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 자리가 비어도 주인은 여전한 법 [3] >
그 엘모가 저 꼴이 되어있으리라곤 상상을 해 본 적이 없다. 아니, 애초에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돈 많은 난쟁이 하나 그리 중요한 이도 아닌 것을.
꽤 안쓰러운 꼴이긴 하나, 도박장 주인이란 작자는 결국 저리되어도 제 업보인 법이다.
행렬은 가문의 행사. 끝날 때까지가 그 여정이니 여기서 이탈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시엔이 얌전히 후작저로 복귀한 이유였다.
시엔은 방 안에 홀로 느긋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니. 보내려고 했다.
아아이고오, 나아으으리이.
어째 엘모 특유의 그 목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듯 하다.
시엔이 방 안을 둘러보았다.
금괴며 귀금속 따위가 보란 듯이 전시되어 있는 시엔의 방. 흑마법사의 시선에는 거기에 똬리를 튼 망령들의 정겨운 모습도 함께였다.
이것들을 마련했던 게 누구 덕분이긴 했다.
영민은 귀족을 섬기고, 귀족은 그에 그들을 살펴 의무를 다하라.
엘모가 시엔을 마음으로 섬기는지는 몰라도, 쨌든 그 권위 앞에 무릎을 꿇고 황금을 바치던 자였다. 그리고 죽어서 시엔을 섬길 운명이기도 했고.
‘에이 씨. 귀찮게.’
허나 원래 귀찮은 것이 의무이리라.
시엔이 방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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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딘은 도착하자마자 기사단의 연병장을 구경하겠다며 베른닐을 끌고 사라졌다.
덕분에 창공 기사단은 짐을 내려놓기도 전에 갑자기 끌어오르는 기사의 혼으로 인해 수련장에 모여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러다 눈에 뜨이면 조언 한 마디라도 들을 수 있을까 하는 심산이었다.
그 사이에 후작가의 장녀 카레네가 끼어있는 것은 조금 의외였지만. 아무래도 한 번 퇴짜맞고도 아직 미련이 많이 남은 모양이었다.
시엔은 밤 늦은 시간 땀 흘리는 기사들을 잠시 바라보다 이내 등을 돌렸다.
베른닐이 어느 때보다도 강렬한 눈빛으로 땅바닥을 구르고 있으니, 지금은 그냥 저러고 있으라 두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어차피 베른닐이 없어도 체른노아, 후작저가 자리잡은 직할도시에 시엔을 상하게 하겠는가.
게다가 그런 이가 있다 하더라도, 시엔이 그걸 막아내지 못할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다.
후작저를 나선 시엔이 ‘인생의 전환점’ 앞에 이르렀다.
시간이 꽤 지난 탓인지 엘모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엘모는 입을 함부로 놀리다 영혼을 저당잡혔다. 만약 죽었다면 망령이 되어 시엔을 찾아왔을 터. 그러니 아직 살아있긴 하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이건 또 어디로 갔담.
시엔이 건물 주변을 기웃거리고 있을 때였다. 도박장의 입구에서 여인 하나가 외투를 여미며 걸어나왔다.
본 듯한 여인이다. 엘모 아래에서 일하던 여인이었던가.
그녀는 여상히 발걸음을 옮기다, 돌연 골목어귀에서 휙휙 주변을 살피더니 으슥한 뒷골목으로 쏙 들어가버리고 말았다.
시엔이 뒤를 따르자, 이내 흠칫 놀라며 이 쪽을 바라보았다. 시엔의 얼굴은 확인하곤 안심한 듯 심장 위에 손을 올리고 안도의 숨을 내어쉬었다.
“아. 공자님이셨군요.”
“응. 그러니까.”
“소녀 릴리입니다. 공자님.”
“그래. 릴리. 여긴 무슨 일이야? 여인이 돌아다니기엔 영 추천하고 싶은 장소는 아닌데.”
“후우. 그게 말이예요. 이걸 좀······”
릴리가 손에 들고 있던 바구니의 입구를 슬쩍 열어보였다.
퍽퍽한 몸통만 남은 오리 구이며 소스가 묻은 감자 따위가 보였다. 먹다 남은 음식들이었다.
“이걸 왜?”
“아. 돌아오셨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어요. 이제 돌아오신 건가요?”
“뭐. 보다시피.”
“엘모 그이가 도박장에서 쫒겨난 일을 모르시죠? 완전 거지가 되서 나앉았답니다.”
“흠. 그래서?”
“그래도 좋은 사장님이었거든요. 우리들한테는.”
“오.”
