위로 드리운 먹구름 아래, 왕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비를 내리겠다 떠난 왕자였으니, 그 여정이 성공했음을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시엔이 사열한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어림잡아 다섯 개 대대. 이천에 이르는 병력이었다.

대군을 이끄는 이는 아이젠 엘스 자작이었다. 일개 자작이 이천이나 되는 병력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왕국의 국경을 지키는 변경백의 지위를 함께 가졌기 때문이었다.

“신 아히젠 엘스, 왕자님을 뵙습니다.”

“환대에 감사드리오. 변경백.”

“감사라니, 신하된 도리로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여기서부턴 신의 군대가 왕자님을 호위하도록 하겠습니다.”

“잘 부탁하겠네.”

예법 선생이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왕자의 응대가 마음에 든 모양.

만족스러운 표정을 한 이들이 또 있었는데, 그간 촉각을 곤두세우며 호위를 맡았던 왕가친위대의 기사들이었다.

지금까지 외국에서 왕자를 지키느라 매 순간이 긴장의 연속이었다. 강철 같은 체력을 가진 왕가친위대라 해도 정신적인 피로는 어쩔 수 없었으니.

변경백이 호위를 맡아주니 이제는 쉴 수 있다는 뜻이었다.

“거의 전 병력을 동원한 모양이네. 에잉, 국경 수비가 뻥 뚫렸겠어. 예식도 좋지만 이래서야 임무에 태만한 것이 아닌가.”

“이 정도는 봐줘야지요. 강우 사업이 성공했으니까요.”

“변경백이 꽤 달아오른 모양일세.”

대군이 의장을 한 채 마중을 나왔으니 웅장하기까지 한 광경이었다. 국경을 지키는 군대가 여기에 모였으니, 전혀 수비가 되고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물론 전쟁에도 선후가 있는 법.

서로 비난을 키우는 외교전이 먼저고, 선전 포고 이후에나 비로소 국경을 넘어 진군할 수 있었다.

그러니 잠시 수비가 마비되었다 해서 그렇게 큰 일은 아닌 셈이었다.

이번 사업 성공으로 델피르는 한층 더 왕세자 책봉에 가까워졌다. 그러니 왕자에게 잘 보이기 위한 예식이 아니겠는가.

국경으로부터 언덕을 한참이나 오르면, 굳건한 성벽으로 무장한 요새도시 아르트밀라가 나타났다.

오늘은 이미 저녁에 가까우니, 아르트밀라에서 하루 푹 쉬어 가는 일정이었다.

그간 고급 여관이나 혹은 타국의 귀족저에서 지내온 여행이었다. 굳이 더 편안하다 할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왕국에 별 탈 없이 돌아왔다는 안도감 때문이었을까. 훨씬 더 편하다 느끼는 이유일 터였다.

성대한 만찬이 이어지고, 시엔이 안내받은 최고급 객실의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배도 부르고 할 일은 없으니 오늘은 모처럼 낮잠을 잘 요량이었다.

이미 저녁을 먹은 참이지만, 그래도 아예 밤잠을 자는 것은 아니고 그저 짧게. 시간 때우는 잠이면 낮잠이라 칭해야 하리라.

침대에 누워 기분 좋은 나른함을 즐기며 서서히 의식이 멀어져 갈 떄 쯤이었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시엔을 방해했ㅎ다. 문을 열자 엘딘의 능글맞은 얼굴이 나타났다.

“뭡니까?”

한참 기분 좋은 때에 방해를 받았으니 시엔의 목소리가 곱지 않았다. 어차피 들으나마나 또 대련이나 한 판 하자 하겠지.

엘딘의 대답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폐하께서 친위대를 급히 찾으신다는 모양일세.”

“지금이요?”

“변경백이 소식을 전했다네. 국경을 넘으면 친위대는 서둘러 왕성으로 와 달라 전언을 미리 보내셨다고 하이. 시간이 애매하니 저녁까진 먹었다만, 이제 채비해 바로 떠나야 한다네.”

