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 무료연재 마지막 편입니다! [2] >
“오. 시엔 자네 왔는가.”
“아, 검위공께서도 오셨네요.”
“그럼 안 오겠나? 왕실친위대가 왕자님 옆에 없으면 그게 말이 되겠나?”
“그런 거였습니까? 전 몰랐죠. 티란디스에 아예 눌러앉으신 줄 알았는데요.”
노소가 사이좋게 킬킬거렸다.
“그나저나 서운하이. 제일 먼저 집결지로 달려올 줄 알았건만, 어째 이리 늦었나 그래.”
“돈 주는 녀석이 뜸을 좀 들여서요.”
“에잉. 돈을 쓸 때는 대범히 써야 하는 법이거늘. 어차피 내어 줄 거면 인색한 티는 내지 말아야지.”
“창고지기는 인색한 것이 미덕이죠, 뭐.”
“뭐. 그도 그렇네만은.”
항상 찾아와 대련하자 매달리던 영감이건만, 왕성에 돌아가고 나니 어쩐지 허전한 기분이었다. 이리 만나서 반가우니, 그간 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깨닫게 된다.
“안녕하세요, 검위공.”
“아. 카레네 양도 안녕하신가.”
“예. 이분들은 왕실친위대의 분들이신가요?”
“그렇지. 다들 처음 뵙지 않느냐? 티란디스의 시엔 녀석과 카레네 양일세. 그리고 저 놈이 바로 그 놈이야.”
검위공의 손가락이 베른닐을 가리켰다.
검은 갑옷을 차려입은 왕실친위대 기사들의 시선이 한데 모였다. 그 눈빛이 사뭇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베른닐이 깜짝 놀랐다.
“저, 저 말씀이십니까?”
“저 녀석들이 네놈 낯짝을 좀 보고 싶어 했거든.”
“저, 저를 말씀이십니까?”
그러자 왕실친위대의 기사들이 베른닐에게 다가갔다. 개중 한 명이 팔을 들어 베른닐의 어깨에 탁 두르며 말했다.
“이봐, 후배님. 검위공께서 가르침을 주셨다 들었는데 말이야. 정말인가? 우연히도 우리도 마찬가지라서 말이야. 후배님이랑 우리랑 어찌 보면 같은 인연으로 사사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냐?”
“맞, 맞습니다.”
“그런데 말이야. 명장의 제자도 명장이여야 하는 법인데 말이야. 검위공께서 둔한 놈을 하나 사람 만드느라 진땀을 빼셨는데도 아직 사람이 덜 됐다고 하시니, 우리가 좀 거들어야 할까 말아야 할까?”
“합니다! 당연히 해야 합니다!”
“그렇지? 후배님이 그래도 귀가 좀 트였네.”
기사가 씩 웃었다.
그리고는 시엔을 향해 자세를 바로 하며 공손히 말했다.
“공자님. 죄송하지만 호위기사의 시간을 잠시만 내어주실 수 있으신지요.”
“시간 말이죠?”
“예. 어쩐지 남 같지 않아 잡기술 몇 개나마 전수해주고자 합니다.”
시엔이 기사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눈을 보고 어떤 이인지 알면 그게 사람의 능력이겠냐만은, 그래도 흔들리지 않으니 제게 당당한 이라.
“좋아요. 그렇게 하세요.”
“감사합니다, 도련님. 자. 가자고. 후배님.”
“예, 옙! 가겠습니다!”
베른닐이 왕실친위대의 기사들에게 둘러싸여 저편으로 사라졌다. 카레네의 시선이 그 뒷모습에서 떨어질 줄을 모르고 계속해서 따라붙는다.
검위공이 씩 웃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시엔. 오랜만에 만났는데 대련이나 한번 어떤가? 보나마나 귀찮은 늙은이 사라졌다고 방에 처박혔을 것이 뻔하니 간만에 몸 좀 풀지 않겠나?”
시엔이 대답했다.
