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의 망령재림-68화 (68/268)

< 16. 길잃은 순정의 행방을 찾아서 [2] >

그리고 나서도 시엔은 한참 동안 오도카니 서 있을 뿐이었다. 바람이 불고 낙엽이 휘날리고 또다시 스산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게 몇 번이나 반복되는 제법 긴 시간이었다.

시엔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입을 다물고 있던 알렌이었다.

더는 참을 수 없었는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할 이야기가 더 있어?”

“아니. 없는데.”

“그런데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데? 안 가?”

“돌아가기 싫어서 그래.”

“뭐?”

“좀 꺼림직한 기분이, 아니 기분이 아니라.”

시엔이 숙소 방향을 바라보았다.

“손님이 온 모양이라.”

“그걸 어떻게 알아?”

“정말로 싫으면 자연스레 알게 된다니까.”

“그럼 나는 가도 되는 거지?”

시엔이 한숨을 푹 쉬었다.

“뭐, 내가 피할 건 아니지. 가자고.”

그러면서도 시엔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숙소 방향에서 끔찍한 기운이 느껴진다 싶더니, 문 앞에서 팔짱을 떡하니 끼고 선 여인이 한 명 눈에 들어왔다.

시엔을 발견하자마자 당장에 쌍심지를 켜고 노려보며 곱지 않은 말투가 튀어나왔다.

“뭘 하다 이제 와요?”

“안 들어가시고 여기서 기다리고 계십니까?”

“거야 시엔이 안에 없는 게 느껴지니까.”

주변에서 느껴지는 가장 큰 불쾌감이 곧 서로인 상황이었다.

물론 뷔아가 느끼는 불쾌감은 시엔이 비할 것이 못 되는 미약한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개중 가장 큰 것을 꼽자면 서로가 맞긴 맞았다.

“흠. 밤산책을 좀 즐겼습니다만.”

“나한테 골칫덩이를 덥석 안겨놓고는 지금 여유만만하게 밤산책이나 즐길 때에요? 지금 그 마법서 때문에 내가 얼마나 곤란한 처지에 있는 줄 알아요?”

“뷔아가 직접 보관하겠다 하지 않았습니까?”

“아니, 그럼 그런 걸 어떻게 당신한테 보여주는데!”

시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거 말입니까? 못 보여줄 건 또 뭐고. 그리고 당신은 너무······”

“아아니. 됐어요! 됐어요! 취소! 취소!”

뷔아가 손을 내저었다. 이 야밤에도 얼굴이 새빨갛다. 심상치 않은 반응이었다.

시엔이 눈을 가늘게 뜨자, 뷔아가 허둥거렸다. 그리고 이 자리에 당황한 사람이 한 명 더.

“세러하드 성녀님?”

“어맛! 부탑주님?”

뷔아가 알렌을 보고 멈칫하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순식간에 극적인 변화가 일었다. 사나운 암사자가 다소곳한 숙녀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어. 그.”

알렌이 시엔과 뷔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 단정하고 우아한 성녀가 이런 모습을 보이다니. 게다가 둘 모두 서로가 어디에 있는지 느낌으로 알아차리는 사이란 말이야?

문득 기억의 파편 하나가 알렌의 머리를 스쳤다.

‘꼬마야. 난 탑을 떠날 거야. 다신 돌아오지 않을 거야. 이 빌어먹을 장소에는.’

‘누나? 왜 그런 말을 해? 나 있잖아, 이번에 차기 부탑주로 내정받았어. 그러면 누나도 더이상은······.’

‘내가 떠나면.’ ‘헤위 누나?’

‘다 버리고 날 찾아올 수 있겠니? 네가?’

‘왜 그런 소리를 해? 내가 부탑주가 되면 누나가 더이상 이런 취급을 받게 두진 않을 거야. 그렇게 만들 거라고!’

‘피곤하네. 오늘은 쉬고 싶어.’

헤인트는 다음날 탑을 떠났다.

3년 전의 일이었다.

그때 다른 대답을 했으면 누나가 탑을 떠나지 않았을까?

그러나 부탑주는 바빴고, 탑주의 장제자로 배워야 할 것도 많았다. 틈나는 대로 헤인트를 찾았으나 전부 허사였다.

결국, 이렇게 마법서의 열람을 위한 일정에서 우연히 마주치고 말았지만.

다 버리고 찾아올 수 있겠니?

