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 피 흘리는 계절, 봄이 오다 [5] >
살베지 백작은 요 즈음 눈만 붙이면 악몽이었다.
어떤 내용이었던가는 꿈이 꿈인 이유로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 지독한 고통만은 선명히 남아 사흘간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러하니 꼴이 어떠하랴.
지끈거리는 머리에 늘 머리를 감싸 쥐고, 졸린 정신에 눈빛은 탁하고 흐리다. 눈 밑으로 검은 기미가 점점 짙어지니 병색이 완연했다.
천막 안의 몰골들 역시 매한가지였다.
네 귀족과 한 명의 마법사가 그랬다.
사실 천막 바깥도 그렇다.
자작 습격을 벌인 날로부터 사흘.
악몽이 진지에 자리잡았다.
진중 의사의 말로는 정신적으로 큰 상처를 입었기 때문인 것 같다고.
살베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 그대로 요즘 하루하루가 가시방석이니.
티란디스는 대화 혹은 충돌, 그 어느 쪽의 접촉도 거부한 채 땅과 거기 속한 광산을 낼름 삼킬 속셈이다.
그리고 명분 작성을 위한 자작극이 되려 제 발목을 잡게 되었다.
”젠장,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이오!“
”고정하세요, 백작님.“
”내가 지금 고정하게 생겼소! 티란디스가 한 짓을 못 보았소? 저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발뺌을 할 작정이란 말이오!“
살베지가 노발대발 날뛰었다.
헤인트가 입술을 깨물었다. 빌어먹을 엘프. 엘프가 끼어드리라 상상이나 했던가.
”이제 어쩔 것이오! 어쩔 것이냐 말이오!“
”잠시 생각을 할 시간이 필요하답니다.“
”지금 태연하게 시간이나 달라고 할 처지인가!“
헤인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당장이라도 태워버릴 수 있는 하찮은 놈이 감히 누구에게 소리를 질러?
화가 나면 얼굴에 열기가 오르니 그 낯이 붉고 후끈하게 달아오른다. 심화의 구도자는 남다른 화염을 품고 있으니 그저 얼굴을 붉히는 데에 그치지 않았다.
불편한 심기에 아케인 에너지가 자연스레 타고 오른다. 눈동자에서 불길이 치솟고, 붉은 머리카락은 아예 화염이 되어 넘실거린다.
살베지가 움찔 한발 물러섰다.
허나 그뿐이었다.
”이게 무슨 짓이오! 그게 공작님의 뜻이오? 이리 겁박을 하다니!“
살베지의 말투가 곱지 않았다.
살베지가 마법사를 두려워했던 이유는, 손에서 부리는 잔혹한 화염 때문만은 아니다. 그저 헤인트의 뒤에 흐레이그 공작가가 있었으니.
허나 살베지의 얼굴에 노기가 가득하다.
‘빌어먹을. 이제와서 내 탓을 할 셈이냐!’
살베지 영지는 티란디스 직할령과 직접 접하고 있으니 그 전략적 가치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러니 티란디스와 척을 진 흐레이그가 제 편으로 포섭해야 할 작자였다.
원래 한 파벌에 속할 때에야 그 종주를 두려워하는 법이 아니던가. 살베지는 이 참사를 흐레이그의 탓으로 돌리고 파벌에서 나가 버릴 수도 있었다.
정치란 무정한 것이다.
살베지가 결국 패배를 선언하고 티란디스로 갈아탄다면? 그러지 않으리란 보장이 있던가.
헤인트가 식은땀을 흘렸다.
흐레이그를 도와 왕국의 정세를 휘어잡아야 한다. 그게 그분께서 내리신 명이 아니던가.
”아이, 백작님도 참. 이른 봄이 쌀쌀하니 소녀가 잠시 자리를 데웠을 뿐이랍니다.“
”크흠.“
”어떻게 해야. 음. 그러니까. 그것이 말이지요. 아이참, 날씨가 좀 덥네요. 호호······“
헤인트가 아무 말이나 주워삼키며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절박한 이는 맹목적이다.
