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 가을, 수확의 계절에 서다. >
가을의 초입. 왕가의 전령이 도착했다.
이민족의 무리가 한데 모여 불온한 의도를 가졌다. 이를 분쇄하여 왕국의 안전을 도모하고자 한다. 델피르 전하께서 분연히 일어나 대업을 도모하고자 하니, 그 충성을 떨쳐 왕국에 헌신을 다하라.
이미 전쟁을 알고 있었으니 새삼 놀라울 것은 아니었다. 시기 역시 적절하니 이쯤 하여 소식이 날아오리라 염두에 둔 상황이었다.
겨울이 되면 야만족들이 굶주리고, 결국 왕국을 약탈할 것이 자명한 일. 그 전에 먼저 쳐야 할 테니까.
게다가 이번 전쟁은 원정이었다. 왕국 귀족의 군대가 모이니 따로 징병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그러니 가을이 무슨 상관이겠는가.
게다가 야만인들과의 전쟁이니 패전의 우려도 없다. 병력도 충분할 터였다.
승리한다 하여 눈에 띄는 보상이 있는 것도 아니나, 차기 왕권을 두고 잘 보이려니 대부분 조금이나마 군대를 보탤 것이다.
후작은 한발 물러났다.
알아서 결정 후에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영지의 행정관, 병무관, 재무관이 한자리에 모였다.
카레네는 팔짱을 끼며 선언했다.
“두 개 기사단. 그리고 세 개 대대.”
로우드는 뺨이 옴폭 패여 눈에 띄게 야윈 인상이었다. 전부 사랑의 열병 탓이라.
요즘 들어는 그저 슬그머니 지켜보고 있는 모양으로, 비설의 말로는 매일같이 따라붙어 귀찮다는 모양이었다. 할 말이 있으면 하지 답답하다고도 했다.
로우드가 고개를 저었다.
“······너무 많아.”
“상대는 야만족이야. 이미 승리한거나 마찬가지인 전쟁이고. 부대에 실전 경험을 쌓을 기회야. 또 언제 이런 기회가 있을지 몰라.”
“그럴 바에야 몬스터 토벌에 나가는 편이 낫지. 누님이야 가서 싸우기만 하면 전부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보급을 생각하면 전혀 이득이 없다니까.”
“하. 이득이 없다? 1 왕자님은 결국 대관을 하실 거야. 티란디스가 가장 큰 아군임을 증명할 기회잖아?”
“굳이 증명하지 않아도 말이지.”
로우드가 시엔을 바라보았다.
여왕의 전언을 가장 먼저 받은 이가 누구였던가. 왕자와 개인적인 친분 또한 깊고, 무엇보다 그 사실을 온 왕국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니 굳이 병력을 많이 보내 증명할 필요가 있냐는 뜻이다.
그러자 카레네가 시엔을 노려보았다. 시엔이 손바닥을 들어 보이며 물러나자, 카레네가 언짢은 기색으로 다시 물었다.
“그래서, 얼마나 보내자는 건데?”
“한 개 기사단, 그리고 한 개 대대.”
“그건 너무 적어! 최소한 두 개 기사단, 두 개 대대는 보내야······.”
“돈이 없어.”
로우드가 말을 잘랐다.
“목재 수입도 계속해서 감소하고 있었고, 하우드란드 목재는 역병으로 불길하다 아예 수요도 없고. 그게 아니라도 벌목지가 뒤집어지는 바람에 조림기에 들어가서 생산량이 또 확 줄어들었어.”
“우리가 돈이 없어? 지금 그걸 믿으라고?”
“돈이야 넘치지. 하지만 내후년 예산 예비까지 편성하고 나면, 당장 동원할 수 있는 금화는 그리 많지 않아.”
카레네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쓸모도 없는 도로 사업에 돈을 쏟아붓는 건 상관없고, 당장 가문의 명예를 위해 출진하는데는 돈이 아까우시다?”
시엔이 움찔했다.
왜 갑자기 날 물고 늘어져?
로우드 역시 움찔했다.
그때는 잠시 정신이 나갔던 통에, 그저 만사가 싫고 귀찮아 예산안을 읽지도 않고 결재를 해 버리지 않았던가.
문득 가슴이 아팠다.
‘비설 양은 아직도 가까이에 있건만. 아니. 아직 모르는 일이지. 마음 단단히 먹자.’
