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7 화 중전마마의 추문
소식을 접하고 대전을 찾아온 대비 조 씨는 마치 금시초문, 난생처음 듣는 이야기인 듯 은하를 둘러싼 추문에 충격에 휩싸인 모습이었다.
“무슨 소리냐 묻지 않습니까!”
“경들은 이만 물러가시오.”
“하오나 전하!”
“모두 물러가래도!”
벼락과도 같은 높은 언성에 신료들은 주눅이 들어 더는 대꾸하지 못하고 모두 물러갔다.
그러자 대비는 파리한 안색으로 엄 상궁의 부축을 받으며 안으로 들어와 앉았다.
“대궐에 도는 소문이 모두 사실입니까?”
“…….”
“중전께서 국혼을 치르시기 전에 정혼을 한 사내와 정을 통하여 후사도 외면하고 있다는 것이 맞습니까?”
“중전에게 정혼자가 있다는 것을 진정 모르셨습니까?”
잠자코 듣고 있던 강이 던지듯 물었다. 그러자 대비 조 씨는 몸을 떨며 억울함을 표출시켰다.
“이 사람이 알았더라면 국혼을 추진하지 않았을 겁니다!”
“부원군에게 물어도 같은 답이 나올지 궁금하군요.”
“주상께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난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부디 그러길 바라옵니다.”
애초에 혼인을 앞둔 두 사람을 무 자르듯 갈라놓은 장본인 중 한 사람이 대비였다. 그래 놓고 발을 빼는 모습이 분노를 불렀다.
“대궐에 도는 소문이 모두 사실이라면 중전은 정조를 잃은 것입니다. 감히 한 나라의 국모가 추문이라니요! 남이 알면 주상의 위상이 바닥으로 추락할 겁니다.”
“중전은 어마마마께서 공들여 뽑은 며느리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정조를 잃었다니, 말씀을 삼가셔야 할 줄로 아옵니다.”
중전에게 정조를 잃었다니, 앞뒤 분간을 못 하고 내뱉는 말이었다. 강은 깊은 한숨을 뱉으며 대비를 외면했다.
“어마마마를 처소로 모시고, 어의를 부르도록 하라.”
“예?”
“두 번 말해야겠느냐?”
되묻는 엄 상궁에게 강은 살벌한 눈빛을 보냈다. 그러자 엄 상궁은 어버버하다가 앉아 있던 대비의 팔을 잡아 주었다.
“궐 밖에도 모르는 사람이 없답니다.”
“…….”
“확실히 해 둬야 왕실의 체면을 지킬 수 있을 겁니다.”
“살펴 가시옵소서, 어마마마.”
강은 대비의 말을 깡그리 무시하고,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대신했다.
* * *
대전에 큰 소란이 났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은하가 걱정스레 얼굴을 낮추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인지는 알아내지 못했는가?”
“그, 그것이…….”
“신료들이 모두 대전으로 갔다면 그만한 중차대한 일이 일어났다는 것인데.”
“마마, 대전으로 가시려 하시옵니까?”
머뭇거리던 은하가 대전으로 가려 걸음을 옮기자 김 상궁이 민감하게 반응하며 그 앞을 가로막았다.
“왜 그러는가?”
“마, 마마…….”
“자네 숨기는 게 있군. 말하시게.”
은하가 자리에 멈춰 서서 김 상궁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러자 상궁의 얼굴이 점차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이내 고개를 깊이 숙였다.
곧 그 입에서 나온 진실에 은하는 속수무책으로 주저앉았다. 놀란 김 상궁이 황급히 잡아 주었지만 늦은 후였다.
생각이 가로막힌 듯 앞이 캄캄하기만 했다. 어떻게 일이 이 지경이 되도록 모를 수가 있었는지……. 그리고 인겸에 대한 걱정으로 까마득해졌다.
“마마! 괜찮으시옵니까?”
“…….”
“중전마마…….”
흐느끼는 김 상궁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렸다. 은하는 눈을 감은 채 입을 굳게 닫았다.
힘주어 다물고 있던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보였다. 정신을 잃지 않으려 스스로를 다잡고 있었다.
* * *
지친 기색이 역력한 영의정이 퇴청을 하고, 사랑채로 건너가 관복을 벗어 갈아입고 앉자 찾았던 시현이 들어왔다.
“와 앉거라.”
“퇴청이 늦으셨습니다.”
“우려했던 일이 벌어져서 지켜보느라 좀 늦었구나.”
그는 자리에 앉아 시원하게 떠 놓은 냉수를 숨도 쉬지 않고 모두 마셨다.
“너도 알겠지만 당분간은 대궐이 살얼음판과도 같을 것이다. 몸을 사리고, 말을 아끼도록 해라.”
“예, 명심하겠습니다.”
“오늘은 집안 얘기를 하려고 불렀다.”
집안 얘기라는 말에 시현이 도통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자 영의정이 흐뭇하게 웃었다.
“진작 나왔어야 할 얘기인데 많이 늦어졌구나.”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네 혼사 말이다.”
“예……?”
시현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였다. 이미 진작 혼례를 올리고 아내를 맞이했어야 맞았지만 그간 망나니처럼 굴어 방치해 둔 감이 있었다.
“네가 정신도 차렸고, 버젓이 관직에 등용도 했으니 마땅히 내조해 줄 안사람을 맞이해야 하지 않겠느냐.”
“…….”
“적당한 가문으로 물색하여 혼담을 나눌 생각이니 그리 알고 있어라.”
알겠노라는 대답이 나와야 하는데 어쩐 일인지 시현은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있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
“송구하오나, 혼사는 제 뜻대로 올리고 싶습니다.”
