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궁,왕을적시다 (74)화 (75/93)

제 74 화 사약 그리고 선위

아침 수라를 물리고, 적막함에 스스로를 가두고 생각에 여념이 없을 때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따로 묻지 않아도 저들이 목청껏 어명에 반대를 외치는 까닭은 하나였다. 도아를 사사하여 국법의 지엄함을 보이란 것이었다.

“저, 전하…….”

“시장하구나.”

“예?”

“상선이란 자가 이렇게 눈치가 없어서야. 수라상을 들이란 말이다.”

“아, 아! 예, 전하.”

곧이어 물렸던 수라가 다시금 대전에 들여졌다. 밖이 한창 소란스러운 시국에 기미상궁이 눈치를 보여 기미를 했다.

“참, 가서 도승지를 불러와라.”

그러나 강은 개의치 않고 평소보다 느긋하게 수라를 들었다. 마지막으로 물로 입을 헹구고 두둑한 배를 만지며 상을 내가라 손짓했다.

“목이 꺼끌꺼끌한 것이 풍한이 오려나.”

“대추차를 내오라 이르겠사옵니다.”

“그게 좋겠구나.”

이번에는 말뜻을 제대로 알아들은 상선이 냉큼 밖으로 나가 대추차를 내왔다.  

“대추차가 맛있는 것을 보니 겨울이 오긴 온 모양이다.”

“…….”

“상선은 내 오랫동안 곁에 두고 신임하였다. 나를 그대가 속속들이 알고 있듯이 나도 그대를 누구보다 잘 알지.”

“망극하옵니다.”

“도화군이 풍파를 만나게 되거든 자네의 지혜를 아끼지 말고 충언을 올리도록 하게.”

이미 도화군을 대전으로 불러 독대를 청했던 날부터 상선은 알고 있었다. 말을 알아들은 상선이 바닥에 엎드려 흐느꼈다.

“차를 다 마셨으니 그만 일어나야겠군.”

“전하…….”

“그만 일어나자.”

묵은 먼지를 털어 내듯 홀가분하게 자리에서 일어선 강이 밖으로 나가자 도승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대전 뜰에 엎드려 목청껏 소리를 높인 지 한 시진 만에 강이 모습을 드러냈다. 꽤 여유롭고 의연한 모습이었다. 

“안 그래도 경들을 부르려 했는데 이렇게 과인의 수고를 덜어 주다니 고맙군.”

강은 뒷짐을 진 채 우두머리로 보이는 대제학 앞에 섰다. 모여 있던 이들은 고개를 치켜들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경들의 생각이 옳다. 귀인을 저대로 둘 수는 없지.”

“예?”

“마땅히 귀인을 폐출하여 궐 밖으로 내치도록 할 것이다.”

모여 있던 이들이 크게 술렁였다. 강의 반응이 이러리라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듯 할 말을 잃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사사는 안 돼.”

“하오나 전하! 귀인은 감히 사람도 아닌 몸으로 전하를 모시며 종묘사직을 위태롭게 만든 죄인이옵니다. 사약을 내리시어 모두에게 본을 보이시옵소서!”

“경들이 이럴 것 같아 과인이 모두에게 숨긴 것이오. 과인은 애초에 귀인이 인어란 것을 알고 있었소.”

“전하께서 귀인을 총애하심은 일찍이 알고 있사오나 이런 식으로 두둔하심은 모두의 반발만 사게 될 것이옵니다.”

대제학이 속지 않겠다는 듯 맞서자 강이 여유롭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과인이 세자 시절에 바다에 빠져서 죽을 고비를 넘긴 것을 익히 알고 있을 것이오.”

“그러하옵니다.”

“그때 과인을 구해 준 사람이 바로 귀인이오.”

“그럴 리가…….”

“귀인은 과인의 생명을 구해 준 은인이요. 생명을 빚진 마당에 사사라니, 금수만도 못한 짓이오. 정이 그리 사약을 내려야겠거든 과인에게 내리는 건 어떠하오?”

왕에게 사약을 내리다니, 듣고 있던 대제학이 입을 벌린 채 숨을 들이마셨다. 

“원한다면 기꺼이 마시도록 하지.”

“마, 망극하신 말씀 부디 거두어 주시옵소서.”

“처음부터 귀인을 은애하여 곁에 두길 소망하고 입궐시킨 것은 과인의 뜻이었소. 그러니 죄의 잣대를 그쪽으로 겨눌 생각은 추호도 않는 게 좋을 것이오.”

“…….”

“그렇다 하여 없던 일로 덮어 두고 입 씻을 생각은 없소. 과인의 행동에 책임을 질 것이오.”

모두 어안이 벙벙하여 우뚝 서서 막힘없이 말하는 강을 올려다보았다. 그때 눈짓을 하자 뒤에 빠져 있던 도승지와 상선이 곁에 나섰다. 

“모두 이게 무엇인지 잘들 알 것이오.”

“어보와 교지가 아니옵니까?”

“맞소. 잘 보았소.”