로우드가 마음을 다잡았다.
“영지 내부 사업하고는 달라. 영지에 쏟는 돈은 돌아오게 되어 있으니까. 도로 사업은 당장 금화를 써도 결국 회수가 되는 예산이야. 하지만 군대는 달라. 순손실이니까.”
그저 될 대로 되라 하고 결재를 한 것은 아니었다. 내부 사업은 결국 영지의 부가 되니 멀리 보면 결국 되돌아오는 금액이다.
다만 지금 빠지는 금화를 생각하면, 제정신으로는 절대 결재를 해 주진 않았을 것이다.
“순손실? 군대의 경험을 손실이라 생각해? 하. 실전은 훈련과는 달라. 실전 경험을 갖춘 베테랑 부대는 금화로 살 수도 없는 거야.”
“그러면 야만인과의 전쟁이 제대로 된 실전인지부터 따져야겠지. 애초에 전쟁이라기보단 토벌에 가깝지 않아? 몬스터랑 야만인이랑 뭐가 달라?”
“달라. 완전히 다르다구. 대물 전술과 대인 전술을 엄연히 달라. 이번 기회에 최대한 많은 정병이 경험을 쌓아야 해.”
“그러는 누님이야말로, 군대가 얼마나 금화를 잡아먹는지 알기는 해? 생산성도 없어서 그 유지비는 회수도 안 된단 말이야.”
둘의 대립이 팽팽했다.
“시엔, 어떻게 생각해?”
“시엔, 어떻게 생각하지?”
결국, 가만히 지켜보던 시엔에게 화살이 날아들었다.
사람은 셋이고 의견은 둘이니, 시엔이 누구의 편을 드느냐에 따라 갈릴 터였다.
“기사단 둘에 세 개 대대면 병력만 벌써 천이 넘어가네. 그만큼을 움직일 수는 없지. 로우드 말대로 보급 소요도 무시할 수 없는 노릇이고.”
“하지만!”
“거봐. 그렇다니까.”
희미가 갈렸다.
시엔이 말을 이었다.
“게다가 기병과 보병을 동시에 이끌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카레네가 둘 모두를 지휘하겠다고?”
“······왜 내가 못한다고 생각하는데?”
카레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시엔이 손바닥을 내보였다. 일단 진정하라는 뜻이었다.
“카레네는 기사단의 가장 앞에서 돌격할 생각인 거 아냐? 안전한 곳에서 지시만 하진 않을 거잖아?”
“거야 당연한 거 아냐? 진정한 지휘관은 가장 앞장서 들어가 맨 마지막에 빠져나오는 법이란다. 시엔.”
“그러니 굳이 보병대대를 편성할 이유는 없지. 그건 다른 귀족들이 많이 끌고 나올 테니까. 두 개 기사단이면 충분할걸.”
“하지만 상대는 야만족이야. 보병대가 대기병 경험을 쌓는 건 또 다른 이야기니까. 한 번 기마에 맞서본 군대는 이후로도 물러나지 않아.”
“얻을 건 얻고 포기할 건 포기해야겠지.”
시엔이 로우드를 바라보았다.
로우드가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 둘 다 군대를 너무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어. 결국, 영지와 영민을 지키는 힘이 어디서 나온다 생각해?”
“그야 당연히 금화 아닌가?”
로우드가 대답했다.
둘의 눈빛이 사납게 맞부딪혔다.
시엔이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카레네. 일군의 지휘관이라면 공훈으로 이야기하는 게 맞지 않겠어?”
“호오. 시엔. 지금 해 보자는 거지?”
“이번에 내가 왕자님의 보좌로 참가하는 건 알지?”
“나보다 상급자이시다?”
“왕자님은 어차피 명목상의 총사령관으로 계실 뿐이야. 각 가문에서 지휘권을 내주려고 하지 않을 테니, 나 역시 차라리 독립 작전권을 보장하는 것이 좋겠다 말씀드릴 참이고.”
“독립 작전권이라.”
“그러니 병력을 얼마나 파견하느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아. 공훈을 누가 세우느냐가 중요하겠지. 그러려면 보병대보다는 기마대가, 기마대보다는 기사단이 더 유리할 테고.”
“흠.”
“탑클라우드 구릉지에서 보니 세 기사단을 하나로 뭉쳐 이끌던데, 그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잖아?
“뻔한 사탕발림은 집어치우고. 하아.”