맹목이란 장님과 같아 보이는 것이 없다는 뜻이니, 결국 제 면피를 위한 수습 말고는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다.
”일단 개전을, 개전을 하는 게 중요하겠지요. 지금 병사들, 장병들의 사기도 있고, 어떻게든 개전을 해야해요. 맞아요. 개전이요.“
살베지 백작이 머리를 굴렸다.
실익과 손해가 머릿속을 맴돈다.
손해 하나.
방벽이 사라지지 않는 한에야, 탑클라우드 구릉지는 이미 내준 손해라고 쳐야 할 터.
실익 하나.
티란디스는 이미 방벽을 세웠다. 그 말인즉슨 미스릴은 눈감아 줄 터이니 여기만 먹고 끝내겠다는 뜻.
손해 둘.
그저 물러났다면 소동으로 끝날 일이나, 이제 간밤의 습격에 대해 여러 말들이 나돌 것이다.
실익 둘.
다행히 자작극으로 입은 손해의 원인을 공작가에 넘김으로써 어느 정도의 대가를 받아낼 수 있을 것이다.
손해 셋.
연합 훈련에 참가해 준 안통, 콩차드, 렌트텍 가문에게 피해에 따른 배상을 해야 한다.
실익 셋.
그래도 탑클라우드 산맥의 네 가문이 결속을 확인하는 자리가 되었다. 가문 하나의 영향력은 미미하지만 넷이 뭉치니 그 강대한 공작가가 손을 내밀 정도임을 확인하지 않았던가. 앞으로도 좋은 동맹을 유지하게 될 것이다.
실익 셋에 손해가 셋이지만, 항목별로 붙이면 손해가 더 큰 판이다
그래도 이쯤에서 수습될 수 있다는 것이 어디인가.
자존심은 순간이나 가문은 계속된다. 아버지에게서 자신에게 왔듯이 그 역시 아들에게로 물려주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이쯤에서 물러나야 하겠소.“
”백작님!“
”훈련에 기꺼이 참여해 주신 여러 가문의 귀인분들께 헤아릴 수 없는 감사를 느끼고 있는 바이오. 간밤의 무도한 사건엔 내 추후 직접 방문하여 사과를 드리리다.“
”백작님께서 그러하시다면야.“
”용단을 내리셨군요.“
“그래도 의미가 있는 훈련이 아니었습니까? 앞으로는 매년 함께하는 자리가 되면 좋겠군요.”
안통 백작가, 콩차드 자작가, 렌트텍 자작가의 세 대표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입은 손해에 대해선 배상하겠다는데야 무슨 불만이 있겠는가. 게다가 규모 있는 중립 파벌로 가치가 있음을 깨닫게 된 연합이었으니 소득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 백작님! 잠시만요! 소녀가, 소녀가 어떻게든 해 보겠습니다! 방벽! 방벽을 치워 드리겠어요!”
헤인트가 급히 끼어들었다.
이대로 정리되면 헤인트의 입장만 난처해졌다. 이 모든 실패의 원인이 제게 돌아가는 판이었으니.
“레이디께서 말이오?”
“예. 백작님. 제가 방벽을 치우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가장 좋은 시나리오는 한 판 붙는 것이다. 이런 소규모 접전에서 마법사란 겨눌 데 없는 전략 병기였으니.
자작극을 통해 전쟁의 책임을 티란디스에게 씌울 수 있으니, 모든 손해를 거두고 실익을 거머쥘 방법이기도 했다.
----
헤인트의 천막 안. 아케인 에너지로 이루어진 얇은 막이 그녀의 천막을 감쌌다.
워낙 미미한 마력이라 방어력은 전무하나, 소리를 차단하는 기능이 있어 비밀 대화를 나눌 때에나 사용하는 수법이다.
그러나 헤인트는 천막 안에 저 혼자 있었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로, 그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본다.
그러자 어디선가 목소리가 속삭였다.
쇠를 긁는 듯 심장을 찌르는 목소리였다.
-말하라.
“······주인님. 그걸 사용해도 되겠습니까?”
