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 어린 왕자 또다시 [2] >
티란디스와 다사린 영지의 경계, 러스티 힐.
시엔이 러스티 힐의 관문 앞에 섰다.
그 뒤로 세 개의 기사단이 예식용 의장을 갖추고 정렬하고, 두 개 대대가 가문의 깃발 들어 높이 세웠다.
이내 저 멀리 고개를 넘어 행렬이 나타났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긴 행렬, 왕가의 깃발과 다사린 가문의 깃발이 눈에 들어왔다. 왕가가 지나니 그 땅을 위임받은 가문에서 호위를 나온 것이었다.
행렬이 러스티 힐을 오르기 시작하고, 선두가 닿아 좌우로 갈라졌다. 다사린 가의 호위병력이 횡대로 서며 티란디스의 군대를 마주본다.
뒤이어 왕실의 깃발이 도착하고, 왕가 기병대가 좌우로 늘어서 방진을 짠다. 그 엄중한 경계 속, 백금으로 장식된 마차가 천천히 다가와 이윽고 멈춰섰다.
문이 열리자 검위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평소와 같이 소탈한 늙은이의 모습이 아니었다. 은빛 갑옷을 차려입고, 붉은 망토를 둘러 위엄 가득한 대장군의 위용이다.
시엔과 눈빛으로 인사를 나누고 나자, 뒤이어 어린 왕자가 마차에서 내렸다. 땅에 발을 딛자마자 주변을 살피고는, 시엔을 발견하자 급히 뛰어 달려오는 것이다.
“오오. 시엔! 시엔이구나!”
“앗, 왕자님! 체통을!”
델피르의 뒤로 여인 하나가 난처한 표정으로 따라붙었다. 곱게 차려입은 드레스 자락을 쥐어 들고, 높은 굽은 신은 채 달리는 품새가 익숙한 듯 늠름하기 그지없었다.
델피르가 그대로 시엔에게 몸을 날렸다.
허리를 와락 껴안고 가슴팍에 볼을 비비는데, 카라렐이 어쩔 줄 몰라 허둥거렸다.
뒤편에서 엘딘이 눈을 찡긋하며 신호를 보내왔다.
‘꽤 부담스런 호의인데.’
델피르 왕자는 최우선 순위의 왕위 계승권자가 아닌가. 그런 이와 개인적으로 절친한 사이란 또 그 뜻이 각별했다.
시엔은 이미 검위공을 손님으로 맞이하며 왕실과 통하는 이가 아니었던가. 아예 왕자와 친하다 하면 가문에서의 위상뿐만 아니라 왕국 정치판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이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어린 왕자의 표정을 보니, 정치적인 제스쳐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 반가운 기색이 역력했다.
유난히 잘 따르는 동생 같은 기분이라, 시엔이 손을 들어 델피르의 뒷통수를 살살 쓰다듬었다.
검위공이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아. 이건 너무 나갔나? 시엔이 엉거주춤 손을 떼던 참이었다.
“델피르. 아무리 반가워도 그리하면 공자님께서 당황하신단다. 보는 눈이 많아.”
“윽.”
“이리 와.”
델피르가 쭈뼛 물러났다.
마차에 한 사람이 더 타고 있던 모양이었다.
흔치 않게 단발을 한 여인이었다. 눈매가 아주 사나워 인상이 날카롭기 그지없다. 왕비와 닮았으니 누구인지는 뻔한 일이었다.
“세필리아 프리 페벨룬이에요. 연회에서 뵈었었지요? 동생이 철이 없어 폐를 끼쳤답니다. 다른 뜻은 없을 터이니 그저 반가워 그러한 것이랍니다.”
“시엔 티란디스입니다.”
세필리아가 제 왼손을 척 내밀었다.
시엔이 의아해 바라보자, 그 매서운 눈매가 똑바로 마주쳐온다.
“무안을 주실 셈인가요?”
“그럴 수는 없겠군요.”
