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의 망령재림-59화 (59/268)

< 14. 가을, 수확의 계절에 서다. [9] >

부패한 환희가 울부짖었다. 모든 산 자가 일시에 귀를 막았다. 영혼이 저릿하니 흔들리는 아우성이었다.

“젠장, 물러나!”

시엔이 버럭 소리쳤다.

기수에게 달려가 깃발을 치들어 휘둘렀다.

청색 기가 흔들렸다. 원정군의 머리 위로 청기가 하나둘 올라와 후진 신호를 전달했다.

왕국군이 한발 한발 물러나기 시작했다.

부패한 환희의 팔꿈치에 고름이 고여 한 방울 똑 떨어졌다. 야만전사가 고름을 고스란히 뒤집어쓰고 짜증을 부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미끌거리는 촉감과 함께 건더기가 걸려나왔다. 눈으로 보니 사람의 코였다. 제 인중 위를 더듬자 튀어나온 것이 없다. 야만전사가 비명을 질렀다.

병이 퍼지기 시작했다.

살점이 뚝뚝 떨어지고 종기가 돋아 고름을 뿜었다. 고통이 없어 더욱 잔혹한 병이었다. 산 자가 자신의 몸이 썩어가는 모양을 멀쩡히 지켜봐야 하는 병이었다.

공포가 번져나갔다.

이 세상의 질병이 아니었다.

야만인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시엔이 마침내 사제들에게 닿았다.

기도를 올리던 사제 하나가 시엔을 보며 반색하며 달려들었다.

“형제님! 무사하셨군요!”

“이걸 좀 맡아주세요.”

“이거라니! 누굴 짐짝처럼······! 악!”

시엔이 페시번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흐레이그의 대공자가 눈을 부라렸다. 눈을 부라리든 흘기든 지금 그게 중요하랴.

다시 몸을 돌려 전열로 향하려는데, 사제가 다급히 시엔을 붙들었다.

“형제님!”

“예?”

“성흔을 보여주실 수 있겠습니까?”

“지금 성흔이 문제가 아닙니다만.”

“그, 그래도······”

사제들의 눈빛이 떨렸다. 살며 처음 보고 또한 들어본 적 없는 대적이 눈앞에 있었다.

신을 믿는 이가 용납할 수 없는 거대한 부정. 이전의 성기사들은 그 공포를 이겨내는 강인한 자들이었으나, 사제들은 그렇지 않았기에.

시엔이 마음을 바꿔 건틀릿을 손에서 뽑았다. 손등 위로 성흔이 모습을 드러냈다.

본디 사람에게 없는 뼈가 돋아 밖으로 드러나고, 살이 갈라져 선을 그으니 둘이 어우러져 복잡한 문양이었다.

겉과 속이 뒤집힌 피부가 살아 핏줄이 얽혀 그 맥이 눈으로 보여 쿵쿵 뛰었다.

시엔이 손을 내밀자 사제들이 무릎을 꿇어 기도를 올렸다.

“그분께서 항상 지켜보시니, 땅 위에 당신의 증거가 여기에 있습니다.”

“당신께서 실제하심을 믿고 또한 내 영혼이 사악한 대적 앞에서 굳건함을 압니다.”

“이 또한 시련이라, 당신의 군대를 부디 보우하소서.”

신앙과 용기는 비슷한 것이라, 가장 위태로울 때 일어서 비로소 세상 무엇보다 찬란히 빛났다. 사제들의 신성이 지금 한층 성장했다. 늘어난 신성에 스스로 놀라 또 감격하여 용기를 얻으니 또다시 신성이 자라는 선순환이 이루어졌다.

‘이건 또 뭐야?’

군종 사제는 군대의 마지막 안식처였다. 그들이 무너져 공포에 빠지면 군대 전체가 그러하니 마음이나 달래라 보여준 참이었다.

그랬더니 떼로 신성을 뿜었다.

시엔은 흑마법사였다. 신성에 속이 날뛰어 또 뒤집히기 시작하니 은혜를 원수로 갚는 꼴이었다.

“저는 이만.”

시엔이 급히 자리를 떴다.

사제들이 한데 기도를 올렸다. 또한 당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이에게 축복이 있기를.

시엔의 머리위로 축복이 쏟아졌다.

‘아니. 왜 뒷통수를 치는거야.’ 시엔이 급히 방어 주문을 외웠다. 음차원 에너지가 움직여 막을 이뤘다. 축복이 시엔에게 닿지 못하고 도중에 둥글게 막혀 빛을 뿜었다.

그 모습이 마치 신성한 빛의 아우라가 후광을 비치는 꼴이었다.

