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의 망령재림-100화 (100/268)

< 21. 가장 밝은 밤 아래 가장 빛나는 이 [2] >

세상은 불합리의 온상이다.

특히나 마력의 상성이란 더욱이 그랬다.

방화광은 강력한 화염을 부리니, 개인의 전투력은 마법사들 중 가장 강력하다 할 이들이었다.

그러나 물길잡이를 만나면 한없이 쪼그라드니, 저보다 턱없이 수준이 낮은 물길잡이를 상대해도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런가 하면 땅지기에게도 약한 편이고.

그렇다고 천문관이나 흑마법사에게 우세하다 할 것도 없으니, 마법사끼리 실력을 겨룬다면 방화광은 한없이 초라해지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흑마법사와 신관의 관계가 있었다.

음차원 에너지와 신성은 상극으로, 빛과 어둠의 개념과 같았다.

빛이 들이치면 어둠이 자리를 감추니, 음차원 에너지는 신성 앞에 맥을 못 추고 물러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강력한 신성 앞에 흑마법사가 마땅히 제 마력을 보호할 수단을 갖지 않으면, 심령이 흔들려 목숨이 위험한 수준에 이를 수도 있었다.

물론 흑마법사의 수준이 높아질수록 마력의 보호가 견고해지는 법이었다. 그럼에도 가장 신성한 이들, 성자 성녀 앞에서 멀쩡하지는 못했다.

아무리 시엔이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더웠다.

지독한 한천이라더니 가만히 있어도 몸에 열이 쌓이는 기분이었다.

기분만 그랬다.

기이하게도 더운 기분이 드는데, 오히려 땀이라곤 한 방울도 솟지 않고 몸에 덥지 않으니 기이한 일이었다.

이 역시 순진무구의 작품인가?

“형님, 혹시 멀미하세요? 안정이라도 걸어드릴까요?”

테이가 걱정스런 얼굴을 했다.

아니, 너 때문인데. 그래도 호의 앞에 매몰찰 것은 아니라. 시엔이 대답을 삼킨 채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신성에 의지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죠. 조금 걷는 건 어때요?”

그래도 순진무구와의 의사 놀이 이후로는 한결 나아지긴 했다. 한 마차를 타고 오랜 시간 대면함에도 속이 뒤집히는 수준에 머무를 정도였으니.

“잠깐 좀 걸어야겠어.”

“그럼요. 몸이 제일이니까요.”

마차 문을 열자마자 뜨끈한 바람이 뺨을 스쳤다. 소가 핥는 것처럼 찝찝하니 기분 나쁜 것이다.

“더운데들 난리가 났군.”

“성야제니까요.”

성국으로 통하는 모든 도로 위에 순례자들이 있었다. 개중 반절은 사제들이라, 밖으로 나와도 온 사방에 크고 작은 신성이 깔렸다.

시엔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스스로 사지로 걸어 들어가는 기분인데.

얼추 반년 전 쯤 던전 이후로 신관을 가까이하지 않았더니, 이 답답하고 어지러운 기분을 잊어버리고 말았던 모양이었다.

그냥 빨리 가서 하루만 지내고 돌아오면 되겠지 하는 생각이었는데, 벌써부터 이래서야 앞이 캄캄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걷고 타고 나아가기를 며칠. 드디어 성국의 입구, 대협곡이 모습을 드러냈다.

온마루 산.

가파른 경사가 난데없이 솟아 대륙 중앙에 우뚝 선 거대한 산으로, 묘한 이름을 들으면 알 수 있듯이 이 역시 엘프가 깃든 곳이었다.

만년설의 대지, 산의 꼭대기에 자리를 잡은 설원 엘프들. 전설과 같은 이들이라 실제로 그 모습을 본 사람은 없다고도 하고.

나중에 한별을 볼 일이 있으면 물어봐야 할 것이 하나 늘었다. 설원 엘프가 실존하는지 아닌지에 한별이라면 알고 있을 테니까.

온마루 산의 정면은 능선으로 솟고, 뒤편은 까마득한 절벽으로 이루어졌다. 그 틈새에 거대한 대협곡이 있었다.

대협곡 너머엔 거대한 분지가 있어 성스러운 도시가 자리를 잡았으니, 바로 이곳이 성국의 관문이었다.

성기사들이 주둔하여 출입자를 엄중히 살폈다. 특이하게도, 그러면서도 얼굴엔 활짝 웃음꽃이 피었다.

바쁘면 바쁠수록 성국에 들고자 하는 이가 많은 것이니 성기사 된 이로서 기꺼운 마음이 들기 때문이리라. 하물며 연중 가장 바쁜 시기였으니, 다른 말로 가장 기쁜 때가 아니겠는가.

