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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작가의 망령재림-106화 (106/268)

< 21. 가장 밝은 밤 아래 가장 빛나는 이 [8] >

이 자리에 인간 폭탄이 하나라도 남아 폭발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터였다.

성도가 아예 무너지는 정도는 아니더라도, 성야에 무고한 이가 피를 흘리면 더는 어떤 축제도 계속되지 못할 터였을 테니.

그러나 그 시도가 무산되자 그저 우스운 목소리가 남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남은 것이 하나 더.

토메쏘.

아마 이번 공격의 책임자일 터. 이름을 알았으니 찾아내기는 어렵지 않으리라.

분위기는 아직도 어수선했다.

그러자 성황이 입을 열었다. 신성이 담긴 목소리가 모두의 귓가에 나직하게 스며들었다.

“자자. 여러분께 소개시켜 드릴 이가 있습니다. 비록 세속에 속한 몸이나, 천신께서 귀애하시니 직접 성흔을 내려 그 신체에 새긴 이입니다. 시엔 티란디스 형제님이시지요.”

시엔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습한 동작으로 성황에 앞에 이르러 한쪽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다. 이때 성가가 울려 퍼지니 미리 합을 맞춰둔 일이었다.

“때는 지난 가을이라, 버려진 땅에 잠든 끔찍한 대적을 맞아 두려워하는 모두의 앞에서 홀로 분연히 맞선 이입니다. 오로지 신심으로 천신께 닿아 기적을 일으키니, 수천의 사람들이 증인이 되어 진실임을 증명했지요.”

성황이 팔을 들어올렸다.

한 줄기 신성이 떨어져 노인을 비추니, 밝은 밤 아래 사람들이 감동하여 한데 손을 모았다.

“그분의 기적을 증명하였으니, 그대는 스스로 광휘를 칭하매 전혀 모자람이 없습니다.”

스스로 광휘를 칭하다. 샤인이라는 미들 네임이 가지는 의미였다.

순례자들이 탄성을 터뜨렸다. 신실한 이들이라 그러한 의미를 모르지 않았기에.

“시엔 티란디스. 그대는 천신께서 오롯히 세상을 지켜보시며, 그 사랑 안에 세상 모든 이가 담겨 있음을 믿습니까?”

“그러합니다. 예하.”

“좋습니다. 시엔 샤인 티란디스. 내 형제여.”

시엔이 방어 주문을 끌어올렸다.

하나, 둘. 셋. 시엔이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강력한 신성이 세상을 가득 메웠다.

성가가 울려퍼지고, 거대한 빛줄기가 폭포수처럼 떨어져내렸다. 방어 주문에 막힌 신성이 사방으로 튀어 퍼져나가니, 타인이 보기에는 스스로 빛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시엔 샤인 티란디스!”

“시엔 샤인 티란디스!”

순례자들이 시엔의 이름을 연호했다.

성국에 신성이 이례적으로 옅었던 터라, 전신에 파고들어 안온한 신성에 더없는 감동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정작 시엔 본인은 죽을 맛이었지만.

그나마 기이할 정도로 단단한 신체가 아니었다면, 날뛰는 음차원 에너지에 핏줄이 터지고 내장이 상했으리라.

그러나 몸뚱이가 어찌 변했는지, 신성에 반발하여 난폭하게 속을 할퀴는 마력을 맞아 상하지 않고 버티는 중이었다.

“오늘처럼 좋은 날에 체면은 필요 없으니, 개회사는 짧게 치고 끝냅시다. 그저 내년 이 때에 모두 건강하여 다시 모이기를 기원할 터이니, 몸치도 춤을 추고 음치도 노래하며 모두 함께 기쁨을 누립시다.”

뒤이어 성야제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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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야제엔 여러 행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대륙 최대 규모의 합동 결혼식 같은 기념적인 행사로부터, 무도 경연 같은 자잘한 것들까지.

시엔은 그중 어디도 못 가고 그저 침대 위에 누웠을 뿐이었다. 신성을 막아내느라 온 기운을 다 쏟는 바람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니.

