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 바다를 멀리하고 숲을 가까이하라 [5] >
흑마법사는 자신이 사역 중인 망령이 어디에 있는지 뚜렷하게 느낄 수 있다. 흑마법사는 이 능력에 대해 굳이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완전히 사역된 망령은 팔다리와 비슷한 것. 제 팔다리가 어디에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는지 모른다면 말이 안 되니까.
“꽤 넓네.”
시엔이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서리바람 숲과 탑클라우드 산맥이 그려진 지도였다.
시엔이 펜을 들어 그 위에 선을 그었다. 드워프 광산 속을 돌아다니는 망령의 동선이었다.
숲으로 돌아온 지 벌써 사흘. 악령이 움직이는 속도를 생각하면 광산 내부를 파악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광산 속을 전부 파악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파악한 광산 내부 구조는, 드워프의 말대로 철저하게 살베지 영지로만 파고들 뿐.
거짓말이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세계수의 뿌리를 상하게 만든, 엘프의 숲 아래를 파먹는 것은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굳이 떠올리자면 자이언트 웜 정도. 평생을 지하에서 살아가는 거대한 지렁이가 오랜만에 활동기를 맞이했을 수도 있겠고.
그 때였다. 시엔이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이것들 봐라?”
악령, 해피 드리머가 돌연 방향을 틀었다. 시엔을 향해 계속해서 다가온다.
시엔의 펜이 움직였다. 지도 위, 서리바람 숲 위로 잉크가 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드워프 놈. 순 사기꾼이었네.
그렇게 당당하게 자기들은 파지 않았다 주장하더니, 결국 드워프가 범인이 맞았다.
원래 드워프는 탐욕스럽긴 해도 명예를 아는 자들이었다. 장인이 저지른 부정은 결국 그 작품에 깃들게 된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평생 걸작 한 점이라도 만들어 대륙에 이름을 높이는 것이 드워프의 궁극적 목표가 아니던가.
한별은 드워프들이 그냥 땅 잘 파는 인간이 되었다고 했다. 천 년이란 정직한 장인들마저 이러한 야료를 부리게 되는 시간이었던가.
시엔이 지도를 계속해서 작성했다.
그때였다.
영혼을 죄는 통증이 밀려들었다. 악령이 느끼는 아픔이 시엔에게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이다.
“성물? 드워프들이?”
오로지 인간만이 신을 믿었다.
드워프는 저들의 강인한 육체와 정신만을 믿고, 엘프에겐 실재하는 신이 있다. 세계수.
허나 드워프가 뻔뻔히 거짓말을 하는 세상에 신을 믿지 않으란 법이 있던가. 시커먼 지하에 있다 보면 없던 신도 믿고싶어질 수 있지 않을까.
성물이 주는 통증은 따끔거리긴 해도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다. 시엔이 망령에게 의지를 전달했다. 아파도 좀 참고 계속하라고.
그런데 이 거슬리는 통증이 멎지를 않는다.
생각해 보니 이상하지 않은가.
요 사흘간 지하를 돌아다니면서 이런 적이 없었는데, 하필 엘프의 숲 아래를 지나는 갱도에만 성물을 놓는다는 것이.
한별이 그랬듯이 그 드워프 땅잡이도 알아보고 조처를 한 걸까? 하지만 드워프는 천 년을 살지 못하는데.
게다가 이 정도로 방비를 하면서까지 파내야 할 광석이 대체 무어란 말인가. 숲 아래에 금맥이라도 흐르는······.
“아.”
드륵. 시엔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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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다시 사흘 후. 갱도의 지도를 완성한 시엔이 한별을 찾았다.
“이건 지도로군요. 이 선들은······”
“드워프 땅굴이야. 네 말이 맞았어. 드워프들이 숲 지하를 파고 있는 거야.”
“하지만 이대로라면 심각한 문제네요.”
지도를 들여다보는 한별의 표정이 무겁다.
