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 도적의 피와 살로 비어진 곳간을 채우리라 [1] >
드워프들의 광산이 발칵 뒤집혔다. 갑자기, 그리고 순식간에 막혀버린 갱도 때문이었다.
누군가의 실수나 우연에 의한 실수도 아니다. 대지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나타난 혐오스러운 살덩어리의 벽이 갱도를 콱 틀어막았다고.
땅잡이 티이 앙샬은 수염을 신경질적으로 쓰다듬었다. 거의 뜯어내는 듯한 손길이었다. 실제로 구불부굴한 수염털 몇 가닥을 손아귀에 쥐고 나서야 한숨을 쉬며 어색하게 팔을 내렸다.
“뤼통텔, 이게 뭔 줄 알겠습니까?”
“희한하군. 자네는 뭔지 알겠나?”
“모르겠습니다.”
“허허. 땅잡이가 모른다면 누가 알겠나.”
빌어먹을 영감쟁이 같으니. 앙샬이 눈살을 찌푸렸다. 땅잡이가 아니라 누군들 이런 일을 겪었으랴. 광산의 최연장자이지만 능력이 없어 땅잡이를 잡지 못했으니 매사 이런 식으로 은근슬쩍 비꼬기나 해 댄다.
앙샬의 손길이 기어코 다시 수염을 잡아뜯기 시작했다.
서리바람 숲 지하에서 미스릴 광맥이 발견되고 나선, 탑클라우드 산맥의 광맥은 아무래도 좋은 것이었다.
질 좋은 철, 그리고 대지 한 겹 아래 석탄이 나니 군데군데 천연 강철까지 나는 호광이지만 그래도 미스릴에 비할 데가 있을까.
그래서 미스릴 광맥에 총동원되어 있던 상황. 42명의 인부가 갱도 안에 갇히고 말았다.
“뤼롱텔, 혹시 웜을 본 적이 있습니까?”
“웜은 아닐세. 그 빌어먹을 마물은 동면하지 않으면 절대로 멈추는 법이 없거든. 그것도 모르나?”
“동면 중에 잠깐 몸을 뒤척이거나 한 건 아닙니까?”
“상상력이 뛰어나구만. 하지만 웜의 피부는 저렇지 않아. 날카로운 미늘이 빽빽하게 돋았지. 어설픈 망치잽이보다 훨씬 나아. 나무 정도는 스치기만 해도 깔끔히 잘리더군. 그런데 저건 그냥 썩어가는 살덩어리 같구먼.”
정말로 싫은 늙은이지만, 이런 때는 그래도 그 연륜 속에 깃든 경험에 대해 물어볼 수밖에 없다.
“뭔가 짚히는 거라도 없으십니까?”
“글쎄. 지벌이라도 내렸나 보지.”
땅 위의 종족들은 하늘을 경애하며 또 두려워하기에 기적엔 천은, 응보엔 천벌이라 했다.
땅 아래 종족인 드워프들은 땅을 경애했다.
“뤼롱텔!”
“내가 뭐 못할 소리 했나?”
“나라도 좋아서 이랬습니까? 400년 이내 최대의 미스릴 광맥입니다! 기울어가는 총단에 군불이나마 지때려면 어쩔 수 없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미스릴 괴를 들고 춤을 췄나?”
“이 개 같은!”
앙샬이 뤼롱텔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자 인부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둘을 붙잡고 떼어냈다.
“장인의 재료엔 티끌 한 점 없어야 하는 법이라. 아버지께선 그렇게 말하셨지. 아니면 지벌이 내릴 거라고. 모든 것은 제게 돌아오니.”
“빌어먹을 늙은이 같으니!”
앙샬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허나 감정은 감정. 일은 일. 지금은 저 안에 갇힌 42명의 인부가 최우선이었다.
저 벽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영 꺼름직한 것이 건드려선 안 된다는 느낌이다.
땅 아래에선 작은 실수 하나가 전체의 삶을 망친다. 저만한 것이 갑자기 땅을 뚫고 들어왔으니, 그 반대도 가능하리라. 그러다 자칫하면 갱도가 우르르 무너져 내릴 수 있었다. 대수층에서 물이 솟을 수도 있고.
앙샬이 작업지시를 내렸다.
“함부로 건드릴 수는 없으니 7유빗으로 우회로를 파. 탈출 통로니 규격은 3사볼으로.”
드워프 단위로 유빗은 반지름을 가진 반원의 크기, 사볼은 원통형 통로의 반지름이었다.
작업 도구는 포기하고 기어나올 수 있는 우회 탈출 통로를 파자는 것.
그 때였다.
“땅잡이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만.”
“지금 손님 맞을 때인가? 돌아가라 그래.”
“그게, 티란디스의 공자입니다.”
“티란디스인지 뭔지, 그게 지금 중요하게 생겼어?”
“돌려보내려고 했습니다만, 막무가내로 광산 안을 둘러보겠다고 버티는 중입니다. 땅잡이님이 이미 허락했다구요. 그런데 왜 뭘 숨기기에 이리 앞길을 막느냐 난리입니다.”
