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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북팽가 검술천재-514화 (612/621)

514. 선택 (5)

한빈이 토끼 가면을 향해서 천천히 걸어갔다.

이제 기세를 숨길 필요 없다는 듯 한빈은 기세를 피워 냈다.

그 모습에 토끼 가면이 말했다.

“재미있구나, 적룡.”

“그런데 왜 날 적룡이라고 생각하지? 그냥 추측인가?”

진심이 담긴 질문이었다.

이전에도 같은 질문을 던졌었다.

하지만 상대의 입에서는 한빈이 만족할 만한 대답은 나오지 않았었다.

자신을 적룡대협이라고 생각한다면 앞에 이루어졌던 음양쌍마와 마원의 대결은 못 봤다는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자신을 보고 있었을까?

거기에 따라 대처가 달라진다.

그때 토끼 가면이 입을 열었다.

“그 기세와 그 꼴을 한 무림인이 너 말고 있다고 생각하느냐?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내가 널 적룡이라 하면 너는 적룡이어야 하는 것이다.”

“재미있는 노인장이군.”

“내가 죽으라 하면 너는 죽어야 하고……. 문답무용”

“그냥 강자가 살아남는 것으로 하지.”

한빈은 월아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때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토끼 가면이 한빈의 앞에 나타났다.

한빈이 재빨리 앞으로 월아를 뻗었다.

아무렇지 않게 월아를 쳐 내는 토끼 가면.

한빈은 눈을 가늘게 떴다.

토끼 가면이 한 손을 뒷짐 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왼손도 아닌 오른손을 뒤쪽으로 숨기고 있었다.

방금 월아를 튕겨 냈던 수법은 왼손을 사용한 것이 분명했다.

좌수검법에 특화된 무인이라?

한빈은 고개를 저었다.

아마 여유를 보여 주기 위해서 실력을 숨기는 것이 분명했다.

한빈은 왼손에 든 월아로는 오호단문검의 초식을 펼쳤다.

그리고 오른손으로는 성동격서를 이어 나갔다.

챙, 챙.

역시 성동격서는 그에게 통하지 않았다.

거기에 좌수만을 이용한 검은 한빈이 현생에서 본 가장 빠른 검이었다.

챙, 챙.

한빈은 미간을 좁혔다.

자신의 검에 상대가 속도를 맞춰 주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상대는 한빈의 밑천을 보고 싶다는 듯 눈에 보이지 않은 정도로 조금씩 속도를 높여 나갔다.

사실 한빈도 실력을 숨기며 상대의 밑천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검을 몇 번 마주해 본 결과.

그는 호락호락 밑천을 보일 자가 아니었다.

문제는 그가 밑천을 드러내는 순간 한빈의 목이 땅에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한빈에게 필요한 것은 상대가 예측할 수 없는 초식이었다.

상대의 상상을 뛰어넘는 힘을 한 번에 쏟아 낸다면?

아마도 상대는 그에 대한 대비를 못 할 가능성이 컸다.

한빈은 재빨리 초식을 떠올렸다.

‘천라신선보.’

이것은 지선 위상호에게 얻은 초식이었다.

무려 백 년의 내공을 필요로 하는 극의.

거기에 더해 신체에도 무리를 준다.

덕분에 회복의 구결 없이는 사용이 불가능한 초식이었다.

그 후 한빈은 실전에서 이 초식을 사용하지 않았다.

다만, 가끔 수련만 했을 뿐이다.

필요 내공 백 년이면, 본신 내공과 지금 남은 심화편의 구결을 모두 쏟아부어야 가능한 숫자였다.

한빈이 천라신선보를 사용하기로 결심한 이유는 눈앞에 보이는 글귀 때문이었다.

‘무공의 격차가 너무 난다고?’

이 글귀가 눈앞에 보인 것은 용린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나서 처음이었다.

물론 그 뒤에 나온 문구에 살짝 설레기도 했다.

위험이 크면 얻는 이익도 많을 수밖에 없다는 옛 성현의 말씀도 있지 않은가?

순간 한빈의 몸속에 용린의 기운이 재배치된다.

질풍처럼 몰아치던 용린의 기운이 균형을 잡았다.

멀리 뛰기 위해 움츠러든 개구리처럼 용린의 기운은 자취를 감췄다.

모든 것이 자연스러웠다.

한빈은 최근에야 천라신선보의 극의를 약 칠 성 정도 깨달았다.

덕분에 예전보다 한 걸음 정도를 더 걸어갈 수 있었다.

지선과 대결할 때보다 한 단계 더 발전한 것이다.