광산에서 숲으로 뻗는 지류는 하나. 숲 아래에서 몇 갈래로 갈라지거나 하며 잎맥같은 모양으로 뻗어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첨단이 향하는 방향 끝에 세계수가 있었다. 이미 깊숙이 파고들어 여기까지 닿는 데엔 먼 시간이 걸리지 않으리라.
“세계수를 노리다니. 어쩜 이럴 수가!”
한별의 표정에 분기가 서렸다.
지금까지 온화하던 엘프의 숲지기는 온데간데없이, 잘 벼린 칼날같은 예기가 맴돌았다.
“제가 광산에 가 봐야겠어요.”
“가서 어쩌려고?”
“당장 멈추게 해야지요.”
“내가 그 뻔뻔한 낮짝을 봤는데. 아마 안 통할 거야. 모른척 발뺌하겠지.”
“여기 증거가 있잖아요.”
“그건 증거가 안 돼. 누가 만든 건데. 광산에 들어가보지도 않은 티란디스의 도련님이 만들었다 주장할 생각이야?”
“그런 말장난은 이젠 상관없겠죠.”
한별이 손을 들자, 그녀의 방 안 곳곳에서 무언가가 솟구쳐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팔뚝만한 단검들, 예리한 엘프 단검 수십 자루가 제 자리를 찾아가듯 한별의 등 뒤에 자리를 잡았다.
전쟁을 치를 셈이다.
양보할 수 없는데 말이 통하지 않는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뿐. 피를 봐야 할 때는 피를 봐야 한다. 후작의 말이 바로 이런 뜻이었다.
그리고 맞는 말이기도 하고.
허나 지금은 아니다.
시엔이 테이블을 똑똑, 두 번 두드렸다.
“워워. 잠깐 진정하자고.”
“저는 어느 때보다 침착하답니다. 세월 속에 많은 것이 잊혀지지만, 드워프들은 너무 많이 잊어버렸어요. 우리에게 세계수가 어떤 것인지는 기억해뒀어야 해요.”
“아니. 헛다리 짚었다고. 드워프들은 세계수를 노리는 게 아니니까.”
“그럼 뭘 노리고 있나요?”
“숲 아래에 성은맥이 흘러. 미스릴 말야.”
한별이 눈을 깜빡거렸다.
갑자기 여기서 그게 왜 나오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리고는 이해한 듯한 얼굴이 된다.
“미스릴 말인가요?”
“응. 그러니까 그 망할 땅두더쥐 녀석들이 하지 말라는 데도 철판 깔고 파먹고 있는 거지.”
“탐욕에 이기지 못했군요.”
미스릴이란 가장 비싼 광물 중 하나다.
일단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금속이고, 그러면서도 단단하기는 강철보다 더했다. 거기에 녹이 스는 일도 없고.
희귀하기 짝이 없으니 부르는 것이 값이다.
게다가 기본적으로 정기가 서려 부정을 막아내니 마물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준다.
해피 드리머가 광산에서 계속 고통을 느낀 이유기도 했다.
정련되지 않았다 해도 성은이 천지에 깔렸으니 부정 세계에 속한 악령이 데미지를 입을 수밖엔.
“인간들이 나설 건가요?”
“가만히 둘 수는 없지. 도둑놈들이잖아.”
“도둑이요?”
“남의 땅에 멋대로 들어와서 보물을 훔쳐가는 이를 보통 그렇게 부르지 않나?”
“도움을 요청한다면 엘프도 돕도록 하겠어요. 세계수가 목적이 아니라고 해도, 도시 아래에 드워프가 드나드는 건 반갑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전쟁은 안 돼.”
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어째서인가요?”
“일단 훔쳐간 보물부터 돌려받아야지.”
“어떻게 말이죠?”
“그러니까 좀 도와줘야 해.”
시엔이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나무 한 그루 심으려고. 나무는 엘프들이 전문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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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태양은 종일 떠올라 흑광을 뿌린다. 검은 광채 아래 세상은 온통 흑백으로 보일 뿐.
바다는 검게 썩어 연신 거품이 피어오르고, 대지는 뼈와 살점으로 이루어져 세상 천지에 끈적한 피에 비린내가 피어오른다.
부정 세계.