알렌의 표정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어깨가 축 늘어진 처연한 표정으로, 알렌이 둘을 바라보며 겨우 한 마디 내뱉었다.

“저. 그럼 먼저 들어가 있겠습니다.”

알렌이 숙소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그 꼴이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바라보는 둘의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다.

시엔이 진정된 말투로 다시 물었다.

“흠흠, 그 말 하러 여기까지 오신 겁니까?”

“그건 아니고. 그동안 몇 번이나 진정 요청을 보내드리지 않았던가요? 다들 자는 시간이니 자중을 좀 해 주십사 하구요.”

이번엔 시엔이 움찔 물러났다.

나름 할 말이 있기는 했다.

엘프 하나는 어떻게 막을 수 있었지만, 엘프 여럿이 모이니 시엔으로서는 이미 수습할 수 없는 판이였다.

그러나 그게 변명거리는 못 된다.

주인으로 배정받은 숙소가 아니던가. 손님을 못 이겨서 소란을 피웠다는 게 어찌 변명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주인의 실책이니 면피를 위해 꺼낼 말이 아니리라.

그럼 어찌한담. 일단 공범으로 만들면 되지 않을까? 시엔이 계산을 마쳤다.

“이러지 말고 안으로 들어가시죠. 날이 춥습니다만.”

“흠흠, 그럴까요?”

뷔아가 못 이기는 척 시엔의 뒤를 따랐다.

굳이 수히를 따돌리고 몰래 혼자서 온 이유가 무엇인가. 소문이 자자한 엘프의 술이 궁금해서였다. 그러니 나름대로 작전 성공인 셈이었다.

“시엔 왔어? 빨리 와!”

“시엔이 자리 비운 사이 분량까지 다 계산해 드렸답니다. 그러니까, 여덟 잔이랍니다.”

“이거 시엔 오면 까려고 아껴둔 거야! 오늘 온 친구들이 가져온 건데, 수호자님이 직접 담근 거야! 뭔가 비장의 재료가 들었다는데, 알려주진 않았지만 그래도 수호자님이니까!”

엘프가 시엔을 반겼다. 그중 끔찍한 내용의 말이 하나 들린 것도 같았다. 그러나 그도 잠시 뒤를 따르는 뷔아를 보곤, 엘프들이 벌떡 일어나 달려들었다.

“우와 예쁜 인간이다! 음, 인간?”

“인간이 맞을까요? 인간이 아닌 것 같은데.”

“우리가 모르는 종족일까요? 인간의 특징이 보이기는 하지만, 인간처럼 생기지도 않았잖아요.”

“뭐 어때? 예쁘잖아!”

“안녕! 너는 뭐야?”

“뭐라고 불러드리면 되나요?”

“너, 인간 맞아? 기운이 장난이 아닌데?”

“신기하네요······”

뷔아가 당황했다. 그런데 인간이 아니란 건 또 뭐람? 욕인가? 욕이 아닌가? 나쁜 뜻은 없는 것 같은데.

어어 하는 사이에 손을 붙잡혀 이끌려 들어가고, 또 뭔가 손아귀로 밀고 들어와 쥐고 나니 술잔이었다. 향긋한 향이 코를 찌르니 어느새 잔이 가득 차 출렁이고, 그 사이 엘프들이 손을 뻗어 잔을 부딪치니 어째 꼭 마셔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아. 이거 좋다······”

“좋지요? 검은누룩의 자랑거리인 사봉실주랍니다.”

“검은누룩?”

“초대 수호자님이 검은나팔아귀버섯을 발견하곤 그걸로 재배한 누룩 씨야. 그걸로 술을 빚었더니 너무 감동적이라서 숲의 이름을 그걸로 바꿔버렸대.”

“검은나팔아귀버섯이요? 그건 맹독이······”

“괜찮아괜찮아. 맛만 있으면 된답니다.”

“확실히 좋은 술이긴 한데, 이거 정말로 괜찮은······.”

“자자. 이번엔 뱀이 두배로 들어간 거야. 쭉쭉 마시자구.”

“뱀? 뱀이요? 지금 분명 뱀이라고.”

“신경 안 써도 된다니까. 자자, 한 잔 더!” 어쩐지 한별에게는 술 한 잔 못 얻어먹었는데. 그걸 보면 서리바람 숲의 엘프들은 딱히 술을 즐기진 않았던 것 같다.