시엔이 무릎을 굽혀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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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피르와 세필리아는 1왕비를 꼭 빼닮았지만, 정작 둘이 붙여 놓으니 눈동자와 머리카락을 제외하면 닮은 구석이 없었다.
왕비가 워낙에 드센 인상이긴 했다.
델피르는 거기서 순해진 얼굴이고 세필리아는 반대로 더 사나워졌으니 남매의 인상이 완전히 달라 그런 모양이었다.
대개 인상은 제 성격을 따라가기 마련이라. 요즘 들어 시엔에게 예외가 생기긴 했지만. 어쨌든 드문 경우를 제외하면 그러했다.
델피르 왕자가 마차 구석에 쪼그라들어 눈치를 살살 살피고 있으니, 제 누이를 상당히 어려워하는 눈치였다.
공주를 보니, 그 인상만으로도 심약한 이는 주눅이 들 수밖에 없긴 할 테지만.
“공자님께선 현재 연인이 있으신가요?”
“그건 아닙니다만.”
“잘됐네요. 번거로울 필요도 없고.”
“그 말씀이라 하시면.”
세필리아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우리 결혼할래요?”
시엔이 멈칫 세필리아를 바라보았다.
“이 여자 제정신인가, 하는 눈빛이시네요?”
“아니라곤 못 하겠습니다만.”
“뭐. 내가 생각해도 그러니까 용서할게요. 애초에 공자님은 제 취향도 아니구요. 저는 유능한 남자는 딱 질색이라.”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칭찬 맞아요. 남의 광산을 그렇게 자연스레 가져가시고. 또 명예 대주교이셨던가요? 교단에게서 뜯어내긴 쉽지 않은데. 수완도 대단하시지.”
시엔이 인상을 찌푸렸다.
칭찬인지 비꼼인지 좀체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지금 공자님을 칭찬하고 있는 거예요. 어머님께서 상당히 기대하고 계시죠. 저는 살면서 어머님보다 정확한 눈을 가진 이를 못 봤답니다.”
“왕비님을 상당히 존경하시는군요.”
“그야 당연하죠. 타국으로 쫓겨나 늙은 왕의 신부로 팔리다시피 하신 분이 지금은 왕국의 한 축이시잖아요?”
시엔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왕족 앞에서 왕비에 대해서 그렇다 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런 대답이었다.
“그게 다 아버님께서 무능하신 덕분이죠.”
“공주님?”
“그렇잖아요? 아버님께서 워낙에 일을 못 하시니. 어머님께 기회가 간 것이 아니겠어요?”
“제가 답변해드릴 수 없는 내용입니다만.”
“여튼. 그러니까 난 유능한 남자는 딱 질색이에요. 안방에서 털실이나 만지작거리며 살긴 싫거든요. 무슨 뜻인지 알겠죠?”
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허면 왜 결혼하자 하셨습니까?”
“공자님께서 제게 반하기라도 하면 곤란하시니까요. 초면에 결혼하자 덤벼들면 그게 사내건 여인이건 학을 떼지 않겠어요?”
시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필리아의 의도가 그렇다면, 아주 제대로 먹혔다 할 수 있으리라. 애초에 배우자라 하면 평생을 정든 벗으로 사는 이가 아니던가.
상전을 모시고 사는 것이 아니다.
“대신 부탁이 하나 있는데. 들어주시겠어요?”
“일단 들어봐야겠습니다만.”
“친한 척을 좀 해주세요.”
“친한 척 말씀입니까?”
“남들이 보기에 연인처럼 보일 정도여야 하는데. 지금 연인이 없으시다면, 그리고 당장 혼인할 생각이 없으시다면 말이에요. 후작님께서 혹시 혼인을 권하시지는 않던가요?”
“왕비님께서 그리하시는 모양입니다.”
“저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아요. 다만. 공자님 말곤 딱히 부탁드릴 분이 없으니 좀 도와주시겠어요?”
