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의 망령재림-84화 (84/268)

< 19. 기사가 죽어 그 핏값을 치르리라 [2] >

흑마법사라 해도 망령술을 익히지 않으면 사자의 잔재를 눈으로 볼 수 없었다.

하물며 그게 망자의 목소리임에야.

어둠을 타고난 시엔이야 어느 때부터 자연스레 보고 듣는 것이었지만, 흑마법사라 해도 또렷히 그 목소리를 듣기 위해선 꽤나 오랜 정진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러한 것을 평범한 이가 들을 수 있다면?

당연히 뭔가 수작이 끼었다는 뜻이었다.

“과연.”

시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흐레이그가 의심스러운 것이야 이미 확신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점차 확신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들어가 영민을 해하는 숲을 영주 된 이가 그저 출입하지 말라 법을 내렸을 뿐이라니.

어차피 쓰임새 없고 해로우니 싹 밀어버리거나, 혹은 신전의 도움을 청하던 마탑에 기별을 보내건 해결을 해야 맞는 일이 아니던가.

숲에 어떤 수작을 부렸고, 그로 인한 결과가 두고 볼 만한 것이라 그저 출입을 금하지 않았을까.

두고 볼 만한 것이라.

베른닐이 물었다.

실상 다른 일행들 역시 묻고 싶었기에 조용히 시엔을 바라보며 귀를 기울일 뿐이었다.

“뭔가 아시겠습니까?”

“어차피 해로운 거 아냐. 신경 끄고 밥이나 먹자.”

“하지만, 이 목소리는 마치 죽은 자가 내는 것 같지 않습니까? 이런 소름끼치는 건 처음입니다만.”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 그게 왜?”

“그러면 저주나, 뭐 그런 사악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시엔이 피식 웃었다.

“그랬으면 세상에 나쁜 놈이 하나도 없어야지. 억울하게 죽은 이가 전부 복수할 수 있었으면 세상에 굳이 법 따위는 필요 없었을걸.”

그리 말하는 시엔의 태도가 여상했다.

베른닐의 어깨가 조금 펴졌다. 아직 불안한 기색은 역력했지만.

“그럼 이대로 놔 두자는, 으으······.”

-도와 주세요, 제발, 도와 줘······

문득 다시 들려오는 목소리에 베른닐이 말을 멈추고 몸을 떨었다. 시엔이 혀를 찼다.

“쯧. 담이 그리 약해서 어디다 써?”

“차라리 마물이 나타났으면 모르겠습니다만. 이런 건 정말······. 싫군요.”

“보아하니 자길 좀 찾아오라고 소리를 내는 것 같은데. 안 가면 그만이지. 답답하면 저가 오든가 할 테니까.”

“이리로 온단 말씀이십니까?”

베른닐이 몸서리를 쳤다.

나름 훈훈했던 식사 시간이 한순간에 얼어붙었다. 내외는 서로 붙들며 연신 불안함에 고개를 젓고, 베른닐은 괜찮은 척하지만,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움찔거리며 놀랐다.

제일 불쌍한 이는 에르제였다.

원래 사람의 머릿수가 홀수가 되면 어쩔 수 없는 숙명이라. 둘둘이 붙어 짝을 지으면 한 명은 남아 오갈 데 없는 꼴이 되었다.

제 주인은 남편과 딱 붙었고, 시엔과 베른닐은 따지고 보면 남과 다름없는 사이. 그러니 중간쯤에서 의지할 이 없이 두리번거리며 혼자 떨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가장 먼저 그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히앗!”

묘한, 사실은 조금 우스운 비명이 터졌다.

그대로 눈을 뒤집으며 까무러쳐 풀썩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쓰러지기 전 가리킨 자리에 기괴한 것이 섰다. 뚝뚝 끊어지는 부자연스러운 동장으로 연신 고개를 까닥거리는 것이었다.

시엔 역시 처음 보는 것이었다. 어린 아이와 닮았으나 그 대가리가 거대하며 몸통과 같은 크기였다.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 뻥 구멍이 뚫리고 코와 입에서 연신 진득한 액체가 흘렀다.

그러면서도 푸르스름한 얼굴이 깨끗하여 더욱이 기괴한 모양새였다.

-여기 있었구나?

“부정한 것! 무, 물러가라!”

베른닐이 기세좋게 검을 뽑아들며 외쳤다.

