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5. 강태공이 된 한빈 (1)
미소를 피워 낸 한빈이 시선을 돌려 허공을 바라봤다.
그곳에 새로운 문구가 나타났다.
[천급 초식 유유자적(悠悠自適)을 획득하셨습니다. 은신술과 귀식대법의 최고 단계입니다. 어떤 고수도 당신의 기척 혹은 숨결을 알아채지 못합니다. 유유자적의 지속 시간은 한 시진입니다. 유유자적은 열두 시진에 한 번 펼칠 수 있습니다.]
만약 최선의 선택을 찾지 못한 상황이라면 실망했을 초식이었다.
상대방의 목줄을 꺾어 놓을 수 있는 한 수가 유유자적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초식은 한빈이 떠올린 최선의 계획을 실행할 조각 중 하나가 될 터였다.
한빈의 변화무쌍한 표정에 토끼 가면이 웃었다.
“크허헐. 이제 마지막을 준비하거라.”
“그래, 노인장! 쿨럭.”
한빈이 기침하자 입술 사이로 선혈이 흘러내렸다.
그만큼 천라신선보의 네 걸음은 내부를 진탕시켰다.
그 모습에 토끼 가면이 말했다.
“무리했구나. 그냥 운명을 받아들였으면 편할 것을……. 세상 모든 약자는 너처럼 마지막까지 발버둥 친단다. 간만에 보는 발버둥이 즐겁구나.”
“약자라고? 거기에 발버둥?”
한빈이 고개를 갸웃하자, 토끼 가면의 복면이 살짝 흔들린다.
비웃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크허헐. 호랑이에 물린 노루가 한 줄기의 희망을 안고 몸부림치는 것도 그렇고 그물에 걸린 물고기가 팔딱팔딱 뛰는 것도 그렇고…….”
“혹시 노인장이 어부라고 생각는 거야?”
“…….”
토끼 가면이 고개를 갸웃하자 한빈이 말을 이었다.
“가끔 어떤 물고기는 자기가 어부인 줄 착각하더라고. 어차피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세상이란 그물에 갇힌 똑같은 물고기가 아닌가?”
말을 마친 한빈은 재빨리 품속에서 환약 하나를 꺼내 입 속에 털어 넣었다.
그 모습에 토끼 가면이 웃었다.
“기사회생의 단약이라도 되는가 보구나. 그래도 나는 어부고 너는 물고기라는 사실은 변함없다.”
한빈은 말없이 상대를 바라봤다.
토끼 가면은 아직도 옆구리에 만월이 꽂힌 그대로였다.
오만함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마치 오만함이라는 호신강기로 온몸을 두르고 있는 모습이었다.
사실 오만함을 넘어서 만용이라 봐도 되었다.
만용이 아니라면?
고도의 심리전일 수도 있다.
상대가 꽂아 넣은 단검을 옆구리에 꽂은 채 대결을 이어 나간다면?
거기에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았다면?
아마도 상대는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생각을 할 것이다.
그 결과, 대결을 포기하고 순순히 자신의 목을 내놓을 자도 있을 것이다.
무림 초출이라면, 이런 심리전에 당할 가능성이 컸다.
토끼 가면은 그런 이유로 만월을 옆구리에서 빼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그게 사실이라 할지라도 한빈은 상대에 의도에 말려들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한빈은 상대의 의도를 계속 의심하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상대의 실력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로 자신을 궁지에 몰아넣은 자는 처음이니까.
한빈은 품속에서 다시 대나무 통 하나를 꺼내 공중으로 던졌다.
휙!
보름달을 향해 날아갈 것만 같은 대나무 통이 적절한 높이에서 터졌다.
펑!
하늘 위에 푸른색과 붉은색의 불꽃이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져 내린다.
그 모습에 토끼 가면이 말했다.
“지금 네 행동을 발버둥이라 하는 것이다.”
“간다.”
한빈은 희미한 미소와 함께 천라신선보의 다섯 걸음을 걸었다.
처음 걸어 보는 다섯 번째 걸음이었다.
위위잉.
월아가 깨질 듯이 비명을 지른다.
한빈도 마찬가지지만, 월아도 다섯 걸음의 무게를 받는 것은 처음이기 때문이다.
다섯 걸음째가 되자 한빈의 속도가 더 빨라졌다.
토끼 가면도 한 발 앞으로 나온다.
챙, 챙, 챙!
