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의 망령재림-67화 (67/268)

< 16. 길잃은 순정의 행방을 찾아서 [1] >

우웁. 붉은 머리칼을 한 여인이 개울가에 머리를 박았다. 우우웁! 이내 묽은 위액이 쏟아져나왔다.

“이 세오르그 오스텐이 술병이라니······”

엘프의 술은 은근히 독했다. 그걸 목넘김이 부드럽다고 꿀떡꿀떡 삼겼다. 벌써 일주일이었다. 몸이 남아나질 않았다.

“하지만 엘프가 따라주는데······ 헤헤, 엘프는 다들 잘생겼지······.”

리치가 히죽 웃었다.

눈 아래는 퀭하고, 긴 머리카락은 대충 틀어 묶어 올려놓았다. 이미 머리칼은 저들끼리 뭉치고 엉켜 엉망이었다.

리치가 손을 내밀어 개울물을 퍼냈다. 차가운 물이 속에 스미자 이제야 정신이 좀 드는 기분이었다.

“헤위 누나? 혹시 헤위 누나야?”

“으, 차갑다.”

리치가 손수건을 적셔 얼굴을 훔쳤다.

이상한 소음이 들린 것도 같다. 해위? 그건 또 누구야? 어째 들어본 적 있는 이름 같기도 했다.

“헤위 누나 맞지? 헤인트 랑그투!”

“아. 나구나.”

“세상에, 이 꼴 좀 봐.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야? 누나, 나 알렌이야. 꼬맹이 알렌이라고.”

사내가 성큼성큼 다가와 리치, 세오르그 오스텐, 헤인트 랑그투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이제 열여덟이나 되었을까 한 청년이었다. 얼굴선이 얇고 고우며 소년과 청년의 중간 쯤에 중성적인 얼굴을 가졌다.

어머, 어린 애는 취향이 아닌 줄 알았는데. 얘는 참 잘생겼구나.

헤인트가 얼굴을 붉혔다.

“어, 그. 이 손 좀.”

“아. 미안.”

“대체 어디를 갔던 거야? 스승님께서 얼마나 진노하셨는데.”

“그게.”

헤인트가 눈알을 굴렸다.

선배님은 분명 본체나 껍데기 둘 중 하나를 알아보는 이가 나올 거라 했다. 그러니 뭔가 자연스럽게 대처를 해야 할 텐데.

“누나, 왜 이러는 거야?”

“응?”

알렌의 우묵한 눈동자가 슬픈 빛을 띠었다.

“나 이제는 키도 많이 자랐고. 더는 꼬맹이가 아니라서 그런 거야? 하지만 누나가 항상 더 먹고 빨리 자라라고 해서 나는.”

“아, 그래. 몰라볼 뻔했다니까. 음, 알렌이라고?”

“왜 그런 식으로······. 하아. 그래서, 말도 없이 사라져선, 대체 어디에서 뭘 하고 있었던 거야? 그 꼴은 또 뭐고.”

“내 꼴이 뭐가 어때서?”

“지금 그 꼴을 하고 나한테 묻는 거야? 밥은 안 먹어도 외모는 가꿔야 하는 법이라면서?”

“아. 내가 그랬던가?”

“그래서, 지금 대체 뭘 하고 있는데?”

“그러니까, 티란디스에서 일하고 있는데.”

“티란디스? 귀족가의 마법사로 들어갔단 말이야? 하지만 왜? 분명 누나는······”

“어? 뭔가 문제라도 있니?”

“······세상에서 귀족이 제일 싫다고 했었잖아.”

“아하하, 참. 맞다. 그랬었지. 하하······”

알렌이 이를 악물었다.

“왜, 왜 그런 식으로 웃어? 나한테는.”

“아. 이게 아니니? 그럼 후후······?”

“젠장! 지금 뭘 하자는 건데!”

알렌이 분통을 터뜨렸다.

쪼그마한 게 더럽게 까다롭게 구네. 헤인트가 식은땀을 흘렸다. 성질 같았으면 벌써 한 대 쥐어막고 이 세오르그 오스텐을 능멸하려 드느냐 감히감히 소리라도 질렀을 터다.

그런데 선배님이 특별히 강조한 일이니 그럴 수도 없고. 그때 지원군이 도착했다.

“헤인트 양?”

“아. 베른닐 경.”

