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 물타기의 제왕 [1] >
미들 네임이 하나 추가되었다 해서 시엔의 생활이 딱히 바뀌지는 않았다.
영지로 돌아와 행정관 업무를 보고, 마법 연구도 진행하며, 자꾸 방에 들이치는 피서객들에 눈살을 찌푸리니 여느 때와 다를 것 없는 생활이라.
그러나 왕국의 사정은 그렇지 않았다.
가뭄이 길어지나, 비는 소식이 없었다.
해갈될 기미가 없는 한천에 그저 탄식이 세상을 채울 뿐. 전 대륙이 그러하니 페벨룬 왕국이라 하여 예외일 수는 없었다.
티란디스야 세계수의 영기로 땅이 마르지 않으니 남의 일이었지만, 그를 제하면 왕국의 민심이 흉흉하다 난리였다.
사소한 다툼이 크게 번지며 미움이 커졌다. 한데 모여 사는 촌락이며 도시들에 웃음기가 사라지니 귀족들의 근심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 와중에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베른닐이 여기저기 떠도는 소문을 듣는 데에는 또 일가견이 있지 않았던가.
보통 이런 치들이 소문을 듣고 또 퍼뜨리는 구조였다. 베른닐이 들은 소문이 자연스럽게 시엔에게 흘러 들어가는 이유였다.
“······뭐?”
“암암리에 그런 소문이 돕니다. 뭐, 내용이 내용인지라 쉬쉬하며 겉으로 드러나진 않습니다만.”
시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소문을 용케 들었네?”
“이상하게 사람이 선술집에만 들어가면, 다른 손님들이 같은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모양입니다. 아마 장식물 같은 걸로 여길지도요.”
“일리가 있네.”
시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맨정신에서야 비밀 이야기라며 그저 속닥거리고 말 것들이, 꼭 선술집에선 앞뒤 안 살피고 경솔하게 떠들곤 하지 않는가.
술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저 식사를 즐기면서도 하는 소리들이 그러한 것이라. 베른닐의 말대로 주변 사람들을 장식물 정도로 여기게 되는 마성의 장소임에 틀림없다.
시엔이 인상을 찌푸렸다.
소문은 다름 아닌 왕가, 그것도 델피르 프린 페벨룬 왕자에 대한 것이었다.
델피르 왕자가 왕의 소생이 아니다.
왕비의 부정으로 잉태하였으며, 그 상대가 왕국의 가장 날카로운 검, 검위공이다.
왕가의 피가 한 방울도 흐르지 않는 이가 왕위를 계승하려하니, 더는 왕국의 영령이 노하여 끔찍한 가뭄이 찾아왔다는 소문이었다.
“그나저나 상황이 더럽게 되었네.”
“그래 봐야 헛소문 아닙니까. 검위공께서 그러하실 분도 아니죠.”
“헛소문인 게 문제가 아니라, 왜 퍼뜨렸냐는 게 문제지. 이번 건 꽤 타격이 있겠어.”
시기가 너무 나빴다.
민심이 좋지 않을 때, 하필이면 그 원인과 엮어 번진 소문이었다. 아직 왕세자 책봉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더욱 그랬다.
자연히 나올 수 없는 내용에 시기까지 맞췄으니, 누군가 작정하고 퍼뜨린 악의적인 소문이었다.
누군가라고 해도 그 범인은 뻔했다.
델피르의 왕위 계승을 막고자 한다면 2왕자파의 계략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어쩐지.”
“어쩐지라 하십니까?”
“이거 봐.”
시엔이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왕가의 직인이 찍힌 것으로, 대규모 강우 사업에 지원을 부탁한다는 내용이었다. 발제자에 델피르의 이름이 박혀있으니, 왕자의 이름으로 여는 사업이었다.
“왕가에서 지원을 말입니까? 왕실 재정이 생각보다 곤궁한 모양입니다.”
“금화를 달라는 게 아니야.”
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가뭄이 들면 가장 바빠지는 이들이 바로 수계 마법사, 물길잡이들이었다. 바쁨과 비례하여 금화가 쌓이니, 바쁘다 바쁘다 하는 비명이 반쯤은 기쁨에서 비롯하는 것이지만.
왕실에서도 진작에 순번을 받았으나, 어찌된 영문인지 차일피일 시일이 밀려 아직까지도 제대로 된 강우를 불러내지 못했다.
이렇게 전 대륙이 말라가는 일이 몇 번이나 있었으랴. 파도등대에 무수한 요청이 밀어닥치니 그 일감이 쌓이고 밀려 좀체 순번을 받을 수가 없는 모양.
이런 때에 소문이 번졌다.
부정한 왕자 때문에 가뭄이 든다는 소문에는, 이러한 날씨에 대한 원망이 억울하게 한 명을 향한 것이 아니던가.
티란디스는 가뭄에서 벗어난 영지라 그러한 원망이 없음에도 여기까지 소문이 닿았다.
델피르의 왕세자 책봉에 치명적인 일이었다.