바깥에선 연신 웃고 떠들며 흥겨운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이 와중에 속은 뒤집히고 머리는 아프니. 대체 무슨 영광을 보겠다고 여기까지 왔나 싶기도 하고.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대답하자, 뷔아가 불쑥 방 안으로 짓쳐 들어왔다.

“샤인이 신성을 못 이겨 드러눕다니. 바로 반납해야 하겠는데요? 흐흐.” “최단기간 성자였던 이로 이름을 남길 수는 있겠군요. 교단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될 때까지 깨지지 않을 기록 아닙니까?”

“꺄하하, 것도 재미있겠네. 뭐 먹을 기운은 있어요?”

뷔아가 손에 든 커다란 대접을 내밀었다.

꼬치며 구이 따위가 한가득이라. 여러 종류를 조금씩 담았음에도 하루치 식사가 될 양이었다.

“속이 좀 안 좋아서.”

“안타깝네요. 그럼 내가 먹어야지. 흐흐.”

그리고는 앉아서 꼭꼭 씹어먹는 것이 아닌가. 시엔이 인상을 찌푸렸다.

“밥 먹으러 왔습니까?”

“따뜻할 때 먹어야 맛있거든요.”

“나 주려고 가져온 거 아니었나?”

“속이 아프다는데 어째. 어차피 노점들은 내일도 하고 모레도 할 테니, 그때 맘껏 먹으면 되겠네.”

“술도 마셨습니까?”

“쬐끔?”

그렇게 말하는 뷔아에게서 뭉근히 술냄새가 풍겨왔다. 그러고 보니 성녀도 상당히 술을 즐기던 눈치였다.

저번에 던전 탐사 때에도 분명 엘프들과 부어라 마셔라.

그러고 보니 성녀의 주사가 웃는 것이라, 왜 바보처럼 실실거리나 했더니 술기운이 돌아 그러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많이 먹진 않았군요.”

“그냥 맥주 몇 잔 만. 어떻게 알았어요?”

“흥이 덜 올라온 것 같길래.”

뷔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내가 제대로 취한 거 본 적이 있어요?”

“어떻게 잊습니까? 허파에 구멍난 줄 알았습니다. 술이 숨구멍으로 넘어간 줄 알았지.”

“어쩐지.”

“기분이 좋아 보이는데.”

“그럼 좋지. 음. 그런데 왜 좋지? 무사히 성야제가 열려서?”

“술의 힘이 아닙니까?”

“아. 그런가보다.”

뷔아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술을 먹었다더니 사람이 많이 유해진 꼴이었다. 평상시에도 술을 좀 먹고 다니는 편이 좋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그럼 가서 술이나 마저 드십시오.”

“왜 사람을 쫓아내려고 해요? 모처럼 병문안을 와 줬더니.”

“병문안이야 감사합니다만. 뷔아가 있으면 상태가 더 나빠집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도 나 많이 연습했거든요? 이제 신성 감추는 것도 많이 늘었거든요?”

“확실히 그렇긴 합니다만.”

“그러니까 좀 참아요. 나도 노력하는 중이니까 시엔도 그 정도는 감수해야지.”

묘하게 말이 안 통하는 느낌이었다.

시엔이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앞으로도 교단이 계속 공격받겠군요. 불리한 싸움이 될 겁니다.”

“그건 또 왜요?”

“적의 목적을 직접 듣지 않았습니까.”

-아무리 기도한들 무용일 뿐. 천신은 그저 지켜볼 뿐이니 기원을 들어 하는 일이 없다.

-그리하여 나는 탑을 무너뜨린다. 이 세계에 진정한 이성을 위하여.

-그러니 전 대륙에 알려라. 천신이 교단을 수호하지 않고 이 참화를 그저 지켜보았음을 알려라.

거창하게 말하지만, 결국 교단의 권위를 꺾기 위함이었다.

교단이 불가침의 성역인 이유는, 대륙에 뿌리내린 교세, 신성을 이용한 헌신, 강대한 무력 따위가 아니었다.