그에 비하면 검은누룩 숲의 엘프들이 유난히 심할 정도로 술을 끼고 산다 싶더니, 그 원인이 여기서 슬쩍 드러났다.

초대 수호자가 제대로 술 뚜껑을 열어젖힌 모양이었다.

시엔이 그 사실에 눈을 빛내며 더 캐물어 보려던 참이었다.

“자자. 시엔도 마셔야지. 이거 수호자님이 특별히 보내주신 거야. 한별의 친구에게 특별히 대접하는 거라면서.”

“한별을 알아? 내가 한별의 친구라는 건 또 어떻게 알고.”

“그거 한별네 나뭇가지잖아. 그럼 한별의 친구지, 뭐. 그리고 한별을 모르는 엘프가 세상에 어디 있어? 살아있는 조상님이잖아. 계보로 따지면 세상 엘프 다섯 중 하나는 한별의 자손들인데?”

“아. 그렇게 되나.”

시엔이 새삼 천 년의 시간이 얼마나 긴 것인지 깨달았다. 그렇게 안 봤는데, 살아있는 조상님이라.

하긴 엘프의 숲을 가진 영지가 몇 있으나, 그 전체에 축복을 내려 홍수와 가뭄을 막고 지력을 돋울 정도의 강력한 세계수는 대륙에 오직 하나뿐이었다.

다시 술판이 펼쳐졌다.

수호자가 담근 술은 솔직히 말하자면 괴상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두 가지 나뭇잎이 들었는데, 개중 하나는 확실히 머릿잎이었다. 떫은맛의 극한이 펼쳐지니 마실 때마다 표정이 절로 일그러졌다.

그런데 나머지 하나가 세계수의 나뭇잎이라. 입은 떫디떫어 괴로우나, 목을 넘어 속에 퍼지면 청량하게 스며드니 그 순간만은 성녀가 주변에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을 정도였다.

베른닐은 이미 자취를 감췄다.

헤인트는 특유의 주사를 부렸지만, 별 반응이 돌아오지 않았다.

“나 예쁘지? 예쁘지?”

“음. 그런데 쟤가 더 예쁜데.”

“응. 맞아.”

“아무래도 저 분이 더 아름다우시죠.”

엘프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헤인트가 객관적으로 미인이긴 했지만, 아무래도 성녀 옆에 서면 그저 배경에 지나지 않았다. 뷔아는 이미 얼굴로 대륙에 이름을 알린 성녀가 아니었던가.

“······다 미워!”

헤인트가 시무룩하여 방구석에 틀어박혔다.

이번엔 진짜로 취한 알렌이 완전히 풀린 눈으로 헤인트의 옆구리를 덥석 끌어안은 채였다.

“그래도 나한테느은 누나가 더 예쁘어······”

“마음에도 없는 위로는 필요 없어! 나한테도 눈 있거든? 내가 이래서 쟤랑 있기 싫었는데!”

“아냐, 지인짜라니까아.”

“흑. 내가 그렇지. 내 팔자가 이렇다니까. 다들 얼굴만 보는 더러운 세상, 다 망해버려라.”

“울지 마아, 나도 슬프단 말이야아.”

그리고는 기어코 둘이 끌어안고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시엔이 인상을 찌푸렸다.

여러 주사 중 최악은, 술만 들이켰다 하면 급격히 공격적으로 돌변하는 치들이었다.

그에 비하면 무척 얌전한 편이지만. 잘 마시다 뜬금없이 통곡하는 주사 역시 수위권에 들어가는 진상이었다.

특히 그 통곡하는 술꾼 옆에 광소하는 술꾼이 끼어들면 그 진상 등급이 급격히 치솟았다.

“꺄하하핫! 쟤 운다! 쟤네 운다앗! 꺄핫, 아, 끕, 아, 배야, 꺄하하!”

성녀가 바닥을 구르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 병을 엎어 술이 쏟아졌다. 그러자 술이 쏟아진다며 웃고, 엘프가 병을 세우자 병을 세웠다고 웃었다. 엘프가 어이가 없어 웃자, 너도 웃기냐 나도 웃기다며 또 바닥을 굴렀다.

시엔이 그 꼴들을 바라보며 이마를 짚었다.

미친 자들의 세상에선 정상인 이가 비정상이라.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나뿐이니.

시엔이 병을 집었다. 잔은 필요 없었다.

