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의 망령재림-101화 (101/268)

< 21. 가장 밝은 밤 아래 가장 빛나는 이 [3] >

새로운 신에 대한 것이야 돌아가 로우드에게 좀 알아보라 시키면 될 터였다.

티란디스의 목재가 대륙으로 팔려나가니, 거기에 딸린 유통이 곧 가문의 눈과 귀였다.

물론 그들이 티란디스의 영민은 아니다. 그러니 그저 윤곽이나마 대략 알아보는 수준에 불과했지만.

그건 그렇고, 약속을 했으니 지켜야 할 때였다.

시엔이 뷔아의 옷을 바라보았다.

“성복이 많이 헤졌군요.”

“윽.”

뷔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 반응에 시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창피한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최고위 사제의 옷이 허름하다면 그 또한 훌륭한 일인데.”

“허름하다니, 이래 뵈도 상당히 고급품이거든요? 조금 오래 입어서 그런 거지.”

흰 성복의 색이 원래 그러한 것이 아니라, 바라고 헤져 그렇게 된 모양새였다. 자세히 보니 여기저기 기워놓은 꼴이라, 그 바느질 솜씨가 탁월하며 대충 보기엔 모를 정도로 감쪽같을 뿐이었다.

시엔이 어이가 없어 되물었다.

“그 조금이 대체 얼마입니까?”

“······한 오 년 정도.”

“오 년?”

“어차피 가장 더울 때에 입는 거거든요? 일 년에 두 달이나 입을까 말까 하니까 그렇게 따지면 일 년도 안 입은······”

“일 년 내내 입는 옷도 있습니까? 새로 좀 지어 입지 궁상맞게.”

“궁상? 이 인간이 보자보자하니까. 새 옷 싫어하는 사람도 있나? 하복 한 벌이면 금화가 몇 개인데 새 옷 입자고 성도들의 성의를 낭비해야겠어요?”

“뷔아가 신경 쓸 정도로 교단이 가난하진 않을 텐데. 오히려 대륙에서 이만한 금력을 가진 이들이 없는데, 그걸 궁상이라 하는 겁니다.”

뷔아의 눈꼬리가 치솟았다. 동시에 꽉 쥔 주먹도 파르르 떨렸다.

“나쁜 새끼. 내가 이딴 새끼를. 옷이라도 한 벌 보태 주고 나불대기라도 하면 몰라.”

시엔이 피식 웃었다.

답지않게 젊잔을 뺀다 싶더니, 이제야 그 본색이 나왔다. 이제야 성녀를 봤다는 기분이 들었다.

“까짓것 뭐, 옷 한 벌 보태 드리지.”

“뭐?”

“파르멧 안스테르라고 제법 실력이 뛰어난 재단사가 있는데, 옷 좀 맞춰주라고 데려왔습니다.”

“파르멧이라면, 그 파르멧?”

“알고 있습니까?”

“거야. 원체 유명한 재단사이기도 하고. 편지도 몇 번 받았어요. 예복을 봉헌하고 싶다고.”

“그 이야기도 하더군요. 왜 거절했습니까? 교단의 금화가 나가는 것도 아닌데.”

“내 옷, 내 개인 물품이잖아요. 천신께서 계신데 나 따위가 뭐라고 감히 봉헌을 받아요?”

“교단에 기부하는 형식 아닙니까. 그리 자신에게 엄격하게 굴 필요가 있습니까?”

“교단에 기부 받은 물품을 사유할 수는 없죠. 그래서 차라리 돈으로 하라 한 거고.”

“그럼 이 참에 맞추면 되겠네. 신전이 아니라 제가 뷔아 개인에게 선물하는 것이니, 그건 상관없지 않겠습니까.”

뷔아가 헛기침을 하며 대답했다.

“흠, 흠. 사치는 좋아하지 않지만, 시엔이 정 그러고 싶다면야. 성의를 무시할 수도 없으니, 정 그렇다면 고맙게 받을께요.”

그러면서도 은근 입꼬리가 꿈틀거리는 것이 새 옷이 갖고싶긴 한 모양이었다.

시엔이 씩 웃으며 생각했다.

고맙긴 뭘. 내 돈 나가는 것도 아닌데.

----

성국에서의 첫 날은 고역이었다. 목울대 아래는 콱 막힌 듯 답답하고, 내장에는 공기가 가득 들어차 터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바늘로 찌르는 듯한 두통은 또 어떠한가.