그러니까 길거리에 나앉은 엘모를 위해 남은 음식이라도 챙겨왔다는 뜻이었다.
그나저나 좋은 사장님이었다라. 의외로 인덕을 쌓아 놓은 녀석이었다. 겨우 남은 음식 따위라고 해도 여인이 주변을 살피는 꼴을 본 이후였다.
엘모에게 음식을 가져다 주는 일이 누군가에겐 달갑지 않은 모양이니, 몰래 챙겨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의외의 일면에 놀라고 있는 사이였다.
넝마를 걸친 이가 쏜살같이 시엔에게 달려들었다.
“아아이이고오, 나아으으리이!”
시엔이 피식 웃었다.
어째 떠오른 그대로의 목소리가 들려오는지. 정신 세계에 통하여 미래 예지라도 가능해진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지저분한 하플링이 시엔의 발밑에 납작 업드렸다. 으레 하던 양으로 시엔의 바짓자락을 붙잡으려 팔을 뻗다가, 문득 움찔하며 동작을 거두었다.
시엔이 물었다.
“왜?”
“그것이이, 소인의 손이 더럽습니다아아. 나으으리이.”
“호오.”
원래 입안의 혀처럼 굴줄 아는 녀석이라 생각했는데, 그 면모가 지금도 어김없이 발휘되었다.
“그래서, 이게 뭔 일이야?”
“아이고오! 나으으리! 들어보십시오오! 갈퀘 그 쳐죽여도 시원치 않은 놈이이!”
“잠깐. 갈퀘? 그게 누구야?”
“왜애, 그 뱀 같이 생긴 놈 있잖습니까아! 감히 나아으리이의 도박장 앞에 또 도박장을 세운 버르장머리 없는 노옴 말입니다!”
“아. 그 뱀눈. 누군지 알겠어.”
로우드 모자의 사주를 받아 ‘인생의 전환점’ 앞에 ‘인생의 반환점’을 세워 방해공작을 펼쳤던 그 사내.
감히 시엔 앞에서 뻗대며 건방지게 굴던 놈이었다.
“어디 보자. 대충 한 달 정도인데. 용케 아직도 버티고 있네?”
“예에?”
“아니. 그런 게 있어.”
갈퀘에겐 제법 원한 깊은 망령이 깃들어 있었다. 그래서 시엔은 음차원 에너지를 전달해 망령을 강제로 부화시켜 악령으로 재탄생시켰다.
해피 드리머.
물리력은 거의 행사할 수 없지만, 인간의 꿈에 개입해 끝없는 악몽을 행사하는 그런 악령이다.
한 달이나 잠을 제대로 못 잤을 것이 분명할 터. 그 상태에서 엘모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면 생각보다 더 강인한 정신을 가지고 있는 놈임에 틀림없었다.
뭐. 그래봤자다.
원한에 사무친 악령이 겨우 한 달 만에 지쳐 떨어질 리가 있겠는가. 한 달이나 버틴 것은 용하지만, 인생은 길고 악몽은 더욱 길 테니까.
그나저나. 시엔이 씩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엘모. 누구 도박장이라고? 내 도박장? 언제부터 인생의 전환점이 내 거였어?”
“아이이고, 제 것이 곧 나으리이의 것이 아니겠습니까아.”
“그래? 그건 또 참신한 발상인걸.”
제 딴에야 이리 말하면 도박장을 되찾아줄 거라 생각하는 모양. 저번에도 입이 방정이라 영혼을 저당잡히고는, 이번엔 아예 도박장의 주인 자리를 홀라당 넘기고 말았다.
하기사, 이미 빼앗겨 제 손에 없는 것이니 남의 위세를 빌려서라도 되찾으려는 속셈은 자체는 제법 훌륭한 처세요, 상당히 약았다 할 수 있겠다.
영리한 녀석은 어디다 써먹어도 나쁘지 않은 법이니. 이 정도야 너그러히 봐 줄 수 있겠지.
“흠. 릴리. 미안하지만 손에 든 건 그냥 버리도록 해. 오늘 저녁은 따뜻한 걸로 먹일 테니까. 좌우지간 일단 밥부터 먹으러 가자고. 좀 씻기도 해야겠고. 너 냄새나. 엘모.”
“크흑, 나으으리이.”
“자. 가자.”
시엔이 앞장서서 걸어나갔다.
골목을 나가 좌회전. 그리고 아주 잠깐 걸어나가 휘황찬란한 입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아으리? 여기느은······”
“어디긴 어디야. 내 도박장이지. 밥은 집에서 먹는게 제일 아니겠어?”