잘 생긴 기사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같이 술판을 벌이지만 헤인트와는 달리 멀쩡한 꼴이었다.

“속은 좀 괜찮으십니까?”

“어우, 말도 마요. 이러다 죽을 것 같으니까요.”

“너무 과음하시는 거 아닙니까?”

“경은 맨날 먼저 뻗으니까 모르겠죠.”

사람마다 주사에 차이가 있는 법이었다.

베른닐은 술이 들어가면 꾸벅꾸벅 졸다가 슬그머니 자리를 뜨곤 했다. 그리고는 꼭 시엔의 신발을 챙겨 품에 꼭 끌어안고는 잠에 빠져드는 것이다.

매일같이 엘프와 술판을 벌여도, 도중에 꼭 자리를 비워 어딘가에서 숙면을 취하더라. 그러니 멀쩡할 수밖에.

“당신은 또 뭐야?”

알렌이 바짝 경계한 채로 베른닐을 올려다보았다. 헤인트의 뒤에 찰싹 달라붙은 꼴이, 영락없이 낮 가리는 남동생이었다.

“흠? 헤인트 양께서 아시는 분입니까?”

“어. 그런가 봐요.”

“아. 그런 겁니까.”

베른닐이 말을 이었다.

“그러면 일단, 도련님을 뵙는 편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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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프 하나가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거리다, 저편에서 다가오는 헤인트를 발견하고 손을 번쩍 들었다. 중지와 약지를 굽혀 엄지로 고정시킨 묘한 손동작과 함께, 경쾌한 인사를 건넸다.

“여! 헤인트! 안녕안녕!”

“안녕안녕!”

헤인트가 같은 모양으로 손을 들어 대꾸했다. 엘프가 킬킬거리다 사레에 들려 컥컥 기침을 내뱉었다.

알렌이 묘한 시선으로 그 꼴을 바라보았다.

임시 주택 안으로 들어서자, 형편없이 널린 엘프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사이로 오리의 뼈 하나가 날아들었다. 포물선을 그린 오리의 뼈가 베른닐의 가슴팍을 두드리곤 떨어져 나뒹굴었다.

시엔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 부츠 어디로 빼돌렸어?”

“그. 찾고 있습니다만.”

“아니, 왜 자꾸 부츠를 챙겨가는 거야? 그것도 네 거 놔두고 내 거를.”

“저도 모르겠습니다.”

“거 참. 술버릇 한 번 고약하긴.”

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시엔 역시 멀쩡한 꼴이 아니었다. 눈 밑에 검은 기미가 끼고, 입술은 갈라지고 눈은 퀭하니 초점이 잘 안 맞았다.

먹고 마시고 새벽녘이 되어서야 겨우 잠에 들고. 이걸 일주일만 반복하면 이렇게 되는 법이었다.

그래도 숙취로 괴로운 일은 없었다.

사실 괴롭기로 따지면 성녀가 곁에 있는 편이 사실 훨씬 힘든 일이었다. 이미 익숙해졌는지 이 정도야 그냥 속이 좀 쓰리고 말 뿐이었다.

그러자 헤인트의 뒤에서 알렌이 쓱 삐져나왔다.

“당신! 당신이 시엔 티란디스인가?”

“음? 누구?”

“나는 알렌 프레이하트.”

시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 아는 사이였던가?”

“나는 화염탑의 부탑주다!”

“부탑주라고?” 호오. 시엔이 알렌, 아직 어린 방화광을 호기심 깊은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아직 소년과 청년의 경계에 있는 얼굴이니 나이 또한 대충 그러하리라. 어린 친구가 부탑주라니. 실력이 아주 뛰어나거나, 혹은 화염탐에 인재가 없거나. 둘 중 하나일 터였다.

“그래서 여기에는 무슨 볼일인데?”

“부탑주의 권한으로, 마법사의 반환을 요청하겠다.”

“반환?”

“헤위 누나 말이다! 누나가 귀족가에서 일을 할 리가 없어. 분명 비열한 수작을 부렸겠지.”

“아아. 그런 일인가.”

시엔이 눈을 가늘게 떴다.

화염탑의 부탑주라. 이 아이가 내 적인가? 아니면 그냥 헤인트와 알던 사이에 불과할까.

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그 요청은 들어줄 수 없어.”

“어째서!”