-어째서 그러느냐.
“엘프의 수호목을 태워야 합니다. 엘프의 숲지기가 직접 나섰으니 소녀의 미천한 실력으로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어째서 그러느냐.
“살베지가 중립 파벌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쯧.
목소리가 혀를 찼다.
그걸로 끝이었다. 연결이 강제로 끊기고 말자, 헤인트가 급히 부르짖었다.
“주인님? 주, 주인님! 주인님! 소녀를, 소녀를 버리시지 마시어요! 주인님!”
헤인트가 가슴을 쥐어뜯으며 제 주인을 찾았다. 절박하기 이를 데 없는 표정.
그런 헤인트의 귓가에 툭, 하고 나지막한 소리가 울렸다. 급히 바닥을 내려다 본 헤인트의 표정이 활짝 피었다.
“주인님! 감사합니다! 소녀의 몸과 마음 모두 주인님의 것입니다!”
헤인트가 돌연 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집어들었다. 타다 만 무언가의 잔해였다.
길이는 팔뚝만하며, 모양새는 길쭉하니 막대기와 닮았다. 그저 타다 남은 나무막대처럼 보이는 물건.
허나 마법사에겐 다른 것이 비친다.
세상 이를 데 없이 강력한 마력이 그 안에 담겼다. 흉포하고 음험하며 어둡기 그지없으나, 또한 매혹적이기 그지없는 순수한 마력이다.
“이것만 있으면 다 태워버릴 수 있어······.”
헤인트의 눈동자에 광기가 서렸다.
----
아침부터 전령이 시끄럽게 굴고 있었다.
엘프의 거목을 빈틈없이 심어 공간을 차단하고 나니, 이젠 아예 저 너머에서 목청을 높힌다. 보아하니 병사들 중 가장 목소리가 큰 이만 뽑아 교대로 내보내는 모양이다.
······잔혹·········창칼·········항복·········다···
허나 거목을 세웠으니 일반적인 방벽하곤 다르다. 하늘을 찌르는 거대한 높이와는 별개로, 구름 닿을 법한 자리엔 가지를 뻗어 푸르른 잎이 무성하다.
방음이 아주 잘 되는 것이다.
“도대체 뭐라는 거야?”
“나도 몰라. 종일 저러네.”
“알 바인가? 일이나 계속 하세.”
방벽 근처에서 작업하던 이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그도 잠깐일뿐. 이내 관심을 잃었다. 잘 들리지도 않는 소리로 뭐라뭐라 외치는데 굳이 들어야 할 이유도 없다. 나무나 마저 심고 일당이나 받으면 그만이 아닌가.
허나 경지가 높은 이에겐 다르다.
방벽에 가로막혀 웅얼거리는 소리라도 집중해 들을 수 있었다.
우리는 티란디스의 잔혹무도한 습격에 해명을 요구한다. 또한 창칼을 거두고 항복하여 인도적 정의를 수행하라. 이 선고는 해가 지기 전까지 유효하며, 그렇지 않을 시에는 무자비한 보복이 따를 것이다.
카레네가 시엔을 붙들었다.
“시엔.”
“걱정 안 해도 돼. 저건 절대 못 뚫어.”
“세상에 절대란 없는 법이야. 인부들을 물러. 기사단을 정렬해야겠어.”
“에이. 못 뚫는다니까. 걱정은.”
“걱정으로 혹여 모를 피해를 줄일 수 있다면, 나는 매일이라도 걱정하며 살겠어.”
“뭐. 그것도 맞는 소리네.”
시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림 사업이 반나절 지연되는 것은 손해라고 할 것도 없었다. 그러니 만일에 대비해 준비하자고 하면 최소한 손해는 없다. 오히려 혹여 일이 닥치면 그 준비가 빛을 발한다.
그리하여 사업이 중단되었다.
기사단이 정렬하고, 병사와 용병들이 장비를 갖춰 열을 짜 돌격에 대비한다.
한 떼의 군사가 방벽을 바라보며 대기하고 있으니 대체 이게 무슨 풍경인가 싶지만.
