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 자리가 비어도 주인은 여전한 법 [4] >
엘모의 도박장은 그 새 더욱 화려해졌다. 원래 화려하긴 했지만 더욱더. 장식물 사이사이에 장식물을 더해놓아 빈틈이 없이 반짝거렸다.
그래서 시엔의 마음에 쏙 들었다.
온 사방이 웅장하게 번쩍이는 공간이라니. 멋지지 않은가. 시엔이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 옆에서 엘모가 이를 으득 갈았다.
“크윽, 이 무슨 악취미란 말인가아. 내 절제된 미학은 어디로 가고 무식한 졸부가 돈지랄만 한 것 같은 인테리어라니이······!”
퍽. 이내 엘모가 한 대 얻어맞았다.
제가 왜 얻어맞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으나, 이내 그저 헤헤 웃고나 말았다.
“저이는 예전에······”
“저 꼴 좀 보라지. 장난질 친다더니만······”
“무슨 낯짝으로 되돌아왔대······?”
거지꼴을 한 엘모를 보며 손님들이 수군거렸다. 직원 몇몇이 사태를 알아차리고 귓속말을 나눈다. 급히 어디론가 뛰어가는 기도 한 명이 눈에 보였다.
시엔이 빈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자 직원 하나가 급히 뛰쳐나와 허리를 굽신거렸다.
“도련님, 여기 누추한 곳에 계실 게 아니라, 안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안쪽? 에이, 됐어. 배고프니까 제대로 요깃거리나 좀 내 올래?”
“그게 아니라, 마스터께서 뵙자고 하시는데······”
시엔이 눈을 흘겼다.
“마스터? 께서?”
“예, 예?”
“야. 이게 정신이 없니, 아니면 개념이 없니? 마스터? 걔가 지금 누구더러 오라가라야? 지금 걔가 부른다고 네 하고 일어설까?”
“아, 아닙니다!”
“웃어주니까 만만하게 보이지? 티란디스의 앞마당에서 아주 간덩이가 부었네?”
“오해십니다! 그럴 뜻은······”
“됐고. 내 일행이 배가 고프다니까 제대로 한 판 깔아. 무슨 말인지 알겠어?”
“알겠습니다!”
시엔이 쯧쯧 혀를 찼다.
“그나저나 뭐야. 왜 그 꼴이 됐어?”
“아이고오, 나아으리, 그게 말입니다······”
딱히 특별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후작가가 국왕 탄신 연회 참가를 위해 출발한 그 다음날, 엘모의 도박장으로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닥쳤다고.
이유인즉슨, 사기도박으로 손님들을 속이고 금화를 부당하게 챙겼다는 것이다.
“경비대가 생각보다 유능하네? 사기꾼 대장을 다 잡을 줄 알고.”
“그게에 무슨 말씀이십니까아! 이이 엘모는 정직합니다아. 절대로 사기 같은 것으은!”
“웃기네. 나한테 걸린 건 뭐고?”
“헤헤, 그건 도박장에 으레 있는 약간의 양념 같은 것이지요오. 손님분들의 재미이를 위해 약깐 치는 향신료 같은 겁니다아. 헤헤.”
“개 같은 소린 집어치고.”
“도박장 치고 양념 안 치는 곳이 없습니다요오. 그냥 관해앵 같은 겁니다아. 헤헤.”
엘모는 그렇게 경비대에 잡혀가 감옥에 갇혔다. 엘모는 필사적으로 억울함을 호소했고, 실제로도 억울했다. 세상 모든 도박장 중 정직한 곳이 어디 있으랴.
“그때, 갈퀘 놈이 나타난 겁니다요.”
“갈퀘? 그게 누구야?”
“그 놈 있잖습니까아. 상도의도 모르는 그 개애 같은 놈 말입니다아.”
“아. 뱀눈. 알았어.”
감옥에 갇힌 엘모 앞에 나타난 갈퀘가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모든 재산을 저에게 넘기겠다는 그런 서류였다. 여기에 사인만 하면, 아무 일 없이 풀려날 것이라고.
“그래서 사인을 했다고?”
“그 놈에게 전 재산을 넘기느니 차라리 평생을 감옥에 있을 겁니다아! 그랬는데, 그 놈이 간수와 짜고 또 억지로······”
지장은 사인의 대체가 가능했다.
시엔의 생각으론, 억지로 서명을 시켜야 했던 그 누군가가 일부러 만들어낸 세상의 패악 중 하나이긴 했지만. 어쨌든 세상이 인정했으니 이제 와 어쩌겠는가.