----

다음날, 시엔이 멀쩡한 뷔아를 보며 말했다.

“멀쩡해 보이십니다.”

“시엔은 꽤 힘들어 보이네요. 어제 무리했나 봐요?”

“뷔아는 제 세 배는 마셨습니다만.” “저는 원래 숙취 없어요.”

“신성을 숙취 해소에 쓰는 겁니까?”

“제가 쓴다기보단, 천신께서 허락하시지 않으신답니다. 당신의 어린 아이가 숙취에 고생하시길 바라지 않으시는 거지요.”

딱히 손을 쓰지 않아도 자동이라는 뜻이다.

그건 좀 부럽네. 시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왜 보자고 하신 겁니까?”

“던전에 새로운 문이 나타났어요.”

“새로운 문 말씀이십니까?”

“던전 개요는 알고 계시죠?”

“뭐. 대충?”

“그럼 제대로 들어 둬요.”

뷔아가 설명을 시작했다.

던전 입구는 거대한 중앙 홀로 이어졌다.

중앙 홀에서 여러 갈래로 나뉘어, 그 끝에 거대한 석문이 자리를 잡았다.

석문은 각각 새겨진 문양에 따라 이름을 붙였다.

엘프의 문, 난쟁이의 문, 드워프, 익인, 개과와 고양잇과의 수인이 각각 하나씩이었다.

그리고 인간이 새겨진 석문이 총 일곱 개. 각각 불을 든 모양과 바람을 부는 모양, 대지에 입을 맞추고, 헤엄을 치고, 기도를 올리며, 검을 치든 형상이었다.

“이종족들과 인간의 마법사, 성직자, 전사의 문이겠군요.”

각각 방화광, 대지술사, 물길잡이와 천문관으로 불리는 원소 마법사와 사제, 검사를 새긴 석문이리라.

“그런데 인간의 문이 일곱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나머지 하나는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고들 하더군요. 난 알겠지만.”

“호오. 뷔아가 던전에 조예가 있었을 줄은 몰랐습니다. 던전 전문가가 여기 계셨군요.”

“뭐. 누구보단 낫다고 하죠. 나머지 하나는 좌우가 다른 인간이 새겨져 있는 문이에요. 가운데를 반 잘라, 인간과 해골의 모습을 동시에 하고 있죠. 지금까지 가장 많은 사망자가 발생한 곳이기도 하구요.”

“독특한 조각이 아닙니까. 그래서?”

“시치미 떼지 말아요. 당신이잖아요. 정확히는 당신과 같은 능력을 부리는 사람들.”

“당신은 너무 가신다니까. 자꾸 이러실 겁니까. 끔찍하게스리.”

“쓰읍.”

"그래서, 그게 어쨌단 말입니까?"

“오늘 하플링과 임프의 연합 탐사조가 난쟁이의 문을 클리어하고 복귀했어요. 이로써 수인의 문은 전부 탐사를 마쳤죠. 남은 건 인간의 문 중 세 개뿐이구요.”

여담이지만, 이종족의 문 중 가장 먼저 클리어된 것이 엘프의 문이라고.

동행한 사제의 증언으로는, 백여명의 엘프가 동시에 들어가 수백 자루의 검을 무자비하게 휘둘렀다고.

덕분에 사제는 그냥 걸어다니는 횃불이었다. 그나마 신성 치료를 딱 한 번 했는데, 제 발에 걸려 넘어진 엘프의 까진 무릎을 치료한 게 전부라나.

하는 일 없어 민망하니 보상을 받지 않겠다고 했으나 엘프들이 억지로 손에 보석을 한 무더기 쥐여주었다고.

엘프들이기에 벌일 수 있는 기행이었다.

던전 탐사란, 그 인원이 많을수록 개개인에게 떨어지는 보상 역시 줄어드는 것이었다.

많은 인원으로 들어가면 더 쉽고 안전하게 탐사할 수 있겠지만, 보상 역시 나눠 먹어야 하는 법이었으니까.

그러니 엘프들처럼 우르르 들어가 재빨리 해치우고 나오는 전술은 좀체 구경하기 힘들었다.

결국 욕망이었다. 좀 더 많은 보상을 받기 위한 아귀다툼. 사망자의 숫자가 벌써 삼백이 넘어가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 아니던가.

한별의 표현으론, 다른 종족들이 인간화되었다고 했던가. 이종족 역시 마찬가지였다.