노을이 지자, 시엔은 한별의 도움을 받아 거목 위에 자리를 잡았다.
한별의 손짓에 따라 가지들이 스스로 벌어져 방벽 너머의 시야를 틔운다.
먼저 보이는 것은 구릉을 따라 돌격 대형을 갖춘 살베지의 군세였다. 시엔이 그 모습을 살피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투석기라도 조달했나 싶었더니. 투석기라고 딱히 무슨 수가 있겠냐만은.”
거목으로 된 방벽이니 그 탄력으로 충격에 훨씬 우수하다. 거기에 엘프의 숲지기가 직접 자리하고 있으니 그렇다 해도 모자랄 터.
이내 살베지의 진영에서 말 탄 이가 뛰쳐나온다. 구릉 중간 쯤, 먼 거리를 두고 말에서 내려 자리에 섰다.
타는 듯한 붉은 머리. 한별이 반응을 보였다.
“아. 저이가 바로 심화의 구도자인가 봐요. 꽤 젊네요. 실력이 상당하던데.”
“머리카락을 보니 딱 방화광이네. 설마 방벽을 태우려고?”
“고작 저 실력으로요?”
시엔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실력이 상당하다 안 했나?”
“하지만 절 넘어서기엔 아직 멀었잖아요?”
“그래도 상성이란 게 있는 거 아냐?”
엘프는 방화광들과는 사이가 나쁘다.
숲을 키우는 이와 태우는 이가 사이가 좋은 것이 이상한 일일 테지만.
허나 태우기는 쉽고 키우기는 어려우니 같은 실력이라면 엘프가 명백히 불리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한별이 여유로게 미소지을 뿐이다.
“격의 차이가 있으니까요. 저만한 이가 열 명쯤 더 있으면 시도해 볼 만 하겠죠?”
“겨우 열 명이면 되는 거야?”
“제가 구경만 하고 있다면요.”
한별은 강대한 마법사이자 또한 전사이기도 했다. 엘프의 검술은 거리를 초월해 날아드는 것이니 마법사가 상대하기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다.
그런 이유로 나무 위에 구경꾼 둘이 자리를 잡았다. 어떤 볼거리가 펼쳐질까 그 기대가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리고 잠시 후, 둘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알트릿데의 푸른 화염!”
한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을 뻗었다.
발 디딘 굵직한 가지에서 한별의 세계수 마법 지팡이가 솟았다. 아직 덜 자라난 지팡이를 잡아채는 모양새가 다급하기 그지없었다.
원초 세계에는 영원히 타오르는 불구덩이가 있어 화염의 정수가 그 아래 잠들어 있다고 한다.
한 층이 이 세상 바다 가장 깊은 곳보다 더 깊은데, 그 충수가 무려 7층에 이르니 현상 세계보다 더 넓은 작열의 심연이라.
알트릿테의 푸른 화염은 6층에 도사리며, 같은 불조차 태워 재로 만든다고 했다.
불조차 태울진대 나무는?
아주 잘 탄다.
“나는 당신의 어머니이자 당신의 딸이며 당신의 언니요 또한 어린 누이입니다. 또한 당신의 모든 것이며 내 모든것이 당신이니, 내가 곧 당신이며 당신이 곧 나임을 우리가 하나로 알고 있습니다. 허니 땅에 뿌리를 내린 삶이 푸르른 당신이여, 또한 나의 힘을 여기에 모읍니다······”
한별이 주문을 외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그저 의념만으로 수목을 부리던 한별이 저리도 긴 주문을 외울 정도라면 대체 어느 정도의 이적을 부리려 하는 것일까.
온 사방에 꽃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가지 위에 앉으니 온 세상천지가 푸르고 붉고 흰 꽃으로 뒤덮여 그 향기가 흐드러진다.
시엔은 그 화원 속에서 화염의 마법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알트릿데의 푸른 화염은 방화광의 최종 목적지나 다름없는 신화다.
당대에 한 명이라도 다룰 수 있다면, 그와 같은 마법사와 동시대에 살고 있음에 감사하라 했던가.