“어찌 이것을…….”

“과인은 도화군에게 선위할 것이오.”

엄청난 소리를 듣자고 온 것이 아니었다. 선위라니, 계획이 어긋나도 한참 어긋나 버리고 말았다. 

자리에 있던 신료들 모두 휘청이며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대제학은 풀썩 뒤로 나자빠지며 넘어갔다. 

“그리고 과인은 죄를 뉘우치며 조용히 살겠소.”

“전하! 부디 망극하신 말씀 거두어 주시옵소서!”

“망극하긴, 과인이 총애하는 귀인을 사사하라 떼로 몰려와서 목청 높일 때는 언제고.”

“전하! 소신들은 그저 종묘사직을 위해 직언을 드린 것이옵니다! 서, 선위라니 당치 않으시옵니다!”

“과인의 뜻은 변함없소.”

그는 질척이며 다시 언쟁을 하려는 이들을 향해 갈무리를 지었다. 매서운 눈빛에서 뜻이 바뀌지 않을 것임을 읽었다. 

“전하! 이는 소신의 눈에 흙이 들어와서 받들 수 없사옵니다!”

“계속 목소리를 높이면 과인에게 사약을 내리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겠소.”

“헉……. 전하!…….”

“물러들 가시오.”

용포가 거센 바람에 펄럭였다. 대제학이 급한 마음에 기어가 옷자락을 잡으려 했으나 틈을 보이지 않아 넘어지고 말았다.

“일이 아주 잘못되고 있는 것 같은데.”

“선위만은 막아야 하네. 전하께서 선위하시면 닭 쫓던 개 신세가 될 것이네.”

바닥에 엎드려 있던 대제학은 주먹을 꽉 말아 쥐며 어금니를 깨물었다. 

* * *

궐에 다녀온 후로 도화군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했다. 도망치며 살기에 급급했던 인생이 용상에 앉을 수는 없었다.

“이러다 병나시겠습니다.”

“부인…….”

“이리 와 앉으세요.”

군부인은 방 안을 배회하던 도화군을 자리에 앉혀 주며 따라 앉았다. 군부인도 소식을 듣고, 뛰는 심장을 주체할 수 없었으나 이내 안정을 되찾았다.

“아주버님께 형제라고는 서방님뿐입니다. 그렇다 해서 후사가 있으신 것도 아니니 서방님 말고는 왕명을 받들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

“아무리 왕의 총애가 깊을지라도 다른 신료들이 계속해서 반발을 해 온다면 어느 누가 버틸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형님께서 물러나시게 둘 수는 없습니다.”

“용상에 앉아 세상을 가진들 불행하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입니까?”

허를 찌르는 군부인의 말에 도화군은 시선을 맞추었다. 얼마 전 강이 제 품에 안겨서 서글프게 울던 날을 떠올렸다.

“귀인마마는 결국 폐출될 겁니다.”

“…….”

“서방님이 왕위를 원치 않으신다면 소첩도 더는 권해 드리지 않겠습니다. 다만, 망설이는 것이 형님을 향한 우애와 막연한 두려움 때문이라면 어명을 받들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삶이라 모르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주버님이 서방님을 먼저 부르시어 뜻을 비추신 겁니다.”

군부인의 말을 곱씹어 보던 도화군은 한숨을 쉬며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모든 것이 급작스럽게만 느껴졌다.

“서방님은 형님께서 어찌 지내시길 바라십니까?”

“무얼 말입니까?”

“왕의 자리에 있으니 외롭고 힘든 일도 모두 이겨 내야 한다, 그러니 마음쯤은 가볍게 저버리고 살아도 된다고 여기십니까? 불행해도, 임금이니까.”

“내게는 형님의 안위가 최우선입니다. 무엇보다 형님이 부디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그거면 됩니다.”

말하고 보니 답은 정해져 있었다. 누구보다 강의 행복을 바라는 사람은 도화군 본인이었다.

“그러면 됐습니다. 그쪽으로 길을 두시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

“차를 내오겠습니다.”

말을 마친 군부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도화군은 고개를 돌렸다.

반쯤 열린 창틈 너머로 앙상한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게 보였다. 그리고 강이 품에 안겨 흐느껴 울던 소리가 귓전을 맴돌았다.

도아가 궐에서 사라진다면 강은 텅 빈 대전에서 매일 밤, 홀로 그렇게 울 것만 같았다. 그 생각을 도무지 지울 수가 없었다. 

* * *

앞을 가로막는 내관의 따귀를 때리며 우악스럽게 길을 열고, 전각으로 들어온 대비 조 씨는 소란에 나온 도아를 마주했다.

가벼운 차림새에 머리를 내리고 있는 모습으로 대비를 맞이한 도아는 엄 상궁이 손에 들고 있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죄인은 꿇어앉으라.”

“전하께서 하명하신 일이 없으시옵니다.”

“억지로 꿇어앉혀야 말을 들을 것인가?”