“네 뜻대로?”
“예, 아버지의 말씀대로 관직에 올랐으니 혼사만큼은 제 뜻대로 하고 싶습니다.”
“마음에 둔 여인이라도 있는 것이냐?”
그 물음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시현은 영의정과 눈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댁 여식이냐?”
“아직은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혼사는 언제든 치를 수 있으니 당분간은 미루고 싶습니다.”
시현의 얼굴을 바라보던 영의정은 문득 싸한 기분이 들었지만 겨우 마음을 잡은 아들을 건드렸다가 망치고 싶지 않았다.
“네 뜻이 그러하다면 당분간은 지켜보마.”
“고맙습니다, 아버지.”
“허나 너무 오래 기다릴 수 없으니 명심하도록 해라.”
말을 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불안했다. 총명하던 눈이 찰나에 멍하니 흐릿해지는 것을 보며 애써 말을 아꼈다.
* * *
밤이 깊어 가자 강을 기다리던 도아는 마음을 접고 자리에 누웠다. 늘 그의 체취에 젖어 품에 안겨 자던 것이 습관이 되어 허전하기만 했다.
“귀인.”
그 순간 밖에서 작게 속삭이듯 말소리가 들렸다. 도아는 곧장 이불을 떨치고 일어나 문을 열었다.
“어찌 오셨어요?”
“보고 싶어서 왔지.”
문턱을 넘으면서 도아를 품에 안은 강은 작은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자는데 방해한 것이오?”
“아니요, 잠이 안 와서 뒤척이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곁이 비어 있으니 잠이 안 온 모양이군.”
“그런가 봐요.”
도아가 순순히 인정하자 강은 놀란 듯 도아를 보다가 이내 웃었다. 어느새 자리에 나란히 누운 두 사람은 서로를 꼭 끌어안았다.
“왜 아무 힘도 없는 과거를 두고, 입씨름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게 말이오.”
“혼인을 한 것도 아니고 단지 정혼이었을 뿐인데 너무 엄격한 잣대입니다.”
“조정에 그대 같은 신료가 반만 있어도 이 지경이 되진 않았을 것이오.”
그는 그리 말하며 살짝 웃는 소리를 냈다. 도아는 더욱 그의 품을 파고 들어가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혼자 누우면 못 잘 것 같아서 왔소.”
“잘 오셨어요.”
“오길 잘했네.”
잔잔하게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강은 도아의 머리 위에 얼굴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일찍 나가셔야 하니 주무세요.”
“으응…….”
많이 고단했던 것일까. 강은 중얼거리며 도아를 품에 안은 채 금세 잠이 들어 버렸다.
* * *
입궐을 하려던 시현의 발목이 붙잡히고 말았다. 대문 앞을 서성이던 중년의 사내, 얼마 전 도아의 가문에 대해 캐물었던 자였다.
그는 시현을 보고 꽤 반가워하며 말까지 더듬었다. 처음 그를 보고 알아보지 못하고 인상을 찌푸렸으나 곧 얼굴을 알아봤다.
“안으로 들어가지.”
조용한 곳에서 들어야 할 이야기였다. 시현의 별채로 들어가 앉자 사내는 침을 삼키며 기다렸다는 듯 말을 꺼냈다.
“홍가의 배에 길잡이로 있던 사람의 자손을 찾았습니다.”
“들은 것이 있는가?”
“워낙 오래전에 죽었는지라 따로 남은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겨우 이깟 걸로 날 잡았는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사내는 그리 말하면서 가슴팍에서 낡은 종이 쪼가리를 꺼냈다.
“그의 자손들 말로는 길잡이로 나갈 때마다 어부가 일지를 썼다고 했습니다.”
“일지를 남겼다고?”
“예, 자손들은 돈도 되지 않는 것이라 관심조차 없어 보였습니다. 그러나 없이 사는 처지에 가보라고 하나 있는 것을 버리지 못하고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아버지, 그 오랜 세월의 흔적을 자손들은 그저 한곳에 처박아 둘 뿐이었다. 먼지만 켜켜이 쌓여 외부인이 찢어 가도 모를 정도였다.
“지나가는 눈길로 보다가 꽤 중요한 부분 같아서 몰래 찢어 왔습니다.”
생각보다 중요한 정보였다. 시현은 손을 뻗어서 곧 찢어질 듯 위태로운 종이를 펼쳐 들었다.
안에는 글자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낙서가 휘갈겨 있었다. 날짜와 함께 짧게 몇 줄로 내용이 적혀 있었다.
긴 여백을 남기고 마지막으로 써진 몇 자가 눈에 들어왔다.
「황금 인어, 가문에 태어날 계집, 저주.」
조잡하게 쓰인 단어였다. 제대로 보지 않으면 뭐라고 썼는지 잘 보이지도 않을 만큼 횡설수설 써 내려간 글자였다.
‘이게 무슨 소리지?’
띄엄띄엄 쓰여 있는 제각각의 단어를 한참 동안 붙잡고 씨름을 하던 시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가문에 태어날 계집아이는 인어가 되리라!’
의심하고, 생각했던 것들이 하나의 그림이 되어 완성되었다.
“하…….”
일지를 잡고 있던 손이 덜덜 떨리는 게 느껴졌다. 물에 젖은 듯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채 맞닥뜨렸던 도아가 떠올랐다.
촉촉한 얼굴과 눈동자는 곧 바다를 떠올리게 했었다. 별당 호수에서 주웠던 비늘, 원했던 답이 맞아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