“제길.”
앙샬이 이를 갈았다.
살베지 백작이 누누 강조하지 않았던가.
티란디스에 들켜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빌어먹을. 최대한 빨리, 그리고 안전하고 튼튼하게 탈출로를 파. 나는 잠깐 올라갔다 올 테니.”
“빠르고 안전하고 튼튼하게라. 그게 가능하면 세상에 사고는 하나도 없겠군그래.”
뤼롱텔이 킬킬 웃으며 말했다.
앙샬이 그런 뤼롱텔을 날카롭게 쏘아보다, 이내 홱 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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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리를 피우고 있다더니, 티란디스의 공자는 오히려 태연한 안색이었다. 부랴부랴 땅잡이의 방으로 돌아온 앙샬을 반갑게 웃으며 맞이한다.
“여. 어서 와요. 오래 기다렸다구요.”
“그 죄송하게 되었소만, 지금 광산에 작은 사고가 있어서. 괜찮으시면 다음에 방문해 주시면 안 되겠는지······”
“뭔가 급한 일인 모양이네요. 땀 좀 봐. 무슨 일인지 일단 한숨 돌리시고.”
제길. 저 안에 지금 42명이 갇혔다고.
앙샬이 속마음을 꾹 감췄다.
시엔이 웃으며 말했다.
“그리 다급하게 뭔가 하려 하면 결국 일을 망쳐요. 그럴 땐 잠깐 주의를 돌리는 것도 좋죠. 예를 들면 잡담이라던가.”
“허나 제가 지금 할 일이 급하니······”
“아니아니. 그러지 말고 잠깐 앉아서 들어보라니까요. 마음이 급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어. 눈에 보이는 게 없으면 큰 일이 터지죠.”
새파랗게 어린 녀석이 말은 잘 한다. 어디서 주워들은 것은 있는 모양. 앙샬이 자리에 앉았다.
그 모습을 보던 시엔이 다시 입을 열었다,
“광산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을까요?”
“내부의 일이오.”
“그런가? 흠. 나는 상관없지만. 있잖아. 내가 어쩌다 우연히 아주아주 귀한 씨앗을 하나 얻었는데 말이죠.”
“갑자기 무슨 말이오?”
“들어 봐요.”
“그럴 시간이 없소만.”
“잠깐이면 된다니까.”
“후우.”
앙샬이 한숨을 내쉬었다. 시엔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아주 귀한 씨앗이라, 이게 또 아주아주 싹을 틔우기가 어렵거든. 그런데 나무 하면 또 엘프들 아니겠어요? 그래서 땅에 심어서 엘프한테 부탁을 했지. 그랬더니 어떻게 된 줄 알아요?”
“······어떻게 되었소?”
“이야! 순식간에 자라더라고요. 진짜 순식간에 다 큰 나무가 되었다구요. 믿겨져요? 이 나무가, 뿌리가 진짜진짜 깊은데 말이죠.”
“아. 뭐. 그러시오? 할 이야기 더 남아있습니까?”
그러자 시엔이 일어나 땅잡이의 방 한 편에 달린 지도에 다가갔다. 그리고 이내 한 지점을 딱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 여기. 여기 심었거든요.”
“이런 젠장!”
“어우 깜짝이야. 왜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그래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오.”
앙샬이 손을 내저었다.
땅잡이가 지도 볼 줄을 모르겠는가. 시엔이 싶은 지점이 바로 정확히 갱도 위를 지나는 곳이다.
‘엘프가 순식간에 나무를 키웠다고? 나무뿌리. 그게 괴상한 살덩어리가 나무뿌리란 말인가. 하지만 나무뿌리가 아무리 깊어도 암벽층까지 뚫고 내려온다고? 그것도 한순간에?’
앙샬이 재우쳐 물었다.
“혹시 그 나무, 뿌리가 얼마나 깊다고 하는지 아오?”
“엘프들 말로는 아주아주 깊다던데요. 세계수를 제외하면 어떤 나무도 닿지 않는 곳까지 뿌리를 뻗었다고 하네요.”
혹시가 역시로 바뀐다.
앙샬의 눈에 긴장감이 서렸다.
‘젠장, 가만 보자. 꼭 짚어서 거기에 심었다고? 갱도를 막을 만큼 뿌리가 자라는 괴상한 나무를? 알고 그랬나? 아니면 모르고 그랬나?’
“음? 왜 그렇게 봐요?”
“아. 아무것도 아니오. 원래 내 눈빛이 좀 이렇다오.”
“그래요?”
시엔은 그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눈만 깜박거렸다. 앙샬이 말을 골랐다.
“공자님, 여기 오신 이유가······?”
“아. 맞다. 그거 광산 좀 살펴보려구요. 내 그냥 돌아가긴 뭐하고, 엘프들은 이러다간 요정목이고 나발이고 없다고 길길이 날뛰는데, 그래도 티란디스가 뭔가 해결하려는 모양이라도 좀 갖춰야지. 안 그래요?”
“그, 그렇소.”
“땅 속은 덥다고 들었는데. 많이 더워요?”