그러니 직접 나서서 비를 구함으로서 이러한 민심을 달래고 소문을 가라앉힐 수 있으리라.
그래서 시엔에게 도와달라 요청하는 것이었다. 왕자가 직접 찾아가 부탁할 셈인데, 이때 교단이 인정한 성자가 함께하면 명분도 서고 그림도 설 테니까.
“출발 준비를 해야겠군요.”
시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귀족이란 의무 위에 권리를 행사하는 이다.
영민이 제 주인 되는 귀족을 존경하여 사랑한다면, 귀족된 자는 마땅히 그들을 살펴 이롭게 해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왕이 마땅히 제 신하를 살피고 사랑한다면, 귀족이 그를 따라 섬기며 귀애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델피르가 시엔을 기꺼이 여기며 의지하니, 부름에 응하는 것이 당연한 의무가 아닌가.
과거의 왕자도 흑마법사도 이젠 사라지고 여기엔 시엔 샤인 티란디스가 남았을 뿐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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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피르의 견제를 위해 퍼뜨린 악의적인 날조라고 생각되지만, 한편으로는 또 꼭 그렇지만은 아닌 것도 아닌가 하는 의심이 남았다.
애초에 왕비가 결투에 검위공을 보내준 일부터가 그랬다.
왕가를 수호하는 친위대의 대장이니 당연히 이러한 왕위 쟁탈에서 중립을 지키는 것이 미덕이 아니던가.
그러나 실상은 어떠하던가. 왕비의 수족 수준으로 돌아다니니.
그것이 충의가 아니라 어떤 부정하다 할 연정이라면?
검위공이 시엔에게 해 준 많은 일들, 힘을 실어주려 애쓴 그 많은 수작들이 왕자에 대한 부정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속에 담아둔 의심은 독이 된다.
그것을 타인과 나누면 그 독은 더욱 진해져 자신 뿐만 아니라 타인과 당사자를 해쳤다.
그러니 가장 현명한 방법은 당사자에게 직접 묻는 것이었다.
어떤 식이든, 그게 오해였는지 아니건 간에. 의심이 거짓인지 사실인지 둘 중 하나로 해소되어야 비로소 독기가 빠지는 법이었다.
메히아트 지방, 왕국의 국경으로 남쪽으로 뻗어나가는 관문이었다.
대륙의 남서쪽 끝, 무지개 제도에 파도등대가 자리잡았으니 그리로 가는 길목이기도 하여, 시엔이 왕가와 합류한 장소였다.
“시엔!”
델피르 왕자가 환한 미소로 달려들었다.
포옹을 하는 소년의 키가 또 그새 부쩍 자랐다. 애띄던 목소리도 이젠 조금 굵어, 아이와 청년의 어떤 경계쯤이었다.
“전하.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응. 시엔은 어때?”
“저도 잘 지냈습니다. 좀 더운 것만 빼면 그렇군요.”
“맞아. 요즘 덥지. 너무 덥다니까.”
아닌 게 아니라 이미 왕자의 이마에 땀이 맺힌 꼴이었다. 왕자의 뒤로 치렁한 옷을 걸친 사내가 급히 뒤따랐다.
“아이고, 전하! 예법을 지키셔야지요!”
“아. 또 잔소리.”
“잔소리가 아닙니다! 왕자님께서도 이제 장성하시였으니 위엄을 갖추셔야 한단 말입니다! 어법에 신경을 쓰서야지요.”
“오냐. 알아들었으니 그만하거라.”
“전하!”
“알아들었다 말하지 않았느냐.”
“끄응······.” 시엔이 킥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사내가 눈을 흘기니, 시엔이 다시 물었다.
“전하, 이 분은?”
“아베비드 발테스, 예법 선생이자 내 궁전의 관리장이니라. 잔소리꾼이지.”
“저는 아베비드 발테스, 과분하나마 남작의 위를 받아 왕실을 섬기는 몸입니다.”
우아한 얼굴과 우아한 몸짓, 우아한 목소리를 가진 사내였다. 왕자의 예법 선생이라니 퍽 적당한 인물이긴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자의 행차라, 검위공과 왕실친위대가 함께 있었다.
왕실친위대의 기사들이 베른닐을 보며 반가운 척을 했다.
“오, 막내, 아니지, 막내는 탈출했구나. 베른닐 왔구나?”
“선배님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너야말로 안녕하게 지냈냐?”
“그렇습니다!”
“뭐? 안녕하게 지냈다고? 방금, 들었냐?”
“나 같으면 그 실력으로는 잠도 못 자. 밥먹는 시간 빼고 수련만 해야 할 놈이 안녕?”
“이거 또 정신 교육이 필요하겠구만.”
베른닐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 사이에서 반가움을 표하는 인물이 또 한 명 있었으니. 이 더운 날에 제 몸뚱이보다 큰 짐을 든 여인이었다.
“시엔.”
“카레네. 어때, 수련은 할만 하고?”
“할만하면 수련이 아니지.”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씩 웃으며 말하니 검위공 아래에서의 수련에 큰 성과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 때에 베른닐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질질 끌던 기사가 소리쳤다.