차라리 잠이나 들었으면 해도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

그러다 어찌어찌 잠이 든 모양이었다. 눈을 떠 정신이 들고 나니, 낫진 않았더라도 그 증상이 훨씬 덜했다.

도시에 가득 차 있던 신성이 반절 이하로 줄어든 까닭이었다.

뷔아가 어떻게 해 보겠다고 한 것 같은데, 말 그대로 어떻게든 된 모양이었다.

시엔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벽을 넘어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이거야! 이거라공!

비음 섞인 목소리는 한 번 들으면 잊기 힘든 것이라. 시엔이 옆방으로 향했다.

“아, 공자님!”

“뭐 때문에 이 난리야? 시끄럽게.”

시엔이 방 안의 꼴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밤을 샌 듯 시뻘건 눈을 한 파르멧과, 방에 쓰러지고 걸치고 걸린 도제들이 여기저기 널려있었다.

그리고 남은 자리는 온통 하얀 종이들로 어지러진 꼴이었다. 시엔이 하나 주워들어 살피니, 대충 그려진 그림이 옷가지구나 싶었다.

“성녀의 의복인가?”

“흐흐, 성녀님의 아름다움을 익히 들었으나, 실물로 보아 그 소문이 미치지 못하더군용. 세상의 어떤 옷도 스스로 숨이 끊어져 바래버릴 그 얼굴!”

“흠. 그 정도인가?”

시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냥 가까이 있으면 여러모로 해로운, 입은 더러운 주제에 꽉 막힌 늙은이마냥 고지식한 여인이 아니던가.

“그러나 저를 죽이지 못하는 시련은 그저 강하게 만들 뿐이지용. 이 파르멧, 일생일대의 도전에 직면하니 공자님의 소개에 다시금 감사드립니다아. 궁극의 의복을 만들 기회를 주시니 어찌 이 마음을 표현해야 할지.”

파르멧의 눈빛이 정상이 아니었다.

온통 실핏줄이 서 벌건 눈에 광기가 비치니, 대체 옷 짓는 일이 뭐라고 이리 난리인지.

어쨌거나 본인이 기쁜 모양이니 시엔이 잘 되었다 싶어 입을 열었다.

“그런데 한 벌로 되겠어?”

“예?”

“내가 의복에 대해 무지하긴 해도, 여름옷과 겨울옷이 다른 건 알지. 여름옷이야 이번에 만든다 치고, 겨울옷은? 누비옷이며 코트며. 춘추복은 어때?”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원래 최고란 가장 으뜸인 하나를 이르는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최고라고 할 수 있지. 최고의 여름옷이야 네가 짓는다 치고, 다른 절기의 의복은? 다른 재단사와 사이좋게 절기별로 나눠가질 셈이야?”

파르멧이 몸을 떨었다.

시엔이 말을 이었다.

“뭐. 인정을 받을 수는 있겠지. 여름옷을 짓는 데는 파르멧이 최고라고. 그럼 분기별로 최고의 재단사들이 따로 있는 거야? 어깨를 나란히 한 최고의 재단사들 중 하나는 될 수 있겠네.”

“들 중 하나.”

“뭐, 대륙은 넓으니 그 정도라면 충분히 만족할 수도 있겠지.”

파르멧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될 말입니다. 대륙 제일, 최고, 으뜸은 바로 저, 파르멧이니까요.”

“흠.”

“도련님, 송구합니다만 다시 청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한 벌이 아니라 종류 별로 여럿을 지어드리고 싶습니다망. 한 벌도 부담스럽다 하시는 분이 여럿을 받아주시지 않을 터이니 공자님께서 좀 말씀드려 주시면······”

“거야 문제없지. 내 책임 지고 성녀가 받도록 만들어줄 테니 네 작품에나 신경쓰라고.”

“오오! 드디어 삶을 불태울 때가 왔구나!”

파르멧이 의욕에 활활 타올랐다.

의외로 다루기 쉬운 녀석이었다.

원래 맹목적인 이는 남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게 되는 법이었으니까. 그래서 맹목이란 눈이 멀었다는 뜻이 아니던가.

시엔이 키득거렸다.

그 모습에, 바닥에 널브러진 도제들의 눈빛이 절망에 물들었다.

숫제 죽음을 앞둔 병자 같은 표정들이었다.

---- 밤이 되자 성자성녀 한 쌍이 찾아왔다.

“형님! 몸은 괜찮으세요?”