“일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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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작전권을 보장한다 말하지만, 알아서 적당히 잘 싸우라는 뜻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군대의 숫자는 육천을 넘겼으나, 저마다 소속이 달라 뭉치지 못하니 한 명이 지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소속마다 태도 역시 천차만별.
어느 가문은 왕실에 줄을 대기 위해 공훈을 노릴 것이요, 또 어떤 가문은 그저 명목상 대충 머릿수를 채우러 와 그저 병력 보존이 최우선일 테니까.
그 모두를 조율하는 일은 어렵기 짝이 없고, 게다가 왕자는 너무 어렸다.
게다가 상대는 야만족이었다.
황무지로 진격하고 이튿날, 기다렸다는 듯이 야만 기병이 모습을 드러냈다.
조랑말을 탄 채 도끼며 시미터를 들었다.
보기엔 흉악한 병기지만, 저러한 중병기는 야만인의 제련기술이 미숙라다는 증거였다. 무기가 날카롭고 튼튼하지 않으니, 무게로 찍어 그 파괴력을 보충하기 위함이었다.
야만족의 기마대가 돌진하는 그 목표지점에 보병대가 있었다.
“온다! 거창!”
지휘관의 외침에 기수가 깃발을 흔들었다. 그 신호에 보병들이 방패를 땅에 박았다. 방패병 사이로 장창병들이 제 창을 내밀었다.
폴 스피어, 혹은 글레이브라 불리는 긴 창이었다. 길이는 성인 키의 두 배요, 끝에는 창날과 그 아래 갈고리가 달렸다.
두두두! 대지를 두드리는 소리. 진동이 되어 군화를 타고 전해진다. 병사의 표정이 불안함에 물들었다.
그러나 야만 기병은 가까워져 올 뿐. 벌써 지척에 이르렀다. 야만인들의 표정이 사납다.
병사가 침을 꿀꺽 삼켰다. 일부는 눈을 질끈 감았다. 방패에 체중을 실고, 입에서는 연신 기도문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쾅! 거대한 충격이 병사를 강타했다.
창을 붙든 손아귀가 찢기고 방패병의 군화가 땅을 긁으며 밀렸다.
그러나 그뿐. 희비가 교차했다.
야만인과 그 말이 꿰뚫렸다. 인간이 창에 꿰였다. 찔린 말이 앞발을 들어 울부짖었다. 땅에 떨어진 야만인 위로 말굽이 떨어져 내렸다.
야만 기병이 파괴력을 잃었다. 창날 앞에 몸을 내던지는 꼴이었다. 사람과 말의 피가 황무지를 적셨다.
병사가 야만인을 올려다보았다. 야만인이 장창에 꿰인 채 바동거렸다. 병사가 칼을 뻗었다. 푹. 푹. 피가 훅 끼쳐 얼굴을 적혔다. 뜨거운 선혈이었다.
그 순간, 마음속 무엇인가가 깨어지고 만다. 병사의 입술이 열렸다. 피칠갑이 된 얼굴에 누런 이빨로 미소가 피었다.
“태이카! 태이카!”
야만인이 저들의 말로 소리쳤다. 야만 기병이 방향을 틀었다. 상대가 되지 않았다. 야만 기병이 반대로 내달렸다.
병사가 그 모습을 보고 또 주변을 보았다. 십인장이, 방패수가, 장창수가, 그리고 자신이. 정든 얼굴 모두 멀쩡히 시선을 마주쳤다.
어어! 누군가 놀라 손가락을 치들었다.
후퇴하는 야만족의 오른쪽. 한 떼의 기마가 새로 나타났다.
야만족의 조랑말이 아니다. 제대로 마장을 씌운 거대한 전마. 그 위에 탄 이들이 장검을 치들고 황야를 질주했다. 기사들이었다.
“와아!”