오오. 신이시여. 병사들이 급히 물러나 길을 트며 기도를 올렸다. 평소에 신앙하지 않는 이들이 태반이나, 당장 전장에 스미는 안온한 신성 앞에 어찌 기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정확히는 방어 주문에 튕겨 나오는 신성일 뿐이었다. 그러나 모르는 이가 보면 그저 신성을 내뿜는다 생각할 수밖에.

그러니 감히 앞을 가로막는 이가 없다.

시엔의 앞이 쫙 갈라졌다.

시엔을 보며 고개를 조아리고 기도를 읊조리니 흑마법사로 살며 상상조차 한번 해 보지 못한 경험이었다.

그나저나 모양새가 이상하게 되었다.

이래서야 시엔이 꼭 무언가 해결하러 나선 듯한 행진이 되지 않았는가. 조용히 교섭하여 심연으로 돌려보낸다는 계획이 물거품이 되었다.

푸른 매가 한 마리 날아들었다. 시엔에게 활강하던 매가 근처에 도달해, 급히 홰를 치며 주변을 맴돌았다.

원정군의 눈에 경이가 깃들었다.

현실은 많이 초라했다. 리치라서 시엔을 감싼 신성을 어쩌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는 참이었다.

시엔이 손짓하자, 결국 눈을 질끈 감고 시엔에게 날아들고 말았다.

신성 앞에 영혼이 흩어지며 불타는 고통이 따랐지만, 지은 죄가 있어서 아픈 척도 못 했다. 그저 얌전히 발에 쥐고 부리에 문 것을 넘길 뿐.

또 내 뼈네? 마침 마력도 떨어진 참인데 바로 회수하고. 이건 루비 원석 같은데. 그리고.

시엔의 표정이 제대로 일그러졌다.

세계수의 나뭇가지가 썰렁하니 본디 달려있던 것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야. 너.”

사나운 으르렁거림과 같은 속삭임에 청깃매가 바짝 움츠러들었다.

-아. 그. 저. 선배님. 그게 아니라 말입니다. 일단 이 세오르그 오스텐의 말을 들어 보시면 말입니다.

“나불대 봐.”

-그게 저는 카브하뎃테를 부를 생각이었습니다만.

“카브하뎃테? 저게 지금 카브하뎃테로 보여?”

카브하뎃테는 지상 위를 부유하는 거대한 해파리였다. 촉수에서 뇌전을 뿜어 적을 태우는 부정 세계의 마수다.

-그게, 저도 당황스러운 게, 성물이 있으니까 상급 마수 한번은 소환해보고 싶어서, 그러니까 억지로 터널을 넓혔는데요. 거기 그 루비 원석 같은 게 반응하더니······

청깃매가 말끝을 흐렸다.

“반응하더니 뭐? 똑바로 말해.”

-저, 저도 모르겠습니다. 선배님도 아시다시피 저 세오르그 오스텐, 아시잖습니까. 제가 대죄인의 손가락이라도 불러올 깜냥이······

“쯧, 무능력도 자랑이라고.”

그건 선배님이 너무 유능하신 건데. 청깃매가 속으로 말을 꿀꺽 삼켰다. 지금 꺼낼 말은 아니었다.

“자세히 말해. 이게 반응해서 어쨌다고?”

-그러니까, 통로를 연 순간 그 루비 원석······같은 것이 반응했습니다. 갑자기 정신 세계가 핏빛으로 물드는데, 순식간에 다른 세계의 풍광으로 바뀌었습니다.

“다른 세계?”

-완전히 다른 세계였습니다. 일곱 허수 차원과는 완전히 궤가 다른. 대지가 위에 붙어 세상이 뒤집히고, 다섯 태양이 까마득한 저 아래에 떠서 거대한 눈동자로 주변을 살폈습니다. 끔찍한 증오로 이루어진 세상이었습니다. 으으.

청깃매가 몸서리를 쳤다.

“그리고?”

-터널이 심층 심연으로 이어지고 말았습니다. 아니, 이미 이 세오르그 오스텐의 터널이 아니었습니다. 아니, 그 세계는 제 정신 세계가 맞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부정 세계와 억지로 이어져 제어할 수도 없고, 대죄인이 고개를 들이밀곤 곧바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청깃매가 두서없이 말을 쏟았다.

모든 내용이 괴상하기 짝이 없었다.

개인의 정신 세계는 곧 자신임에도 어째서 그 정체성을 확신할수 없다 말하는가.