그저 교단이 교단이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더러운 삶을 사는 천한 용병마저도 신관을 귀히 여겼다. 신관에게 해코지를 하여 천벌이 내릴까 무서워 그러한 것이 아니던가.

천신께서 수호하시는 이들.

교단의 힘은 거기에 있었다.

하지만 교단의 행사에서 참사가 일어난다면?

성야제, 가장 성스러운 날 밤. 천신께 가장 기꺼운 도시에서, 가장 사랑받는 이들이 공격을 받아 사라진다면?

교단의 근본적인 힘, 믿음의 근간을 뒤흔드는 일이 되리라. 천신께서 사랑하여 저를 섬기는 이를 보우하신다는 그러한 믿음이.

“인식을 바꾸는 일이죠. 교단의 근본적인 힘을 빼앗는 겁니다.”

역병 사태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선량한 교단의 구원대를 무참히 살해하고, 그 상징인 성녀를 해하고자 일을 꾸몄다.

만약 성공했다면 세상에 선량한 의도가 꼭 좋은 끝을 만들어내지 않고, 그리하여 천신의 수호가 인간 세계에 미치지 않는다는 의식이 온 대륙으로 퍼져나갔으리라.

“하지만 왜요? 왜 그런 일을 꾸미죠?”

“글쎄. 그게 이득이 되기 때문이겠죠.”

“사람의 신앙을 꺾어 어떤 이득을 취할 수 있단 말인가요?”

“그걸 알아내면 적을 특정하기가 더 쉬워지겠군요.”

“모른다는 뜻이네요.”

“일단 토메쏘란 이를 찾는 것이 먼저겠군요. 방화광일 확률이 높으니 화염탑에 문의를 해 보고, 동시에 수배를 진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뭐. 그건 알아서 할 테니까.”

뷔아가 불퉁하게 대꾸했다.

어디서 기분이 상할 부분이 있었던가? 시엔이 제가 한 말을 되새겨보았다. 딱히 그러한 부분은 없었던 것 같음에도.

“됐고. 술도 못하겠어요?”

“술 말입니까?”

“자, 이것 봐요.”

뷔아가 가방에서 술병을 꺼내들었다.

라벨이 붙지 않았으나 색을 보아하니 포도주인 모양이었다.

“제가 지금 속이 별로 좋지 않······”

“천 송이의 포도로 담갔다고 하던데요. 데뉴 지방의 형제님께서 주셨는데, 그해 생산된 포도를 일일이 살펴 가장 좋은 낱알만을 떼어 빚었다고.”

“······지만 뷔아의 성의가 있으니 같이 마시지 않으면 실례가 되겠군요.”

거절하기엔 너무나 좋은 술이었다.

데뉴 지방이 워낙에 양질의 포도로 유명하고, 개중에서도 과일을 하나하나 살펴 가장 좋은 알갱이만 모았다면 보통 술이 아니었다.

왕실에 진상하는 술도 이러한 정성을 들이진 않을 터. 오로지 신심으로 비롯한, 좋은 술을 봉헌하겠다는 장인의 의지가 만들어낸 보물이 아닌가.

돈을 주어도 맛보기 힘든 것이었다.

“오. 향 좀 봐. 히히.”

뷔아가 능숙한 손길로 뚜껑을 땄다.

순식간에 짙은 향이 방안을 감싸니 맛보지 않더라도 좋은 술임을 알겠다.

그리고 그 맛은. 필설로 형용할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이러한 것이리라. 뒤집힌 속이 바로잡힐 정도였으니.

“히야······. 좋다.”

“과연. 좋군요.”

“좋죠? 이 포도주, 이름이 뭔지 알아요?”

“뭡니까?”

“청혼이라 하네요. 형제님께서 직접 가져다 주신 술이기도 하구요.”

시엔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꽤 노골적인 수작이 아닌가. 이제 보니 신심으로 빚은 것이 아니라 사심을 듬뿍 담은 것이었다.

“그거 설마.”