“이제 멀쩡해.”

도시를 메운 신성이 점차 그 힘을 잃으니, 해질녘이 되자 아침의 또 반절 수준이었다.

“그럼 멀쩡해야지. 열두 천신상에 신성을 잠시 거두고, 모든 사제들이 조심하고 있는 와중인데. 다 누구 때문인 것 같아요?”

“괜찮겠습니까? 성야제가 심심해질텐데.”

도시에 가득찬 신성은 순례자들에겐 이루말할 수 없이 경건한 경험이라. 성야를 맞아 밝은 밤, 가득 찬 신성 아래 천신을 우러르는 일이었다.

그 신성이 반의 반으로 줄었으니 그 경험이 예년 같지 않으리라. 뷔아가 피식 웃었다.

“민폐인 건 알긴 아네.”

“누가 부르지만 않았으면 말입니다.”

“하여간 한 마디를 안지지. 사내 새. 사내가 되서 뭐 그래요?”

“방금 사내 새 뭐라고 하지 않았나?”

뷔아가 헛기침을 삼켰다.

테이가 말을 받았다.

“뭐, 누님이 저러는 게 새삼 하루이틀은 아니잖아요?”

“야! 내가 뭘 어쨌다고!”

테이가 실실 웃으며 뷔아를 응시했다.

뷔아가 차마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니 스스로 떳떳하지 못함을 알기 때문이었다.

“괜찮아요, 형님. 괴로운 이의 짐을 덜기 위해 조금의 행복이 덜할 뿐이라면, 세상 모든 이가 한 명의 불행을 위해 덜함이라도 마땅한 법이랍니다.”

“흠.”

“어차피 즐거운 마음으로 즐기는 축제니까, 조금 덜해도 즐거운 건 마찬가지잖아요?”

“명예 성자 추대를 받아야 할 사람이 죽상을 하면 안 되는 것도 있네요.”

“그도 그렇군요.”

“이제 살만 하면 예하를 뵈러 가죠? 식의 연습도 해야 하니 그리 넉넉한 시간은 아니에요.”

교단의 본단, 낙원대신전은 분지의 입구 반대편에 자리잡았다.

여관이 가장 신성이 덜한 분지의 중심이라, 밖으로 나가서도 한동안 걸어야 하는 거리였다.

성야를 앞둔 성국은 그야말로 축제나 다름없었다. 남녀노소 들뜬 얼굴로 손을 잡고 어깨를 맞대고 웃으며 떠들고, 노점에서 굽는 것들의 달고 짜고 향긋한 냄새가 번갈아 스몄다.

“성녀님! 꼬치 하나 드시고 가세요!”

“성녀님, 건과는 어떠세요?”

“성녀님······”

이 와중에 뷔아의 인기가 보통이 아니었다.

극구 사절함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다가와 쥐어주니 어쩔 수 없이 받아야 하는 것들이 있었다. 그러다보니 어느 새 일행의 양손이 온갖 군것질거리로 가득이었다

그러면서도 길을 막고 축복을 청하고자 하는 이는 없으니 또한 특이한 일이었다. 잘 정돈된 축제 같은 분위기. 음. 잘 정돈된 축제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은데.

관찰은 영민한 자의 버릇이다.

거리를 살피던 시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화광들도 성야제를 즐깁니까?”

“거야 즐기겠죠, 형님. 그네들도 축제를 즐기는 분들이 아닌가요?”

“아니, 그게 아니라. 유난히 많지 않습니까.”

“많다구요?”

뷔아가 되물었다.

시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보다 마법사 보기가 꽤 드물어졌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몇이 스쳐갔는지.”

“와, 형님. 마법사를 보면 아세요?”

“상대가 숨길 마음이 없으면.”

마력을 따로 처리하여 숨기지 않는 한에야, 같은 마법사끼리 기운을 느껴 서로 알아보기란 쉬운 일이었다.

게다가 고위 마법사일수록 마력 감지가 뛰어나니, 실력 차이가 크면 클수록 상대방이 숨긴 마력마저 느껴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러니 시엔 수준에 이르면, 마력을 숨기지 않은 마법사를 알아차리는 정도야 숨 쉬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방화광들 뿐이네? 아. 방금 스쳐간 염소 수염 사내가 일곱 번째야. 마력을 전혀 숨기지 않는 건 좀 이상한데.”

다만, 마력을 숨기는 것이야 마법사에겐 버릇 같은 것이라 어지간히 마음을 놓지 않는 이상은 대놓고 드러내는 일이 드물었다.