정신 세계와 허수 차원을 잇는 통로, 터널은 그저 시각적 심상화일 뿐이었다. 실상 개인의 의지가 아니던가. 그 의지를 제어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대죄인이 곧바로 사라졌다는 것. 허수 차원의 개념을 정신 세계에서 구체화해 현상 세계에 불러들이는 마법의 원리, 그 자체를 무시한 일이었다.

“곧바로 사라졌다고?”

-제가 실체화한것이 아닙니다! 대죄인이 제멋대로 현상 세계로 내려가 버렸습니다! “젠장. 그게 말이······ 아니다. 일단 넌 나중에 보자.”

시엔이 으득 이를 갈았다.

청깃매가 몸을 떨었다.

시엔이 어느새 군대의 전열에 다다랐다. 앞을 감히 막는 이가 없어 길이 곧게 뻗었다. 그러니 금방이었다.

부패한 환희가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었다.

몸집이 워낙에 커서 느려보이는 것 뿐, 실상 그 아래 야만인들은 수없이 죽어나가는 중이었다.

대죄인이 돌연 움직임을 멈췄다.

서서히 몸을 돌려 시엔을 바라보았다.

“----------------------!”

인간의 귀로 들을 수 없는 언어가 울려퍼졌다. 그저 귀청을 찢는 날카로운 소리, 유리를 긁고 쇠가 연신 스치는 듯한 그런 소음일 뿐.

시엔은 그 속에 담긴 뜻을 들었다.

「강대한 이가 왔구나. 여명부터 지금까지 가장 멀리에 이른 자로다. 부정에 속한 자들이 한데 바라보는 이다. 실제로 보아 참으로 기꺼운 일이로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시엔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 크기가 바로 옆에서도 듣기 힘들 정도. 그러나 대죄인 정도의 존재라면 충분히 알아차린다.

「세상이 참으로 기껍구나. 태양은 자애롭고 대지는 굳건하다. 대기가 맑고 청명하니 오랜만에 이 고통이 가시는구나. 아아.」

“그, 외람된 말씀이오나.”

「내게 돌아가라 권할 참이더냐. 나는 오래도록 고통받았다. 오래도록. 아주 오래도록. 여명을 아느냐. 세상에 지성이 나타나 사라지고 그것이 하루처럼 당연히 반복되는 그 오랜 시간을 네가 아느냐.」

“여명이라 하시면.”

「태동. 원대한 시작. 무한한 시간조차 그 시작이 있어 존재하지 않겠느냐. 그야말로 칼파의 시간이로다.」

“칼파······?”

「네가 감히 알겠느냐? 유구한, 거대한 연기를. 이루어 살아 멈추고, 또한 허물어져 비는 모든 순간이 순환으로. 그 위에 또 다른 환이 있어 또한 네가 모르는 것이다.」

아. 이거 제대로 큰일이 났다.

시엔이 속으로 생각했다.

심층 심연에서 영원히 고통받던 이가 현상 세계에 나왔으니 얼마나 기쁜 일일까. 그러니 돌아가 주십사 해도 스스로 돌아갈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러나 그건 사소한 문제였다.

정말로 큰 문제는, 아득한 시간을 살아온 존재가 눈앞에 있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대화가 가능하며 호의적이었다.

입이 근질근질하니 날을 잡아 몇 달이고 지혜를 구하고 싶다. 마법사의 본능이었다.

그러나 지성체가 짐승과 다른 것이 무엇이랴. 본능을 눌러 스스로 생각해 이치를 판단하니 그것이 바로 지성이었다.

대죄인처럼 격이 높은 존재는, 그저 현상 세계에 있는 것만으로도 계속해서 재앙을 불러일으켰다.

그래도. 그래도 그 전에 하나만 물어봐도 되지 않을까.

“혹여 이것이 무엇인지 지혜를 구할 수 있겠습니까.”

시엔이 루비 원석을 들었다. 겉모양이 그렇다 하나 실제로는 다른 물건이리라.

「바깥 것을 쥐고 있구나. 인간의 운명에 허락된 것이 아니나 바로 네 손에 있구나. 그러하니 스스로 알지 못하면 순리에 따라 스쳐 없게 될 것이다.」

“음. 그런데 정말 송구한 말씀이오나.”

「돌아가라 말할 참이더냐?」

“아시잖습니까. 당신께서 여기 계심이.”

「재앙이다? 허나 그것이 어떻단 말이더냐. 나의 기꺼움을 너희의 보신으로 말미암아 포기하하겠는가?」

포기할 리가 없지. 시엔이 입을 다물었다.

대죄인에게 인간이란 개미와 비슷한 미물에 불과할 터였다. 개미를 위해 자리를 비키는 인간이 세상에 있을까.