“그렇소. 아주 덥지. 인간 기준에선 그렇소.”
“흠. 그럼 일 층만 살펴보고 갈까.”
시엔이 진지하게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젠장.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이군. 아무 생각 없이 심은 나무가 하필 거기란 말인가.’
앙샬이 지도를 바라보았다.
하기사 그 뿌리가 어디 나무 비슷하기라도 한가. 그런 수상한 나무를 엘프들이 저네 도시 가까이에 심게 하지는 않았을 테니, 적당한 외곽에 심게 하지 않았겠는가.
재수가 없는 일이었지만 굳이 그 자리여도 이상하진 않겠다 싶었다.
“그, 공자님. 잠시만 자리를 비워도 되겠습니까?”
“응? 어. 그렇게 해요. 아주 잠깐만이에요.”
앙샬이 방 밖으로 나와 문을 닫았다.
문이 제대로 닫혔는지 한 번 더 확인한 앙샬이 드워프 인부 하나를 붙잡고 지시했다.
“젠장. 특별 갱도에 그거 나무뿌리였어. 우회로는 됐고, 그냥 그대로 뚫어버리자고 전해.”
“땅잡이님, 그게 나무뿌리라구요?”
“엘프들이 끼고사는 그 괴물 같은 세계수도 나무인데 그런 게 없을까. 그냥 파 내자고. 한시가 급하니 빨리 전해주게.”
“알겠습니다.”
드워프가 갱도 너머로 급히 사라져갔다.
고작 나무뿌리 하나 피하려고 우회로를 파는 건 멍청하기 짝이 없는 짓이다.
갱도란 가장 안전한 곳으로 내는 것이기에 그 외의 지역은 위험하기 짝이 없으니까. 게다가 이미 난 갱도 옆에 또 갱도를 파면 위험은 두 배, 아니 세 배 이상으로 늘어난다.
게다가 우회로를 파는 데 걸리는 시간은 또 어떤가. 그런 위험 때문에 족히 사흘은 걸릴 터.
허나 나무뿌리라면 바로 파내버리면 된다. 뿌리란 땅과 얽히는 것이라 중간을 파낸다고 해도 위아래로 크게 영향을 주진 않으니까.
앙샬이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무언가 내려놓은 표정이었다.
시엔이 미소를 지었다.
“이제 좀 여유가 있어 보이네요. 어때요. 잡담을 좀 하니 머리가 좀 돌아가죠?”
“아. 예. 뭐, 그렇소.”
“아. 맞다. 그 귀한 나무 말이에요. 내가 그 이야기 왜 했나 깜빡했었네.”
“뭔데 그러시오?”
“심은 위치가 조금 애매하잖아요. 분명 티란디스의 땅이기는 한데, 살베지 영지에 좀 가까운 편이라. 나무란 게 뿌리가 멋대로 뻗으니까 혹시나 광산 쪽으로 뻗을 수 있겠다 싶네요.”
“뿌리 정도야 뭐 문제가 있겠소?”
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그냥 뿌리가 아니거든요. 혹시 썩은 살뭉텅이 같은 게 땅에서 뻗어 나올 수도 있어요. 상상이 잘 안 되겠지만, 여튼 그렇게 생겼어요.”
“아아. 뭐. 그럴 수도 있지 않겠소?”
앙샬이 아주 느긋해졌다. 이젠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회색의 살뭉텅이 같은 거라. 이미 그 기괴한 모양새를 본 이후였다.
시엔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혹시나 그런 게 광산까지 뻗어오면, 함부로 건드리지 말고 엘프들에게 연락하도록 하세요. 자르지 말고, 엘프들이 통제해 제 스스로 뿌리를 거두도록요. 귀한 나무기도 하고.”
“뭐. 그렇게 하겠소이다.”
앙샬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이어진 시엔의 말에 낯빛이 사색이 되고 만다.
“무엇보다 그거 아주 사납거든요. 제 뿌리에 손을 대면, 바로 반격을 해 온다고 하던데요.”
“바, 반격? 독이라도, 독이라도 뿜소이까?”
시엔이 심각해진 앙샬에게 고개를 저었다.
“에이, 그리 심각한 거 아니에요. 잔뿌리가 해봐야 그냥 제 몸 건드리는 벌레 정도나 잡는 정도죠. 괜히 손 다치고 그럴까봐서요. 드워프는 손이 생명 아니겠어요?”
“그, 그렇소.”
“가운데 자라는 거대한 뿌리가 있는데, 그것만 안 건드리면 위험하진 않은데, 아래로 아주 곧게 뻗어나간다니까 그건 광산하곤 별 상관없는 일이기도 하구요.”
앙샬이 침을 꿀꺽 삼켰다.
“혹, 혹시라도 그 거대한 뿌리를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 거요?”
그러자 시엔이 상쾌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주 끔찍한 일이 일어나죠. 아주 끔찍한 일이요. 상상보다 훨씬 끔찍한 일이.”
< 8. 도적의 피와 살로 비어진 곳간을 채우리라 [1] > 끝
ⓒ Lab.No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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