검이 스치는 소리가 연달아 들린다.
한빈과 토끼 가면 사이에 연신 불꽃이 튄다.
둘의 격돌이 만들어 내는 자그마한 불꽃은 마치 수백 마리의 반딧불이 날아다니는 듯했다.
챙, 챙.
끝없이 울려 퍼지는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충격파.
그들의 격돌은 그들만의 공간을 만들어 냈다.
둘이 휘두르는 검의 속도가 대기의 흐름까지 바꿔 놓은 것이다.
대나무 잎이 그들 주변을 감싸더니 녹색의 구체를 만들어 냈다.
순간 주변에 울리는 기묘한 소리.
쩌-정!
한빈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것은 진법이 깨지는 소리였다.
진법이 깨지면 불리한 것은 누구일까?
현재 상황으로는 누가 불리하다고 할 수 없었다.
한빈과 토끼 가면이 동수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시간이 가면 갈수록 불리한 것은 한빈이었다.
[심화편]
[복(復) : 이십(二十)]
[……]
[복(復) : 십구(十九)]
지금도 끝없이 회복을 담당하는 구결이 떨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이게 끝까지 간다면?
한빈의 오장육부는 천라신선보의 다섯 걸음을 버티지 못하고 찢겨 나갈 것이었다.
천라신선보로 이제는 동수를 이루었다면 용린검법을 쓸 수 있을 정도로 무공의 격차를 좁혔다는 뜻이다.
한빈은 재빨리 초식을 떠올렸다.
‘자승자박!’
한빈은 미소와 함께 검의 속도를 높였다.
이제 ‘무공의 격차’ 같은 문구가 눈앞에 더는 뜨지 않았다.
토끼 가면의 검이 더욱 빨라졌다.
그도 마음이 급하다는 뜻이었다.
검을 쓰는 토끼 가면의 손이 미묘하게 떨렸다.
자승자박으로 타격을 받는 것이 분명했다.
자승자박(自繩自縛)은 이화접목의 수법.
자신의 펼친 공격의 일부를 돌려받게 된다.
동수를 이룰 경우 토끼 가면은 오 할의 타격을 입는다.
그가 한빈보다 더 무공의 경지가 높다고 해도 최소 이 할의 타격을 입는다는 것이다.
한빈은 미소를 피워 냈다.
가면 속에서 일그러진 상대의 얼굴이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빈은 토끼 가면이 밑천을 드러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한빈은 토끼 가면의 밑천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것을 위해서 한빈은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진법의 바깥쪽에서 굉음이 들려왔다.
쿠아앙!
동시에 미세하게 느껴지는 진동.
쿠릉.
진동은 점점 커졌다. 만물이 좌우로 움직인다.
이어서 거대한 열기가 한빈과 토끼 가면을 감쌌다.
열기가 지나가며 둘이 만들어 낸 공간을 잡아먹기 시작했다.
트트득.
툭.
공간을 감쌌던 대나무 잎이 타는 소리였다.
점점 침범하는 열기.
토끼 가면이 다급하게 진기를 끌어올렸다.
한빈은 그 상태 그대로 월아로 상대를 공략했다.
챙, 챙.
그는 뒤쪽에서 밀려오는 열기를 방어하기 위해 호신강기의 범위를 넓혔다.
하지만 한빈은 열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검에만 집중했다.
“네놈!”
“소위 말해서 동귀어진이라고 하지.”
“네놈이 진정!”
토끼 가면은 진심으로 흥분했다.
이 정도의 열기라면 고수라 해도 녹을 수밖에 없었다.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고수는 없으니 말이다.
불꽃을 일으키고.
상대방을 얼리고.
허공에 꼿꼿이 서는 천외천의 무공들이라 해도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무공은 아니었다.
자연의 섭리를 이용하든가 아니면 그 힘을 늦출 뿐이었다.
그런데 한빈은 열기에 자신의 몸이 녹아내려도 괜찮다는 듯 검에만 집중했다.
토끼 가면은 뒤쪽에서 들이닥친 열기와 앞쪽에서 이를 드러낸 적의 검을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토끼 가면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그러더니 그의 눈에서 갑자기 광채가 흘러나왔다.
한계라는 빗장을 푼 것처럼 그는 끊임없이 내공을 뿜어냈다.
드디어 그가 밑천을 드러낸 것이다.