카레네가 한숨을 푹 쉬었다.
“됐어. 유치하게 싸우지 말라 이거지? 좋아. 이번엔 어쩔 수 없지. 내가 양보해야지 어쩌겠어. 하여간 동생이라는 놈들이 하나는 수전노에 하나는 애늙은이······. 어쩜 예쁜 구석이란 한 군데도 없고.”
로우드가 인상을 구겼다.
“누가 수전노란 거야?”
“왜, 찔리니?”
“큭. 잠깐, 지금 어디 가는데?”
“어디 가긴. 기사단 소집하러 가지. 숫자만 두 개 기사단에 맞추면 되는 거 아냐? 종자들 쳐내고 이백을 꽉 채우려면 지금부터 움직여야지.”
두 개 기사단이라 했더니, 머리 숫자만 맞춰 각 기사단의 정예만을 모아 이끌 생각인 모양이었다.
로우드가 기겁하며 말했다.
보병보다는 궁병이, 궁병보다는 공병이, 공병보단 기마대가, 그리고 그 모든 병력들 중 가장 금화를 많이 먹는 군대가 바로 기사단이 아니던가.
“잠깐. 그렇게 했다간.”
“맞아. 예비 전마와 마구, 그리고 경기병용 무장은 따로 챙겨두고. 랜스는 필요 없고 돌격검에 숏 소드로. 체인까지 해서 전부 짝으로 해서 맞춰 놓도록 해.”
“그럴 바에야 차라리 보병대대를 보내는 게.”
그러자 카레네가 반색하며 손을 흔들었다.
“아. 비설! 여긴 무슨 일이니? 함부로 들어오면 안 돼.”
“비설 양?”
로우드의 고개가 급히 돌아갔다.
그러나 가문의 세 후계 후보가 모인 자리에 어찌 외부인이 나타나겠는가. 목을 빼 주변을 휙휙 둘러본 로우드가 한 박자 늦게 속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카레네!”
“난 간다? 그렇게 알아.”
퉁. 카레네가 그렇게 말하고 잽싸게 문밖으로 빠져나갔다.
로우드가 머리를 부여잡았다.
시엔이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다, 스윽 일어나 자리를 떴다.
굳이 여기서 한마디 보탤 정도로 친한 사이는 아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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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한창이었다.
흐레이그 영지는 로이로즌 강을 끼고, 그 지류와 함께 펼쳐진 커다란 평야에 자리잡았다.
고개를 돌리면 보이는 것이 온통 흐드러지게 익은 곡식들이었다. 시야가 막히는 곳이 없어, 저 시야 너머 지평선을 이뤘다.
영지 대부분이 숲과 비탈로 이루어진 티란디스에선 볼 수 없는 풍경이기도 했다.
덕분에 멀리서부터 집결지가 보였다.
휘날리는 색색의 깃발들. 저마다 다른 문양이 나부끼니 전부 그 소속이 다른 군대라.
거기에 티란디스의 깃발이 더해졌다.
기사단의 야영지를 안내받아 자리를 잡고, 시엔이 카레네와 함께 참모 천막을 찾았다.
보기 드문 초대형 지휘 천막이었다. 그러나 그 크기가 무색하게도, 벌써 귀족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궁병대요? 라그랏사의 장궁병이라 하면 또 유명한 것이 아닌가. 이참에 우리와 함께 하시는 건······”
“하하, 오랜만입니다. 저희야 뭐 워낙에 약소한 병력이라······”
“야만족이 무어 상대가 되는 일이겠습니까. 사나우나 무식하여 전법을 모르는 것들이니······”
그러니 천막의 분위이가 어떠하랴.
이미 이긴 것처럼 들떠 저마다 담소를 나누며 웃고 떠들었다. 참모 천막이 아니라 승전 연회라도 열린 모양새였다.
시엔이 들어서자 귀족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시엔의 얼굴을 한 번 보고, 그 옆에 선 카레네를 보고. 그 이후에 자연스레 시엔의 품에 안긴 오리에 시선을 빼앗겼다.
웬 오리? 귀족들이 가볍게 술렁였다.
시엔이 그 사이에서 델피르를 찾았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가장 사람이 몰린 장소를 찾으니, 그 안에 폭 파묻힌 어린 왕자가 있음이라.
애매한 표정으로 귀족들의 수다를 들어주고 있던 어린 왕자가 시엔을 보며 반색을 했다.
