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3 화 대궐에 출몰한 괴물
자정이 넘어 늦은 시간이 되었으나 강은 자리에 들지 않고, 되려 어두운 대전을 촛불로 밝히며 자리를 지켰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들을 생각하며 괴로움에 한숨을 쉬고 있을 때 기다리던 손님이 찾아왔다.
“왔느냐.”
“예, 형님.”
상선을 보내서 도화군을 불러오라 시켰다. 곧장 입궐한 도화군은 이미 소문을 접한 듯 차마 고개를 들어 강을 보지 못했다.
“네 태몽을 알고 있느냐?”
“예?”
“내가 알기로 아마 아무도 얘기해 주지 않아 모를 것이다. 맞느냐?”
“예……. 아무도 얘기해 주지 않아 모르옵니다.”
가엾은 처지였다. 그런 태몽을 꾸고 태어났음에도 서자라는 이름에 갇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네 태몽은 아바마마께서 꾸셨다.”
“형님은 알고 계시옵니까?”
“암, 알다마다. 어마마마께서 어린 너를 모질게 대하고, 경계한 것은 모두 그 태몽에서 비롯되었다.”
“그게 무슨…….”
“푸른색 용이 여의주를 물고 나타나 아바마마의 품으로 달려들었다고 했다.”
흘려들어도 상서로운 태몽이었다. 난생처음 태몽 이야기를 들은 도화군은 경직되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바마마께서는 그 태몽의 주인을 잘못 아시고, 어마마마에게 말했지. 그러나 며칠 후 너의 생모가 회임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아…….”
“후에 생길 분란을 걱정한 아바마마께서 너의 태몽에 대해 함구하라 명하셨다. 그렇다 하여 어마마마의 행동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지.”
“형님.”
“네가 비범함을 애써 감추고, 백성들을 가엾이 여겨 온정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말을 마친 강은 갑작스레 어보를 꺼내 상에 올려놓았다. 어보란 국권의 상징으로서 임금이 쓰던 도장이었다.
“이미 소문을 들어서 알고 있겠지.”
“망극하옵니다.”
“그 사람이 많이 아프다.”
“귀인마마 말씀이시옵니까?”
그 물음에 강은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아프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곁에 있어 주고 싶다. 그런데 이곳에선 그 사람을 말려 죽이려 들것이다.”
“형님께서도 함께 대궐을 나가시려는 겁니까?”
“하여 너를 불렀다.”
“혀…… 형님…….”
말의 의미를 알아차린 도화군이 어찌할 새도 없이 강은 어보를 앞으로 내밀었다. 이것은 선위를 뜻했다.
이에 도화군이 황급히 자세를 고치고,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부디 뜻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너도 알지 않느냐. 난 세자 시절에 이미 왕위를 내려놓았다.”
“오늘 아우는 궐에 들지 않은 것이옵니다. 아무것도 듣지 못했사옵니다.”
“처음부터 네 자리였어.”
“형님!”
망극한 말에 몸부림치던 도화군이 고개를 쳐들고 언성을 높였다. 그의 눈에 아득하게 눈물이 차올라 있었다.
“이 땅 위에 있는 모든 것이 형님의 것입니다. 모두가 형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옵니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어 이 아우의 마음을 아프게 하시옵니까?”
“마땅히 선위 절차를 밟아 교지를 내릴 것이다.”
기어이 그 입에서 선위란 단어가 나오고 말았다. 도화군의 얼굴 위로 뜨거운 눈물 줄기가 흘러내렸다.
자리에 앉아 있던 강이 조용히 일어나 울고 있는 도화군 앞으로 가 앉았다.
“멋지게 말하고 싶어서 숨겼는데 네가 이리 우니 말해야겠구나.”
“…….”
“그 사람은 궐에서 살 수 없고, 난 그 사람 없이 살 수가 없다.”
“…….”
“너를 위해서가 아니다. 나를 위해서다.”
자신을 위해 진심으로 울어 줄 수 있는 사람. 강은 손을 뻗어서 눈물을 닦아 주고, 도화군을 안아 주었다.
* * *
어릴 적 동그랗게 몸을 말고 자던 버릇이 남아 있던 도아는 홀로 잠들 때면 간혹 그리 잠들고는 했다.
옅게 잠들었던 탓일까? 누군가의 손길이 닿는 것이 느껴지자 무거운 눈꺼풀이 올라갔다.
“언제 오셨어요?”