테이가 이상하다는 듯 되물었다.

“어제는요?”

“어제는 내가 몸이 안 좋아서 몰랐지.”

사방이 신성이니 날뛰는 제 마력의 간수도 힘든 판이었다. 이제 신성이 잦아들었으니 흑마법사가 그제야 날개를 폈다.

“한 일행들이 아닐까요? 본단의 성야제니까, 화염 마법사 분들이 단체로 모이신 거죠.”

“뷔아, 뭔가 들은 바가 있습니까?”

“딱히 없네요.”

“방화광들이 단체로 방문할 생각이라면야, 미리 탑 차원에서 알렸을 겁니다.”

방화광의 파괴력은 다른 마법사보다 강력하니, 어디든 한 무리의 화염 마법사를 경계하지 않을 곳이 없었다.

방화광이 아니라도 마찬가지였다. 마법사란 위험한 자들이었다. 그러니 미리 알려 양해하고 안내를 받는 것이 관례가 아니던가.

“우연히 많은 화염 마법사 분들이 모였을 수도 있지 않나요?”

“우연이라.”

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면야 세상에 이상하지 않을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거야 붙잡고 물어보면 알 일이지.”

마침 또 한 명, 타오르는 아케인 에너지가 점점 가까워졌다. 시엔이 잠시 멈춰서 느긋하게 기다리니, 인파를 뚫고 청년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청년의 앞을 막아서니, 이내 당혹스런 표정이 얼굴에 번졌다. 시엔이 안심하라는 듯 웃어보이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좋은 날이군요.”

“아, 예. 그, 무슨 일이신지.”

시엔의 눈이 가늘어졌다.

성국에서 열리는 성야제라 대개는 그 믿음이 독실한 이들이었다. 그리하여 모두가 한 형제 자매들이 아닌가. 초면이라 해도 인사를 건네고 덕담을 건네는 것이 그리 당황할 만한 일이던가?

심지어 성복을 입은 성자 성녀가 함께 있으니, 사제가 순례자에게 안부를 묻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닌가.

“무슨 용무가 있어야겠습니까? 좋은 날에 찾아와 주셨으니 그저 신전에 적을 둔 이가 반가워 그러한 것입니다.”

“아. 그렇군요. 음.”

“즐기시기에 만족스러우신가 모르겠군요. 어떠십니까?”

“좋습니다. 아주 좋아요.”

“멀리서 오셨나요?”

“어, 음. 그. 그렇습니다.”

시엔이 청년을 바라보았다.

청년 역시 멀뚱히 시엔을 바라보았다.

음? 멀리서 왔냐니까 그렇다고 하면 끝인가? 보통 이런 식으로 대답하는 사람은 없는 법인데.

시엔이 뒤편에 선 둘을 돌아보았다. 뷔아와 테이가 눈을 마주치고 또 저들끼리 눈짓을 주고받으니, 시엔과 마찬가지로 명백히 수상하다 여긴 까닭이었다.

시엔이 다시 청년에게 말했다.

“뭔가 바쁘신 모양인데, 가는 길 붙든 셈이 되었군요.”

“아. 맞습니다. 용무가 있어서.”

시엔이 작별을 고하자, 청년이 허둥대며 자리를 떴다. 시엔이 그 자리에서 청년을 배웅했다.

청년이 다시 인파 속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시엔이 몸을 돌려 말했다.

“수상하지 않습니까?”

“확실히 그렇네요.”

“그러니 미행을 해 보는 것이 어떤가 싶습니다만.”

시엔의 말에, 테이가 울상을 지었다.

“하지만 예하께서 기다리시는데요, 형님.”

“테이가 가서 좀 늦는다 전해 드려.”

“누님? 누님은요?”

“나도 같이 가 보려고. 완전 수상하잖아.” “하지만. 벌써 하루를 꼬박 기다리셨는데.”

뷔아가 킥 웃으며 대답했다.

“하루를 기다리셨으니 기다리시는 김에 조금 더 기다리시라고 해. 쓰시는 김에 조금 더 쓰시면 좋잖니?”

그렇게 둘이 나란히 인파 속으로 녹아드니, 자리에 남은 것은 어린 성자뿐이었다.

그럼 예하께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하지?

테이가 한숨을 푹 쉬었다.

< 21. 가장 밝은 밤 아래 가장 빛나는 이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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