“이 시간에 말입니까?”

“그렇게까지 급한 것은 아니라 하니 밤새 달리고 할 것은 아니네만, 말을 갈아타며 속도를 내야 하니 왕자님께서 함께하시기는 좀 그렇다네. 그러니 자네에게 왕자님을 좀 부탁해도 되겠나?”

“안 될 게 뭐가 있겠어요?”

시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왕자를 부탁받았다 해도 시엔은 그저 말벗이나 하며 왕성에 함께 들면 될 일이었다. 왕족의 행차라 가는 영지마다 그 주인이 나서서 호위를 할 테니까.

“마법사들도 함께 출발할 것이네. 강우 사업이 한시가 급하니, 최대한 빨리 왕성에 가 사업 순서를 밟는 게 좋지 않겠나.”

“그것도 그렇긴 한데. 마법사들이 불평하진 않을까요?”

“금화가 한두푼이던가? 값을 치렀으니 그 정도야 감내해야 하지 않겠나.”

엘딘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왕가는 파도등대에 강우 사업 계약을 맺었고, 막대한 금액으로 체결되었다.

개중 20%가 시엔의 몫으로 티란디스로 되돌아 올 예정이었다. 시엔에게는 정당한 노동의 대가로 그 정도 챙길 자격이 있었다.

그러니 왕가가 티란디스에 금화를 수레로 가져다주는 꼴이었다. 물론 굳이 그 사실을 밝히진 않았지만.

굳이 이야기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그럼 왕성에서 뵙겠네요.”

“왕성에서 보세나. 못다한 대련도 좀 하고.”

“그놈의 대련은.”

“자네야말로 그러다 뱃살이 두둑해지고 말 걸세. 지금이야 젊으니 그리 눕고 앉고 해도 태가 안 변하지만.”

“안 바쁘십니까? 바로 채비하신다면서.”

“에잉. 듣는 척도 안 하는구만.”

“대련 백날 해 봐야 제겐 별 소용도 없습니다만.”

“그게 무슨 되다 만 소린가? 수련해서 손해 볼 것이 무어가 있다고. 자네도 자연스레 오러가 깃들기 시작한 것 같은데, 제 몸 지킬 수단 하나는 가져야지.”

“그 수단 이미 충분히 가지고 있습니다만.”

“자네가?”

시엔이 미소를 띄웠다.

“원래 비장의 한 수는 감춰두라 하지 않았습니까.”

“자네가 빈말할 이는 아니고. 에잉. 섭섭하게 그간 숨기고 있었단 말인가?”

“검위공께야 언제고 말씀드릴까 했는데 마땅히 기회가 없었던 것 뿐이에요. 왕성에서 털어놓을테니 너무 섭섭해 하진 마시죠.”

검위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왕성에 가 있겠네. 천천히 오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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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머리 위에 구름을 두고 항상 그늘 아래 있었다. 그런데 왕가친위대가 물길잡이를 데리고 가 버렸다.

그러자 다시 해가 비쳐 날이 더웠다.

왕자가 툴툴거렸다.

“검위공이랑 같이 갈 걸 그랬어.”

“그러게 말입니다.”

시엔이 동의했다.

그래도 더위 말고는 퍽 편안한 여정이었다.

왕성으로 복귀하며 이르는 땅의 영주들이 저마다 병사를 이끌며 호위하고, 좋은 곳에 묵고 좋은 요리를 먹으며 가는 길이었으니까.

영주들이 하나같이 과한 병사를 불러모아 호위에 나섰다. 왕자에게 잘 보이기 위함일 터. 새삼 왕자의 위상이 보통이 아님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번 강우 사업으로 그만큼 민심을 얻었다는 반증이리라.

그렇게 날이 흘러, 얌벨 백작가의 영지를 지나는 길이었다.

“정지! 정지!”

“경계 대형으로!” “궁사대!”

바깥이 시끄럽다 싶더니 기어코 마차가 멈추어서고 말았다.