델피르가 귀족들 사이에서 빠져나와 성큼 다가왔다.
“오! 시엔, 정말로 와 주었구나!”
“예, 전하. 곁에 있겠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좀 늦길래 안 오면 어떡하지 하고.”
“안녕하세요, 전하.”
“아. 그대도 오랜만이야. 카레네였던가?”
“예. 기억해 주시는군요, 전하.”
꽥. 오리가 울음소리를 내며 시엔의 품에서 푸드덕 홰를 치며 뛰어올랐다.
“세올! 너도 왔구나! 하핫, 그래. 기억하고 있구나. 영리하기도 하지.”
꽥. 꽥. 오리가 천연덕스러운 울음소리를 내며 왕자의 품에 안겼다. 왕자가 환히 웃으며 오리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카레네가 어깨를 늘어뜨렸다.
“왠지 오리한테 밀리는 기분인데.”
“그나마 카레네 정도면 반가워한 편일걸. 봐봐.”
시엔이 카레네의 팔뚝을 툭 건드리며 턱짓을 했다. 아닌게아니라, 왕자 주변에 몰려있던 귀족들 전부 황당하다는 표정이었으니까.
델피르의 표정으로는 눈이 웃지 않는 이들이리라.
‘뭐지? 왕자님께서 오리를 좋아하시나?’
‘동물을 좋아하시는 모양인데.’
‘귀한 새라도 잡아드려야 할까요.’
‘저렇게도 점수를 따나? 돌아가면 귀여운 짐승을 좀 수배해야겠는데’
그렇게 수군거리는 소리도 귀에 들어온다.
아마 원정이 끝나면 델피르에게 귀하고 어여쁜 동물 친구들이 많이 생길 모양이었다.
귀족들이 저마다 눈빛을 교환했다.
티란디스의 공자가 왕자와 개인적 친분이 깊다 소문은 들었지만, 반가워하는 기색을 보니 예사 것이 아니다.
이번에도 군대 외에 특별히 개인 보좌로 참여했다고 하던가.
“티란디스의 공자님이시군요. 저는 에플락의 크런트라고 합니다만······”
“이번에 명예 대주교를 받으셨다던데, 오. 과연. 이것이 바로 성흔이군요. 과연 성스럽습니다.”
“요즘 경사가 있으셨다고 들었습니다만, 공주님께선 어떠하신지요.”
작년 탄신연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
저마다 한 마디라도 붙여 아는 체를 하며 다가오는 것이다.
“에플락이면 남부의 곡창이라 불리는 곳이 아니던가요? 반갑습니다.”
“별말씀을요. 천신께서 보우하셨지요.”
“공주님과는 아직 이렇다 말씀드릴 것은 아닙니다만, 참 좋은. 음. 독특하신 분이셨죠.”
시엔이 쾌활하게 대답을 붙여 인사를 나누었다. 원래 그런 성격이었다. 연회를 좋아하고 주목받아 즐거움을 느끼는 성정이었다.
왕자는 눈이 웃지 않는다 하여 저어하였지만, 시엔은 그래도 별 상관은 없다 여겼다.
진정으로 아껴 살피는 벗. 그리고 그저 겉으로 친근하여 속마음이 다른 아는 이.
결국, 둘 모두 주고받아 서로에게 이득을 취해야 관계가 유지되지 않던가.
그러니 굳이 배척할 이유가 있겠는가. 그저 속으로 경계함을 잊지만 않으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긴 인사가 한풀 꺾이고 나자, 시엔이 그제야 델피르에게 물었다.
“소집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습니까?”
“음. 지금까지 열아홉?”
델피르가 슬쩍 제 옆의 눈치를 보았다. 카라렐이 급히 속삭였다.
“전하, 스물. 스물.”
“아. 스무 가문에서 기꺼이 병사를 보냈어. 그러니까 티란디스까지 하면 스물 하나?”
“전하, 해서 스물이요.”
“맞아. 티란디스까지 스물이야.”
시엔이 다시 물었다.
“참전하겠다 알린 가문 중에 아직 도착하지 않은 이들은 얼마입니까?”
“전하, 그러니까.”
“이번엔 나도 알아. 일곱이야. 해서 총 27 가문에서 원정에 나서겠다 답을 했어.”
“거진 다 모였군요.”