잠들 때까지도 보지 못했던 사람이 보였다. 강은 곁에 앉아 물끄러미 자는 도아의 얼굴을 관찰하고 있었다.
“모르겠소.”
“깨우시지 않구요.”
“이대로 보고 있는 것도 나쁘지 않았소.”
도아는 여전히 누워 있는 자세로 속삭이듯 말을 건넸다. 강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어서 얼굴을 어루만져 주었다.
그 손길을 느끼기라도 하듯 도아는 눈을 감은 채 그의 손길에 의지했다. 따듯한 체온에 시린 마음이 녹아내렸다.
“좀 쉬었소?”
“예, 누워만…….”
“응?”
곧이어 고운 얼굴 위로 고통이 서렸다. 도아는 애써 내색하지 않으려 했으나 강도가 점차 세지는 고통을 삼킬 수가 없었다.
“아픈 것이오?”
“아니…… 아닙니다.”
“아니긴! 이렇게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는데!”
“조금만…….”
어의를 부르려 했으나 마땅치 않았다. 강이 안절부절못하자 도아는 그의 옷깃을 붙든 채 이불에 얼굴을 묻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강은 얼굴을 숨기고 있는 도아를 일으켜 앉혀 품에 안아 주었다. 숨이 막히도록 꽉 세게 안았다.
‘내가 없는 곳에서 그대는 이렇게 아팠어.’
도아를 품에 안은 강은 그에 못지않게 고통스러운 얼굴이었다. 가늘게 떠는 몸은 말 그대로 한 줌이었다.
손을 들어서 등을 쓸어 주었다. 고통이 사라질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 * *
이윽고 대제학과 도총관은 자신들과 마음이 맞는 이들을 하나둘 모아 세력을 만들기에 이르렀다.
이 사건으로 적잖게 충격받은 이들이 도아를 보호하려는 강의 의견에 반기를 들고 일어났다.
“좌상의 죄가 없다고 할 수 없소.”
“만일에라도 귀인이 낳은 자식이 세자가 되기라도 했다면 이는 종묘와 사직이 위태로운 것으로 끝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좌상이 사사로운 권력욕에 사로잡혀 이 같은 엄청난 일을 저지른 것이오.”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대제학과 도총관은 치열을 몰아낼 계획으로 여론을 몰아갔다. 술렁이는 틈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이 대다수였다.
“귀인을 사사하고, 좌상에게 사약을 내려야 마땅할 것이오.”
“전하께서 귀인을 남다르게 총애하시니 쉬운 일은 아닐 것이오.”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전하께서 그러하시니, 반기를 들기 위해 모인 것 아니오? 조정에 한두 사람의 의견은 묵살하실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대전으로 간다면 어심을 돌릴 수 있소.”
“당장 대전으로 가십시다. 이럴 때일수록 가신들이 충언을 드려야 하는 것이오.”
웅성웅성. 곧이어 대제학의 의견에 모두가 따르겠다는 동의를 표시했다. 그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서렸다.
* * *
자리에 앉아 머리를 만지던 대비 조 씨는 엄 상궁의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나인이 돌아왔다고?”
“예, 귀인이 대비마마께 돌아가라며 보냈다고 하옵니다.”
“이 판국에도 아주 당당하구나.”
“하온데 그 나인이 대비마마를 뵙기를 청했사옵니다. 어찌 하올까요?”
“가만히 있어도 어지러운데 보탤 것 없다.”
“망극하옵니다, 마마.”
이런 상황에 하찮은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대비는 그리 말하고 다시 자세를 고쳐 앉아 머리로 계획을 세웠다.
“대비마마! 대비마마!”
이내 생각은 멈춰야만 했다. 엄 상궁이 밖으로 나가 뜻을 전했으나 란희는 발버둥 치며 돌아가지 않고, 소리를 질렀다.
“소인과의 약조를 지켜 주시옵소서! 마마! 대비마마!”
“어허! 어느 안전이라고 목청을 높이느냐! 진정 죽고 싶은 것이냐?”
“약조를 지키신다는 말씀을 듣기 전에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것입니다.”
“뭣들 하느냐! 어서 이것을 끌어내라!”
그럴수록 소란만 더 커질 뿐 나아지는 것이 없다. 대비는 한숨을 깊이 내쉬며 결국 란희를 처소에 들였다.
그런데 처소로 들어온 란희의 꼴이 퍽 볼만했다. 검게 그을린 얼굴에 눈은 퉁퉁 붓고, 입술을 말라 터져 있었다.
“첩자로 모신 주인도 네게는 주인이었나 보구나.”