“그래서 이 꼴입니다. 저는 억울합니다아. 저, 저는······. 나아으으리······, 크흑. 이제 보니, 경비대도 한통속, 우우우······.”
다시 생각하니 분이 뻗쳤는지 아니면 설움이 솟았는지, 엘모가 결국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개판이네.”
시엔이 기가 막혀 고개를 저었다.
녀석 뒤에 로우드 모녀가 있는 거야 진작 알고 있었다. 잘 드는 칼을 쥐었으니 여기저기 휘두르고 다니는 것도 당연지사.
그 사이 음식이 탁탁 테이블 위에 쌓였다.
시엔이 직원을 붙들었다.
“마음이 바뀌었어. 뱀눈 안에 있나?”
“예?”
“뱀눈 안에 있냐고.”
“아, 그, 저, 안에 계십니다.”
“계셔?”
“아닙니다. 안에 있습니다.”
“안에 있어? 아직도?”
분명히 용건이 있을진데. 건방지게 오라가라 한다 했더니 아예 얼굴도 비추지 않는다. 지금쯤 제가 먼저 나타났어야 정상이 아닌가.
“앞장 서. 낮짝이나 좀 보자.”
시엔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엘모도 소파에서 뛰어내려 두 발로 섰다. 시엔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엘모는 여기 있어. 좀 씻고. 냄새 난다. 옷도 좀 사람 같은 걸로 입지 누더기는 또 어디서 나서 걸쳤어? 사람 시켜서 얘 옷 좀 챙겨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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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본 뱀눈 사내, 갈퀘는 그간 많이 수척해졌다. 눈 밑으로 거뭇한 기미가 뺨까지 내려오고, 주름이며 푸석한 피부가 한 달만에 십 년은 늙은 것처럼 보였다.
보라. 이것이 잠의 위력이다. 하루만 잠을 설쳐도 사흘은 내리 피곤한 것을. 그게 한 달 내내 이어지면 사람이 이렇게 산 미라처럼 말라가게 된다.
시엔이 구 엘모의 방 안으로 들어서자, 갈퀘가 제 부하들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모두 우르르 몰려나가며 두꺼운 철문을 밖에서 닫았다. 방 안엔 단 둘 뿐이었다.
시엔이 경쾌하게 인사했다.
“안녕? 요 봐라. 꼴이 말이 아니네. 잠을 잘 자야 사람이 건강하다니까.”
그러자 갈퀘가 눈을 부라렸다.
“······대체 내게 무슨 짓을 한 겁니까.”
“내가? 네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네?”
“대답하십시오! 당신을 신전에 고발할 수도 있습니다!”
“고발? 왜? 어떻게?”
“왜냐하면 당신이 내게 저주를 걸었으니까!”
쿵! 갈퀘가 신경질적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뭐? 당신? 이게 이젠 아주 막나가는구나? 시엔이 씩 웃었다. 날 선 미소였다.
“그럼. 고발해. 왜 지금까지 참고 있었대?”
“내, 내가 못 할 것 같습니까?”
“할 수도 있지. 신전에 가서 시엔 공자가 내게 저주를 걸었습니다. 저주를 걸었다고요. 뭐. 그럼 내가 곤란해지려나.”
시엔이 책상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그럼 신관이 물어보지 않을까? 저주라구요? 세상에. 그런데 무슨 저주인가요? 그럼 뭐라고 대답할 생각이야? 내가 죽인 이들이 꿈에 계속 나옵니다. 잠을 못 잔다구요!”
시엔이 킥 웃음을 터뜨렸다.
신관들이 좋아하는 말 중 하나가 바로 업보가 아니던가. 선행이 선행으로 되돌아오고, 악행이 악행으로 되돌아온다고 하는 그런 아름다운 이야기.
그러니 애써 고발해봐야 신관들이 할 일은 뻔했다. 신의 공정함에 찬사를 올리고, 이 맹랑한 살인자를 두들겨 패 쫓아내겠지.
시엔의 몸에서 음차원 에너지가 피어올랐다.
이 자리에서, 시엔은 티란디스의 소공자가 아니었다. 천 년 전, 홀로 제국을 불태우던 흑마법사. 세계의 법칙 끝자락에 닿았던 위대한 거장이 자리에 있었다.
시엔의 작은 몸뚱이가 태산처럼 크게 보였다. 정신세계가 가진 규모의 차이가 만들어내는 칼날 같은 위엄.