왕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베른닐이 눈치 좋게 나섰다.

“도련님, 제가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그럼 내가 가야겠어?”

“아. 도련님이 가시려고 하셨던 겁니까? 제가 눈치 없이 나섰군요. 날이 더우니 조심해서 다녀오시죠. 저는 여기서 편히 있겠습니다.”

“빨리 안 가?”

시엔과 베른닐이 사이좋게 키득거렸다.

잠시 후 상황을 알아보겠다며 나선 베른닐이 마차로 돌아왔다. 날이 덥다 보니, 그 잘생긴 얼굴에 벌써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도련님께서 좀 나와보셔야겠습니다.”

“왜 또? 뭔 일인데?”

“상단의 호송입니다. 합류를 요청하는 중입니다만······.”

베른닐이 말끝을 흐렸다.

상단의 호송에 있어서 귀족가의 행렬이 앞에 있거나 뒤에 있어 갈 길이 같아 보인다 하면, 대개는 값을 치러 합류하고자 했다.

귀족가의 호위병력에 동승하겠다는 뜻으로, 대개는 합류가 이루어졌다.

귀족가의 입장에서는 그저 함께할 뿐, 지켜줄 의무는 딱히 없었다. 그러면서도 상단이 보여주는 호의가 있으니 대개는 합류가 이루어지는 편이었다.

상인 입장에서야 딱히 귀족가의 병력이 지켜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누가 귀족가의 행렬을 습격하겠는가. 그저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호송에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으니.

“그게 왜? 어차피 안 될 일인데.”

그러나 행렬도 행렬 나름이었다.

왕자의 호위 행렬에 상단을 끼울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던가.

“그게, 탑리프 상단입니다.”

“아. 그럼 가봐야겠네.”

시엔이 납득했다.

로우드 휘하 재무부엔 티란디스가 직접 운영하는 상단이 셋 있었다. 개중 하나가 탑리프 상단으로, 요정목만을 취급하는 곳이었다.

요정목의 가격이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라, 호송의 중함 역시 보통이 아닐 터.

티란디스의 상단이니 곧 시엔의 백성이었다.

탑리프 상단이라면 그 신원도 확실하겠다, 합류해서 나쁠 건 없지 않겠는가.

“전하, 죄송하지만 부탁을 좀 드려도 되겠습니까?”

“응? 뭔데?”

“티란디스 휘하 상단이 합류를 요청한 모양입니다. 왕가의 호위 행렬이라 하여 거절하는 모양인데, 티란디스의 일원이 제 식구를 매정하게 쳐낼 수는 없지요. 하여 합류를 허락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뭘 그런 걸 부탁 씩이나. 다른 이도 아니고 시엔이잖아?”

“감사합니다. 전하.”

“헤헤. 뭘.”

왕자가 흔쾌히 허락했다.

왕자가 허락했으니 이제 문제가 될 것이 없었다. 시엔이 마차에서 내리자, 델피르가 그 뒤를 따랐다.

“심심하니까 나도 갈래.”

그러나 예법 선생이 따라붙었다.

“왕자님, 마차 안에서는 편히 계시도록 하여 드렸으나, 밖에서는 안 됩니다. 왕가의 위엄을 항상 생각하십시오.”

“윽. 또 잔소리.”

“안 됩니다.”

“알겠어. 알겠다니까.”

“안 됩니다.”

“내 알아들었다 하지 않았느냐.”

“좋습니다. 이제야 나갈 준비가 되셨군요.”

그제야 예법 선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아한 동작이었다. 생긴 건 여리여리하게 생겨서는 보면 볼수록 강단이 있는 이였다. 행렬의 선두로 나가자, 얌밸 백작과 그 앞에 바닥에 달라붙은 사내가 보였다.

“흠, 흠. 무슨 소란인가?”

“전하. 이리 나와 계시면 위험합니다.”

