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2 화 떠나는 사람들
내일은 새로운 임금을 위한 즉위식이 열리는 날이었다. 하여 궐 밖에서 지내고 있던 도화군을 비롯하여 그의 식솔들이 입궐했다.
이른 아침부터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던 강은 도화군의 식구들이 나란히 대전에 들자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어서 오세요, 제수씨.”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예,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선이가 그새 많이 자랐습니다.”
“워낙 먹성이 좋은지라 하루가 다르게 자라고 있사옵니다.”
군부인의 품에 의젓하게 안겨 잠이 든 선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강은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내일이면 새 하늘이 열릴 겁니다. 아우는 군주가 되는 것이고, 제수씨는 국모로서 내명부의 안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선이는 장차 세자가 될 몸이니 귀하디귀한 몸이 되는 것이니 큰 변화가 있을 겁니다. 허나 너무 어려워들 말고, 그저 자리가 바뀌는 것이라 생각하고, 지금처럼 부부가 서로 의지하고 힘쓴다면 잘해 낼 수 있을 겁니다.”
걱정과 근심으로 그을린 도화군을 바라보며 강은 다독거려 주듯 진심으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군부인과 선이는 내일 즉위식 준비를 위해 제조상궁을 따라 대전을 나섰다.
“그리고 대비마마께서는 즉위식을 보지 않으시고, 오늘 비암사로 떠날 것이다.”
“예? 즉위식은 보고 가신다고 하질 않으셨습니까?”
“그랬었지. 허나, 어차피 할 일을 미룰 필요 있겠느냐.”
“어마마마께서 그리하시겠다고 하신 것입니까?”
그 물음에 강은 뜻 모를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조용히 떠나시겠다는 뜻을 밝히셨으니 누구도 자경전에 갈 필요 없다.”
“……형님.”
“도화군은 내일 즉위식을 무사히 치르고, 대비마마가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절로 떠났다고 선포하도록 해라.”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이렇게 해야 모두가 괜찮을 것이다.”
그 이상은 대비의 얘기를 꺼내려 하지 않았다. 도화군도 뜻을 짐작한바 말을 아꼈다.
“나는 오늘 궐을 나갈 것이다.”
“즉위식도 보지 않고 가시옵니까?”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 마음이 좀처럼 여유롭지 않구나.”
“…….”
“내일 즉위식을 치르려면 할 일이 많을 것이다.”
“오늘 가시면…… 기약 없는 이별이 아니옵니까?”
형제애가 돈독했던 두 사람이었다. 다시 언제 만날지 모르는 이별을 목전에 두고 도화군이 눈시울을 붉혔다.
강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갈하게 관복을 차려입은 도화군 앞에 앉았다.
“이제 네 모든 한마디에 모든 것이 결정되는 것이다. 말 한마디에 신중함을 기하고, 늘 백성들의 고단함을 생각해라. 네 곁에 듬직한 식구들이 있으니 걱정하지 않고 떠나마.”
“형님이 펼치신 선정에 누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잘할 것이다. 형님보다 나은 임금이 되어 태평성대를 이룰 것이다.”
어느새 넓어진 어깨를 두드려 주며 북돋아 주었다. 강에게는 이 자리가 이제야 주인을 찾았다는 생각만이 들었다.
“아우는 형님이 서신을 보내 주시기만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때가 되면, 그리하마.”
“예,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형님.”
이젠 모든 준비가 끝났다. 마음만은 벌써 용포를 벗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도아에게 향하고 있었다.
* * *
즉위식을 앞두고, 과거의 흔적은 모두 사라져야 했다. 그 흔적에 후궁이었던 청아가 속해 있으니 속히 궐을 떠나야 했다.
후궁의 품계를 받아 하사받았던 패물과 비단옷을 모두 빼앗기고, 오직 소복 한 벌과 검은색으로 칠해진 나무 비녀 하나만 갖고 나갈 수 있었다.
“아버지는 아직이냐.”
“연통을 넣었으니 곧 오실 것이옵니다.”
청아가 이를 바득바득 갈며 부친을 기다리고 있을 때 어수룩한 몰골로 대제학이 들어왔다.