그렇다면?

최소한 상대에게 구결을 얻을 수 있었다.

한빈은 초식 하나를 더 떠올렸다.

‘전광석화.’

가장 기본적인 초식이면서도 천라신선보의 효과를 더해 줄 수 있는 초식이었다.

한빈은 천천히 그를 향해 나아갔다.

월아가 달빛을 받아 춤추기 시작했다.

월아가 춤을 추는 무희라면, 단검 만월은 무희의 그림자와도 같았다.

그만큼 은밀하게 움직였다.

백 년의 공력이 모두 소진되자 단전은 허무할 정도로 텅 비었다.

줄어든 내공만큼 이상하게 몸은 가벼워졌다.

전에도 느낀 것이지만, 망망대해에 떠 있는 돛단배처럼 자신의 존재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토끼 가면도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며 월아를 막았다.

챙, 챙.

연달아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한 번은 월아였고 다른 한 번은 만월을 막아 낸 소리였다.

그때였다.

한빈이 한 걸음 나아갔다.

그 한 걸음은 신선의 걸음.

한 걸음마다 변화가 있었다.

눈에 띌 정도로 한빈의 검은 속도를 더해 나갔다.

한빈은 지금 펼치는 천라신선보에 모든 것을 걸어 보기로 했다.

자신의 한계는 네 걸음.

한빈은 그 안에 결판이 날 것이라 확신했다.

챙. 챙. 챙.

소리가 연달아 울린다.

앞에 소리가 징을 울리는 소리라면 이번 소리는 칠현금을 튕기는 소리와 비슷했다.

그만큼 빨라졌다는 말이었다.

이제 두 걸음.

한빈의 월아와 토끼 가면의 검이 자취를 감추었다.

팅. 팅. 팅.

칠현금의 소리가 급박해지는 것만 같았다.

절정을 향해 나아가는 곡처럼 두 고수는 밤하늘을 배경으로 급박한 연주를 펼쳤다.

한빈이 할 걸음 더 나아갔다.

천라신선보의 일곱 걸음 중 세 걸음.

토끼 가면이 변화를 보였다.

뒷짐 지었던 오른손을 빼서 자신의 검을 잡았다.

팅. 팅. 팅.

마치 검이 부딪치는 것이 아니라 스치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한빈은 눈을 가늘게 떴다.

무공의 격차가 너무 높다는 말이 지금은 실감 났다.

한빈은 네 걸음 안으로 승부를 끝낸다는 생각을 바꿔야 했다.

일단 한빈은 상대를 인정하고 다음 계획을 실천하기로 했다.

사실 무인으로서의 고집 같은 것은 애초에 없었다.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고 구결을 얻으면 장땡인 승부였다.

한빈은 재빨리 다음 걸음을 걸었다.

천라신선보의 네 번째 걸음이었다.

순간 토끼 가면의 눈이 커졌다.

한빈이 내딛는 한 걸음의 폭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한빈은 단 한 걸음에 멀리 있는 대나무 숲으로 도망갔다.

토끼 가면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희열에 어깨를 부르르 떨었었다.

자신이 적수라 생각한 무인을 처음 만난 것이었다.

자신에게 양손을 쓰게 만든 무인은 상대가 처음이었다.

심장이 터질 것같이 흥분하던 그 순간, 상대가 꽁무니를 뺀 것이다.

순간 토끼 가면의 눈은 분노로 타올랐다.

“이놈이 대체!”

그때였다.

멀리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인장, 이쪽으로 오쇼. 보는 눈이 많아 내 실력을 모두 보일 수 없어서 그러니, 노인장이 양해해 주시오.”

토끼 가면의 눈에 다시 희망의 빛이 감돌았다.

그는 한걸음에 대나무 숲으로 달려들었다.

대나무 숲에 들어간 토기 가면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당황한 것이다.

토끼 가면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앞이 안 보일 정도의 대나무라면 진법이 분명하군. 거기에 만근의 무게라면 만근팔괘진이 확실하군.”

자신이 대나무 숲에 들어온 것은 맞았다.

하지만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빽빽한 대나무 숲이었다.

분명히 들어올 때는 불편함이 없었는데 어느 순간 온몸을 대나무가 감싸고 있었다.

그때 건너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노인장의 안목은 대단하시오.”

“어깨를 짓누르는 무게와 눈앞에 빽빽한 대나무가 보이는데 어찌 모르겠나?”

토끼 가면이 눈을 가늘게 떴다.

대나무 사이로 상대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 상대가 있다는 말이었다.

그때 상대가 말을 이었다.