예외라면 익인들 정도지만.

그네들은 워낙 먼 곳에서 오다 보니 정예로 추린 적은 수의 전사가 파견된 것에 불과했다.

“그래서, 제가 그 음. 해골문이라 합시다. 그 해골문을 탐사하길 바라시는 겁니까?”

“아무래도 시엔이 전문가라고 생각되니까요.”

“그럼 전문가의 의견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보다 성기사단이 나서는 게 훨씬 쉽고 안전할 겁니다만.”

“왜죠? 설마 귀찮아서는 아니죠?”

“뭐. 그것도 맞긴 합니다만. 어차피 보상은 챙겨주시겠다 약속하셨으니.”

“내가 꼭 밥값을 들먹여야 하겠어요?”

“신성이 사실 뭐 그리 폭력적인 힘은 아니지 않습니까. 공격 수단이라 해봐야 신체 강화나 빛의 창이 전부이니. 그나마도 물리적 수단에 불과하고.”

“천신께서 싸우라 내려주신 힘이 아니니까요.”

“그런데 저와 같은 이에겐 세상 그 어떤 힘보다도 폭력적입니다. 상성이 워낙에 좋지 않아서. 그러니 성기사들이 들어가면 쉽게 클리어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만.”

“상성이라. 그게 정확히는 어느 정도죠?”

“뷔아가 제 앞에 있는 것만으로도 저는 지금 토하기 직전입니다만. 몸이 이미 안 좋아서.”

“시엔, 설마 그 때.” “그 때 맞습니다.”

안 좋은 추억이 떠올랐다.

뷔아가 인상을 찌푸리며 신성을 조절했다.

시엔이 한숨 돌렸다. 숙취에 신성의 압박까지 더해져 더할 나위 없이 최악의 몸 상태였다.

그나마 신성이 줄어드니 좀 살겠다.

“아니, 그럴 수 있었으면 진작에 떨치지 않으시고.”

“넘쳐 흐르니 자연스레 뿜어지는 신성이랍니다. 굳이 막을 이유도 없을뿐더러, 신성이란 본디 이로운 힘이니 누구를 제외하면 기꺼운 일이 아니겠어요?”

맞는 말이었다. 그저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만인에게 이로움을 주는 것이 성녀 성자들이었다. 그러니 신성을 감출 이유가 없었다.

“더 줄일 수는 없습니까?”

“이게 한계에요.”

뷔아의 신성이 줄긴 줄었으나, 아직도 부담스럽긴 매한가지였다. 여름의 뙤약볕이 늦봄, 혹은 초가을 수준으로 줄은 정도일까.

“혹시 모르니 해골문 탐사엔 시엔이 참가해 줬으면 해요. 시엔에게도 좋은 일 아닌가요? 익인의 문 뒤에는 익인의 장비가 있었고, 다른 문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요.”

“흠. 그때와는 조금 다릅니다. 아시다시피 제 능력을 가급적이면 숨기려고 하는 참이라서 말입니다.”

“그런 것 치고는 보란듯이 드러내시던데요.”

“뷔아는 어차피 상관없고, 익인들이 어디서 떠들 이들이 아니니까요.”

“저는 상관없다?”

“제가 바로 명예 대주교가 아닙니까.”

시엔이 왼손을 들어보였다.

“칫.”

“흠. 일단 한 번 들여다보긴 해야겠습니다. 가까운 탐사조에 들어가죠.”

“좋아요. 그렇게 알고.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새로운 문에 대해서인데요.”

“새로운 문이라.”

“지금까지 없던 규모의 커다란 문이에요. 사실 이전의 문들이 종족에 관계없이 열 수 있었던 것과는 달리, 어떤 수를 써도 움직이지 않는 문이기도 해요.”

“그럼 아마도 다른 문들부터 처리하고 오라는 뜻 같습니다만.”

“전문가들 역시 같은 의견이네요.”

“혹시 그 문에도 무언가가 새겨져 있습니까?”

“그게 문제에요. 이대로 던전 탐사를 계속해도 되는가 하는 논쟁도 있고.”

뷔아가 한숨을 푹 쉬었다.

시엔이 되물었다.

“대체 뭐길래 그렇습니까?”

뷔아가 대답했다.

“드래곤. 용의 문이에요.”

< 16. 길잃은 순정의 행방을 찾아서 [2]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