대협곡에선 말이나 마차를 탈 수 없어, 내려서 끌어야 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테이가 말을 덧붙였다.

“다른 이유는 아니구요. 그냥 위험하잖아요. 그리 넓은 길이 아니니.”

“넓은 길이 아니라고?”

시엔이 협곡을 바라보았다.

말 여덟 마리가 끄는 팔두 마차 열 대가 나란히 내달릴 수 있을 정도의 폭이었다. 이래서야 협곡이라 부르기도 민망할 지경이 아닌가.

물론 좌우로 솟은 절벽이 워낙에 높아, 폭이 넓다 해도 전체적인 조형이 협곡에 모양새를 띄긴 했지만.

“길이 하나뿐이니까요. 특히나 이리 많은 분들께서 찾아주실 땐 더욱이 아쉬우니.”

“그런가?”

“사실 탑승이 금지된 이유도 별다른 것은 없답니다. 유일한 길이 그리 넓다 할 수 없으니 안전을 위해 서로 조금씩만 불편하자는 뜻이래요.”

“흠.”

“아. 그리고 대관문의 좌우로는 절벽을 파 성기사분들이 항상 상주하신답니다. 일곱 개 기사단이 절기마다 돌아가며 관문을 지키고 계세요.”

“흠.”

“아, 저기 보이시죠? 가운데 조각된 천신상 말이예요. 저게 바로 에밀렌 제이의 작품인데요······.”

테이가 물어보지도 않은 것들을 쫑알거렸다.

그렇게 반쯤 듣고 반쯤 흘리고 있다 보니, 어느새 줄의 맨 앞이라. 성기사가 다가와 신원을 확인했다.

“아, 성자께서 돌아오셨군요. 일행분께선?”

“시엔 티란디스 명예 추기경님이세요.”

“명예 추기경님? 아! 그, 혹시 성흔을 뵐 수 있겠습니까?”

신관이 손을 달라는 일도 이제는 익숙해졌다.

성흔에 입 맞춘 성기사가 다른 절차 없이 바로 통과를 시켰다. 성흔보다 확실한 신분 증명도 없는 법이었다.

시엔 일행이 그제야 협곡 안에 이르러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협곡은 걷기엔 퍽 긴 편이었지만, 테이가 옆에서 계속해서 떠드니 심심할 일은 없었다.

“당대 최고라 불리는 조각가들이 감사하게도 협도에 천신상을 새기고자 하시죠. 저기 보이는 건 벨르아르의 작품이랍니다. 특이하게도 얼굴을 비워둔 것이 특징인데요, 그건······”

그리고 마침내 성국에 이르렀다.

절벽을 깎아 조각한 열두 개의 거대한 천신 상이 내려다보는 곳. 까마득히 솟은 절벽엔 계단이 빽빽하고, 흰 지붕과 흰 벽으로 치장한 건물들이 복잡한 낙차로 자리잡으니, 자체로 절경이었다.

한번 발을 들인 사람은 절대 잊지 못할 성스러운 대지라 하더라니.

시엔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겠는데.’

마력 역시 막힌 곳에 있으면 고이는 것이었다. 신성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방이 절벽으로 막힌 도시에 고위 신관이 바글바글하니 자체로 신성이 충만했다.

무엇보다 열두 천신상이 문제였다.

사람의 키 수백배에 이르는 조각들이 전부 각자 거대한 성물이라 자체로 신성을 쫙쫙 뿜었다.

여러모로 흑마법사에겐 최악의 장소였다.

“괜찮아요? 형님 안색이 안 좋은데요.”

“신성이 과해.”

“아. 특이 체질 때문에······. 괜찮을까요?”

“듣기만 들었지, 이 정도일 줄은 몰랐지.”

시엔이 관자노리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일단 좀 쉬었으면 좋겠는데. 대신전, 음. 대신전은 안 되겠네. 어디 적당한 숙소가 없을까?”

“흠. 그나마 도시 중심부가 좀 낫겠죠? 천신상에 가까울수록 신성이 충만해지거든요.”

“됐으니까, 빨리.”

시엔이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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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앓아누웠다길래 꾀병인 줄 알았더니. 정말이었네요?”

“제가 꾀병을 부릴 이유가 뭐가 있다고.”

“그야 어디서도 멀쩡한 것 같은 인간이 아프다니까 그렇지.”

“흠.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뷔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뭔가 쏘아붙일 거리가 있었던 것 같은데, 마땅히 말로 만들어지지 않아 그저 언짢은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편지 한 장 없던 인간이 뭐가 어째? 근데 그렇게 말하면 꼭 편지를 기다렸던 것 같지 않나?

그것도 뭔가 지는 기분이 들것 같으니 그저 속으로 삼킬 수밖에.