“어차피 나도 같은 상황이니 편하게 겨뤄 봅시다.”

“그럼 덤벼라.”

“내가 거동이 불편해서 그러니 노인장이 들어오시오.”

상대가 도발하듯 손을 까닥인다.

순간 토끼 가면이 눈웃음을 피워 내며 검을 들었다.

회리릭.

검을 돌리자 토끼 가면 앞의 대나무가 사라진다.

사사-삭.

마치 낫에 갈대가 깎여 나가는 것만 같았다.

그 통로를 통해 토끼 가면이 짓쳐 들었다.

팡!

한빈이 상대를 도발한 이유는 간단했다.

한빈은 아직도 천라신선보를 펼치는 중이었다.

한빈의 한계는 네 걸음.

네 걸음을 모두 소진했는데, 한빈이 그쪽으로 갈 수는 없었다.

한빈은 기다렸다는 듯 월아를 들었다.

만근팔괘진의 효용은 대단했다.

진법의 효과로 한빈과 상대의 속도는 십 분의 일만큼 느려졌다.

만약 밖에서 진법 안쪽을 볼 수 있다면 이제는 둘의 대결을 정확하게 볼 수 있을 터였다.

그 정도로 움직임은 느려졌다.

하지만 만근팔괘진에서는 모두가 느려지기 마련.

천라신선보의 네 번째 걸음을 쓴 한빈은 이제 상대와 속도가 비슷해졌다.

순간 한빈의 시야에 상대의 눈썹에 맺힌 땀방울이 들어왔다.

상대도 이제는 힘을 쥐어짜 내고 있는 것이다.

그때였다.

한빈이 일도양단의 기세로 적의 정수리를 내려쳤다.

상대가 한빈의 월아를 튕겨 낸다.

챙!

동시에 한빈의 월아가 토끼 가면의 옆구리를 찔러 들어갔다.

이것은 하북팽가의 오호단문도를 개량한 수법.

즉, 한빈만이 쓰는 오호단문검의 초식이었다.

월아라는 거대한 용이 앞을 가리고 그 그림자 아래 새끼 호랑이가 발톱을 드러내는 듯한 공격.

순간 한빈은 눈을 가늘게 떴다.

만월이 토끼 가면의 옆구리에 박혔기 때문이다.

한빈의 눈앞에 글귀가 나타났다.

[용안으로 구결을 확인합니다.]

[천급 구결 적(適)을 획득하셨습니다.]

하지만 한빈은 다음 글귀를 읽지 못했다.

상대의 기세가 다시 변했기 때문이다.

용암처럼 들끓던 기세가 솜이불처럼 부드럽게 바뀌었다.

한빈은 재빨리 뒤쪽으로 물러났다.

이것은 본능이 내린 신호였다.

한빈은 토끼 가면의 눈을 바라봤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의 눈빛은 잔잔하기만 했다.

이제는 땀방울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빼!”

“…….”

한빈이 답하지 않자 괴인이 자신의 옆구리를 가리켰다.

토끼 가면의 옆구리에 박힌 단검을 빼라는 뜻 같았다.

한빈은 상대가 자신과 많이 닮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상대도 타고난 투견임이 분명했다.

한빈은 섣불리 다가가지 않았다.

격장지계에 넘어갈 한빈이 아니었다.

한빈은 검을 앞으로 내뻗어 경계하며 용린검법의 심화편을 확인했다.

[심화편]

[복(復) : 사십(四十)]

[……]

[복(復) : 삼십구(三十九)]

구결이 눈 깜짝할 사이에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저 구결이 다 소진되면 한빈의 단전은 견디지 못하고 깨진 호리병이 될 가능성도 있었다.

한빈은 시선을 돌려 지(智)의 구결을 확인했다.

아직 지의 구결은 소진되지 않고 있었다.

순간 한빈이 눈을 빛냈다.

이 싸움에서 최적화된 결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머리를 써야 할 것 같았다.

머리를 써서 최선의 결과를 만들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지(智)의 구결을 모았다.

한빈이 깊은 생각에 잠기자, 지의 구결도 실시간으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한빈의 머릿속에는 수십 가지의 상황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만약 이러면 어떨까?’라는 가정 아래 토끼 가면과의 가상 전투를 그려 보고 있었다.

대결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상황까지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한빈은 눈 깜짝할 사이에 수백 가지의 갈림길에 대한 분석을 끝마쳤다.

한빈이 눈을 떴다.

그 눈빛은 등선을 앞둔 신선처럼 허허롭기만 했다.

드디어 최선의 선택을 찾아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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