“허면, 이유를 좀 들어봐도 되겠습니까?”
세필리아가 사연을 털어놓았다.
이웃 왕국 카드로우와의 혼담이 진행중이었다. 셋째인지 넷째인지, 어쨌든 왕은 못 되는 그런 래노탄 오 카드로우라는 왕자가 있다고.
문제는 그 왕자가 언제 봤는지 세필리아를 원한다는 모양이었다.
“그 왕자님도 유능합니까?”
“아니요. 참으로 선량하신 분이라 두루 사랑받는 분이신 모양이에요. 형제간의 우애도 좋다고 하던데요.”
“유능하다는 말의 반대가 언제부터 선량하다는 말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대개는 그렇지 않던가요?”
속이 꼬인 공주님이구만.
시엔이 혀를 차려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렷다. 아무리 그래도 공주님 앞에서는 아니지 않겠는가.
이러니 상전을 아내로 맞이하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
“그럼 문제 될 것이 없지 않습니까? 무능한 이가 좋다 하셨던 것 같습니다만.”
“그러니까 저는 별로 신경 안 쓴다 말씀드렸잖아요. 위피 카드로우가 되어 왕비를 노려보는 것도 꽤 재미있을 테니까.”
확실히 왕비를 닮았다.
“문제는 샤피, 그러니까 샤페리아 그 아이가 래노탄 왕자님을 연모한다 하니 그게 문제랍니다.”
샤페리아 프리 페벨룬. 1왕비 태생의 셋째 공주였다. 생각해 보니 작년에 열다섯이라 들었건만.
“샤페리아 공주님을 보내드릴 생각이시군요.”
“저야 아무래도 좋지만, 그 아이는 왕자가 아니면 싫다잖아요. 그러니 어쩌겠어요. 언니라 뭔가 해준 것도 없는데 이럴 때나 좀 비켜 줘야겠지요.”
“허나, 그것이 꼭 좋은 이야기는 아닐 것 같습니다만. 래노탄 왕자께서 원하는 이는 공주님이 아니십니까.”
세필리아가 미소를 띄웠다. 원래 인상이 그러하니 웃는 상 역시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그러니까 선량한 분이라 했잖아요. 아내 되는 이를 서운하게 하실 분은 아니니.”
“사람의 마음이란 것이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만.”
“입에 넣어줬으면, 삼키는 건 알아서 해야지요. 혼인까지 밀어줬으면, 알아서 제 남편 마음을 잡아야죠. 그것까지 제가 해줄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어요?”
왕국끼리의 혼사야 동맹국의 우정 다지기 같은 것이다. 그러니 계승권이 없는 이들끼리 짝을 지어 혈연을 맺었다.
첫째 공주인지 셋째 공주인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나, 상대방에서 한 명 콕 찍어 원한다 하면, 대개는 그렇게 해주는 것이 관례였으니.
그걸 피하고자 연인 행세를 해 달라는 것이었다.
딱히 안 들어줄 것도 없는데, 그렇다고 딱히 들어주고 싶은 것도 아니다.
사실 마음 가는 대로 하자면, 요 앙큼한 공주와 연인 놀이를 하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리고 시엔은 원래 마음대로 살았다.
“송구스런 말씀입니다만.”
시엔이 거절의 말을 꺼내는 순간이었다.
세필리아가 조그마한 상자를 꺼내 내밀었다.
“공자께서 보석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다 들었어요. 영리한 이의 취미지요. 저 역시 그러하답니다.”
귀한 보석은 한 알로 수십의 금괴를 대신했다. 여유로울 때 모아두면 혹여 곤궁한 때에 요긴하게 쓰이니 영리한 이는 항상 미리 챙겨 숨겨놓으리라.
물론 시엔이야 사령석의 재료를 위해 수집하는 것 뿐이었지만.
“공주님과 같은 의도로 수집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호오.”
달빛을 한 원형의 보석이었다.