함성이 터져나왔다. 누구 하나 약속하지 않았건만,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
기사가 야만인을 보았다. 경지의 차이가 커 모든 곳이 빈틈이라. 기사의 검에 오러가 서렸다. 전마가 스치고 검이 지났다. 야만인의 허리 윗부분이 추락을 시작한다. 기사의 검이 또 다른 야만족을 사선으로 베어냈다. 먼저 베어낸 상체가 땅에 떨어지기도 전이였다.
기량도, 무구도, 심지어 전마마저 우월한 것이니 상대가 될 턱이 없다.
살아 도주하는 야만인의 숫자가 절반 이하로 줄었다. 그대로 유유히 크게 선회한 기사단이 본대로 복귀했다. 군대의 환호성이 기사단을 반겼다.
정규군과 야만 전사의 간극은 이 정도였다.
“대승입니다! 전하! 축하드립니다!”
“야만족 따위 용맹한 왕국군 앞에 상대가 되겠습니까! 하핫.”
델피르의 옆에서 귀족들이 추임새를 넣었다.
어린 왕자의 표정이 밝았다. 전쟁이라 하여 마음고생이 없던 것이 아니나, 이제보니 아예 상대가 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차륵차륵. 사슬 갑옷이 부대끼는 소리다. 참모 천막 안으로 기사 한 명이 들어섰다. 답답한 듯 투구를 벗으니, 순간 툭 하고 무언가 땅에 떨어졌다.
지저분한 손가락 한 개.
카레네가 멋쩍은 표정으로 발로 툭 차 밀어내곤 의자에 앉았다. 시엔이 물을 건네며 말했다.
“수고했어.”
“고마워. 마침 목이 말랐는데.”
땀에 전 얼굴로 한 컵을 그대로 비우고는, 그래도 뭔가 아쉬운 표정이었다. 시엔이 병을 들어 한 잔 더 따라주었다.
“꿈꾸던 첫 실전이었던가? 어때, 소감은.”
“됐어. 뭐 특별한 일이라고. 딱히.”
“그런 것치곤 꽤 즐거워 보이는데.”
“그런가?”
카레네가 잠시 말을 골랐다. 저만치 굴러떨어진 손가락을 잠시 바라보더니, 이내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적이 사방에서 두려워하고, 내 말, 그리고 내 기사들과 그 안에 있으니까 말야. 음. 아냐. 어차피 말해줘도 넌 모르겠지.”
“흠.”
“그나저나 어떻게 알았어? 적의 기병대가 돌격할 거라는 건. 언덕 너머에서 준비 중이었을 텐데.”
“뭐. 다 아는 수가 있지.”
시엔이 델피르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그 품에 안긴 오리를 바라보았다. 델피르의 손길에 맞춰 눈을 사르르 감는 모습이 참으로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문득 델피르와 눈이 마주쳤다. 왕자가 일어나 다가오자, 카레네가 급히 땀을 닦으며 자리에 섰다.
“카레네 경의 활약이었다 들었는데. 그. 음. 수고했노라.”
카레네가 미소지었다.
“감사합니다, 전하. 허나, 저는 경이 아닙니다. 기사 작위를 받은 몸이 아닌지라.”
델피르가 움찔했다.
시엔의 누이는 눈이 웃지 않으니 그 미소가 부자연스러웠다. 저번에 후작가에 방문했을 적에는 이렇지 않았으니 무언가 기분이 상했구나 싶은 탓이었다.
“아. 미안. 음. 그럼 뭐지? 티란디스 영애?”
“그냥 카레네라 부르세요. 전하.”
“아, 어. 응. 카레네. 수고했어.”
“별말씀을요. 전하의 백성으로 당연한 일이지요.”
“음. 그런가. 뭐. 어쨌든. 그럼.”
왕자가 쩔쩔매고 있으니 시엔이 그 사이에 끼어들었다.
“아. 왕자님, 세올이 답답한 모양입니다만.”
“아. 그런가?”
델피르가 오리를 내밀었다.
꽥. 오리가 어쩐지 억울한 눈빛으로 울었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랴.
“답답하지? 한 바퀴 돌고 와.”