일곱 세계 중 가장 끔찍한 곳의 풍경이다.
부정한 땅에는 부정한 것들이 산다.
하흐트브레카라타라 불리는 식물 역시 마찬가지였다. 땅 위로 뿌리를 뻗고 그 줄기가 지하로 파고드는 기괴하기 짝이 없는 나무다.
썩은 땅 깊숙히 맺힌 열매 하나가 돌연 부정 세계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시엔이 들고 있던 세계수의 잔가지에는 이파리가 세 개 달렸다. 그중 하나가 누렇게 뜨더니 이내 떨어져 흩날렸다.
시엔이 아쉬운 눈빛으로 떨어져나간 이파리를 바라보았다.
이파리 한 장당 한 번. 마법사의 한계를 뛰어넘는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시엔의 음차원 에너지는 천년 전 기준에는 숙련된 견습생 수준. 부정 세계의 것을 직접 불러내는 소환술은 흑마법 중에서도 가장 상위에 속한 것이었으니.
시엔이 소환된 흐트브레카라타의 과실을 내려다보았다.
충혈된 눈알 하나가 불안한 듯 동공을 벌름거린다. 이내 흰자에 검은 실핏줄이 피어올랐다.
흐트브레카라타의 열매. 이렇게 핏줄을 세울 때면, 뒤이어 고약한 악취를 내뿜곤 한다.
“이크.”
시엔이 급히 손바닥을 뒤집는다. 눈알이 땅 위로 툭 떨어져내렸다. 두 엘프의 시선이 거기 못 박힌 채 아래로 향했다.
“종자처럼 보이지는 않는데요.”
“오오.”
그렇게 말하는 두 엘프의 눈빛엔 호기심이 가득 담겼다. 시엔이 픽 웃으며 말했다.
“부정 세계는 상식으로 잴 수가 없으니까. 하지만 관념은 하나로 통하니 이건 식물이 맞긴 해.”
“과연 그렇군요. 어떤지 귀엽더라니.”
“뭐?”
“귀엽지 않나요?”
시엔이 흐트브레카라타의 과실을 내려다보았다. 검은 실핏줄이 도드라진 눈알이 하나.
시엔이 다시 한별을 바라보았다.
“귀엽다고?”
“네. 귀여운데요.”
“귀여워.”
어쩌면 엘프의 식물 사랑은 종족 근원에 새겨진 어떤 의무 같은 것이 아닐까.
시엔이 새로운 가설을 세웠다. 그렇지 않고서야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 상황이었으니까.
시엔이 고개를 살래살래 젓는 와중에도, 두 엘프는 애정 가득한 시선을 연신 눈알에게 쏘아보낼 뿐이었다.
“그럼 한 번 키워볼까요?”
한별이 손을 뻗자, 대지 위에 스르륵 막대 한 자루가 솟았다. 자체로도 어마어마한 파장을 내뿜는 마법 지팡이였다.
허나 저걸 지팡이라 부를 수 있을까.
오로지 숲지기만이 가질 수 있는 세계수의 분신. 마법 지팡이라 차마 부를 수 없이 격이 높은 물건이었으니.
“자자. 착하지. 옳지. 그래······”
한별이 아이 어르는 듯한 소리를 냈다.
동시에 눈알이 갈라졌다. 대지 위로 회백색의 뿌리가 점차 자라나 솟아나기 시작한다.
곧게돋게 자란 흐트브레카라타의 뿌리가 사방으로 기지개를 폈다.
충분히 자란 뿌리에서 촉수가 돋아나오기 시작했다. 붉은 갑피를 두른 촉수에선 무수한 실들이 붙었다. 지네를 연상시키는 형상.
촉수들이 바람도 없이 저 혼자 살랑거린다.
이내 매끈한 몸통에 작은 실금들이 무수히 생겨나더니, 일제히 벌어져 눈동자를 드러냈다.
수만 수천개의 눈이 데굴데굴 제멋대로 시선을 돌리고 꿈벅거리며 분주히 움직였다.
“어머! 근사해라.”
“응. 예뻐.”