허나 저 마법사는 제 힘으로 화염 마도의 극의를 다루는 것이 아니었다.
시엔의 시선이 마법사, 정확히는 그 손에 들린 검은 마법 지팡이로 향했다.
저게 바로 방화광이 몇 단계나 제 능력을 뛰어넘도록 만들어 준 물건이었다. 세계수의 영기가 담긴 나뭇잎이 그러하듯이.
시엔이 인상을 찌푸렸다.
저 물건이 대체 무엇인지 깨달았기 때문에.
저거 내 거 아닌가? 내 거 맞는데?
시엔이 손을 뻗었다. 반응이 온다.
시엔이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그 표정에서 불쾌함이 역력히 묻어나왔다.
아니, 남의 뼈를 가지고 지금 뭘 하는 거야?
----
헤인트의 정신 세계에 화염이 들이닥쳤다.
알트릿테의 푸른 화염. 불조차 태우는 심화 중의 심화. 정신 세계를 불태우는 열락에, 세상 어떤 쾌락도 비하지 못할 거대한 쾌감이 영혼을 강타한다.
아아. 불이여. 모두 태우리라. 아아.
헤인트가 해맑은 미소를 머금었다.
어린아이처럼 천진한 웃음을 만면에 띄우곤, 제가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거대한 힘을 끌어린다.
태우는 행위 자체가 심화의 구도자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쾌락이었다. 그네들이 방화광이라는 모멸스러운 별명으로 불리는 데에는 전부 그 이유가 있는 법이다.
“「<[(----------------)]>」”
헤인트의 주문은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었다. 현상 세계를 초월하여 인지할 수 없는, 그저 존재할 뿐인 언어다.
그리고 그 때.
“아앗······?”
성물에 깃든 강대한 마력, 아케인 에너지가 아닌 다른 허수 세계의 미지의 힘이다. 돌연 그 에너지가 불안정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
헤인트의 정신 세계에 활짝 열린 차원의 문이 닫혔다. 그 온도조차 알 수 없이 뜨거운 푸른 화염만 남은 채다.
알트릿데의 푸른 화염이 통제를 잃고 날뛰었다. 현상 세계에 구현되지 못한 울분을 풀듯, 닿는 모든 개념을 불태우고 나서도 그 기세가 줄지 않았다. 심지어 더는 탈 것이 없자 제 스스로를 불태우며 잿더미로 화한다.
털썩.
헤인트가 무릎을 꿇었다.
눈에는 초점이 없고, 입가엔 침이 주룩 흘렀다.
“헤에······.”
이제 그녀는 더는 헤인트가 아니었다. 정신 세계가 불타 사라져 육체만 남았다. 기억도 자아도 없으니 더이상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한 명의 백치가 남았다.
----
“음?”
한별이 주문을 멈췄다.
갑자기 마법사가 쓰러지며 영창이 취소되고 말았다. 기껏 세계수의 힘을 완전히 끌어올리고 난 이후였다.
“시엔이 뭔가 했나요?”
“딱 보니 제 능력 밖의 힘을 다루려다 잡아먹혔네. 특히 방화광들이 많이 저러더라.”
“인간의 탐욕이란······ 어쨌든 다행이네요.”
“그럼. 뼈는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법이니까.”
“예?”
“그런 게 있어.”
방화광이 떨군 완드, 천 년 전 죽어 사라진 흑마법사의 불탄 뼛조각이 가루로 분해되어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내가 여기 살았으니 어찌 과거의 잔해가 오롯이 존재하랴. 세상의 법칙이 뒤틀려 충돌하니 보다 부정한 쪽이 사라지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한별이 문득 시엔의 눈을 바라보았다.
흑마법사의 마력이 갑자기 불어난 것을 느낀 탓이다.
“시엔? 마력이······”
“이제 견습생 딱지는 뗄 수 있겠지?”
한별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시엔은 그저 싱긋 웃으며 그렇게 대답할 뿐이었다.
< 9. 피 흘리는 계절, 봄이 오다 [5] > 끝
ⓒ Lab.No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