그렇게 시엔이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기도 한 명이 앞을 가로막았다.
기도답게 키가 크고 우락부락한 놈이었다. 건방지게 위에서 내려다 보는 꼴을 하곤 목소리를 까는 것이다.
“쯧. 이건 또 뭐야?”
시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내 얼굴을 모르나? 원래부터 일하는 놈은 아니었던 모양이네.
재림 전에 이 몸뚱이야 방안에 틀어박혀 나가는 일도 없었다. 그러니 얼굴만 보고 알아보는 이가 거의 없는 것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그럼 뭐. 잘 됐지.
시엔이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뭐긴 뭐야. 손님이지.”
“손님? 하. 쬐그만 게. 돈푼이나 좀 있는 모양인데, 여기 아무나 오는 데가 아니다. 아해야.”
“나 돈 많은데?”
기도가 위아래로 시엔을 훑었다.
야등 아래로 비치는 차림새가 한 눈에 보기에도 고급품 중에 고급품이다.
키는 쪼그만 게, 얼굴엔 구김 하나 없이 고생한 태가 없다. 특히 피부가 허옇다. 하얀 피부는 귀히 자랐다는 증거였다. 햇빛에 탈 일이 없었다는 뜻이니까.
기도의 기준에선 이쯤 통과시켜도 될 유형이기도 했다. 그 뒤에 이상한 걸 달고 들어오려고만 하지 않았다면.
“뭐야. 너. 저 거지 새끼는 왜 달고 들어오려고?”
“입에 걸레를 물었나? 말끝마다 새끼는 니 새끼한테나 하고. 비키기나 해. 덩어리.”
“뭐 이 새끼야?”
“돈푼이나 받는 건달 놈이 쎈 척은 더럽게 해 되네.”
“아이, 썅, 쪼그만 게, 악!”
시엔이 기도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악, 하는 비명. 기도의 허리가 휜다. 시엔이 손날을 휘둘렀다. 손날이 목젖을 강타했다. 컥. 숨이 막히는 통에 기도가 중심을 잃었다.
시엔이 주먹을 쥐어 기도의 귀 아래를 후려쳤다. 골이 흔들리는 강타. 고스란히 뇌로 전해지는 충격에 결국 기도의 거구가 고꾸라지고 만다.
한 명이 바닥에 눕는 데에 걸리는 시간은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기도는 2인 1조. 나머지 한 명이 눈을 꿈벅거렸다. 무슨 상황인지 잠시 이해를 못 했다. 이내 눈에 분기가 서린다.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 애새끼가!”
남은 기도가 달려들었다.
허나 원래 기도란 놈들은 대개 건달이거나, 혹은 되다 못한 용병에 불과했다.
천년 전, 그 강대한 제국과 단신으로 맞선 흑마법사가 과연 지팡이만 휘둘렀을까.
정직하게 뻗어오는 주먹에 시엔이 고개를 젖혔다. 뺨에 바람이 스치고, 시엔이 주먹을 뻗었다. 시엔의 주먹이 기도의 갈빗대에 틀어박혔다. 얇은 갈빗대가 똑 부러졌다.
“흐억, 억, 억······”
뼈가 부러지면 정말 더럽게 아픈 법이다. 그중에서도 갈빗대는 더더욱 아팠다. 너무 아프면 숨이 턱 막힌다.
기도가 바닥을 구르며 숨 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어우, 주먹이야.”
시엔이 손목을 돌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 몸뚱이의 전 주인은 여자에게 차이고 독이나 마실 줄이나 알았지, 단련과는 완전히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다.
물론 체술이란 기본적으로 기술. 신체의 능력을 가장 효과적으로 이끌어내는 방법이 아닌가.
이런 몸이라도 건달 둘 쯤이야 간단히 때려눕힐 수 있었다. 그러나 가죽이 워낙에 물러 주먹의 돌출된 뼈 위쪽이 살짝 찢어져 피가 흘렀다.
“엘모. 이것 좀 봐봐.”
“아이고오! 나아으리이! 이게 무슨 일입니까아! 피가! 피이가!”
“그냥 살짝 찢어진 거라 뭐 별거 아냐. 별거 아니긴 한데. 그렇다고 아무것도 아닌 건 아니지.”
시엔이 해사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엘모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꿈벅거리다, 이내 난쟁이답지 않은 사악한 웃음으로 그에 대답했다.
시엔이 엘모의 뒷통수를 한 대 때렸다.
“그렇다고 네가 웃으면 안 되지. 엘모야.”
< 6. 자리가 비어도 주인은 여전한 법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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