말을 떨지 않았다면 멋있을 수도 있었는데. 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왜 도와주지 않아? 왜 도와주지 않아? 왜 도와주지 않아? 왜 도와주지 않아?

그것이 끊임없이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 목소리가 점차 분노를 띄며 악의가 끓어올랐다.

-도와주지 않아. 왜? 너희도 나쁜 놈들이구나. 나쁜 놈들은 죽어야 해. 죽어야 해.

마침내 그것이 고개를 치들었다.

뻥 뚫린 눈구멍 속에서 작은 손가락들이 기어나왔다. 손가락들이 위아래 눈꺼풀을 붙잡고 크게 벌렸다.

촤악!

물 베는 소리와 함께, 수십의 촉수들이 그것의 눈구멍으로부터 솟았다. 수백의 촉수들이 돋아나 구불구불 위로 뻗쳤다.

“도련님! 피하셔야 합니다!”

베른닐이 급히 시엔의 손을 잡아챘다. 등 뒤에 시엔을 끼고 검을 적에게 겨눈 채 뒷걸음질을 치며 거리를 벌렸다.

꽤 듬직하긴 하네. 역시 실력 말고는 이제는 딱히 뭐라 할 데가 없단 말이지. 시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젠장, 셜리! 위험해!”

페시번이 그에 질새라 셜리를 보호하며 뒤로 물러났다. 여차하면 바로 도망을 칠 태세였다.

시엔이 바닥에 쓰러진 에르제를 바라보았다.

불쌍하기도 하지. 간난신고 온갖 고생 끝에 제 주인을 구하겠다 편지를 전해온 여인이 아니었던가. 결국 챙기는 이 없이 바닥에 쓰러져 있어야 하는 꼴이라니.

“안 돼! 에르제! 에르제가······!”

그제야 셜리가 에르제를 발견하곤 비명을 터뜨렸다. 제 하녀에게 달려드려는 셜리를 페시번이 뒤에서 껴안아 막았다.

“젠장, 위험해! 위험하다고!”

“하지만, 하지만······! 에르제!”

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베른닐. 됐어.”

“예?”

“환상이야. 그냥 겁을 주려는 거지.”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봐봐. 촉수 끝에.”

대륙은 넓으니, 시엔이라도 모든 악령을 다 안다 감히 자부하지는 못할 터였다. 천 년이 지났으니 새로운 것이 탄생했을 수도 있고.

그러나 악령이 맞는지 아닌지는 그냥 바로 느껴 판단할 수 있었다.

악령이 가진 악의도, 음차원 에너지도 느껴지지 않으니 일단 망령에 속한 것은 아니고.

괴물의 눈구멍에서 솟은 촉수들이 계속해서 꿈틀거렸다. 일부가 숲의 천장에 닿으니, 그 끝이 나뭇잎을 통과했다.

그러하면 보이되 실체는 없는 것이다.

망령도 아니고, 실체도 없다면 결국 환상일 수밖에.

“확실히······.”

“공포를 주는 건 좋은 전략이기는 하니까.”

아무것도 모르고 숲에 들어왔다 저런 것을 보면, 누구라도 등 돌려 도망칠 수 밖에 없을 터였다.

그러면 일행은 뿔뿔이 흩어지고, 어둡고 울창한 숲속에 깊숙이 파고들어 길을 잃을 수밖에. 숲에서 길을 잃으면, 숙달된 훈련 없이는 돌아 나오기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숲에 발길을 들인 자들이 돌아오지 못했다는 이유가 바로 이것일까.

“혹여 모르니 일단 지켜보죠.”

베른닐이 검을 겨눈 채 말했다.

그렇게 얼마나 대치하고 있었을까. 퍽 시간이 흐르도록 공격 없이 꿈틀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다 문득 입을 여니 이전과는 다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런. 생각보다 담대한 이가 있었군요.

“너는 누구지?”

-저는 트리예라고 한답니다.

“네년! 트리예!”

페시번이 고함을 빽 질렀다.

-도련님? 후훗, 그간 안녕하셨나요? 안녕하시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왜 귀찮게 살아서 여기까지 와 계시는지.

“네년이 감히.”

-감히? 아이 참. 입을 조심하셔야죠. 이젠 대공자도 아니시고. 한낱 납치범 따위에게 제가 굳이 예의를 차려드릴 이유가 있나요?

“트리예!”