“헤인트는 기억을 잃었어. 그녀는 용병으로 참전해 티란디스에 심각한 해를 입혔고, 기억이 돌아와 그 배후를 알아내기 위해서, 영지의 마법사로 보호 감호 중이니까.”

“기억을 잃었다고?”

알렌의 표정이 멍하게 풀어졌다.

이내 헤인트를 돌아보니 이 말이 맞느냐는 확인이었다. 헤인트가 무슨 할 말이 있을까. 선배님이 그렇다면 그런 거였다. 헤인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가 기억을 잃어? 그럼 아무것도 기억이 나질 않는 거야? ······나에 대한 것도?”

“그런가봐.”

“하긴, 뭔가 이상하다 했는데.”

알렌의 어깨가 축 처졌다. 눈동자가 떨리며 진동하고, 손을 가늘게 떨며 제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올렸다.

갈피를 잡지 못하던 시선이 바닥을 구르는 술병에 붙들려 멈추었다. 손에 들어 흔드니 그래도 제법 남은 엘프의 술이 찰랑거렸다.

“이거 마셔도 될까?”

“얼마든지.”

시엔이 눈을 빛냈다.

술만큼 사람의 마음을 열어젖히는 물건이 또 있던가. 낚시의 결과로 화염탑의 부탑주라는 거물이 낚였다. 적과 어떤 관계인지 알아낼 좋은 기회였다.

꿀꺽꿀꺽 알렌이 병나발을 불었다.

“뭐야, 벌써 시작하는 건가요?”

“오늘은 좀 이른걸? 아. 나 술 가져올게.”

그러자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던 엘프들이 고개를 들어 왁자지껄 떠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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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 누나아. 나 누나가 많이 보고 싶었는데에.”

알렌이 헤인트의 허벅지에 머리를 묻고 어리광을 피웠다. 헤인트가 얼굴을 붉혔다.

“어머. 어머머. 얘가 왜 이래.”

그러면서도 묘한 미소를 띠는 것이, 싫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마 알렌의 얼굴 때문이리라. 새의 몸을 하고 있을 때도 사내라면 그저 품에 덥썩덥썩 안겼던 리치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나 예쁘니?”

“응. 누나는 예뻐.”

“헤헤, 나 예쁘다는 말이지?”

“누나는 너무 예뻐.”

“한 번 더?”

“누나는 예쁘다니까.”

헤인트의 입이 헤 벌어졌다. 일주일 동안 계속해서 지켜본 주사라 굳이 신기할 것도 아니었다. 어째 술만 들어가면 오만 사람을 붙잡고 제가 예쁘냐고 물어보더라니. 리치의 생애를 아는 처지에선 조금 안쓰럽기도 하고.

“으으······”

베른닐이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눈이 절반은 감겼다. 반쯤 자고 반쯤 일어나 있는 꼴로, 어디론가 천천히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저건 또 자러 가는 모양이네. 내 부츠나 좀 찾아왔으면 좋겠는데.

시엔이 한숨을 푹 쉬었다. “이봐. 부탑주.”

“뭐야아?”

“잠깐 좀 걷지. 많이 취한 모양인데.”

“우웅. 귀차는데······”

“주사는 그쯤 해 두고.”

시엔이 앞장서서 숙소를 나섰다. 현관에서 잠시 주춤했으나, 눈대중으로 대충 비슷한 것에 발을 욱여넣었다.

엘프의 신발은 가볍고 신축성이 있어 편안했다. 마음에 쏙 드는데 하나만 달라고 해 볼까.

시엔이 숙소 밖으로 나와 손을 비볐다. 그러길 잠시, 알렌이 따라 나와 마주보았다.

“뭡니까?”

“의외로 의뭉스러운 구석이 있던데. 취한 척도 적당히 해야지. 취한 척 어리광을 부리면 기분이 좋던가?”

“······어떻게 알았어?”

시엔이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취한 척 한 게 맞았네.”

“젠장. 뻔한 수법에 당하다니.”

순순히 나 취한 척 했다고 인정한 꼴이었다. 뻔한 수법이라고 해도 이만큼 잘 먹히는 방법이 또 있을까.

“뭐. 어쨌든. 좀 걷지.”

시엔이 앞서나갔다.

화염탑의 부탑주라. 미끼를 던져 대어가 물었으니 이제는 이 녀석이 내 적인가 알아볼 시간이었다.