“아버지! 정말 이대로 쫓겨나야 합니까?”
“…….”
“저더러 가문에서 이름을 파고, 평민으로 살랍니다. 이럴 수가 있는 겁니까?”
“사약을 받지 않은 것을 감지덕지로 여겨야지.”
“예? 지금 뭐라 하셨습니까?”
청아는 붙들고 있던 부친의 팔을 놓으며 황당한 얼굴을 지었다. 자신이 들은 게 맞는지 믿기지 않았다.
“나는 이제 최하위 문반직을 지내야 한다. 내 아랫사람으로 두고 일을 부리던 자들을 웃전으로 모셔야 하지. 그게 어떤 건지 아느냐?”
“그래도 아버지는 사대부로 사실 수는 있지 않습니까! 저는……. 이대로 쫓겨나면 이름도 없이 초가에서 살아야 한단 말입니다! 이대로 지켜만 보실 겁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너를 도우면 이마저도 가문을 지킬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께 유일한 자식인 나를 버리겠다는 겁니까?”
여인의 몸이었으나 이자의 가문이 유일하게 얻은 자식이 청아였다. 그런 자신을 버린다니 청아가 비아냥거리며 언성을 높였다.
“얼마 전에 얻은 첩이 회임을 했는데 의원 말로는 틀림없는 아들이란다. 앞으로 그 아이가 우리 가문을 잇게 될 것이다.”
“하…….”
“죽으려면 명예롭게 죽거라.”
울고 싶지 않았다. 다른 자식이 생겼다고 있는 자식을 버리는 사람 앞에서 눈물 따위 보이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죽어도 좋다는 말에 청아의 눈에 고여 있던 눈물이 힘없이 떨어졌다.
“다시는 날 찾지 마라.”
눈물 앞에 비정한 아버지는 행여나 불똥이 튈까 봐 서둘러 전각을 빠져나갔다. 앞으로 두 번 다시, 청아를 찾지 않을 것이다.
“이제 떠나셔야 하옵니다.”
“안 숙의는 어찌 되었느냐.”
“전하의 명으로 궁가에서 지낼 것이라 했사옵니다.”
“결국은 나만 자멸했구나.”
한참 동안 자리에 서서 헛웃음을 짓던 청아는 이내 연 상궁의 안내를 받아 초라한 가마에 몸을 실었다.
한때는 교태전을 노리며 야심을 갖고 입궐했던 화려한 날이 있었다. 허무하게 사라진 후궁들처럼 시시하게 지지 않겠노라 결심을 했었는데 결국은 이리되었다.
* * *
열두 살의 어린 나이로 대궐에 시집을 왔던 대비 조 씨는 반평생이 넘는 시간을 대궐에 묻혀서 살아왔다.
눈을 감는 날까지 그리되리라 여기며 궐 담장 너머의 삶은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결국 이런 날이 오고야 말았다.
“대비마마, 엄 상궁이옵니다.”
“들라.”
말이 끝나자 대전을 지키는 제조상궁이 함께 들었다.
“대비마마, 비암사로 행차하실 채비가 모두 끝났다고 하옵니다.”
“주상이 자네더러 이 사람을 배웅하라 하던가?”
“망극하옵니다, 대비마마.”
“도화군은 입궐했느냐?”
“예, 그러하옵니다.”
“그런데도 코빼기도 비추지 않는단 말이냐!”
서안을 내려치며 화를 냈으나 그렇다 하여 달라질 건 없었다. 제조상궁은 허리를 더 숙이며 어서 가마에 오르라 채근했다.
“전하께서 비암사로 전령을 보내시어 대비마마를 모실 준비를 하라 이르셨사옵니다. 대비마마께서 지내심에 있으시어 불편함은 없으실 줄로 아옵니다.”
“오죽이나 할까.”
“송구하오나 전하께서 길시를 정해 주신지라 이제 그만 가마에 오르셔야 하옵니다.”
“주상께서 오기 전에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나올 것을 예상했기 때문에 강은 한마디를 덧붙여 제조상궁에게 어명을 내려 놓았다.
제조상궁이 가까이 다가와 대비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전하께서 이르시기를 무력을 동원해도 좋다고 하셨사옵니다.”