꽥. 오리가 한 번 울고는 종종 걸어 천막 바깥으로 향했다. 입구에서 홰를 치며 날아올라, 저 밖으로 휙 날아 사라지는 것이다.
왕자의 뒤에 그림자처럼 붙어있던 검위공이 슬그머니 다가와 말을 붙여왔다.
“그런데 자네는 안 답답하나? 몸이라도 한 번 풀지?”
시엔이 대답했다.
“일 없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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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인이라 불리는 이들. 저 스스로는 평원의 자손이라 칭했다.
황무지는 바깥 놈들이 부르는 명칭일 뿐, 평원의 자손들이 보기엔 그럭저럭 먹고살 만한 땅이다.
봄풀에서부터 가을풀까지 먹을 수 있는 것들이 널리고, 염소와 양을 키우니 젖와 고기를 먹고도 털가죽이 남았다.
문제는 겨울.
겨울은 혹독하고 땅이 얼어 살 방도가 없으니, 그때엔 남으로 북으로 말을 이끌고 나가 약탈을 하는 수밖에.
평원의 자손들에게 세상은 강한 이가 제 것을 챙기는 것이 당연한 곳이었다. 그러니 바깥 놈 중 땅에 무얼 심을 줄이나 아는 약한 치들은 어차피 약탈당해 마땅했다.
간혹 바깥 놈 중 철을 두른 강자가 나타나 복수하는 일도 있었지만, 그건 그들이 강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알루는 어릴 적에 그러한 평원의 법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해하고자 했고, 결국 이해했다.
평원은 사람이 못 살 곳은 아니나, 결코 많은 이가 살 땅은 아니다.
그러니 부족으로 갈라져 서로 싸우고 또 싸워 죽어 나갔다.
누군가는 죽고 누구는 또 태어나니, 그렇게 입의 개수가 유지되는 것이다. 이 평원에서 먹고살 수 있는 정도의 입의 개수가.
‘이 무슨 개 같은 세상이란 말이냐.’
그래서 알루는 대주술사가 되었다.
대주술사.
평원의 역사에서 이따금 강력한 부족이 나타나 그 수장이 대족장에 오를 때는 있었다. 그러나 대주술사라는 자리는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하니 알루가 바로 곧 새로운 역사라.
대주술사의 천막 안이었다.
불경하게도 족장 하나가 목소리를 높였다.
칼라콤의 족장 다홀다였다.
“대주술사! 이게 어떻게 된 건가! 상대가 안 되잖아!”
“당연한 일이니라.”
“당연하다고! 알고 있었단 말이냐!”
“나는 대주술사다. 세상의 신비마저 꿰뚫어 아는 내가 몰랐겠느냐. 내 이미 알고 있었느니라.”
“그럼 어째서, 상대가 되지 않음을 알면서 전사들을 개죽음으로 내몰았느냐!”
“개죽음이 아니다. 그들로 인해 저들은 방심하여 날뛸 것인즉. 방심한 사자는 들개에게도 물려죽느니라. 하물며 우리는 들개가 아니라 위대한 평원의 자손이다.”
“개자식! 전사들이 죽을 걸 알고 있었어! 네놈이 알고 있었다고!”
다홀다가 제 도끼를 집어 들고 벌떡 일어났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당장이라도 덤벼들 기세였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나는 대주술사다. 선조의 영령과 평원의 뜻이 나와 함께한다. 감히 불경을 범하느냐.”
“크윽.”
다홀다가 식은땀을 흘렸다.
어느새인가 치솟은 검은 가시가 다홀다의 목을 겨누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홀다가 대신 소리쳤다.
“허나 저들은 강대하오! 그 숫자를 보았소? 호수의 파리떼조차 저리 모이진 않을 것이야!”
“걱정하지 말라. 두 신물이 나와 함께한다! 이것을 보아라! 이것이 선조의 뼈다. 영령이 나를 가호함에 내린 신물이니라.”
알루가 오른손을 들었다.