시엔이 적당히 외진 장소를 찾았다.

일단은 운을 띄워 볼까.

“꽤 각별한 사이였던 모양이지? 아주 착 달라붙어서 떨어질 줄을 모르던데.”

“나, 남이사 어쨌든.”

알렌이 얼굴을 붉혔다. 시엔이 픽 웃었다.

“마법사가 정의하길, 개인의 정체성은 기억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었나? 네가 아는 헤인트가 저 헤인트가 맞아? 그저 같은 육체를 한 타인일 뿐이 아니고?”

“그건. 그래도. 헤위 누나는 헤위 누나야.”

“흠. 그렇게 믿고 싶은 게 아니라?”

알렌이 한숨을 푹 쉬었다.

“차라리 지금이 낫다고 생각해. 분위기도 따뜻해졌고. 저렇게 웃을 수 있다고는 상상도 못 했으니까. 어떤 기억들은 차라리 잊어버리는 편이 나아.”

“흠.”

“갑자기 탑을 나가버린 것도 전부 그 때문이었겠지. 더는 버틸 수가 없으니까. 젠장. 나는 옆에 있었는데도······.”

알렌이 자책했다. 시엔이 시큰둥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올해 봄이었던가. 작은 분쟁이 하나 있었는데. 헤인트가 상대 진영의 마법사로 나타났어. 알트릿테의 푸른 화염을 다루더군.”

“말도 안 돼!”

“내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있나?”

“뭔가 오해가 있었던 게 틀림없어. 헤위 누나의 경지로는 불가능한 일이야.”

“그래서 저 꼴이 됐지.”

“백파이어······.”

알렌이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하. 그래서 기억을 잃었던 거야. 기억을 잃은 게 아니라 아예 불타 사라져 버렸어.”

잊어버린 기억은 언젠가 되돌아올지 몰라도, 불타 사라진 기억은 되돌아오는 법이 없었다.

“그래도 저 이가 네가 아는 여인인가? 어떤 기적이 일어나더라도 예전의 헤인트로 돌아오는 일은 없을 텐데.”

“나는······.”

“뭐. 그건 네가 알아서 할 일이고.”

시엔의 눈에서 검은 안개가 풀려나왔다.

그러나 사위가 어두워 알렌이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당장 목 아래에 칼끝이 드리웠음을 몰랐다.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사람 하나쯤 사라지더라도 누구 하나 알아채지 못하리라.

부탑주이니 뭐니 해도, 아직 어린 마법사 하나쯤 치우는 일이야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세력이 있어 나와 내 영민을 노리고 있다.”

“잠깐, 그게 무슨 소리······.”

“헤인트 역시 그 세력에 속했지. 그녀가 탑을 나선 것이 3년 전이라 했던가?”

“헤위 누나가?”

“성유해, 혹은 성유물. 이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나?”

“아니. 들어본 적이 없어.”

“제 경지를 넘어선 마법을 부리게 하는 물건이라더군. 헤인트가 그걸 시도했고, 그 결과가 저 모양이지.”

“잠깐. 그게 무슨.”

“백파이어가 뭔지 알고 있으니, 헤인트가 더는 마법을 부릴 수 없다는 사실도 알겠지. 마법을 쓰지 못하는 마법사를 굳이 여기에 데려올 이유가 있었을까? 뭐. 적어도 그녀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말을 걸어오진 않을까 생각하긴 했지.”

알렌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너 이 개자식. 지금 헤위 누나를 미끼로 쓰겠다고?”

“이미 쓰고 있지. 그래서 네가 낚였고. 내 적으로 보기에는 너무 경솔하고, 보아하니 사람 속이는 재주는 없어 보이긴 하는데.”

순간 어둠이 내려앉았다. 땅 위와 하늘 아래가 일시에 까만 풍경 속으로 잠겨들었다. 그 속에 선 이는 시엔과 알렌 둘 뿐이었다.

“너, 너는 뭐야!”

“글쎄. 네가 누구인가에 따라 다르겠지.”

“빌어먹을! 하-사-크르엔!”

알렌이 제 지팡이를 쥐며 외쳤다. 그러나 그뿐. 공허한 외침만이 어둠속을 맴돌 뿐이었다.

“소용없다. 애송아.”

“마력이, 어, 어떻게······!”

