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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궁,왕을적시다 (56)화 (57/93)

제 56 화 중전마마의 추문

매일 밤 강에게 시달리자 순진했던 날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가 보여 주는 신세계는 도아에게 또 다른 극락을 선물했다. 

도아는 몸 안에 핀 입술 자국을 보고 눈을 가늘게 뜨는 무이의 시선을 애써 피하며 시선을 이리저리 굴렸다.

“전하께서는 매일 오시면서, 어찌 매일 이렇게…….”

“뭐, 뭐가?”

“에이. 다 아시면서!”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힌 채 무이를 쏘아보며 투덕거리고 있을 때 밖에서 란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냐?”

“대비전에서 귀인마마를 급히 찾으신다고 하옵니다.”

“알겠으니 차비해라.”

덤덤하게 말은 했지만 내심 무슨 일일까 가슴이 조여 왔다. 대비가 불러서 좋은 일이 결코 없었기 때문이다. 

서둘러 준비를 마치고, 자경전으로 향했다. 걸어가는 내내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의연하게 대처하자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인사를 마치고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대비 조 씨는 도아의 면전에 무언가를 집어 던졌다.

탁, 얼굴에 맞고 떨어진 종이가 바닥에 힘없이 떨어졌다. 도아는 당의 속에 두었던 손을 꺼내 종이를 집어 들었다.

펼쳐 들자 ‘후궁 조건서’라고 써진 글자가 들어왔다. 순간 숨이 멎는 듯했다. 

“그것에 대해 설명해 보게.”

“적힌 그대로입니다, 대비마마.”

“방자한 것. 감히 이따위 문서를 만들어서 왕실을 능멸하려 했느냐!”

“송구하오나 그 전에 이것이 어찌 자경전에 있는지 감히 여쭙고 싶사옵니다.”

오히려 도아는 기죽지 않고 이것의 출처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대비 조 씨는 기막히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내가 귀인 처소에 간자라도 붙였을까 봐 그러느냐?”

“소첩에게 보내 주신 란희란 궁녀가 물어다 드린 것이옵니까?”

“잘못 짚었네. 자네가 쓰러지던 날 아수라장이 된 처소에서 자경전 궁녀가 가져온 것이네.”

“…….”

“그렇다면 후사를 잇기 위해 입궐한 자네가 이따위 맹랑한 것을 주상에게 내밀었다는 것이 없던 일이 되는가?”

달리 할 말은 없었다. 애초에 자신은 후사가 없는 왕실에 자식을 낳아 주러 입궐한 후궁이었기 때문이다.

“내 좌상을 그리 안 봤는데 귀인을 보니 자식 교육을 엉망으로 한 것 같군.”

“부친은 모르는 일이옵니다.”

“그렇다고 내 이 일을 그냥 넘어갈 것 같은가?”

“전하께서 이미 윤허하신 일이옵니다. 문제가 됐다면 전하께서 서명을 하지 않으셨을 것이옵니다.”

잘못하면 이 일이 치열에게 번질 수 있다는 생각에 도아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진작 불태워 없애 버릴 것을 하는 후회가 들었다. 

“주상 전하 납시오!”

“든든한 지원군이 왔군.”

대비가 그리 말하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도아는 두 손으로 종이를 꽉 쥔 채 안으로 들어오는 강을 애써 외면했다.

“어서 오세요. 안 그래도 내 주상을 뵈러 가려던 참이었습니다.”

강은 대비 조 씨를 냉소적으로 바라보다가 도아가 들고 있는 종이를 내려다봤다. 힐끗 보이는 것으로 무엇인지 감지를 한 듯 안색이 굳었다.

“한때 장난에 지나지 않는 문서일 뿐이옵니다, 어마마마.”

“그래요? 내 눈에는 그리 보이지 않습니다만.”

“귀인은 이미, 승은을 입었습니다.”

“이제는 이 어미를 속이려 하십니까?”

세 번째 조항을 읽어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숱한 밤을 보내면서도 합궁을 하지 않았노라 확신에 차 있었다. 

“제조상궁을 심문해 보시면 아실 일입니다.”

“……진정입니까?”

“예, 한때의 장난으로 쓴 것이 어찌 자경전에 건너왔는지 모르겠지만 귀인은 이미 온전히 소자의 여인이옵니다.”

이렇게 나오는 것을 보니 거짓은 아닌 것 같았다. 상황이 난처하게 돌아가자 대비 조 씨가 헛기침을 뱉었다.

“그렇다 해도 이런 것에 주상께서 채신머리없이 서명하시다니, 문제가 될 수 있는 일입니다.”

“그 일은 깊이 반성할 것이옵니다.”

“…….”