검게 변색된 뼈가 묘한 광택을 뿌렸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오싹하니 등줄기가 시리고 소름이 돋으니 신물이라 하여 부족함이 없었다.
“또한, 보아라! 이것이 평원의 심장이다! 평원의 뜻이 내게 있으니 결국 이 신물이 내게 있지 않으냐!”
알루가 왼손을 들었다.
거대한 루비의 원석이었다. 그 빛깔이 피처럼 붉고, 투명하나 그 속이 점차 검어져 중심에 심연같은 어둠이 깃들었다.
이 역시 바라보는 것만으로 온통 불길하니 걷잡을 수 없는 두려움이 솟으니 역시 신물이라.
“대계는 이미 준비되었다! 저들의 전사는 모조리 파멸하여 평원의 양식이 될 것이며, 우리는 세상 가장 강대한 민족이 되어 북으로 남으로, 동으로 서로 뻗어 누구도 감당할 수 없으리라!”
그러자 알루의 눈과 입에서 금빛 광채가 뿜어져나왔다. 천막 안이 온통 황금빛으로 가득찼다.
“오오, 대주술사이시여.”
“평원의 아들이 당신을 받듭니다.”
족장들이 일제히 고개를 조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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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가 날아올랐다.
시엔이 하늘 높이 사라지는 그 모습을 바라보던 때에, 뜬금없이 흐레이그의 대공자와 그 호위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상한 취미로군. 오리를 키우다니.”
“남이사 뭘 키우건.”
“또 날 그딴 식으로······. 뭐, 좋아.”
페시번이 미소를 머금었다.
시엔이 이건 또 왜 이러나 인상을 찌푸렸다.
“그 말 하러 왔나? 할 일도 없는 모양이지.”
“아니. 재미난 구경이 있다 해서 왔지.”
“무슨 구경? 또 넘어지려고? 그럼 내가 재미있지 네가 재미있진 않을 것 같은데.”
페시번이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그러자 샹라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오리를 날리시기에 구경을 왔습니다만.”
“구경이요?”
“예. 좋은 구경 말입니다.”
샹라가 손가락을 뻗었다.
황무지의 지형은 기묘하기 짝이 없다.
작은 언덕들로 울퉁불퉁한 가운데, 돌연 직각으로 절벽이 드높이 솟았다. 그렇게 솟아오른 땅 위엔 녹색이 번지니 아마 숲이 있으리라. 다만, 사람의 발길이 닿을 방도가 없는 곳이었다.
샹라가 가리킨 곳 역시 그러한 절벽이었다.
산양이란 신기한 짐승이라, 제 몸 가누기도 힘들어 보이는 절벽을 태연하게 타고 노닌다. 병사가 가리킨 것도 산양 한 가족이었다.
문득 푸른 것이 한 마리가 날아들어 산양의 머리며 눈을 쪼아댔다. 산양이 버티지 못하고 몸을 비틀다 결국 발을 헛디뎌 중심을 잃었다.
절벽을 타고 구르고 치이며 떨어진 산양이 그중 튀어나온 돌부리에 걸려 몸을 떨었다. 이내 축 늘어지니 숨이 끊어졌다.
푸른 새가 그 위에 앉아 부리질을 했다.
“청깃매라고, 평원에서 나는 귀한 새입니다. 야만족들은 신조라 하여 신성시하지요.”
야만족을 가장 잘 아는 이라고 하면 바로 샹라리라. 그는 야만족 출신으로, 약탈을 왔다 붙잡힌 후에 개심하여 기사가 되었으니까.
“그래서요?”
시엔이 되묻자, 샹라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비웃는 듯한 조소였다.
“청깃매의 영역에는 다른 날짐승이 없습니다. 제 영역에 다른 것이 나는 꼴을 못 보는 아주 흉포한 놈이라서 말입니다.”
그때였다.
산양의 시체를 쪼던 청깃매가 대가리를 들어 한 곳을 바라보더니, 이내 날아올라 쏜살같이 나아갔다. 허공에 푸른 선이 그어진다 보일 정도로 그 속도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라.