페시번이 분노에 차 소리 질렀다. 그러나 환영은 못 들었다는 듯 말을 돌릴 뿐이었다.

-유르반의 아가씨. 이제 놀이는 그만하고 돌아오시지 않으시겠어요? 공작 각하께서 없던 일로 할 터이니 돌아오라 당부하셨답니다.

“나는 돌아가지 않아요. 이미 이이의 아내니까.”

-어머나. 세상에. 어쩜 이리도. 정말이지, 이래서야 제가 나쁜 년 같잖아요? 사실 진심으로 아가씨를 응원하고 있답니다. 사랑하는 이와 맺어진다는 건, 정말로 환상적인 일이니까요. 하지만 입장이 입장이라.

셜리는 대답 대신 페시번의 허리만 휘감고 말 뿐이었다.

환영이 다시 시엔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나저나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네요.

“뭐지?”

-용병인가요? 제 장난에 넘어가지 않을 정도로 담대한 심장을 가졌어요. 장비를 보아하니 대단한 실력자이신 모양인데.

이 부분에서 시엔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어찌 이런 의뢰를 맡으셨을까. 제 죽을 자리인 줄을 모르고.

“그야 의뢰금이 두둑하거든.”

-그런가요? 사실 별로 궁금하진 않고. 제 아이들이 숲에 많이 살고 있답니다. 그분과 제 마음이 하나로 모여 만들어진 어여쁜 아이들이죠. 다소 거칠긴 해도 착한 아이들이니, 열린 마음으로 환영해 주셨으면 해요.

시엔이 턱을 쓰다듬었다.

그분. 그러고 보니 리치 역시 같은 표현을 썼던가. 시엔이 다시 물으려는 찰나, 환영이 스륵 흩어져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젠장!”

페시번이 거칠게 분통을 터뜨렸다.

“뭔데? 트리예라. 아는 인물인가?”

“그 여자는······”

트리예는 공작가의 마법사로, 공작이 직접 데려온 인물이었다.

예의는 바르지만 딱 그뿐. 미묘하게 사람의 신경을 거스르는 부분이 있어 공작저의 식구들과 좋은 사이는 아니었다고.

“그저 너랑 사이가 안 좋은 게 아니라?”

“젠장. 그 여자는 다 싫어했어. 기분나쁘고 깔보는 기분이 든다면서.”

“흠.”

“뭐야?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아니. 뭐. 그 여자만 싫어한 게 아닌 모양이라.”

페시번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무언가 항변하려는 듯 거칠게 고개를 들었다가, 이내 일그러진 얼굴이 더 일그러지며 다시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빌어먹을 티란디스.”

그런 페시번의 손을 셜리가 잡아주는 것이 보였다.

천신께서도 놀랄 일이지. 이런 한심한 놈이 무어 좋다고 저리 유난인지 모를 일이었다.

물론, 남녀가 눈이 맞는 데에야 이성적인 논리가 필요하지 않다고 했던가. 시엔 역시 자주 듣고 읽은 이야기였으니.

그래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되지 않는 것이었다. 대체 어떤 부분이 그렇게 심장을 꿰뚫었는지 알 수 없으니.

“음?”

생각해보니 셜리의 전 연인도 만만치 않은 녀석이라. 재림 전 이 몸뚬이의 주인은. 생각해 보니 그에 비하면 페시번이 더 나았다.

둘 모두 별반 사랑받지는 못한 모양이지만. 적어도 페시번은 제 잘난 줄 알고 안하무인 제멋대로 살기는 하지 않았던가.

천성인지 뭔지 소심하고 줏대가 없어 하인들에게도 무시 받던 이 몸뚱이의 전 주인보다는 낫다 하겠다.

그 한심한 녀석을 유일하게 보듬어 주던 이가 바로 셜리라.

생각해보면 셜리가 시엔에게 부채를 느낄 이유는 없음이라.

사랑은 의무가 아니니, 일방적으로 사랑한다 매달리는 이에게 응답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래도 셜리는 약혼자의 의무인지 그 한심한 녀석을 잘 보듬어줬고, 나중에 덜 한심한 녀석에게 눈이 멀어 떠나갔으니.

이 몸뚱이의 주인이 유력한 티란디스의 승계 후보였다면 그리 간단히 파약이 이루어지지도 않았겠지.