“막내야! 가자!”
“예, 갑니다! 시엔, 그럼 나중에.”
보아하니 귀족이라 하여 딱히 어떤 대접을 받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표정이 참으로 밝으니 본인이 만족스럽다면 그걸로 된 일이었다.
“자네 왔는가.”
“검위공께선 잘 지내시고요?”
“나야 뭐 항상 잘 지낸다만. 아, 세올 양도 오랜만일세.”
“안녕하세요?”
“어허, 그새 여아 하나를 더 들였구만.”
“안녕하신지요, 소녀 트리예라 합니다. 위명이 자자한 검위공을 뵙습니다.”
“우아한 아가씨로군. 시엔 자네는 음.”
검위공의 표정이 미묘했다.
그러다 이내 마침 생각났다는 듯 말을 이었다.
“자네, 듣자 하니 큰 깨달음이 있었다 하더구먼.”
“큰 깨달음이요? 제가요?”
시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검위공이 말을 이었다.
“자네 반푼이 호위기사한테 오러를 운용한 운신법을 배우느라 열심이었다던데.”
“아.”
순진무구 덕분에 갑자기 월등해진 신체 능력을 다루는 방법을 깨치기 위해, 한동안 땀을 흘렸더란다.
그 모습을 기사들이 보고, 또 그것이 카레네에게 흘렀을테니 검위공이 아는 것도 당연한 일이리라.
“그리 거창한 건 아닙니다만.”
“내가 그런 거 보는 데는 전문가일세. 그럼 오랜만에 대련 한 판 어떤가? 어떤 깨달음이었나 좀 보세나.”
“여전하시군요.”
“사람이 변하면 죽을 때가 된 걸세.”
시엔이 씩 웃어 보이자, 검위공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 왕족이 국경을 벗어나 타국을 가로지르는 일은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었다. 가로지르는 이도 마찬가지지만, 타국의 입장에서도 혹여 사고라도 나면 큰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달갑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타국의 영주가 호위를 나서 보내기도 하고, 위험을 이유로 먼 길로 돌아가기도 하는 여정이었다.
시엔의 마음 속에 풀어야 할 것이 있었다.
마침 가장 으슥한 밤중, 검위공이 번을 선다고 하니 자청하여 나섰다.
모닥불을 바라보며 한담을 나누길 잠시, 문득 검위공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전부 자는 모양이야. 숨이 고르다네. 물어볼 것이 있지 않은가?”
“어찌 아셨습니까?”
“자네가 속으로 끙끙 앓을 위인이던가? 분명 물어볼 터인데, 설 필요도 없는 번을 함께 서겠다 하니 이 때구나 하지 않겠나.”
“그럼 굳이 질문을 꺼내지 않아도 되겠군요.”
“아닐세. 헛소문이라네.”
검위공이 대답했다.
“검위공. 저는 딱히 왕실엔 감정이 없습니다. 사실 왕실이 무슨 상관이랍니까. 영지가 있고 영민이 있으니 그저 그대로만 보살피며 살아도 무관한 일인데요.”
“흠.”
“다만 여기까지 온 이유야 델피르 전하께서 불러주신 까닭입니다. 왕실이 아니라요.”
“흐음.”
검위공이 신음을 삼켰다.
어떠한 뜻인지 알아들었기 때문이었다.
왕실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델피르를 따른다는 것. 정통성이니 뭐니 하는 문제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한 왕자를 지지한다는 뜻이었다.
검위공이 한참이나 침묵했다.
모닥불에 애꿎은 마른 장작만 몇 번 던져넣고는, 결국 힘겹게 입을 열었다.
“······큰 실수를 해 본 적이 있나?”
“큰 실수라.”
“정말로 큰 실수 말일세. 인생을 뒤바꿀 만한 바로 그런 실수.”
문득 천 년 전 어느 날이 떠올랐다.
모든 것이 잿더미가 되었던 그 날. 왕자가 왕국에 있었더라면 달랐을까?
그러나 그것은 실수가 아니었다. 제국의 욕심이 부른 참화였을 뿐이지.
왕자가 왕국에 거하고 있었던 들, 함께 죽기밖에 더했을까. 그랬다면 지금까지도 제국이 남아있을 수도 있고.
“딱히 떠오르는 일은 없군요.”
“그런가? 글쎄. 그런 실수를 한 이들은 항상 같은 소리를 하곤 한다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러한 실수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검위공께서는요?”
“나 역시 그런 실수를 한 적은 없으나, 글쎄 있다고 치고 말하자면.”
검위공이 쓴 미소를 지었다.
“내 후회는 있으나, 다시 돌아간다 한들 같은 실수를 할 생각이야. 평생을 후회하며 살더라도, 그렇게 후회하며 사는 편이 좋은 결과가 있으니.”
검위공이 그렇게 말하며 한 편을 바라보았다. 여섯 대의 마차로 둘러싸 보호한, 한 대의 가장 커다란 마차가 위치한 곳이었다.
델피르 왕자가 한창 꿈꾸고 있는 장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