아직 소집 마감까지 사흘이 남았으니 그 정도면 모두 도착해 첫 회의를 열 수 있으리라.
가문이 27이면 영지를 가져 부유한 이들은 전부 참여했음이라. 파벌에 상관없이 아직 왕실의 힘이 건재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문득 장내가 술렁였다.
무슨 일인가 보니 막사 천막에 새로 들어온 청년 때문이었다. 시엔 역시 아는 얼굴이었다.
흐레이그가의 대공자인 페시번. 그리고 그 뒤에 선 샹라였다.
저를 반기는 파벌들 사이에서 웃는 낯을 하다, 시엔을 발견하고 당장에 인상을 구겼다.
귀족들의 눈에 기대감이 차올랐다.
둘이 어떤 관계던가. 전 연인의 현 연인. 그리고 현 연인의 전 연인. 이미 한차례 소동으로 공인된 앙숙이 아니던가.
시엔이 어쩔 셈이냐는 듯 페시번을 보며 미소를 지어보였다. 페시번이 찌푸린 얼굴로 마주 노려보다, 이내 못 볼 것을 보았다는 듯 시선을 돌려버리고 말았다.
아예 무시하겠다는 심산인 모양이었다.
그대로 델피르에게 다가와 정중히 인사를 올린다.
“전하. 신 페시번 흐레이그, 왕가의 명을 받아 대령하였습니다. 일천의 병력이 전하의 뜻을 따를 것입니다.”
“흠흠, 그래. 수고하였다.”
“예. 전하.”
일천. 그 숫자에 귀족들 사이에서 탄성이 터졌다.
티란디스의 정규군이 전부 하여 5000정도라. 곡창을 끼고 인구가 더 많은 흐레이그는 7000쯤 할 터다.
물론 정규군만이라 실제 침략이 있다 하면 징집하여 건장한 이 모두 병사가 된다. 물론, 징집병과 정규군은 완전히 다른 집단이긴 해도.
그러니 정규군, 군대 중 천을 이끌었다 하면 대단히 성의를 보인 것이다.
공연히 누군가 옆구리를 쿡 찔러 돌아보니, 카레네가 뾰족한 시선을 던졌다. 내가 뭐랬냐는 그런 의미였다.
“자기 땅에선 개도 일단 한 수 먹고 들어가는 거지 뭐.”
시엔이 속삭이자 카레네가 픽 웃음을 터뜨렸다.
멀리 원정을 나온 다른 귀족들과는 달리, 흐레이그야 제 앞마당에 나오는 격이니 당연히 병력을 동원하기가 쉽다.
그래도 썩 좋은 느낌은 아닌데.
시엔이 뒷말을 삼켰다.
흐레이그는 아무래도 경계할 수밖에.
광산 분쟁에서 헤인트의 소재는 모르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그러나 공공연히 심증으로 흐레이그가 도왔다 알고 있었다.
다만 다른 이들이 모르고 시엔이 아는 것이란, 성물 또는 성유해라 불리는 흑마법사의 뼈가 거기에 얽혀있다는 사실이었다.
또한, 그 뼈가 역병 소동에서도 나타났으니 누군가 티란디스를 노렸다. 그렇다면 가장 유력한 범인이야 두말할 것도 없었다.
‘두고 보면 알 일이지.’
역병 때와는 달리 흑마법을 이용한 술수를 부리기는 어려울 것이었다. 이미 수해에서의 음모가 실패하여 교단이 적으로 돌아섰으니까.
그러니 얕은 수작을 부리다 관련이 있다 증거가 나오면, 교단의 군세가 성전을 벌이지 않겠는가.
그렇게 되면 손 안 대고 코 푸는 셈이라, 오히려 반갑게 맞이하여 대처하면 될 일이고.
하지만 시엔은 언제든 능력을 쓸 수 있었다.
당장 이번 전쟁에서 흑마법을 드러내더라도, 왼손에 찍힌 성흔이 신의 이름으로 보증하니 문제가 될 이유가 없다.
그저 내가 적을 알고, 적이 나를 모르는 것이 전략의 기본이라 드러내지 않을 뿐.
그리고 무엇보다 흑마법이 아니라고 해도.
시엔에게는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
꽥?
시엔의 묘한 시선에, 오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저 울음소리만 냈다.
< 14. 가을, 수확의 계절에 서다. > 끝
ⓒ Lab.No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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