“백작의 군대가 이리 든든히 지키는데 무어 위험할 것이 있겠소. 잠시 답답하기도 하여 나왔으니 너무 심려치 마시오.”

“허나, 전하.”

“그러지 마시고. 이 무슨 소란이오?”

“전하께서 심려하실 일이 아닙니다.”

얌밸 백작은 단호했다.

너무 단호했다. 그 태도에 시엔이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탑리프 상단이 티란디스의 것임을 왕국이 이미 알았다.

그러니 시엔의 얼굴을 봐서라도 합류하는 방향으로 하여, 왕자에게 설명하고 허락하시느냐 물어보는 것이 귀족끼리의 예의가 아니던가.

명백히 시엔을, 그리고 티란디스를 무시하는 처사였다.

백작이 제후급이나 되는 대귀족이라면 또 몰라, 알량한 땅을 가진 주제에 감히.

시엔이 앞으로 나섰다.

“이미 전하께서 알고 계십니다. 전하께서 허락하셨으니 저들의 합류를 받아 주시지요.”

“전하?”

“내 허락하였소. 티란디스라 하면 왕국의 충신이니 그 백성이 해로울 리가 있겠소?”

얌밸 백작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시엔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일그러진 백작의 표정은 불쾌함이나 분노보다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듯한 그런 종류의 감정이 비쳤기 때문이었다.

“전하, 송구스러운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왕가를 모시는 것은 귀족가의 사명이자, 또한 폐하께 충성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하니 혹여 아주 미세한 위험이라도 둘 수 없음을 양해해 주십시오.”

“응?”

델피르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지금 제대로 들었냐는 듯한 그런 표정이었다.

예법 선생이 급히 헛기침을 하여 신호를 보내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다시 입을 열었다.

“내 허락하였음에도 말이오?”

시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델피르야 항상 시엔을 따르며 늘상 웃는 낯으로 유순하기 짝이 없는 아이였다.

그러나 왕자의 목소리에 잔뜩 가시가 돋아 그 불편한 심기가 노골적으로 새어 나오니, 그간 한 번도 본 적 없는 신경질적인 모습이었다.

“송구합니다. 허나 저는 전하의 신하이나, 크게 폐하의 백성입니다. 폐하께 누를 끼쳐드리지 않으려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얌밸 백작이 국왕을 팔았다.

델피르가 주먹을 꽉 쥐었다.

“저들도 왕국의 백성이 아니오. 백성이 그 주인을 해칠까 믿지 못해 내치겠다는 말이오? 나는 그럴 수 없소. 내 백작의 염려를 아니, 아바마마께서 이 일에 무어라 하시더라도 내가 나서 소상히 설명드리겠소. 그러니 백작께선 것이니 불충이라 생각하지 마시고 저들을

받아들이시길 바라오.”

이 합류가 문제가 되면, 왕자가 직접 나서서 해결을 보겠다는 말이었다.

“죄송합니다. 전하.”

얌밸 백작이 거절했다.

이제는 명백히 이상한 상황이 되고 말았다.

왕자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도 거절이라니. 상단의 합류를 필사적으로 막는 꼴이 아닌가.

시엔이 나섰다.

“백작께서 누구를 호위하는 중인지 모르겠군요. 왕가를 호위하심입니까? 아니면 죄수를 호송하시는 겁니까?”

“뭐라고?”

“그렇지 않습니까? 전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어찌 거절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백작님의 충심이 그렇게 깊으신지는 몰랐네요.”

얌밸 백작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시엔이 후계로 낙정된 대공자의 신분도 아니고, 그저 후작가의 영식 중 하나일 뿐이니 준귀족 신분에 불과했다.

거기에 더해, 제 아들보다 어린 시엔에게 비꼼을 당했으니 당연히 열이 오를 수밖에.

“저들이 티란디스의 식구이니, 그 안전을 제가 보장하도록 하겠습니다.”