“소인을 궐 밖으로 내보내 주신다는 약조는 어찌하여 지키지 않으시옵니까?”
“하찮은 궁녀 하나 궐 밖으로 보내는 일 따위 어려울 것 없다.”
“허면 소인을 당장 보내 주시옵소서.”
“네가 벌인 일이니 네가 마무리를 지어야지.”
이 말은 아직 대비에게 란희가 쓰임이 남았다는 뜻이었다.
“소인이…… 무엇을 더 어찌…….”
“걱정 마라. 그저 증인으로 나서 몇 마디 하면 끝날 것이다.”
“이미 모두가 보질 않았습니까?”
“으흠, 그것 말고. 귀인이 끔찍한 진실을 숨기고 왕을 조종하려 들었다느니 뭐 그런 것 말이다.”
“귀인마마는 그런 적이 없사옵니다.”
“없는 사실은 만들면 되겠지. 너는 그렇게만 하면 소임을 다하는 것이니 그때는 양손 가득 쥐어서 궐 밖으로 내가 보내 주마.”
결국은 란희가 끝까지 도아의 옷깃을 잡고, 지옥으로 던져야 끝나는 일이었다. 마른 눈물이 뚝 떨어졌다.
* * *
낙선재를 찾은 강은 가볍게 차를 마시고, 산책을 하자며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다른 이를 모두 물리고 두 사람만 걷기에 이르렀다.
“귀인이 중전을 몹시 의지했던 모양이군.”
“송구하옵니다.”
“과인에게 송구할 일은 아니지. 귀인이 의지할 곳이 있었다는 것이 다행이라 생각하는 중이었소. 중전에게는 늘 신세를 지는군.”
“당치 않으시옵니다. 귀인은 괜찮은 것이옵니까?”
“그럴 리가.”
그리 말하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은하는 괜한 것을 물었다는 생각에 입술을 꽉 다물었다.
“귀인이, 많이 아프오.”
“그게 무슨, 대체 어디가 말이옵니까?”
“어의는 손댈 수 없이 아주 많이.”
“전하…….”
“그래서 하루라도 빨리, 이 대궐에서 나가야 하오.”
누구보다 서로의 마음을 잘 읽는 두 사람이었다. 은하는 그가 절대 도아를 홀로 궐 밖으로 내보내지 않으리란 것을 알았다.
“망극하오나 선위를 생각하시옵니까?”
“역시 중전이시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뱉은 말에, 강이 빠르게 수긍하자 은하는 손으로 입을 막았다.
“곧 대신들이 들고일어나 귀인에게 사약을 내리라 할 것이오. 시간을 허비했다간 꼼짝없이 그들에게 먹히고 말겠지. 해서 어느 때보다 신속하게 움직일 생각이오. 그 전에 중전에게만큼은 미리 말해 줘야 할 것 같아서 왔소.”
“귀인의 비밀을 아시고, 이미 마음을 정하신 것이지요?”
“중전의 눈은 속일 수가 없군.”
매의 눈이었다. 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번에도 부정하지 않았다. 귀신이라도 본 듯 미치게 뛰는 심장이 도무지 가라앉질 않았다.
“그리고 하나 더.”
“신첩이 까무러치는 것을 보시려 작정을 하셨사옵니다.”
“이건 중전의 일이니 까무러치지 말고, 잘 들으시오.”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중전과 과인은 부를 가지고 태어난 죄로 내 삶을 내 마음대로 살아 본 적이 없소. 그렇게 태어났고 그렇게 살다 죽어야 마땅하지.”
은하는 쉬지 않고 뛰는 심장을 애써 잡으려 했다. 그리고 강이 하는 말을 토시 하나 빼놓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과인은 선위를 선택했소.”
“…….”
“그래서 중전에게도 선택할 기회를 주려 하오.”
“무엇을 말입니까?”
“사찰에서, 그가 기다리고 있소.”
어떤 상황에도 강의 말을 또렷하게 알아듣던 총명한 사람이, 이번에는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고 헤맸다.
“그 사내에게 과인이 뜻을 전했소. 그리고 그는 기다림을 택했소.”
“…….”
“중전이 원하면 갈 수 있도록 과인이 길을 만들어 줄 것이오.”
“…….”
“대궐에 남겠다면, 그 또한 그리해 줄 것이오.”
누구도 은하의 뜻을 존중하며 묻지 않았다.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길이 열렸다.
간신히 붙잡고 있던 심장은 바닥으로, 끝없이 곤두박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