열기를 막으면서 검에는 무한의 진기를 실었다.
마지막 한 수에 모든 힘을 담았는지, 가면과 그의 무복이 바람에 흩날리듯 흔들렸다.
한빈의 검은 상대적으로 급격하게 느려졌다.
사실, 한빈이 내는 검의 속도는 그대로였다.
토끼 가면의 검에 비해서 느려졌을 뿐이었다.
[심화편]
[복(復) : 십(十)]
[……]
[복(復) : 구(九)]
이제 바닥을 보이는 회복의 구결.
한빈은 기침을 토해 냈다.
“쿨럭.”
그와 동시에 한빈의 입에서 선혈이 분수처럼 앞으로 뿜어졌다.
졸지에 한빈의 피를 뒤집어쓴 토끼 가면.
그는 재빨리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그가 공간에서 빠져나가자 열기가 한빈이 서 있는 공간을 휩쓸었다.
토끼 가면은 허공에서 옆구리에 박힌 단검 만월을 빼내었다.
그러고는 한빈을 향해 쏘아 냈다.
슝!
만월이 한빈의 심장을 향해 날아왔다.
한빈의 월아가 천천히 단검 만월을 쳐 냈다.
휙!
하지만 월아는 단검 만월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푹!
가죽을 뚫는 소리가 또렷하게 울렸다.
허공에서 토끼 가면의 목소리가 울렸다.
“네 선물은 돌려주마. 날 원망하지 말고 모자란 네 실력을 원망하거라.”
말을 마친 토끼 가면이 허공을 박차고 자리를 떠났다.
* * *
그들의 대결을 보던 효명 공주는 눈을 한계까지 크게 떴다.
그녀는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처음 그들의 대결을 보며, 효명 공주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었다.
보름달이 휘영청 떠 있어서 옆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두 고수의 신형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가끔씩 병장기가 만들어 내는 불꽃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대나무 숲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서 소리는 들렸지만, 승부는 전혀 볼 수 없었다.
그때 불꽃이 대나무 숲 안에서 솟아올랐다.
그 불꽃을 본 설화와 청화가 통을 대나무 숲에 쌓아 놓더니 불을 붙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고 대나무 숲은 잿더미가 되었다.
그제야 효명 공주는 한빈과 적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것도 잠시, 그녀는 경악해야 했다.
적이 쏘아 낸 단검을 맞은 한빈이 쓰러진 것.
주변이 불타고 있는 데다 보름달이 훤히 떠 있어서, 무인이 아닌 효명 공주라 할지라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효명 공주는 무릎을 꿇었다.
털썩.
그녀는 눈앞에서 누군가가 죽는 것을 본 것이 처음이었다.
거기에 상대는 다름 아닌 신선 오라버니였다.
그녀는 몸을 가눌 수 없었다.
그때였다.
그녀의 옆으로 모두가 불타는 대나무 숲으로 뛰어갔다.
타다닥.
그때 장유중이 효명 공주를 일으켰다.
“날이 찹니다. 일단 일어나시지요.”
“저, 저기 신선 오라버니가…….”
“일단 저희는 자리를 피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아니에요. 저도 가 볼래요.”
말을 마친 효명 공주는 아직 불씨가 남아 있는 대나무 숲을 향해 갔다.
대나무 숲의 중간에는 불씨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딱 그곳만 녹색의 잎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마치 화룡의 눈이 푸른빛을 내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문제는 그 안에 쓰러져 있는 사람이었다.
비동으로 대피한 인원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한빈의 주변에 모여 있었다.
가장 먼저 다가간 것은 설화와 청화였다.
설화는 놀란 듯 한빈의 가슴에 박힌 만월을 가리켰다.
“이, 이게 대체…….”
청화는 한빈의 코에 자신의 손가락을 갖다 댔다.
“공자님의 숨결이 느껴지지 않아요.”
순간 주변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장유중이 눈을 크게 떴다.
“팽 유생이 죽었단 말이냐?”
“팽 유생이 이리되다니……. 믿을 수 없군요.”
장혜화도 눈물을 글썽였다.
그 모습에 청화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르겠어요. 공자님이 이러실 리가 없는데…….”
청화는 말을 맺지 못했다.
다만, 설화만이 침착하게 한빈의 상태를 살피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제갈공려가 앞으로 나왔다.
“제가 한번 보겠습니다. 모두 뒤로 잠시만 물러나 주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