“영식은 후작가의 모든 식솔의 얼굴을 알기라도 하는 모양이야? 저들이 전부 아는 얼굴이라 보장할 셈이냐?” 그저 상단에 속했을 뿐, 그 인원을 개인적으로 전부 아는 것이 아니니 무슨 일이 있을지 어떻게 아냐는 것이었다.

시엔이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제 식구의 낯을 알아보는 것이 그 주인의 당연한 미덕 아니겠습니까? 백작님께선 제 식솔의 얼굴조차 모르십니까?”

당연히 시엔도 모든 식솔의 얼굴을 알 리가 없다. 아니, 오히려 하인에게 무관심하니 자주 마주치는 몇 명 말고는 이름조차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나마도 세올과 트리예가 전속으로 들어앉고 나선 자주 마주치는 이도 손에 꼽았다.

하지만 거짓말은 안 했다.

미덕이라고 했지, 안다고는 안 했으니까.

얌밸 백작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뺨이 푸들푸들 떨리는 것을 보니 어지간히 열이 오른 모양. 시엔이 싱글벙글 웃는 낯으로 백작을 바라보았다.

“내게는 왕자님의 안전이 최우선이다.”

“끝내 허락하지 않으시는군요?”

“더이상 긴 말 하지 않겠다.”

시엔이 델피르를 바라보았다.

“이런. 왕자님. 어쩔 수 없게 되었군요.”

“시엔?”

시엔이 눈을 찡긋하며 물었다.

“백작께서 한사코 상단과의 합류를 거절하시고, 왕자님께선 함께하고자 하시니 여기서 갈라서 헤어지면 될 일입니다.”

“오오. 그렇군.”

“그러니 여기서부터는 제가 전하를 모셔도 되겠습니까?”

“내 부탁하겠네.”

시엔이 백작을 보며 이를 드러내보였다.

“들으셨지요? 전하께서 백작님의 호위를 거절하셨습니다. 그러니 이제 서로 제 갈길 가도록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너, 너! 건방진 것도 유분수지······!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말이 안 될 것이 무엇입니까? 왕국의 주인될 분께서 왕국을 이동하시는데 이러한 대병력이 움직이는 것도 우습지 않습니까?”

“내가 그걸 허락할 성 싶으냐!”

“허락하지 않으시면? 저는 전하를 모시고 저들과 떠나겠습니다. 그러면 어찌하십니까? 왕자님의 신병을 구속하기라도 하실 겁니까? 죄수 호송처럼 말입니까?”

백작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귀족을 움직이는 것은 명분이다.

델피르의 허락을 국왕의 권위로 눌렀으나, 따로 가겠다고 하면?

물론 왕자의 지위가 국왕에 비할 것은 아니다. 국왕에 대한 충의를 앞세워 억지로 구속하여 이끌 수도 있었다.

시엔이 죄수를 들먹이지만 않았다면.

이 자리에 보고 듣는 이가 한둘이 아니니, 이 상황에서 억지로 구속하고자 했다간 오히려 역풍이 불었다.

백작이 왕자를 핍박하고 구금했다는 소식이 왕국 전체로 퍼져나갈 테니까.

귀족은 명분으로 움직였다.

지금이야 누가 뒷배인지 배짱으로 나서고 있지만, 지금의 상황은 두고두고 약점이 되어 남는 것이었다.

왕실이 이를 빌미로 트집을 잡으면 그대로 숙청이었다. 왕가를 핍박했으니 반역죄고, 반역죄엔 자비가 없는 법이었으니,

왕가 뿐만 아니라 다른 귀족이라도 얼마든지 이러한 명분을 세워 영지전을 벌일 수 있게 될 터.

시엔이 키득거리며 쐐기를 박았다.

“전하께선 저들에게 은혜를 베풀고자 하십니다. 백작께선 아직도 반대하십니까?”

이제는 은혜란다. 여기서 거절하면 더불어 백성을 핍박하는 모양새까지 되는 상황이었다.

백작이 눈을 질끈 감았다.

< 23. 도둑맞은 빈 집의 책임은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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