“뭐에요, 이 여름에 감기?”

“신성이 안 맞아서 그렇습니다. 도시 전체가 자욱하군요.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만.”

“괜히 성국이겠어요? 흠. 그렇게 힘들어요?”

“뭔가 방법이 있습니까?”

“일단 예하께 말씀을 드려 볼게요. 성야 하루는 신성을 좀 억제하는 거로. 그리고 열두 신상의 신성 공급도 좀 막아달라 할 테니까.”

“듣던 중 반가운 소식이군요.”

시엔이 미소짓자, 그제야 뷔아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그나저나. 잘 지냈어요?”

“흠. 생각해보니 꽤 바빴군요. 겨우내 고생하기도 했고.”

“고생?”

“아. 그러고 보니 적에 대해서도 추가로 드릴 말씀이 생겼습니다. 할른폴드에 터전을 잡은 모양인데.”

“할른폴드? 가시렌 왕국의 왕도 말인가요?”

“맞습니다. 왕족 중 한 명, 아니면 원로원 급의 고위 수도 귀족 중 하나가 그 배후인 것까진 알아냈습니다만.”

“가시렌이라. 가시렌. 하필이면.”

“하필?”

뷔아가 한숨을 푹 쉬었다.

“요즘 그쪽 때문에 다들 골치거든요.”

“골치라.”

“새로운 신이 나타난 모양인데, 알죠? 교단에선 제작된 신에 관대한 편이라는 거.”

“제작된 신이라. 관대하다는 것 치곤 꽤 과격한 표현 아닙니까?”

“사람이 만들었으니 제작된 신이지.”

뷔아가 콧방귀를 뀌며 대답했다.

천신을 최고신으로 인정하기만 한다면, 교단은 그 휘하의 신들에게 관대했다.

농작의 신이라던가, 풍요의 여신이라던가. 전쟁의 신 혹은 승리의 여신 같은 하위 신들.

천신의 아들딸들이었다.

사실, 제작된 신이라는 표현이 맞았다.

천신께선 그저 세상을 보아 유지하며 모든 지성체를 사랑하시는 분이니, 어떤 뜻을 가지고 인세에 개입하여 법칙을 뒤흔드는 법이 없었다. 천신 앞에서는 살인자와 성자가 같은 지성체라 그저 사랑스러운 자식일 뿐이다.

전쟁의 신이라니. 신이 개입하여 승패를 좌우한다면 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신이 지성을 가져 판단하는 순간, 대륙의 모든 인간은 그저 미물으로서 삶의 주체를 잃어버리게 될 터였다.

다시 생각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천신을 부정합니까?”

“부정하지는 않아요. 다만 그 교리가.”

뷔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새로운 신은 천신의 자식이 아니라, 깨달음을 얻어 태를 초월한 인간이라 하더라고요.”

“인간이 신이 되었다?”

“그래서 지금 의견이 분분해요. 사교로 분류하고 성전을 벌일 것인지, 천신을 부정하지 않으니 지성체의 의지로 보아 인정을 할 것인지.”

“뷔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뷔아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분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면 모두 포용하여 감싸 안으라. 천신의 사랑이 귀천과 선악을 가리지 않으니, 종들이 어찌 그 뜻을 헤아리지 않을 것이냐.”

“인정입니까?”

“뭐 인간이 신이 되었다는 게 개소리긴 하지만, 지금까지 딱히 해로운 활동은 없었으니까요. 오히려 빈민 구제에 적극적이라 그 수혜가 대단하다 하니.”

“빈민 구제에 적극적이라.”

“결과적으로 이로운 이들이라면 마음에 들지 않아도 두어 세상을 밝히는 편이 좋잖아요?”

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제 생각은 다릅니다. 성전을 준비하는 것이 현명하겠군요.”

“왜죠?” “적과 연관되었을 가능성이 높지 않습니까. 적의 본거지에서 하필이면 새 종교라. 신전의 세를 줄이려는 수작이 아니겠습니까?”

“의심만으로 성전을 벌일 수는 없으니까. 무고한 피를 흘려서는 안 되지.”

“적의 피를 아까워하면 자신의 피를 대신 흘리게 될 텐데.”

“그러니까 적인지 아닌지 아직 모른다니까.”

뷔아는 본 성질이 지저분하긴 해도, 원래 선량한 이였다. 시엔이 손을 들어보였다.

“그냥 제 생각이 그렇다는 겁니다. 의심스러우니 조사를 해 보는 게 우선이겠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속으로는 확신에 가까운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이유 없는 일은 없고, 계획 없는 결과도 없다.

새로운 신이라.

한번 알아볼 필요가 있겠는데.

< 21. 가장 밝은 밤 아래 가장 빛나는 이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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