말씨름을 해 봤자,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도아는 제 팔을 붙드는 무이의 손을 풀고,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러자 대비는 엄 상궁에게 눈짓을 해 보였다. 바짝 긴장한 듯 경직되어 있던 엄 상궁이 들고 있던 소반을 도아의 앞에 내려놓았다.

사발 안에 든 검정 물이 출렁였다. 도아는 그것을 보고, 고개를 들어 대비를 응시했다.

“사약이다.”

“사, 사약이라니요! 아무리 대비마마시지만 전하께서 아무 말씀도 없으셨는데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옵니다!”

“제 주인이 나대니 아랫것까지 나를 업신여기는구나.”

“대비마마……!”

함께 무릎을 꿇고 있던 무이가 나서려 하자 도아는 손을 들어서 저지시켰다. 

“너 때문에 주상은 기어코 위험을 무릅쓸 것이다.”

“…….”

“이미 숱한 신료들이 대전으로 달려가 귀인을 사사하라 외치고 있다. 그 외침을 외면할수록 민심도 함께 달아날 것이다. 버틸수록 용상이 위태로워지겠지. 네가 원하는 것이 그런 것이냐?”

“예, 그런 것을 원하옵니다.”

도아는 비틀어짐 없이 또박또박 고하였다. 공기가 싸늘하여 밖에 나온 지 반 시진도 되지 않았으나 온몸은 돌처럼 얼어붙기 시작했다.

“대비마마, 소인이 이 사약을 먹길 바라시옵니까?”

“오냐, 내 앞에 이 사약을 먹고 귀인이 피 토하고 죽는 꼴을 봐야 내 속이 풀릴 것 같구나.”

“그리해 드릴 수는 있사옵니다.”

“잘됐구나. 지체 말고 어서 마시거라.”

“허나 다시는, 대비마마께서 전하를 뵈올 수 없을 것입니다.”

겁박이라면 겁박이었다. 매서운 눈초리가 대비를 훑고 지나가니 그 말이 과연 가벼운 것이 아님을 알았다.

“주상이 한낱 계집 때문에 천륜을 저버릴 것 같으냐?”

“겨우 버티고 있는 천륜이라 손짓 한 번만으로도 무너질 수 있사옵니다.”

“듣자 듣자 하니!”

“전하께서는 죽을 때까지 대비마마를 만나 주지 않을 것입니다.”

“내 알아서 하마. 그러니 너는 사약을 마셔라.”

사건이 터지고, 강이 그토록 애절하게 부탁을 올렸는데 대비는 추호도 마음을 기울이지 않았다. 

마음이 허물어지고 약해져 있던 도아는 찢어지는 소리를 지르는 무이를 두고, 사발을 집어 들었다. 

차라리 자신이 먹겠다며 나섰으나 도아는 으름장을 놓았다. 그리고 흉물스러운 사약을 입으로 가져가기에 이르렀다.

그때 궁녀들의 행렬 맨 끝에 서 있던 란희가 한달음에 달려와서는 도아의 손을 탁 치우고 단숨에 사약을 제 입속에 털어 넣었다.

“뭐 하는 짓이냐!”

놀란 대비가 소리를 질렀으나 이미 상황은 벌어진 후였다. 란희의 손에 들려 있던 그릇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누가 너더러 마시라 했느냐?”

“마마…….”

“어리석구나.”

말은 그리했으나 도아의 목소리는 떨고 있었다. 란희는 빨갛게 오른 얼굴로 눈물을 글썽이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지금은 이 길밖에 없었습니다.”

“말하지 마라. 더했다간 피를 토할 것이다.”

“잘못…… 잘못했습니다. 흡……!”

그 말대로 잘못을 빌던 입에서 검붉은 피가 뿜어져 나왔다. 

“가서 사약을 다시 가져와라.”

“예?”

“속히 움직여라!”

대비는 죽어 가는 란희를 보고도 어떤 기색도 없이 엄 상궁에 새 사약을 가져오라 명할 뿐이었다.

“대비마마! 대비마마!”

그때 자경전 나인이 거품을 물고 달려왔다. 

“대비마마! 큰일 났사옵니다!”

“가서 사약을 가져오래도?”

“전하께서 선위를 선포하셨다고 하옵니다!”

“지금 뭐라고 했느냐?”

선위라는 말에 란희를 바라보던 도아의 시선도 대전 나인에게 향했다. 대비는 믿기지 않는 듯 얼굴을 파리하게 떨었다.

“대전 앞에 모인 신료들 앞에서 선위를 선포하시며 어보와 교지를 가지고 나오셨다고 하옵니다.”

“주상!”

허공에 대고 고함을 치던 대비는 그대로 뒤로 넘어가며 혼절했다. 한쪽에서는 피를 토하고, 한쪽은 정신을 잃었다. 

대비가 혼절하자 엄 상궁은 모두를 지위하며 속히 자경전으로 돌아갈 것을 명했다. 이 무리가 떠나자 바닥에 쓰러져 죽어 가는 란희만이 남았다.

흙바닥에 쓰러진 란희의 입에선 쉴 새 없이 피가 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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