시엔이 세계수의 나뭇가지를 쥐었다.

어쩔 수 없이 역소환에 나서야 하리라. 심연에 있을 때야 대적할 이 없는 대죄인이지. 현상 세계에 현신한 이상 결국 법칙 아래 묶여있지 않은가.

부패한 환희가 날카로운 소음을 쏟았다.

자리에 모든 인간들이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나 시엔 혼자 표정이 밝았다.

「그러나 여기에 네가 있구나.」

“하시면.”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그 거위의 배를 가를 수는 없지. 약속하라. 네 초월에 이르러 나를 만나러 오겠느냐.」

“초월 말씀이십니까?”

「이미 네가 기어코 작은 원 하나를 비틀었구나. 네 바라는 것이 그에 있다면 나아가 초월에 이를 수 있으리라. 그때 나를 만나러 오겠느냐.」 공허한 약속이었다.

초월에 도달한다는 개념 자체가 아득하건만, 그때에 저를 만나러 오라니.

손해 볼 것이 없는 약속이기도 했다.

초월에 닿지 못하면 아무래도 상관없고, 닿으면 만나러 가는 것이 문제가 될 것 같진 않으니.

“약속하겠습니다.”

순간 마력이 흔들렸다. 약속이 말이 맺어져 동토 세계에 얼어 역사가 되었다. 격이 높은 존재와의 약속.

「좋다.」

시엔이 한숨 돌렸다.

리치 역시 시엔에게 속한 것이었다. 내 것의 잘못을 그 주인이 바로잡아야 마땅하니, 땅 위에 재앙이 머무는 것은 막았다.

“그러면 이제 돌아가 주십니까.”

「언제고 세상에 불러다오. 이리 따뜻한 곳임을 잊고 살았구나.」

쿵! 쿵! 쿵! 땅이 울렸다. 부패한 환희가 천천히 다가왔다. 가까이 다가온 거체는 어떤 절벽이 이러할까 싶을 정도로 높은 것이었다.

부패한 환희가 손을 뻗었다. 그늘이 지며 허억 숨 들이켜는 소리가 요란했다. 심약한 병사는 이미 다리가 풀려 쓰러졌다.

그러나 이 와중에 피고름이 병사를 비껴가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당장 눈앞에 선 부정함이 그런 것조차 사소하여 떠오르지 않게 만든 탓이었다.

“----!”

부패한 환희가 거친 괴성을 내질렀다. 소리가 돌풍이 되어 몰아쳤다. 사납고 거칠며 흉포한 돌풍.

그 뜻은 이러했다.

「손을 내밀어 보겠느냐.」

시엔이 순순히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거인이 놀라는 척 한발 물러섰다. 팔을 들어 눈이 부신 듯 얼굴을 가리며, 또한 급히 몸을 돌려 달아나니 겁에 질린 모양새였다.

또 왜 이러시나. 시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부패한 환희의 거체가 서서히 녹아내렸다. 부패한 환희가 한 걸음 떼어 전신의 살점이 떨어지고, 또 한 발을 떼어 뼈가 보였다. 저만치 달려나가 이미 그 형체를 잃고 대지에 지독한 잔해만 남았다.

우와아! 순간 함성이 터져나왔다.

온 힘을 다해 내지르는 환호성이었다.

시엔! 시엔 티란디스!

자신의 이름을 계속해서 연호하며 소리를 높이니, 시엔이 그제야 알아차렸다.

‘아니, 무슨 대죄인씩이나 되는 이가 이리 유치한 장난을 치고.’

당했다. 시엔이 깨달았다.

창졸간에, 손짓 한 번으로 거대한 괴물을 물리친 영웅이 되고 말았음이라.

이걸 어찌 둘러댈까. 아무래도 성흔이 힘을 발휘했다 해야겠지. 그냥 모르겠다 저도 모르게 손을 들었다. 아니면 목소리를 들었다 할까. 대충 저들의 입맛에 따라 알아서 이해할 것 같기도 한데.

그런데 내가 왼손을 내밀었던가, 오른손을 내밀었던가. 오른손이면 좀 이상한 거 아냐?

시엔이 심각하게 고민하는 사이, 함성이 황무지에 연신 울려퍼졌다.

야만인은 이미 죽거나 흩어져 남은 이가 없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대적이 나타났으나 그조차 물리쳐 사라졌다.

이를 두고 승리라 했다.

원정이 끝났다.

그러나 후폭풍은 제법 거칠게 몰아치리라.

< 14. 가을, 수확의 계절에 서다. [9]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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