“나를 이 자리에서 끌어내기라도 하겠다는 것이냐!”
“송구하옵니다, 대비마마.”
지금 상황이라면 강은 군사들을 동원하여 대비를 처소 밖으로 끌어낼 수 있었다. 지켜보던 엄 상궁이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마마께서는 백성들에게 귀감이 되시는 분이시옵니다. 부디 민심을 살펴 주시옵소서.”
“…….”
“전하께서 비암사로 전령을 보내셨다니 누구도 마마를 홀대하지 못할 것이옵니다.”
“환복 없이 이대로 갈 것이다.”
“그러시옵소서. 소인이 마마를 모시겠사옵니다.”
결국은 이렇게 될 일이었다. 버티지 못할 것임을 대비 스스로도 알면서도 괜히 으름장을 놔 본 것이었다.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난 대비 조 씨는 사치로 도배를 해 놓은 처소를 미련 가득한 눈으로 둘러보다가 제조상궁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전각 밖에는 대비가 타고 갈 가마와 짐을 든 궁녀들이 줄을 지어 서 있었다. 생각보다 많은 인원은 아니었다.
그리고 눈을 아무리 씻고 찾아봐도 왕실 사람 하나, 대비의 덕을 본 신료들 한 사람 보이지 않았다. 모두 부질없는 일이었음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배은망덕한 놈.”
대비는 도화군을 떠올리며 치를 떨었다.
“내 앞에 와서 싹싹 비는 꼴을 보고 말 것이다.”
“오르시옵소서.”
다시 돌아올 수는 있을까? 가마에 오르려던 대비는 멈춰 서서 자경전을 한눈에 바라보았다.
‘내 그것을 궐에 들인 일이 천추의 한이로다.’
대비가 탄 가마가 천천히 대궐을 빠져나갔다. 그 뒤로 궁녀들이 행렬을 따르며 초라한 막이 내렸다.
* * *
밤하늘에 눈이 휘감겨 내리고 있었다. 별당에 있다가 눈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마루로 나온 도아는 손을 내밀었다.
눈발이 작아서 훤한 낮이었으면 잘 보이지 않았을 텐데 까만 밤이라 흰 눈이 도드라져 보였다.
한참 동안 눈을 바라보던 중, 어디선가 낯선 소리가 들려왔다. 사냥꾼들의 습격을 받은 터라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져 있었다.
도아는 바로 곁에 두었던 활을 집어 들고 일어나 소리가 나는 쪽을 응시했다.
“왜 보고만 있소?”
어둠 속에서 홀연히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강이었다.
“전하…….”
“이제는 아니오.”
“…….”
“계속 그러고 있을 것이오?”
떨어지는 눈을 맞으며 환하게 웃고 있는 사내가 마치 그림과도 같았다. 도아는 손에 쥐고 있던 활을 떨어뜨리고, 그에게 달려갔다.
돌계단을 밟고 아래로 내려간 도아는 두 팔을 벌리고 기다리고 있던 강의 품에 와락 안겼다.
“보고 싶어서 혼이 났소.”
“저도요.”
서로를 꼭 끌어안고 재회를 만끽하던 두 사람이 나란히 떨어졌다. 도아는 그의 얼굴에 묻은 눈을 가볍게 닦아 주었다.
“떨어져 있는 건 두 번은 못 할 짓이오.”
“제가 그리 좋으십니까?”
“그걸 말이라고.”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짓고 있던 강이 황급히 도아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눈이 묻어서.”
그러자 이번에는 도아가 까치발을 들고 그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눈이 묻어서요.”
“온몸에 눈을 묻히고 싶군.”
“못 말리십니다.”
그리웠던 그의 장난에 도아가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강이 이번에는 제대로 다가왔다.
도아는 두 팔을 뻗어서 강의 목을 감싸 안았다. 작은 입술에 집중하던 강은 손길이 느껴지자 씨익 웃으며 도아를 안아 들었다.
“악……!”
외마디 비명은 다시 강의 입술에 말려 들어가 사라져 버렸다. 도아를 손쉽게 한 손으로 안아 든 강은 성큼성큼 별당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