“부탑주? 탑주라 하더라도 감히 내 앞에서 그 알량한 실력을 뽐내진 못할 터다.”

정신 세계 일부를 통째로 현상 세계에 복사해 실제와 한 된 공간이었다. 그 주인이 허락하지 않으니 어린 방화광의 마력이 침묵해 그 효능을 잃었다.

미리 정신 방어 주문을 외워 막았으면 모를까, 이미 이렇게 펼쳐지고 난 후엔 그 누구라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는.

어둠 속에 불빛이 일었다. 수천, 수만의 눈동자가 돌연 눈을 떠 일시에 알렌을 노려보았다. 절그럭절그럭. 부딪치고 긁히는 소리와 함께, 수많은 해골들이 나타나 주변을 감쌌다.

“너, 대체 넌 뭐야! 이게 무슨!”

“오래전에 잊혀진 마법이지.”

“젠장! 그게 무슨 소리냐고! 빌어먹을! 환상 마법? 너, 설마 천공탑의 마법사······”

“흠.”

시엔이 손을 휘두르자, 순간 모든 것이 꿈이었던 듯 일시에 사라졌다. 잡벌레 우는 소리가 다시 울리고, 달이 고개를 내밀어 텅 빈 공터를 비췄다.

“정말 모르는 모양인데? 흠.”

시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흑마법을 직접 보여줘도 천공탑이니 애먼 소리를 할 정도가 아닌가. 천공탑의 왜곡 마법이라 여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만.

이 어린 마법사는 정말로 흑마법에 대해선 전혀 모르고 있다는 뜻이었다.

“빌어먹을. 너, 대체 정체가······”

“그건 네가 알 바 아니고. 괜히 힘만 뺐네. 사람 헷갈리게 괜히 낚이고 그러냐.”

“큭.”

“너한텐 더는 볼 일 없으니 돌아가도록 해.”

“웃기지 마! 이렇게 다시 만났는데, 내가 어떤 마음으로 그동안······”

“네가 아는 헤인트는 이제 없다. 알고 있을 텐데. 그저 같은 몸뚱이를 한 다른 사람에 불과하다는 걸.”

“하지만, 그래도 헤위 누나잖아! 젠장!”

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화염 마법의 부작용, 백파이어가 그저 기억만 태웠으리라 믿는 순진한 녀석이었다. 물론 헤인트가 웃고 먹고 마시며 멀쩡히 돌아다니는 꼴을 보았으니, 그 속에 든 것을 모르는 입장에서는 그렇게 믿을 수밖엔 없겠지만.

실제로는 오래 묵은 리치 하나가 그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있을 뿐이 아니던가.

“그 헤인트가 이 헤인트가 아니라니까.”

“그런 건 상관없어!”

“그렇게 믿고 싶은 게 아니라?”

“그게 뭐 어쨌다는 거야?”

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남의 일에 신경 끄고 하던 일이나 마저 해. 부탑주라. 여기까진 무슨 일이지?”

“남이사 여기 왜 왔든.”

“뭐. 맞는 말이긴 하지. 네가 여기 온 이유야 뭐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니. 괜히 알짱거려봐야 좋은 꼴 못 볼 거야.” “젠장, 네가 누날 미끼로 쓰겠다고 하는데 어떻게 가만히 지켜보고 있냐고!”

호오. 이거 재미있게 돌아가는데.

시엔이 되물었다.

“그럼 뭐 어쩔 셈인데? 옆에서 지켜주기라도 하겠다고?”

“못 할 것도 없지.”

“결국, 네가 알던 이는 이미 세상에 없다는 사실만 깨닫게 될 텐데도?”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야.”

“뭐. 좋아.”

시엔이 씩 웃었다.

아직 어린 애송이나, 부탑주 씩이나 되면 그래도 뭔가 한 가닥 하는 놈임은 틀림없으리라.

그런 인재가 자발적으로 알아서 돕겠다는데, 그걸 굳이 말릴 이유가 있을까.

보아하니 리치도 제게 달라붙는 미소년이 기꺼운 눈치가 아니었던가. 시엔에게도 방화광 하나 아래에 두고 부려먹을 수 있으니 역시 기꺼운 일이었다.

알렌 본인에게는 조금 안타까운 일이겠지만.

< 16. 길잃은 순정의 행방을 찾아서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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