한별이 감탄하고, 비설이 옆에서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부정 세계에 속한 것들이란 산 자들에게 본능적인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
허나 엘프들에겐 식물이라는 점이 더 중요한 모양이다. 혐오감은커녕, 새로 들인 애완동물이라도 되는 예쁘다 예쁘다 난리가 났으니.
한별이 물었다.
“이 아이는 이름이 뭔가요?”
“흐트브레카라타.”
“흐트브레카라타. 음. 다 자란 것 같은데. 더 키워야 하나요?”
“뿌리는 다 자랐는데, 몸통은 아직 멀었어.”
“전혀 안 자라고 있는데요?”
“얘는 위쪽이 뿌리야. 몸통이 땅에 박혀.”
“어쩜. 멋지기도 해라.”
시엔이 한숨을 내쉬었다.
한편 흐트브레카라타가 지하로 굳건한 밑둥을 쭉쭉 뻗어나갔다.
일곱 세상의 모든 식물 중, 가장 격이 높은 세계수가 성장을 돕고 있었다. 척박한 땅에서 자라던 흐트브레카라타가 이 놀라운 기적에 부응하며 경이로운 속도로 자랐다.
그러기를 한참.
지하로 뻗어내려간 흐트브레카라타의 몸통이 드워프들의 갱도를 관통했다.
흐트브레카라타의 몸통은 물컹한 살덩어리와 닮았다. 잿빛의 살뭉치가 갱도를 콱 틀어막았다.
“아. 끝났군요.”
시엔이 손짓하자 한별이 지팡이를 거뒀다.
“일이 끝나면 이 아이를 거둔다고 하셨죠. 그냥 계속 숲에 키우면 안 될까요? 참 사랑스러운 아이인데요. 잘 키울게요. 네?”
“아니. 이거 이렇게 보여도.”
시엔이 멈칫했다.
흐트브레카라타는 그냥 혐오스럽다. 이미 충분히 혐오스럽게 보인다. 이렇게 보여도, 라는 말이 적절한지 잠시 갈등이 생긴 탓이었다.
“······엘프의 눈에 어떻게 보이는지는 이해하고 싶지 않지만. 이거 마수야, 마수. 지금도 상당히 위험할 정도로 자랐다구. 통제를 잃으면 도시 하나는 간단히 말아먹는 녀석이야.”
“통제를 잃지 않으면 상관없는 거네요.”
“마수라는 게 그리 간단히.”
시엔이 입을 다물었다.
한별이 제 지팡이를 내밀었기 때문이었다.
마수라고 해도 결국 식물이 아닌가. 세계수의 수호자 앞에서 식물의 통제를 논하다니.
“나야 좋지, 뭐.
시엔이 쾌재를 불렀다.
흐트브레카라타는 애초에 드워프 이야기를 듣자마자 생각해 낸 것이었다. 지하의 주인은 드워프만이 아니니까.
그래서 세계수의 나뭇가지를 달라 했다. 애초에 사건 해결을 위해 필요하다 했던 이유였다.
이파리까진 안 주려는 한별에게, 시엔은 최소 세 장이 필요하다 주장했었다. 그래서 받아낸 것이 겨우 새순이나 세 개 달린 잔가지 하나였고.
시엔이 최소 세 장을 주장한 이유는 이랬다.
소환한 때에 한 장. 되돌려 보낼 때 한 장. 그리고 수고비로 내가 한 장. 해서 세 장.
그런데 되돌려보낼 필요가 없다?
그럼 두 장 내꺼 하지 뭐.
결국, 이 자리에서 한 명의 흑마법사와 두 명의 엘프가 만족스러웠으니 잘 된 일이었다.
신기한 듯 흐트브레카라타의 눈동자를 쿡쿡 찔러보던 비설이 물었다.
“그럼 이제 뭐 해?”
시엔이 대답했다.
“도둑놈들한테 가서 말해야지. 훔쳐간 거 뱉으라고.”
< 7. 바다를 멀리하고 숲을 가까이하라 [5] > 끝
ⓒ Lab.No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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