“내 아는 늙은이는 언제나 날 붙잡고 자비를 베풀라 했지. 한때 그럴 이유가 없었으나, 그조차 과거로 얼어붙어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하여 지금은 자비로 네게 기회를 주었으나 스스로 차 버리는구나.”
“무, 무슨······”
“알량한 네 목숨 따위 내가 거두고자 하면 일만의 군대로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네 삶이 가여워 붙여둔 목숨이 가치가 없었음을 스스로 증명하느냐?”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은, 살려두었을 때가 더 두렵기에, 그 후환이 두려워 간단한 방법을 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진정으로 강한 이는 쉬이 목숨을 거두지 않는다. 어차피 해가 되지 못함을 알기에.
망령들이 날뛰기 시작했다.
순수한 음차원 에너지, 부정 세계의 공기가 방 안을 잠식했다. 망령들이 힘을 얻어 현상 세계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거뭇한 그림자들이 광란에 빠져 방 안을 휘돌며 쏘다녔다.
갈퀘가 몸을 덜덜 떨었다. 저도 모르게 이를 딱딱 부딪쳤다.
이야기 속 악마가 이러할까. 수많은 악령들을 휘감은 채 영혼을 쏘아보는 저 눈동자!
덥썩. 문득 무언가 발목을 잡는다. 갈퀘가 삐꺽삐꺽 고장난 동작으로 고개를 내렸다. 반쯤 썩은 시체 한 구가 구더기 끓는 손길로 바짓자락을 붙들고 있었다.
-아이, 아이가 있었어······
문득 시체가 고개를 든다. 일곱 개의 입이 가시 돋힌 이빨을 드러내고, 수만 수천개의 눈동자가 일제히 그를 노려보았다.
수없이 반복되던 악몽이 현실로 치닫았다.
“으악! 으아아악! 저리 가! 저리 가라고!”
갈퀘가 소파위를 기었다. 등받이를 겨우 타넘어 바닥에 나동그라지고, 몇 바퀴 굴어서도 몸서리치며 벽에 몰려 비명을 질렀다.
시체가 다가온다. 관절 아래 기괴하게 비틀린 낫에서 서슬 퍼런 예기가 흐른다. 목숨을 수확하는 대낫이 번쩍 들리고, 이내 심장을 꿰뚫는다······
“으아아악! 흐억, 흐어억······”
순간 모든 것이 환상처럼 스러졌다.
심장이 쥐어짜이는 듯한 환통에 가슴을 부여잡고 거친 숨을 내쉬다, 이내 맥이 풀려 바닥에 드러눕고야 만다.
그 위로 장난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미의 원한은 무서운 법이지. 아이를 가진, 오, 그것도 네 아이라고? 왜 죽였어? 돈 때문인가. 구제 불능의 쓰레기 같으니.”
“어쩔 수, 어쩔 수 없었다고······”
“세상에 어쩔 수 없는 일이란 없는 법이야.”
“대체 나한테 왜 그래! 왜 그러냐고!”
“사실 너 따위에겐 별로 관심 같은 거 없었거든? 누가 먼저 건드리지만 않았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거 아니야.”
시엔이 친절하게 대답해주었다.
갈퀘가 악을 썼다.
“나도 어쩔 수 없었어! 어쩔 수 없었다고! 나도 피해자야! 빌어먹을 귀족 나으리들의 후계 다툼에 끼고 싶은 줄 알아? 하지만 이미 불려갔다고! 거절할 수가 없었어!”
“흠. 그것도 일리가 있네. 맞는 말이야.”
시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힘 좀 깨나 쓴다 해도 일개 건달이 귀족에게 먼저 다가갈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로우드 모자가 갈퀘를 불렀을 테고, 내게 돈을 대는 엘모를 방해하라 명했을 터다. 그러니 갈퀘에게 선택권은 없었으리라. 이미 명령을 받았으니 따르는 수밖에.
“그거야 이해하겠는데. 그렇다고 나랑 맞먹으려 들면 안 되지. 고개가 영 빳빳하니 힘 좀 주던데?”
“그건······”
“네가 네 주인의 권세를 믿고 나를 만만히 보았으니 이 꼴을 당한 거야. 자. 이거 보이지?”
시엔이 주먹을 내밀었다. 주먹 위에 상처엔 어느새 어설프나마 딱지가 붙었다.