“맞아요. 장문의 연서와 함께 받았는데. 그런데 내 입장에선 봐요, 생전 처음 보는 사내가 대뜸 나타나 내밀면 어머나 세상에 하고 우리 그럼 한 번 같이 살아볼까요 하면서 받아줘야겠어요?”

“정성은 알아줄 만합니다만.”

“그 형제가 제 뭘 알겠어요. 처음 본 순간 어쩌고 하는데, 에라이, 개뿔. 얼굴만 알아봤겠지.”

“그런데 그 술이 지금 여기에 있군요.”

“마음만 받는 거로.”

“술도 받았군요.”

“술에는 죄가 없잖아요? 어차피 한두번도 아니고.”

“한두번이 아니라면?”

“소문 못 들었어요? 교단에는 장작을 안 쓴다고. 누구한테 온 연서가 너무 많아서 대신 태워도 겨우내 따뜻하다고. 나 이 정도에요. 막 이래. 히힛.”

뷔아가 으스대며 말했다.

“덕분에 좋은 술도 얻어먹는군요.”

“나 이 정도라니까요? 형제님들 뿐인줄 알아요? 두 개. 두 개 뿐이에요.” “두 개라. 뭐가 두 개입니까?”

“왕자가 껄떡대지 않은 왕실이 대륙에 두개밖에 없다고. 정말 징그러 죽겠네. 젠장.”

“징그럽다라.”

“그나마 형제님들은 교단 살림에 도움이라도 될 것들을 가져다주지. 귀족이란 놈들은 여하튼 지가 귀족이라 잘난 줄 알고 아주 상전이나 다름없다니까.”

술이 몇 번 돌더니, 특유의 그 거친 입담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문득 뷔아를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났다.

멱살을 콱 틀어쥐고 목소리 쫙 깔고 껄덕댈 생각 말라고 엄포를 놓았더랬지. 그때 뭐라 했더라?

“관짝에 못 박히는 소리를 안쪽에서 듣고 싶어하는 이가 상당히 많은 모양이군요. 제게도 그러시지 않았습니까?”

“아.”

“신선한 표현이라 생각했습니다만. 산채로 묻어버리겠다는 뜻입니까?”

“꺄하하핫, 그거 기억하고 있었어요?”

“생매장당하기는 싫어서 말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이 정도에요. 알겠어요?”

“기억해 두겠습니다.”

“좋아요. 항상 생각하고 있으란 말예요. 지금 이 순간, 그리고 모든 순간에 교단에 연서가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고. 히힛, 막 이래.”

뷔아가 실실 헤픈 웃음을 흘렸다.

그러다 이내 다시 말했다.

“고마워요. 또 도움만 받았네. 시엔이 아니었으면 큰 참사가 있었을 거예요.”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도망가지 않았잖아요. 위험하다면 시엔은 그냥 성도 밖으로 나가버리면 끝이었는데. 끝까지 있으면서 같이 뛰고 노력해 줬잖아요.”

“저도 나름 명예 대주교, 이제는 명예 성자인 몸입니다만.”

“고마운 건 고마운 거니까.”

뷔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냥 이 말 하고 싶어서 와 봤어요. 남은 건 여기 두고 갈테니, 상태가 나아지면 마저 먹던가 가져가 친구들과 나누던가 마음대로 하시고. 나름 교단의 간판인데 너무 오래 자리를 비우기도 뭐하네.”

“수고하시는군요.”

“그럼 또 봐요. 시엔.”

뷔아가 나가고 문이 닫혔다.

술이 들어오니 그랬는지, 아니면 술을 마셨다 인지하여 정신이 풀린 것인지는 모를 일이었다.

덕분에 두통도 속도 어느 정도 진정이 된 것 같아. 시엔이 그대로 누워 눈을 감았다.

밖에선 여전히 웃고 떠들며 흥겨우니, 잠을 청하며 듣기에는 그래도 나쁘지 않다 생각하면서.

< 21. 가장 밝은 밤 아래 가장 빛나는 이 [8]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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