“귀인은 아직 충분한 휴식이 필요한 상태인지라 더 하실 말씀이 없으시다면 데리고 가겠사옵니다.”

말을 마치고 도아의 손을 잡으려는데 끄응거리던 대비 조 씨가 다급히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차후에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내 귀인을 직접 가르쳐야겠습니다.”

“송구하오나, 불가하옵니다.”

“내명부의 일입니다. 주상께서 나설 수 없습니다.”

“하오나……!”

두 사람 사이에 다시 마찰이 생기려 하자 잠자코 앉아 있던 도아가 강의 팔을 잡았다. 

“명백히 소첩의 잘못이옵니다. 대비마마께 가르침을 청할 것이옵니다.”

“귀인.”

“그리하겠사옵니다, 대비마마.”

싸늘하게 식은 강이 도아를 만류하려 했지만 이번에는 대비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내 그만해도 좋다는 말이 있기 전까지 매일 미시에 자경전으로 건너와 필사를 하도록 하라.”

“예, 명심하겠사옵니다. 대비마마.”

“그만 물러가도 좋네.”

그 말이 떨어지고 나서야 도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싸늘하게 식은 얼굴로 대비에게 인사를 마친 강이 먼저 처소를 나섰다. 

* * *

이른 퇴청을 하던 길에 치열의 곁으로 영의정이 다가왔다. 힐끗 옆을 보자 영의정의 심각한 얼굴이 드러났다.

“무슨 일입니까?”

“대궐 안팎으로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는데 아십니까?”

“금시초문입니다만 무슨 일입니까?”

걷던 걸음을 멈춘 치열이 예사롭지 않은 말에 영의정을 살폈다.

“중전마마의 추문이 나돌고 있답니다.”

“저, 저런!”

“궐 밖에는 이미 걷잡을 수 없이 소문이 퍼진 상태라 합니다. 어느 놈 입을 통해 나왔는지 찾을 수 없을 정도랍니다.”

“…….”

“이미 궐 안에도 소문이 돌고 있으니 머지않아 들고 일어날 겁니다.”

듣고 있던 치열은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거칠게 한숨을 뱉었다. 

“어느 놈의 소행인지 밝혀내야 합니다.”

“그런데 전부 허언은 아니라 그게 더 문제입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중전마마께 과거에 정혼을 맺은 사내가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 말이 얼핏 나돌기는 했지만 이내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 것이라 생소하게 들렸다.

“중전마마께 후사가 없는 것이, 그 정혼자를 잊지 못해서라는 구설이 있답니다.”

“이런 쳐 죽일 놈들.”

“진위 여부를 떠나서 중전마마께서 곤혹을 치르게 됐습니다.”

어느 쪽도 은하에게 피해가 안 갈 수는 없었다. 정혼자가 있었다는 과거는 맞으니 추문을 벗어날 수는 없게 됐다.

* * *

전각으로 돌아오자 란희가 서둘러 나와서 웃전을 맞이했다. 지나쳐 가려다가 멈춰 선 강이 몸집이 조그마한 란희를 무섭게 내려다보았다.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지.”

“예……?”

“널 주시할 것이다.”

“…….”

“허튼짓을 했다간 목을 칠 것이니 명심해라.”

이런 말은 아무리 아랫사람이라도 쉬이 뱉는 법이 없었다. 살 떨리는 말을 던진 강은 이내 도아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대비마마의 말씀으로는 어수선한 틈에 자경전 궁녀가 가져간 것이라 했습니다.”

“퍽이나 그랬겠군.”

“그래도 란희를 곁에 두진 말아야겠습니다.”

“그러시오. 누가 보냈는데 오죽할까.”

날카로운 말에 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곧장 화로를 가져오라 명한 뒤 들고 있던 후궁 조건서를 활활 태워 버렸다.

“어쩌자고 어마마마의 뜻에 따른 것이오?”

“그러지 않았다면 아마 아버지를 불러다가 모욕을 주셨을 겁니다.”

“마음이 놓이지 않는단 말이오.”

“조심하겠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앞에 데려다 놓고 얼마나 괴롭힐지.”

벌써부터 그것이 걱정이었다. 아마 꽤 오랫동안 붙들어 놓고, 힘들다는 소리가 절로 나오게 괴롭힐 것이다.

“대비마마가 부를 때마다 전하께서 나서 주실 수만은 없는 일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한창 대화를 하고 있을 때 밖에서 우당탕탕 소리가 났다. 

“전하! 전하!”

“귀인이 놀라게 웬 소란이냐!”

버럭 성질을 내자 잔뜩 풀이 죽은 상선이 후다닥 들어왔다. 그러고는 강의 귀에 대고 들리지 않게 소곤거렸다.