“여기 들어오려는데 네 부하들이 날 공격하더라. 감히 티란디스의 성을 눈앞에 두고 그 혈족에게 이빨을 들이민 거지. 관대히 넘어가려면 넘어가겠다만야, 그렇지 않으면 네 목이 날아가도 문제가 없는 거 알지?”
“그, 그건 제가 시킨 것이 아니라. 그 놈들이 멋대로······”
“종의 허물이 주인의 죄지. 그러니까 이미 네 목숨은 내 손아귀에 있지. 선택할 수 없었다고 했던가? 그럼 이번엔 선택할 수 있도록 해 줄게.”
시엔이 손가락을 세 개 폈다.
그중 엄지를 접었다.
“하나. 이대로 반역죄로 잡혀가기. 감히 후작가의 직계를 암살하려 한 죄야. 성의 고문 기술자들이 네 죄를 증명해 줄 테고.”
시엔이 손가락을 하나 더 접었다.
“두 번째는 여기서 내게 용서를 빌고, 평생 악몽에 시달리면서 사는 거지. 너를 괴롭히는 것이 바로 네 죄야. 네가 해한 이가 원한이 깊어 끊이지 않으니 죽음에 닿아서도 한없이 괴로우리라. 어때?”
갈퀘의 시선이 이제 하나 남은 손가락, 홀로 일어선 중지 손가락에 박혔다.
떨리는 눈빛은 두려움이요, 그 가운에 처연한 기색은 혹여 모를 희망일 따름이라.
이제야 좀 웃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되었다.
시엔이 씩 웃으며 중지만 편 주먹을 보란 듯이 들어보였다.
“이게 바로 네가 바라는 바가 아닌가 싶은데. 모든 재산을 엘모에게 넘기는 거지. 그럼 네 불면증도 내가 해결해 줄 수가 있겠고.”
후작은 제가 인정한 자식에게 영지의 직책을 하나씩 맡도록 했다.
카레네는 영지의 병무관을 맡아 기사단을 장악하고 병사를 제 밑으로 끌어들였다. 재림 후에 얼굴은 못 봤지만, 5남 제오스는 직할도시 아르베오라의 시장 자리를 꿰차 도시 하나를 차지했다.
로우드는 영지의 재무관으로, 제 어미가 후작가의 안살림을 도맡았으니 둘이 합쳐 가문의 돈을 알뜰하게 잘 써먹고 있었다.
예를 들어 적당한 건달에게 도박장을 하나 세워주고 다른 업장을 망하게 한다거나 하는 그런 건전한 용도로.
그러니까 갈퀘의 재산이 곧 로우드의 주머니에서 나온 것이라.
“흠. 그런데 그렇게 했다간, 네 뒷배. 그러니까 로우드 녀석이 가만히 놔두진 않을 텐데. 멀리멀리 도망쳐야겠지?”
“그, 그렇습니다! 멀리멀리 도망치겠습니다.”
“자. 그럼 뭐 해? 빨리 서류를 작성하지 않고. 네 재산을 전부 넘기겠다는 각서 말야.”
시엔이 소파에 몸을 뉘이며 재촉했다.
죽었다 여기다 제 구명줄이 보였으니 어찌 급하지 않을까. 갈퀘가 급히 펜과 종이를 휘둘렀다. 결국 서명과 지장까지 찍힌 재산 양도 문서가 완성되었다.
시엔이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그럼 소인은 이제 그만······”
“좋아. 이제 넌 빈털터리야. 로우드 녀석은 성질머리가 소인배라 널 용서하지 않을 테니까. 지금 당장 도망치는 걸 추천하지.”
갈퀘가 비슬비슬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향했다. 시엔이 눈살을 찌푸렸다.
“잠깐. 어디 가?”
“예? 어, 저기, 그게, 도망을 치고 있습니다만. 무언가 잘못이라도······”
“여기 이거 안 보여? 네 모든 재산이 이미 넘어갔다니까?”
“그······ 맞습니다.”
갈퀘가 눈동자를 데룩데룩 굴렸다. 혹여 뭔가 거슬린 것이라도 있을까 비굴하기 짝이 없는 모습.
“네가 입은 건 쓰레기야?”
“그, 무슨 말씀이신지······”
“모든 재산을 양도한다고 여기 네가 직접 써 놨잖아. 모든 재산.”
갈퀘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시엔이 말을 이었다.
“벗고 가. 임마.”
< 6. 자리가 비어도 주인은 여전한 법 [4] > 끝
ⓒ Lab.No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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