테두리는 희게 빛나며 두꺼운 곳이 요요한 은빛으로 빛나니 마치 보름달이 손안에 든 것과 같았다. 얼핏 보면 모르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점점 투명해져 그 속이 비쳤다.
그러면 그제야 슬그머니 푸른 광채가 비쳐 나오기 시작한다. 하염없이 들여다보아 신비롭기 그지없는 귀물이었다.
월장석.
중에서도 가장 귀한 것이 틀림없으리라.
“혹여 이명이 있습니까?”
“만월이라 해요. 꽤 유명한 물건인데요.”
“만월. 이름이 아깝지 않은 녀석이군요.”
이명이 붙을 정도라면 그 귀함은 말로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재물 따위. 언제고 오고 가며 있다가 없는 것이 아니던가.
중요한 것은 어떠한 일에 마음이 동하여 진심으로 하고자 하는지가 중요한 것이니. 거짓 연인 행세라니. 천성에 맞는 일은 아니다.
시엔이 대답했다.
“세피라 부르면 되겠습니까?”
“좋아요. 시엔.”
거절하기엔 너무 귀한 물건이었다.
악령이 너무 성장하여 곤란하던 참이었다.
해피 드리머야 아직 제 우리인 페리도트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지만, 버닝 신은 부쩍 심통이 나 있는 상황.
소드마스터의 강대한 영혼을 살라먹어 부쩍 그 격을 키웠다. 그리하여 새 둥지가 필요하니 마침 잘된 일이었다.
굳이 보석이 탐나서 그러는 것은 아니다.
제 동생을 위해 귀하기 짝이 없는 물건을 선뜻 내놓으니, 그 속이 얼마나 기특한 일인가.
한 여인의 행복을 위한 일이니 이 또한 보람찬 일이리라.
시엔이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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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각사각. 펜 움직이는 소리가 경쾌하다.
시엔이 진지한 표정으로 계속해서 글을 작성해나갔다. 이미 체험하여 얻은 것이라 글귀가 거침없이 뻗어나간다.
······연인이란 대저 무엇인가.
서로 사랑하는 이가 또한 서로 함께하니 그 자체로 즐겁고 기꺼운 일이리라.
대개는 이러한 것이 연애에 대한 시각이다.
그러나 이런 시각은 대개 대중적인 망상이 한데 모여 나온 결과라 할 것이다.
그러니 보편적인 방법을 시도함과 동시에, 그 결과와 실제적인 감상을 통해 현실과 이상 사이의 간격을 알아보고자 한다······
「연애 기록 일지. 그 하나.」
베른닐의 증언이다.
연인 간 가장 보편적인 연애 활동이 무엇인가. 바로 신체적 접촉을 유지한 채 산책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장소가 좋은가에 대해서 역시 조언을 구했다.
한적한 호반. 잘 구성된 정원. 축제 거리. 야시장. 해질녘의 들판. 승마 연습장. 유랑 예술가들의 임시 공연장.
야심한 시간의 호밀밭, 베른닐은 이 대목에서 야심한 시간을 특히 강조했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끝내 증언하지 않았다.
문제는 이러한 장소들 사이에서 어떠한 법칙을 찾아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인구가 밀집된 곳과 밀집되지 않은 곳이 함께이며, 자연과 도시, 익숙한 곳과 익숙하지 않은 곳이 한 범례에 묶여있지 않은가.
베른닐에게 이에 대해 문의해 보았다.
“그렇게 물어보시니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저 함께하는 것이 좋았지요. 연애까지는 좋았습니다. 도련님, 명심하십쇼. 원래 연애까지가 제일 좋은 겁니다.”
이러한 증언을 바탕으로 산책 장소를 선정하였으니, 세필리아 공주와 함께 도로 공사의 진척도를 함께 살펴보기로 했다.
< 13. 어린 왕자 또다시 [2] > 끝
ⓒ Lab.No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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