청깃매가 쏘아지는 방향으로 오리가 한 마리 날아오고 있었다.
“아끼시는 오리가 안타깝게 되었군요.”
말은 그리해도, 전혀 안타까운 기색이 없다.
그러니까, 이렇게 될 것이 뻔하니 둘이서 속을 긁으러 왔다는 것이다.
청깃매의 속도는 가공할 지경이라, 순식간에 오리의 지척까지 날아들었다. 느긋이 날던 오리가 청깃매를 발견하니 이미 코앞이었다.
꽤액!
-꺄악!
오리 울음소리와 사람의 비명이 동시에 터졌다. 오리의 모습일 때에 말을 말라 단단히 말해두었건만, 당황하니 어쩔 수 없었던 모양.
오리가 급히 날갯짓했다. 그러나 오리가 빨라 봐야 얼마나 빠르랴. 청깃매가 발톱을 들이밀었다.
꽥! 오리의 물갈퀴가 청깃매의 머리를 콱 밟았다. 키엑? 청깃매가 비틀 중심을 잃었다.
“음?”
오리가 양발로 청깃매의 몸통을 붙들었다. 청깃매가 당황해 몸통을 흔들었다. 꽤액! 꽤액! 아예 오리가 아예날개를 접어 청깃매를 끌어안았다.
날아다니는 것이 날개가 접혔으니 어찌 날랴. 오리와 청깃매가 한 덩어리가 되어 대각선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 방향이 딱 시엔이 선 자리라.
땅에 닿기 전, 오리가 청깃매의 등을 차며 푸드덕 날개를 폈다. 그대로 부드럽게 활공하여 다시 하늘로 날아올랐다.
끼에엑. 바닥에 처박힌 청깃매가 시엔의 발치까지 미끄러져 멈추었다.
“아니, 이게 무슨······.”
샹라가 아연히 중얼거렸다.
그 사이에 오리가 시엔의 어깨에 척 내려앉았다. 긴 목을 빳빳하게 펴고 부리를 치드니 내가 이 정도다 뽐내는 태도였다.
시엔이 어떠냐는 듯 둘을 바라보았다.
페시번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졌다.
반면에 샹라는 세상 못 볼 것을 본 사람의 표정이었다. 눈코입 모두 커다랗게 면적을 넓혀 오리와 청깃매를 번갈아 바라보기에 바쁘다.
시엔이 이죽거렸다.
“확실히 좋은 구경 했네. 이제 좀 가지? 얼마나 할 일이 없으면 구경거리나 찾아다녀?”
“큭. 젠장, 어떻게 된 거야!”
“······죄송합니다, 도련님.”
“젠장!”
페시번이 몸을 팩 돌려 사라졌다.
샹라 역시 그 뒤를 따랐다.
그러면서도 연신 뒤를 돌아 청깃매를 바라본다. 그 시선에 연민과 슬픔이 깃든 것을 보니, 아직도 야만족의 전통이 어딘가에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야만족이 신성시하는 새라고 하더니만.
둘이 도망치듯 자리를 뜨고 나자, 당당한 자태로 있던 오리가 포르르 시엔의 품 안으로 자리를 옮겼다.
울먹거리는 목소리가 귓전에 울렸다.
-우우, 선배님. 이 세오르그 오스텐, 정말로 죽을 뻔했습니다. 살아서 두 번 죽을 뻔했습니다. 완전 무섭, 진짜 무서웠다구요! 으으. 선배님, 저 또 날아야 하나요? 안 날면 안 될까요? 이 세오르그 오스텐, 당신의 후배를 좀 가여히 여겨 주시면 안 될까요? 네? 우우.
가여히 여길 상대가 따로 있지, 적어도 리치를 동정하기엔 그 죄가 너무 많았다.
그런 이유로 시엔이 대답했다.
“안 돼.”
< 14. 무료연재 마지막 편입니다!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