티란디스나 흐레이그나 결국 한 지방의 맹주고 대귀족이었다. 가문의 골칫덩이와 대공자를 놓고 유르반이 저울질을 할 필요도 없었다.

결국, 재림 전의 이 녀석이 제 약혼녀를 지키기 위해 한 노력이라곤 그저 응석부리며 매달리는 전부 아니었던가.

시엔이 그녀였더라도 온갖 정나미가 떨어졌을 것이 뻔하니.

그나마 허무맹랑한 소리라도 함께 도망치자, 용병단을 세워 가문을 도모하겠다 외치는 멍청이가 더 예뻐 보이는 게 당연하겠지.

물론 이제와서 시엔에게 도움을 청하는 건 꽤 뻔뻔한 일이기는 했다.

그것도 뭐. 실상 도움이 아닌 거래였으니까.

흐레이그의 정통성을 가진 핏줄을 손에 넣는 대가로 그 안전을 보장해달라. 시엔이 그에 응했을 뿐이니 굳이 고마워하고 미안해할 이유는 없음이라.

영리하고 강단있는 선택이기도 하고.

페시번이 용병단을 일으켜 스스로 가문을 전복하기보단, 티란디스의 힘을 빌리는 것이 훨씬 더 현실적이고 가능성이 높았으니.

제 손이건 남의 손이건, 어쨌거나 공작가를 차지할 수만 있으면 그 안주인이 바로 누구랴.

시엔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다.

왜 내가 유르반 영애에 대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담? 혹여 신체에 남은 무언가가 이런 식으로 생각을 이끄는 건 아닐까.

잠재적 무의식의 발현인가?

무의식? 그렇다면 감정은 어디에 있지? 기억에 있는 것이 아니었나? 하지만 재림 전의 기억이라면 내게도 있는데?

리치가 화염탑의 부탑주에게 끌린것도 같은 맥락인가? 가서 물어봐야겠는데. 좀 자세히.

시엔의 사고가 휙휙 날았다. 의식의 흐름대로 제멋대로 뻗어나가는 중이었다. 이제는 정신과 신체, 기억과 실제에 대한 고찰로 넘어갈 즈음이었다.

베른닐이 생각을 끊었다.

“그나저나, 괜찮겠습니까?”

“뭐가?”

“그. 여자? 그거? 그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제 아이들이라고.”

“아. 그랬지. 자식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는 않지?”

“병단을 이끄는 지휘관들이 그런 식으로 말하곤 하죠. 우리 애들은. 아. 그러고 보니 아가씨께서도 가끔 그러십니다.”

“카레네가?”

“단장이 두 명이 된 것 같더군요.”

“그게 기사단을 장악한 힘이지. 아가씨가 아니라 단장처럼 느껴질 정도면.”

“요즘은 도련님도 만만치 않습니다만.”

“뭐가?”

“도련님이 뭘 한다, 하자, 해라 하면 다들 얌전히 고개만 숙이지 않습니까. 거기 대해 따로 떠드는 이가 없으니.”

“금칠하려는 시도는 좋았지만, 사실을 이야기해봐야 별 효과는 없어. 공부하려면 엘모나 벨티를 찾아가 보도록.”

결국, 또 의식의 흐름대로 대화가 진행되었다. 함께한 시간이 너무 길었던 탓이었다.

그 모습을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던 셜리가 결국 나서서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건가요?”

“일단 그 아이들을 좀 봐야겠습니다.”

“하지만, 상대는 마법사에요.”

“흐레이그의 마법사가 우리를 확인했습니다. 이미 바깥에 차단선이 만들어졌거나, 만들어지는 중일 겁니다.”

“그럼 지금이라도 빨리 탈출을 해야······”

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군대를 숲에 끌어들여 흐레이그의 군세를 줄이고, 또 그때 드러난 빈틈을 타 빠져나갈 계획이었다.

이제보니 숲에서 무언가를 꾸미고 있던 모양. 가만히 놔두면 그저 포위된 채로 시간만 버릴 테니, 여기서 대체 무얼 꾸미는지 알아내 방해하는 일이 먼저였다.

“하지만······.” “쉿.”

시엔이 손가락을 들어 입술 앞에 세웠다.

사삭, 사삭. 와그작. 부자연스럽게 부대끼는 소리, 낙엽과 잔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밤바람에 섞였다.

온 사방에서, 그리고 점차 가까워지며.

< 19. 기사가 죽어 그 핏값을 치르리라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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