상선의 말을 전해 들은 강의 눈이 이내 휘둥그레지더니 상선을 응시했다. 

“전하, 대전에 무슨 일이라도 있으시옵니까?”

“우선은……. 대전에 가 봐야겠소.”

“예?”

“나올 것 없으니 앉아 계시오.”

그리 말하며 강이 상선을 데리고 나갔다. 도아가 걱정되는 마음에 뒤를 바짝 따르려는데 심장의 통증이 갑자기 번져 나갔다.

문이 닫히자 도아는 쓰러지듯 자리에 주저앉아 한 손으로 심장을 움켜쥐었다. 숨을 틀어막은 듯 숨이 제대로 쉬어지질 않았다.

“흡…….”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은 새빨개지고 말았다. 도아는 고통으로 얼룩진 신음을 참으며 입을 꽉 다물었다. 

온 얼굴이 식은땀으로 젖어 들고, 심장을 움켜쥔 손이 하얗게 질려 갔다. 찾아온 고통은 전과 달리 쉬이 사그라지지 않았다. 

‘만일 그런 인간을 만나게 된다면 저주는 그 대에서 끝나고, 그 인어는 죽을 것이다.’

합방을 치른 후 꿈에서 들었던 말이 메아리치듯 도아의 머리를 지배했다. 두려움에 온몸이 덜덜 떨려 왔다. 

* * *

대전으로 가는 동안 상선은 대궐 안팎으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퍼져 나간 소문에 대해 읊어 주었다.

그 얘기를 전달받던 강은 팔을 기대고 있던 난간을 꽉 움켜쥐었다. 뭐라 중얼거렸으나 들리진 않았다. 아마 욕설을 내뱉은 것 같았다.

소문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이 부풀려지고, 살을 더해서 소설이 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은하에게 정혼자가 없던 것이 아니니 난처해졌다.

“소문의 근원지가 있을 게 아니냐?”

“너나 할 것 없이 떠드는 통에 근원지를 알아내기가 쉽지 않을 것 같사옵니다.”

“대체 일이 이 지경이 되도록 제조상궁이 몰랐다는 게 말이 되느냐!”

“소, 송구하옵나이다. 전하!”

대전으로 들어온 강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상선과 제조상궁이 빠르게 바닥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신료들이 우르르 떼를 지어서 대전을 찾아왔다. 군인들이 전쟁이라도 나가듯 비장한 얼굴들이었다. 

“경들이 대전까지는 어쩐 일이시오?”

“전하! 소신들이 차마 입에 담기 민망한 일이 대궐은 물론이고 궐 밖 백성들에게까지 난무하여 전하를 찾아뵈었사옵니다.”

짜증이 절로 나왔다. 이 무리를 이끌고 앞장선 사람은 대제학이었고, 옆에 날개처럼 도총관이 함께 서 있었다. 

“만백성의 국모로서 어질고 지혜로운 성정으로 백성들을 어루만져야 할 중전마마께서 저잣거리 상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추문에 휩싸이시니 소신들이 망극하여 고개를 들 수가 없을 지경이옵니다.”

“대제학.”

음산한 부름에 대제학은 움찔하며 마른 입술을 겨우 열어서 대답했다. 

“경이 지금 중전을 욕보이는 것이오?”

“저, 전하! 소신은 그런 뜻으로 고한 것이 아니옵니다!”

“아니면! 김 숙의를 교태전에 앉히기 위해 위험을 무릅쓴 것이오?”

정곡을 찌르는 말에 대제학은 하얗게 질린 채로 바닥에 무릎을 꿇고 바짝 고개를 숙여 외쳤다.

“어찌 그런 망극한 말씀을 하시옵니까? 소신은 그저 중전마마를 둘러싼 말도 안 되는 추문에 대해 한 점 의혹도 없이 진실을 밝혀 주시길 바라는 뜻에서 드린 충언이옵니다!”

“가뭄으로 백성들이 굶주림에 허덕일 때는 뒷전으로 빠져 있던 경들이 이런 일에는 보기 좋게 단합하여 대전을 압박하는데 좋게 보이겠소?”

그들의 압박에 대해 강은 이를 빠득빠득 갈며 분노를 표출했다. 따지러 온 이들의 기세를 눌러 놓기에 좋은 수였다.

그때, 

“이게 지금 무슨 소리들입니까?”

기다렸다는 듯 대비 조 씨가 엄 상궁의 부축을 받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강은 어금니에 힘을 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 중전께서…… 추문에 휩싸이시다니요?”

대비는 마치 충격에 휩싸인 듯 휘청거리며 엄 상궁의 손에 의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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